그들이 말한 ‘개나 돼지’는 구조주의적 메타언어일까?

인문학 100년사 1960~70년대 (7)

2016-09-01     성지훈|인문학자·본지 편집위원

 

 
1960년, 젊고 야심찬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에 미국인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소련의 노회한 흐루쇼프는 젊은 케네디를 얕보고, 1962년 10월 쿠바에 장거리 공격용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한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불사하며 쿠바 해안봉쇄에 나선다. 두 정상은 충돌직전, 협상 끝에 위기를 돌파한다. 이에 힘입어 미국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자유, 민주, 인권의 미국적 가치에 대한 자긍심이 세계를 휩쓸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위상이 재확인된 셈이다. 미국의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 속에서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공산주의 문화혁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시민권리 투쟁, 베트남전쟁 반대, 대학생들의 저항(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소르본대학), 그리고 비틀스와 밥 딜런, 자니 홀리데이의 콘서트들에 매료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구조주의가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
 
유럽에 몰려온 구조주의의 물결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수아 도스는 “1966년은 구조주의의 신성한 해였다”라고 기록했다.(1) 적어도 파리에서는 그랬다.  그 해 가장 주요한 5개의 학술지가 구조주의 분석에 한 호를 통째로 할애했고, 또 하나의 주요 학술지<에스프리>는 구조주의를 주제로 학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은 <에크리>를 출간했고, 2주 만에 5천 부가 팔렸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을 출간했으며 5일 만에 800부가 팔렸다, 롤랑 바르트는 <비평과 진실>을, 조르주 뒤메질은 <고대 로마의 종교>를, 츠베탕 토도로프는 <문학의 이론>을, 알지르다스 그레마스(1917~1992)는 <구조주의 의미론>을 출간했다. 이 <구조주의 의미론>의 경우, 총서 편집장이 “1천 부는 더 팔릴 것”이라며 제목에 ‘구조주의’라는 말을 추가하길 권했다. 
이렇게 프랑스 지식사회에 몰려온 구조주의의 물결은 언어학이라는 본연의 경계뿐 아니라 학계라는 소우주의 경계 역시 벗어났다. 민족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철학 등 인문학은 물론 정신분석학, 문학비평 및 영화비평 분야 역시 인간의 모든 산물이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식에 열광했다. 이러한 인식은 어디에서 출발했고, 또 어떻게 전개됐는가? 구조주의의 주된 출발점은 로만 야콥슨(1896~1982)과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의 <구조주의 음운론>이다. 
특히 소쉬르 이래 최고의 언어학자로 일컬어지는 야콥슨은 “만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면, 이 ‘파롤(Parole; 발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라며 자문한다. 하지만, “(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의미에 차이를 부여하는 음의 변별(辨別) 기능이며,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음, 요컨대 시니피앙(Signifiant;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음)을 검토하는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과 의미 간 관계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언어전달 요소로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발신자, 수신자, 관련 상황, 메시지, 접촉, 신호체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언어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①발신자에 초점을 맞추는 감정표시적 기능: 말하는 사람의 정서 표출 ②수신자에 초점을 두는 사역적 기능: 말을 듣는 사람을 향한 명령이나 요구 ③관련상황에 초점을 두는 정보전달 기능: 정보 주고받기 ④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시적 기능: 메시지 자체의 아름다움 추구 ⑤접촉을 초점으로 삼는 친교적 기능: 친밀감 조성(흔한 대화) ⑥신호(약호) 체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메타언어적 기능: 개념의 형성과 표현.
야콥슨에 따르면 말은 이처럼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개’, ‘돼지’는 가축이지만, 누가 어떤 자리에서 왜,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그 단어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단순히 정보전달 기능만이 아니라 감정표시적 기능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육부의 고위공무원이 “국민의 99%가 개나 돼지”라고 말해, 국민 대다수의 분노를 샀다. 이는 여기에 정보전달 기능과 함께 경멸의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만에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하거나, “너 몰라보게 예뻐졌다”고 했다면, 이는 정보전달 기능과 친교적 기능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시에 야콥슨과 함께 강의했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개념을 친족관계(Kinship)로 발전시킨다. 그의 <친족의 기본구조>(1949)는 인류학 분야의 혁명이라 할 수 있으며, 레비스트로스는 곧바로 자신의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그의 주요 연구주제인 ‘신화’(<구조주의 인류학>, 1958)와 ‘사고의 범주’(<야만적 사고>, 1962) 또한 구조주의적 분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어학자 알지르다스 그레마스는 이야기(Récit)의 구조주의적 이론을 발전시켰고, 옐름슬레우는 언어의 형식적 구조를 기술하고, 나아가 언어를 통해 언어의 배후에 있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지식을 해명하려 했다. 
고대 종교 전문가인 조르주 뒤메질은 인도유럽어계의 세 가지 기능적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미셸 푸코 같은 이들이 그의 제자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1950년 이후 R. 야콥슨과 교류했다. 1960년에는 프랑스 구조주의의 창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문학자들, 역사학자들, 철학자들, 경제학자들, 심리학자들이 세미나를 열었고, 서로의 작품을 읽으며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이제 구조주의는 어느 학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상과 텍스트를 다루어 그 안에 숨겨진 형태를 도출해내는 일반 방법론처럼 작용하게 된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일반 기호학(패션, 문학, 광고)에 달려들었으며,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된다”고 밝혔고, 루이 알튀세르는 <자본론>에 관한 구조주의적 강의를 했으며, 장-피에르 베르낭은 고대 그리스인의 사유적 방식을 그들의 자연적‧사회적‧역사적 환경과 연관시켜, 그들이 믿었던 것이 그들이 ‘사는 방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고, 미셸 푸코는 개념들의 일반적인 역사 연구에 착수했다. 일부 철학적 논쟁 덕분에 구조주의는 정치무대에 진입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재가공하고 인문주의와 현상학을 보다 엄준한 시각으로 대체할 준비가 된 전위 부대처럼 말이다.
 
