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블루칼라 코스프레와 힐러리의 진부한 말들
2016-09-30 토마스 프랭크
지난 7월, 미국에서는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 두 전당대회는 의도와 무관하게 미국 정계의 현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공화당 측은 (당내 지도층마저 불신하는)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성을, 민주당 측에서는 (유권자들 대부분이 불신하는) 자신의 선(善)을 내세워 상대 후보를 누르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지 못하는 한 여성을 각각 대선 후보로 지명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시는 공화당 전당대회를 열기에 가장 부적절한, 최악의 지역이었다. 공업도시인 클리블랜드는 오래 전부터 민주당이 우세했던 곳으로, 지난 40여 년 간 공화당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황폐화된 산업의 영향이 구석구석 묻어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과거 미국산업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도시다. 존 록펠러가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처음 설립했던 지역이며, 철강, 자동차, 화학 등 생산업이 활성화돼 수질오염 등 각종 환경오염 문제가 계속해서 일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2016년의 클리블랜드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중산층이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시내 중심지는 텅텅 비기 시작했고, 각종 산업공장들도 멕시코와 남부지방으로 이전해간 탓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920년만 해도 클리블랜드는 미국 내 인구 5위를 차지하는 도시였지만, 현재는 48위까지 떨어졌으며 압류 건물과 빈 집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리는 공화당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클리블랜드 동쪽에 위치한 과거 산업지역을 방문했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자동차 안에서 창문으로 내다본 풍경 속에는 황폐해진 공장들과 담쟁이로 뒤덮인 낡은 건물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36년 승리를 거둔 노동자 파업운동 이후 유명해진 자동차 설계회사 피셔바디 생산 공장은 현재 클리블랜드 직업훈련센터의 열악한 기숙사가 돼 있었다. 조금 더 가니, 도로 옆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청소년들을 기리는 십자가와 인형 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내 곳곳의 땅은 비어 있었고, 거리에는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따로 조성된 택지들도 온통 잡초에 뒤덮여 야생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돌아가고 있는 지역도 반쯤은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곽 지역으로 가니, 조깅하는 사람들을 몇 명 찾아볼 수는 있었지만, 깔끔하게 조성된 잔디밭에는 노는 아이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헝가리 식당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고, 슈퍼마켓 계산대에도 사람이 없었다. 시내 중심가 아무 곳에나 주차를 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런 도시에서 공화당 전당대회를 조직하는 것은, 다 무너져가는 교량 위에 올라서서 설비지출을 축소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하지만 2016년은 다른 해와는 달랐다.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억만장자 선동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있어서, 클리블랜드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이상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간의 경제정책과 산업계 쇠락,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이 할퀴고 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클리블랜드야말로, 부동산 사업가였던 트럼프가 미국 전역에 약속한 그의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처럼 언젠가 다시 ‘위대’해질 미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무대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그러나 배반당한
미국을 구해야한다
그런데 클리블랜드에도 다른 대도시와 다를 바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가 있다. 1990년대 재개발로 조성된 이스트 4번가다. 여름이면 테라스가 딸린 작은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문을 연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거리가 이번 7월에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퀵큰론즈아레나의 로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거리의 행상들과 공화당 대의원, 언론인, 시위대는 물론, 이 며칠간의 광경을 담기 위해 손에서 아이폰을 놓지 않는 행인들까지, 이곳에서 모두 함께 정치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이 시대는 끝났다고 소리치던 시위대와 광신적인 지지자들은 방송 카메라들이 나타나자, 플래카드를 흔들면서 자신들의 모습이 전국에 비쳐질 순간을 기다렸다. 한 남성은 ‘트럼프’라고 적힌 빨간 모자를 쓰고 무기를 멘 채 카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고, 바로 옆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기심을 발달”시키도록 손가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놓은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트럼프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광경 속에서, 무엇보다 지배적이었던 요소는 역시 통제불능의 상스러운 물건들이었다. 트럼프가 반대파들을 향해 중지를 날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도 있었고, 힐러리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1)를 비교하며 조롱하는 글귀가 적혀있거나, 성조기 무늬의 남성 성기가 그려진 옷, 그리고 “IS를 폭격하라”고 적힌 배지도 눈에 띠었다.