 

 

구조주의의 숨겨진 매력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1968년에 사회학자 레몽 부동은 인문과학에서 구조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해 저서<구조라는 개념은 어디에 필요한가?(À quoi sert la notion de structure?)>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부동은 ‘구조주의적 방식’ 그리고 ‘구조’라는 용어의 일반 용례와 유사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 말에는 일부 진실이 담겨 있었다. 언어학의 외부에서 구조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이론이라기보다, 일종의 철학적 입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푸코에 의하면, 구조주의란 깨어 있는 의식이자 현대의 학문을 우려하는 인식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들의 진실이 이념 뒤에 숨겨져 있다고 단언한다. 정신분석학처럼, 인간은 자신의 의식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개인적·집단적 차원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틀에 사로잡혀 있다고 공언한다. 자연과학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의 다양성을 소수의 요소 및 법칙으로 환원하고자 애쓴다. 현재까지 이러한 작업이 성공한 유일한 대상은 언어뿐인만큼, 구조주의 신념의 제1조는 “모든 것은 언어”다. 
이러한 공통점을 넘어서면 난관이 시작된다. 구조라는 개념이 보급되는 가운데 이 개념의 의미는 선택-수정-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에 가장 충실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레마스는 옐름슬레우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서 자신의 행위체적(Actanciel) 서사학의 요소를 차용했는데, 이 서사학과 옐름슬레우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롤랑 바르트는 주로 소쉬르의 기호이론에 기반했고, 자신의 전개방식을 형식화하는 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라캉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를 활용했지만, 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에게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추후 “본디 니체주의자”라고 자칭했던 푸코는 ‘구조’대신 조르주 캉길렘에게 영감을 얻은, ‘에피스테메(épistémè; 한 시대, 한 공간이 갖는 인식론적 가능조건 전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68혁명이 구조주의에 미친 영향

 

 
 실상, 구조주의를 들여다보면 그 조직이 취약했다. 구조주의를 창시한 인물들 중 일부는 - 가장 먼저 레비스트로스가 - 라캉‧ 푸코‧알튀세르 트리오가 자신들의 개념을 보충하는 것에 반대했다. 언어학자 앙드레 마르티네는 언어학 바깥에 구조주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특히 1968년 5월의 68혁명은 학계의 구조주의 거장들에게 저항으로 작용했다. 알튀세르는 야유를 받았고, 롤랑 바르트는 모로코로 떠났으며 레비스트로스는 연구실에서 물러났다. 학생들이 점거한 소르본과 낭테르의 대학 강당에선 이들 ‘특권 지식인’들의 사상이 ‘독단’이자 ‘학문만능주의’로 비난받았던 것이다.
알랭 투렌, 에드가 모랭 등 현실참여 학자들이 연설에 나서고, 장-폴 사르트르가 관심사의 전면으로 되돌아오면서, 구조주의 운동은 위기에 처했다. 그런 한편 구조주의는 혁명으로 이득을 보기도 했다. 다양한 개혁들로 인해 구조주의 언어학은 대학가에 군림하게 됐으며, 푸코, 라캉, 바르트는 파리8대학의 수장으로 거듭났다. 실상 언어학 분야의 구조주의는 내부적으로 분열했고, 생성언어학파와 화용주의학파 등 여타 학파들과 경쟁하게 됐으며, 70년대 말까지 영향력이 커졌다. 
반면 문학 및 철학 분야의 구조주의적 접근은 점차 거부당했다. 푸코는 구조주의와 결별했고, 바르트는 모든 학문적 계획을 다소 소홀히 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을 했다. 1975년 이후 젊은 철학자들(베르나르앙리 레비, 뤽 페리, 알랭 르노)이 목소리를 높여 ‘68혁명’의 반인문주의적 성격과 구조주의를 비판했을 때, ‘구조주의’라는 라벨은 이미 매혹의 힘을 상당히 잃어버린 후였다. 70년대 말에 이르자 구조주의는 더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다양한 인문과학적 개념의 발전이 존경 또는 거부를 받게되는 순간이었다.  
 
유럽 구조주의를 닮은 
미국의 상호작용론
 
1959년,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교외마을인 팔로알토에서 정신과의사 돈 잭슨은 가족 관련 연구 및 치료 센터인 ‘정신건강연구소’를 창설했다. 1963년, 피아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인 하워드 베커가 시카고의 재즈뮤지션에 관한 조사자료인 <아웃사이더>를 출간했다.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두 가지 사건은 새로운 사회분석 방식의 도래를 알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는 역학 속에서 사회구성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심원의 의결, 청소년들의 애정의식, 정신병동의 일상 등을 막론하고, 사회적 작용이란 하나의 정해진 데이터가 아니라 연구자가 ‘본래의 환경’을 관찰해 철저히 분석해내야 하는 과정이다. 상호작용론은 미국에서 각기 발전했던 두 가지 사조, 즉 개인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분석(팔로알토학파)과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사회학적 학파 및 그 부산물들(시카고학파에서 야기된)이 함께 만난 것이었다.
1950년대에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자신의 연구팀과 함께 팔로알토에 자리를 잡았다. 시스템 이론의 전개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베이트슨은 개인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역설적이고 암묵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상대방에게 논리적으로 상호모순되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의 명령이 상호소통적 커뮤니케이션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교수가 학생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라!”고 하고는, 정작 학생이 질문을 하면 그 학생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더욱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1956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젊은 여성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9초짜리 영상을 분석했다. 마치 음악과 춤이 조화를 이루는 한편의 발레처럼, 언어와 제스처가 어떻게 서로 병행하는지를 보여줬다. 한편 인류학자 에드워드 T. 홀은 공간의 사회적 운영을 강조했다(공간학(Proxemics); 동물‧인간‧개체들 사이에 필요한 공간 및 이 공간과 환경·문화의 관계를 연구). 수차례의 여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홀은 여러 문화들 간의 접촉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주요작 <숨겨진 측면>(1966)은 인간이 자신의 동류를 대할 때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예컨대 사무실 문을 연 채로 두는가, 아닌가)이 어떻게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 방식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고프만이 주장한 “우리 모두는 배우다”