전당대회장으로 가까이 갈수록 바그다드 최고 보안구역인 ‘그린존’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대회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빽빽하게 선 경찰 행렬 사이로 철조망 길을 걸어가야 했다. 총 여섯 차례에 걸친 취재권 검사 후 금속탐지기 검문까지 마치고 난 다음에야 마침내 대회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장은 말 그대로 ‘비어’ 있었다.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대회장 내부는 그리 붐비지 않았다. 연설의 수준도 뛰어나지 않았다. 연사 대부분이 성심성의껏 준비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미트 롬니나 존 매테인,(2) 부시 가문 등 과거 공화당 지도부 인사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몇몇 공화당 대표 인사들도 연설을 했지만,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폴 라이언 연방하원의회 의장이 대회 의제를 짤막하게 소개했고, 미치 맥코넬 켄터키 주 의원은 자신이 거둔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로서의 성공을 자랑해 야유를 샀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 주지사는 기조연설 중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국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저지른 외교적 실수들을 비난했다. 그는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트럼프가 비판했던 내용과는 정반대 내용으로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전당대회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공직자들의 행렬은 없었다. 대신 극보수주의 방송인들이 나서서 애국심 넘치는 용맹한 행동들을 이야기해 감탄을 유도하고, 참을 수 없는 배반과 범죄 행위들에 대해 낱낱이 소개하며 분개하도록 부추겼다. 분위기는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최고의 미국! 배반당한 미국! 우리가 미국을 구해야 한다! 청중들은 품격 있는 연설과 모험담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힐러리를 감옥에 보내라,
트럼프를 지지하라
뒤이어 불법 이민자를 비롯해 ‘좌파가 끔찍이도 보호하려는 불한당들’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단상에 올랐다. 이들의 연설에는 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어조들이 섞여 있었다. 미국의 용맹함, 미국의 희생, 그리고 “적을 적의 이름으로” 결코 부르려 하지 않는 민주당 지도자 등의 모습이 뒤섞여 나타났다. 청중들은 2012년 9월 리비아 벵가지에서 일어난 미국 영사관 테러로 공무원이었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 패트리시아 스미스의 낙심한 목소리를 들으며 전율을 느꼈다. “저는 힐러리 클린턴(당시 국무부 장관)에게 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미국의 한 가정이 이런 일을 당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공화당 대의원들은 민주당의 배반으로 인해 일어난 국가적 파멸이라는 달콤한 악몽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함도 일종의 심심풀이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당대회 참석자들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 “감옥에 보내라!”라고 소리치는 것도 어쩌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팝콘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온화하고 연약한 인상의 한 노년 여성이, 내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당신 어깨를 짚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감옥에 보내라!”고 소리쳤다.
한편 일부 공화당 지도층은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이번 전당대회에 불만을 표했다. 테드 크루즈 텍사스 상원의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경선 당시 트럼프와 경쟁 구도를 이뤘던 크루즈는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자형 정치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의 감언이설과 선동 때문에 같은 상원의원들조차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당대회 사흘째, 크루즈는 연단에 올라 교훈적이지만 내실은 없는 전형적 우파 스타일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공무 집행 중 숨진 경찰관에 대한 눈물어린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사랑했던 그의 딸은 눈물을 삼키고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고, 이어 자유의 힘에 대한 장황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20분이 넘도록 연설을 듣고 있던 청중은 크루즈가 아직 단 한 번도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연설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달콤한 말들을 덧붙이며 연설을 마치려고 할 때, 청중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악어의 눈물에 이골이 난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트럼프를 지지하라!”고 외쳤다(결국, 크루즈는 9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지선언을 했다). 팸플릿을 확성기처럼 둥글게 말아 연단을 향해 소리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파 종교계의 진부한 말들을 늘어놓던 그는 다행히도 살아남아 야유 속에 무대를 떠나야 했다.
‘그’의 공화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실패의 흔적 속에서, 수십억 달러의 투자금이 무(無)로 돌아가는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40여 년간 공화당을 가장 부유한 1%를 위한 잘 길들여진 도구로 만들기 위해 모였던 그 많은 돈 말이다. 이 돈은 모두 워싱턴의 로비스트에게, 입법자들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그리고 노동자들을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계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책략들에 사용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몇 달 만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미국 우파의 주요 원동력인 문화적 전쟁이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페이팔의 공동 설립자인 피터 틸은 “나는 게이인 것이 자랑스럽고, 공화당원인 것이 자랑스러우며, 그 무엇보다도 미국인이기에 가장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밝혔을 때 청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또한, 공화당의 신념을 이루는 기둥 중 하나인 자유무역주의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회적 비용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없었고,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 주지사만이 그나마도 조심스럽게 노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었다.