 

 
1922년 캐나다에서 출생한 E. 고프만은 팔로알토학파의 커뮤니케이션적 접근법과 시카고학파의 사회학적 접근법 사이의 ‘미싱링크’를 다룬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썼다. 고프만은 사회성의 골조이자 정수를 이루는 것이 바로 대면교류라고 봤다. 그런데 두 사람 간의 상호작용 과정은 상당히 취약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은 개인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해주는 ‘상호작용 의식’(예의범절과 발언 등)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다. 
고프만은 사회생활이 연극의 일종이며, 이 안에서 모두는 각자 역할을 맡아 타인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고 봤다. 개인이 무대(사무실 혹은 사교모임)에서 나와 무대 뒤편(자신이나 편한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면, 자기 행동의 통제를 늦출 수 있는(상스러운 말을 하거나, 속내를 털어놓는 등) 것이다. 세심한 관찰자였던 고프만은 연구에 있어 몰입의 방식을 신봉했다. <정신병원>(1961)을 집필하기 위해, 워싱턴 세인트엘리자베스 정신병동의 환자들과 함께 1년을 보내기도 했다. 
‘상호작용론 공세’의 두 번째 측면은 사회학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그 뿌리가 좀 더 깊다. 이는 시카고학파의 철학적 전통에 입각한 것으로,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고 불린다. 1938년에 허버트 블러머가 만든 이 표현은 60년대에 와서야 E. 고프만이나 H. 베커, 앤셀름 스트라우스 등의 저서를 통해 전파됐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에서는 각 개인이 구조주의 혹은 기능주의적 접근법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사회적 사실에 순응하기보다는 사회적 사실을 생산해낸다고 봤다. 이는 심리학자 허버트 미드(1863~1931)가 60년대 초에 확산시킨 개념이다. 상호작용, 그리고 개인이 자기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를 통해, 우리는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베커는 마리화나를 피우는 행동이 사회학적 결정론의 결과가 아니라, 복잡한 상호적 과정(첫 체험, 기준의 적용, 타인이 규정한 탈선의 정의 등)의 귀결이며 사회학자는 실증적인 관찰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해럴드 가핑클이 자신의 저서 <민속방법론 연구>(1967)에서 ‘민속방법론’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토대를 발표하면서 한층 첨예해졌다. 배심원들이 의결을 하는 방식을 연구하던 가운데, 가핑클은 이 배심원들이 법률적 지식이 없음에도 문제를 평가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동원하는 일상적인 고찰(민속방법론)에 관심을 가졌다. 예컨대 젊은 트렌스젠더인 아녜스는 ‘평범한 여성’처럼 행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가핑클은 이 같은 어려움이 사회적 생활 속에서 여성성이 만들어져 인정되는 일종의 인습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봤다.
민속방법론자들의 입장에는 순전히 상황적이고 기술적인 분석으로 귀결될 위험이 내재돼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피해가기 위해 몇몇 학자들은 일상적인 교류의 구조적인 원칙을 찾았으며 이러한 시도를 E. 고프만(<경험의 기틀>, 1975)이나 애런 시커렐(<인지주의 사회학>, 1972)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시커렐은 자신이 ‘해설적 행동’이라 명명한 근본적인 상호작용의 구조를 확인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하비 삭스와 임마누엘 쉐글로프의 대화적 분석은 논의가 어떻게 시작되고 끝맺는지, 발언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의 기본적인 대화 규칙을 연구했다. 
 
남반구에 부상한 
저개발 이론의 황금기
 
1960년대 들어 남반구 국가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을 쟁취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 속에서 모두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문맹률이나 식수공급율, 1인당 국민소득 등 국제기구들이 당시 만들어냈던 일련의 지수들이야말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1962년 이후 유엔총회는 ‘유엔 개발 10년’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식민 상태에서 해방된 국가들이 과거의 식민국을 따라잡을 가능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60년대 초입, 지난 한 세기 동안 데이비드 리카도가 만들어낸 비교우위 이론은 여전히 준거로 사용됐다. 그렇지만 이 이론은 형식에 그쳤는데, 각 국가는 제각기 특정 상품에 특화함으로써 국제거래에서 이득을 취해 번영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어쨌든 특화가 되건 아니건 간에 모든 국가는 조만간 대중소비사회로 들어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월트 W. 로스토가 1960년에 출간하고 프랑스에는 1963년에 번역된 저명한 저서 <경제성장의 단계>에서 인정하고 요약한 견해였다. 바로 이 두 가지 접근법 모두가 60~70년대에 걸쳐 상당히 문제시됐다. 리카도의 견해는 역사적 성격이 결여(각 국가의 역사적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됐기 때문에, 로스토의 견해는 너무 진화론적이라는 점(세계의 모든 사회에 대해 선형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진행과정만을 전제한다) 때문에 비난받았다. 서구의 오래된 산업화국가들만을 참고해 만들어진 이 이론들은 식민지 출신 국가들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더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등가교환

 

 
40~5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가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의 차원에서 시작해 이후 브라질의 대통령이 된 페르난도 카르도소가 계속했던 연구들은 소위 ‘구조주의’라는 관점으로 개발경제학과 개발사회학을 쇄신하는 출판물 생산의 출발점이 됐다. 주로 마르크스주의학파에서 탄생한 이 연구들은 이집트 경제학자 사미르 아민이나 독일 출신 미국 학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에 의해 계속됐다. 이들은 이른바 ‘종속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들 모두는 저개발 국가를 선진국에 종속시키는 이런 종속현상의 요인을 기술과 무역의 관점에서만큼이나 금융의 관점에서도 강조했다. 60년대 말 아기리 엠마뉘엘이 도입한 ‘부등가교환’은 수출품의 성격 때문이다. 저개발국가의 주요 수출품은 원자재이지만 선진국의 주요 수출국은 완제품이므로 선진국이 훨씬 더 많은 이윤을 얻는 것이다.  
이후 이러한 사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월러스틴은 저개발국가에 대한 선진국의 착취가 노동의 국제적 분업으로 가능하다는 견해를 대중화시켰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심부-주변부 이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반구 저개발국가들은 북반구 선진국들에는 하나의 발전 기회처럼 보이는데, 혹자는 이 저개발국가들에 관해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든가 ‘약탈’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 바로 이와 같은 사고에서, 여러 분석들이 개발도상국 경제의 이원화를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산업분야와 근대적 산업분야 간의 와해가 포함됐다. 또 다른 내적 요인도 고려 대상이었는데, 계급 간 갈등이나 지주들의 영향력에 관련된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다. 종속학파의 외부에서는 또 다른 연구가 개발현상의 사회경제학적 접근법을 제안했다. 미국의 앨버트 허시먼이나 1971년 ‘상호의존 속의 독립(프랑스 정치인 에드가 포레가 모로코의 독립에 관해 했던 표현)’을 지지했던 프랑스의 비주류 경제학자 프랑수아 페루 등의 연구를 언급할 수 있겠다.
이처럼 다양한 연구의 관점에서, 개발이론은 저개발이론 즉 경제발전단계에서 이륙단계가 부재했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이 됐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는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개발이론 전문가들을 양분시켜놓았다. 한쪽은 국제기구의 원조를 통한 구조개혁 감행에 찬성했다. 이들은 프랑수아 페루를 비롯한 ‘구조주의적 개발주의자’들이자 종속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중 일부는 수출중심산업 구조의 형성을 장려하는 ‘협력적 종속적 개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종속현상이 강화된다는 이유로 국제원조나 사적원조 혹은 서구식 개발 자체를 반대하기도 했다. 이들은 저개발국가 경제가 국제시장과 단절하기를 권했는데 이는 ‘자력발전’, 즉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데 집중하는 발전을 가리켰다. 특히 1967년부터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이끈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경험을 그 근거로 삼았다.
그 후 국제원조 프로그램 같은 유형의 경험이 실패로 끝나고 나자, 저개발 관련 논의는 또 다른 발전을 맞이했다. 1981년 사미르 아민의 <부등가교환>의 재판이 출간됐을 때, 이미 관심사의 본질이 바뀌어 소구역적(Subregional), 즉 지역 개발의 차원 혹은 환경문제와 성장(친환경개발, 이후에는 지속 가능한 개발)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이야기였으므로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갔던 셈이다.
 