‘일하는 미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 정당이 “노동자들의 당”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평범한 국민들의 경제 문제를 우선순위로 삼겠노라 약속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있어 미국 경제를 파괴한 무역협정을 규탄하기 위한 무대로 클리블랜드보다 적격인 곳은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한 연사로부터 “미국의 억만장자 노동자”라고 칭해졌고, 트위터로 수많은 인종차별적 언사를 퍼부었으며,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약속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제품들은 해외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바로 그 도널드 트럼프가 스스로를 ‘일하는 미국’의 수호자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70분에 걸친 연설을 듣는 동안 트럼프가 마치 이성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물론 그가 테러와 범죄행위에 대해 편집증적인 시각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반향을 일으키고 다녔던 보편적 공포는 실제적이다. 미국 중산층은 해체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불공평한 무역협정들과 서민층에 대한 민주당 정부의 기이한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에게 있어, 경제는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는 가진 자들을 위한 일종의 연극이 돼버린 것이 분명했다. 트럼프는 직접적인 표현들로 이러한 극히 미국적인 냉소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대기업, 언론 특권층, 자본가들은 제 상대 후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현 시스템을 유지해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힐러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기 위해 돈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기 위해 끈을 잡아당기는 셈이죠.”
이어서 경제 회복으로 인한 그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었던 서민층에 대한 약속이 이어졌다. “저는 해고당한 공장 노동자들을, 부당하고 끔찍한 무역협정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공동체들을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짐짓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대통령을 재현이라도 하듯 덧붙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잊혀진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목소리입니다.” 연설 직후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막말꾼 정치 초보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과 거의 대등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힐러리의 ‘선(善)’과 ‘올바름’의 향연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함께하면 더 강하다(Stronger Together)”라는 공식 슬로건을 내걸고 민주당 전당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 슬로건은 힐러리와 경선에서 경합을 벌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세력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당대회의 진짜 주제는 유년기 이후의 힐러리의 삶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선(善)’에 있었다.
열정적이고 완강하면서, 대담하고 꾸밈없으며, 필연적이고 극도로 순수해 그 무엇도 필적할 수 없는 선(善). 필라델피아를 찾은 우리에게 다가온 메시지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웰스파고센터의 무대에 오른 이들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괴물들과 비교하면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원래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들이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 이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올바름에 대한 특권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민주당 전당대회 주최측은 물밀 듯 쏟아지는 선의 속에서 이곳을 찾은 청중도 스스로를 선하게 여기기를, 무대에서 시작된 우월함이 지지자들에게까지 퍼져가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대회장 근처 판매대에서는 글루텐프리 먹거리를 판매하는 한편, 장애인 화장실은 물론 수유실도 찾기 쉬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인파 속으로 젖먹이 아이를 데려올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또 다른 형태의 도덕적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올바름’의 향연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순으로 인해 부인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언론을 통해 월가 기업들이 주최한 리셉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전당대회 주최측은 전당회장 가까운 곳에 택시가 들어올 수 있게 우버 사와 교섭을 진행했다. 주최측은 우버가 노동 불안정으로 악명 높은 기업이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듯 했다. 전당회장 내부는 미어터졌다. 회장 입구마다 길게 줄지어 서있던 사람들은 화난 표정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외쳤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한 경비업체 직원이 기다리다 지친 참가자들을 자리로 안내했는데, 몇 분 후 다른 직원이 나타나 취재권을 요구하면서 자리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고작 보조의자를 두고 이토록 본능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스크린 속 힐러리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더 많은 호의와 애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광경은 며칠 동안 지속됐다. 무대 위에 선 연사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줄지어 연설을 이어가는 모습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상연하는 고등학생 무리들, 또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이야기를 설파하는 19세기 선교사들을 떠오르게 할 정도였다. 자신의 고결한 언사에 심취한 이들은 연설 내용에 어울릴만한 말투를 선택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일제히 나타난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 전당대회는 민주당이 지닌 본질적 선함을 강조해야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는 그다지 선한 행실들을 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일례로 전당대회 개최 직전에는 경선기간 동안 원칙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했던 민주당전국위원회(DNC)가 힐러리의 경쟁 상대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비방했다는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당 당원들이 우려를 표하고 많은 연사들이 온 힘을 다해 비난했던 여러 문제들이, 실상 민주당 소속인 임기 말의 현 대통령이나, 힐러리의 남편인 전 대통령이 펼친 정책에 따른 결과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모순적인 측면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세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십 명의 대의원들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반대하는 플랜카드를 흔들며 반대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전당대회 셋째 날 연단에 오른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는 점이다. 조 바이든 부통령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대통령 중 최고의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고, 여전히 임기 내 ‘TPP 비준’이라는 영광스러운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서 말이다.