과학적 사유에 나선 철학자들
 
1963년 7월, 런던에서는 기념할 만한 과학철학 학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당대 과학철학의 세 거장이었던 루돌프 카르나프, 윌러드 밴 오먼 콰인, 칼 포퍼를 비롯해 당대 영미권의 가장 위대한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또한 과학철학 분야에서 전 세대의 학자들을 대신할 떠오르는 신성 토마스 S. 쿤과 러커토시 임레가 이 학회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카르나프(1881~1970)는 빈학파에서 나온 논리실증주의를 지지했다. 물론 1930년, 소위 ‘카르나프의 해’에 논리실증주의학파의 수장이 되면서 그의 사고에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몇 가지 원칙에는 여전히 충실했다. 카르나프는 과학적 언어가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담론과 구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학적 언어는 두 가지 유형의 발화를 수단으로 삼는다. 경험을 통해 확인 가능한 실증적 발화, 그리고 분석적 발화(논리의 발화)가 그것이며 이 분석적 발화의 엄정성은 유효성(Validity)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물리학의 철학적 토대>, 1948)
윌러드 밴 오먼 콰인과 칼 포퍼는 과학의 이러한 이미지에 공감하지 않았다. 칼 포퍼는 한 가지 핵심지점에서 카르나프의 주장에 반대했다. 포퍼는 ‘확인’과 ‘과학적 증거’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과학은 가설을 생산하고, 이 가설을 시험함으로써 오류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이를 포퍼는 ‘반박가능성’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하나의 시험에 성공한다고 해서 어느 가설이 완전히 유효화(Validate)되는 법은 절대 없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는 흰 백조와 마주칠 때마다 살아남지만, 이러한 만남은 이 명제를 최종 확증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포퍼는 1934년에 집필한 자신의 역작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이러한 논거들을 소개했다(하지만 이 책은 1959년에야 영어로 번역됐다).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실증주의 비판에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하버드 출신의 이 철학자는 1951년 <실증주의의 두 가지 독단>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유명해졌는데, 이 논문에서 콰인은 카르나프가 논리에 기반을 둔 분석적 지식과 경험에 기반을 둔 실증적 지식을 서로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콰인은 실증적 명제가 언제나 약간의 개념화를 내포하며 그렇기에 약간의 분석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 어떤 경험도 어느 이론을 완전히 무효화하거나 확증할 만큼 충분히 설득력 있지 않다. 즉 사건과 이론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접합

 

 
그렇기에 학회가 진행되는 동안 카르나프와 포퍼, 콰인은 과학적 방식의 기준과 진실에 관해 토론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와 런던에 자리한 차세대 학자들의 견해 사이에는 이미 크나큰 간격이 있었다. 이 차세대 학자 중 하나가 미국 출신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S. 쿤(1922~1996)이었는데, 그는 이전 해인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출간해 과학철학 분야에 충격을 던졌다. 이 책에서 쿤은 과학이 점진적 과정으로 진화하지 않으며, 시도와 오류를 반복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은 지배적인 모형, 즉 ‘패러다임’을 이용해 발전한다고 보았는데, 패러다임이란 특정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특정한 사고의 기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 모형이 공유되는 동시에 ‘정상과학’이 작동되고, 이후 이 모형이 위기에 봉착하면 새로운 모형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뉴턴의 물리학에서 20세기의 상대론적 물리학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과학의 역사는 두 안정기 사이의 혁명적 급변을 통해 진화한다. 임레 러커토시(1922~1974)는 1956년 부다페스트 혁명이 실패한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로, 이 학회의 실무책임자를 맡았다. 러커토시 또한 선대 학자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연구 프로그램 방법론(MRP)’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쿤의 패러다임과 유사한 이 MRP는 현재 상황에서 과학을 이끄는 모든 가설을 지칭했다. 예컨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이론 또한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계시스템으로 바라보는’ MRP인 셈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러한 원칙을 기반으로 삼아 광학이나 역학에 대해 연구를 진행해나갔을 것이다. MRP는 프로그램의 핵심을 형성하는, 불가침의 명제들을 가리키는 ‘중핵(Hard core)’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핵’은 부차적인 가설들로 형성된 보호대(Protective belt)로 둘러싸여 있는데, 보호대는 해당 이론의 핵심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 없이 잠재적으로 수정 가능하다. 
프로그램의 역할은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고 연구영역을 선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면 ‘진보적’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퇴행적’이다. 그렇지만 러커토시는 어느 연구프로그램 하나만으로는 모든 이상현상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러커토시는 자신의 스승 포퍼와 맞섰는데, 포퍼는 과학의 본질이 스스로의 발화를 반박시키는 데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대립했고, 포퍼는 1969년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은퇴한 뒤 자신에게 도전한 이 젊은 학자가 바로 자신의 뒤를 이어 학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보고 쓰라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의 내부에 언제나 약간의 모순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가 내재한다는 생각은 나중에 미국의 파울 파이어아벤트(1924~1994)에 의해 체계화되고 급진화됐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사의 구체적인 예시들을 기반으로 삼아 수많은 과학이론(갈릴레이의 이론과 뉴턴의 이론, 상대성 이론 등)은 때때로 내적인 모순이 존재하며 약점이 드러나긴 하더라도, 일종의 경험적 사실처럼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반순응주의적 태도의 소유자인 파이어아벤트는 ‘지식의 아나키즘’이라는 이론을 이끌어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방법론적 규칙에서 벗어났는데, 그러니 그 어떤 이상적 방법론도 과학을 발전시키는 방법론으로서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쿠아레, 바슐라르, 캉길렘

 

 
프랑스 학자들은 영미권 철학자들이 주도한 런던학회에 전혀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미권 철학자들과 ‘유럽적’ 사고의 지지자들이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 거주했던 토마스 쿤만이 당대 프랑스 과학철학의 거장인 알렉상드르 쿠아레나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를 알고 있었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이들에게서 많은 빚을 진 셈이었다.
러시아 출신의 알렉상드르 쿠아레는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갈릴레이 시대 물리학의 변화를 연구했으며 이후에는 <닫힌 세계에서 무한한 우주로>(1957)에서 현대 우주생성론을 연구했다. 그의 모든 발언은 과학적 사유가 정신적 구조 안에서 변화해나가며, 이 구조는 각 시대에 따라 어떤 현상을 ‘사유 가능한 것’ 또는 ‘사유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함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한편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1938년 <과학정신의 형성>에서 과학은 언제나 상상에서 나온 ‘표상’을, 즉 오로지 ‘과학적 사유의 정신분석적 해석’으로만 밝혀낼 수 있는 ‘기만적 이미지’를 전달한다고 단언했다. 포퍼와 마찬가지로, 바슐라르는 과학이 진실을 발견하기보다는 오류를 걸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과학정신은 바로잡아진 오류들로 구성돼 있다.”
바슐라르의 뒤를 이어 소르본대학의 과학사 교수직을 맡은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은 이러한 접근법을 생물학과 의학의 역사에 적용해 그 개념적 토대를 밝혀내려 했다. 또한 캉길렘의 저서는 그의 제자였던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 이론에 영감을 줬다. 쿤의 패러다임에서부터 푸코의 에피스테메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러커토시의 연구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즉 과학은 각 시대에 고유한 정신적 기틀 속에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 저자들 간의 긴밀한 사유적 유사성이야말로 이들의 주장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언어철학의 등장

 

 
존 랭쇼 오스틴(1911~1960)은 이 세상에 이미 책이 너무 많다고 보았고, 그래서 생전에는 책을 전혀 출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했던 강연이 제자들에 의해 묶여 한 권의 책으로 거듭났다. 그것이 바로 1962년에 출간된 강의록 <말로 일을 하는 법>이며 이 책은 언어철학의 중요한 전환점을 장식했고 인문과학 분야에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새로운 언어학을 창설했으며 철학적 화용론에 기여했고 비판 사회학에 밑거름이 됐다. 오스틴은 1953년 이후 길버트 라일에 의해 옥스퍼드대학에서 발전된 분석학파의 순전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옥스퍼드의 철학자들은 이른바 ‘일상언어학자’라고 불렸는데, 이들에게 ‘철학한다’는 것은 단어의 의미를 주해하는 것이며 이 의미란 늘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용례의 ‘작용’에 좌우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스틴이 자신의 강의록에서 했던 것은 그가 ‘언표내적’ 행위라 이름 지은 새로운 유형의 작용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언표내적 행위란 대체 무엇인가? ‘명명한다’ ‘준다’ ‘약속한다’와 같은 어떤 발화들은 어떠한 상태를 확인하는 데에도, 사실을 단언하는 데에도,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지만, 청자에게 특정한 효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오스틴은 이 언표내적 행위가 특별한 종류의 동사와 관련된다고 보았는데 이런 동사를 가리켜 ‘수행적 동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실험을 거듭하면서 그는 진술적 발화 중 다수가 언표내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즉 특정한 효과를 겨냥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컨대 “너 늦었어” 같은 발화는 단순한 진술이 될 수도 있고, 서두르라는 요청이 될 수도 있다. 즉 오스틴은 대다수의 문장이 ‘언어행위’를 구성할 수 있다고 결론지음으로써, 언어의 실증적 분석 비판에 하나의 토대를 더했다. 어느 발화가 진실도, 거짓도 아니지만 특정한 기능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발화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연구를 창시했던 것이다. 발화의 내용이 아니라 발화의 행위에 속한 의미를 찾는 것, 이것이 바로 ‘화용론’의 차원이었다. 
초기에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오스틴의 저작은 1970년대에 들어 언어학의 이론 및 분석에서 새로운 분파를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화의 메커니즘과 전제, 암묵적 의미 등 언어의 용례 흔적을 연구하는 분야였다. 그렇지만 이 책은 또한 실증주의에 반해 발전을 구가한 영미권의 대대적인 철학적 운동에 밑거름이 됐으며 무엇보다도 화용론적 측면을 포함했다. 
이 언어행위라는 개념은 미국 철학자 존 설(1932~)이 차용하면서 보다 전반적인 차원으로 거듭났다. 1969년에 존 설은 우리의 발화 대다수가 이중의 의미를 지니며 그 자체로 ‘간접적 행위’라는 것을 증명했다. “소금 있어요?”라는 문장이 질문이 아니라 요청인 것처럼. 이후 언어의 의미가 논리적 서술로 치환 불가능한 의도적 현상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한편 미국 신실용주의의 주요인물인 리처드 로티(1931~)는 1967년 <언어적 전회(転回)>를 출간했다. 이후 언어철학에 일부 기대어 1979년에 지식의 상대주의적 개념을 제안했다. 로티에 따르면, 지식은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유효성도 지니지 못하는 만큼 이성과 객관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글·성지훈
파리8대학에서 유럽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불편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본지에 '인문학 100년사'를 연재하면서 오랫만에 오래된 책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공부할 즐거움에 들떠있다. 
 
 
(1) <구조주의의 역사(Histoire du structuralisme)>(국내에선 1998~2003년 동문선에서 시리즈 4권이 번역·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