그 다음, 전당대회 둘째 날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부유한 자들과 열심히 일하는 중산층 모두 동일한 규칙을 따르고 있도록 감시해줄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조금 앞서 법무부장관 재직(2009~2015) 중 금융사기 책임이 있는 은행가들에 대한 추적 과정에서 무관심으로 일변해 비난을 샀던 에릭 홀더 전 법무부장관이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간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 워렌 메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이 기조연설을 통해 노동자 계층을 덮친 여러 문제들을 열거한 후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이다.
“증권시장은 날로 기록을 갱신하고 있고, 기업이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으며, 최고경영자들은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가 여러분의 가족처럼 열심히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혜택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 중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 분들이 있을까요?”
‘이곳에 계신 여러분’이라니? 그 문제들은 오바마 대통령 임기 동안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이날 저녁 텔레비전으로 이 연설을 보고 있었다 해도, 딱히 저격당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힐러리가 내린 진단에 자신이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워렌 상원의원은 도널드 트럼프가 “자금 통제를 축소하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20여 년 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진정한 파괴공작을 벌였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청중은 이튿날 저녁 연단에 오른 빌 클린턴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한편 힐러리의 과거 행적은 아주 상세하게 다시 쓰였다. 힐러리의 이력과 관련된 몇몇 간략한 에피소드에 긴 해설이 따라붙었고, 덕분에 마치 일생을 구호운동에 바친 듯한 인상을 줬다. 기업들의 권익 수호에 힘을 쏟았던 변호사 경력을 비롯해, 다른 주제들과 관련된, 보다 일관성 있는 이력들은 자체적으로 녹아 없어진 듯했다.
조금 전까지 힐러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추켜세웠던, 힐러리가 큰 기여를 했노라 내세웠던 빌 클린턴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도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한 이야기도 공식석상에서는 전부 빠져 있었다. 또한 빌 클린턴이 1996년 당시 아동부양가족지원금을 폐지하는 개혁안에 서명한 사실도, 힐러리가 “여성과 아동의 권리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보내왔다”고 역설한 지금까지의 연설들과 대치되는 까닭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솟아나는, 하지만 지금까지 물려 내려온 민주당의 유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선(善)만이 남았다. 장애와 악조건을 이겨내고, 테러에서 살아남고, 끔찍한 부상에서 회복한 이들의 성공 스토리만이 남았다. “혁신과 기업정신”을 믿는 사람들, 자신이 대통령의 두 팔에 안겼던 것처럼 “모든 미국 국민이 오바마 대통령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힐러리의 전략적·군사적 역량을 신뢰한다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남았다.
엄숙함이 서린 얼굴들 위로 눈물이 물결쳤다. 스크린에는 한 이민자가 미국에 밀입국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세 번이나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비춰졌고, 또 다른 영상에서는 부모가 미국에서 추방될까 두렵다고 울먹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영상 속 힐러리는 그 아이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는 자신이 보호하겠노라고 약속했고, 이번에는 힐러리의 주변에 앉은 선하고 따뜻한 인상의 다른 어른들의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감동적인, 그러나 진부한 말들
연민과 선의, 그리고 훌륭함. 필라델피아에 초대된 이들은 모두 훌륭한 기업가이며 눈부신 성공을 경험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연단에 올라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아름 준비해두고는 공무 중 세상을 떠나고 만 경찰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전당대회의 가장 뛰어난 연사 중 하나였던 바이든 부대통령은, “목에 멍에를 멘 듯 학자금 대출을 갚아가고 있는 학생들이, 사실은 그들의 부모가 은행 대출을 거절당하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학자금을 대출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장황한 무대 끝에 마침내 힐러리 클린턴이 연단에 올랐다. 흰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오른 힐러리는 청중들을 향해 감동적이지만 진부한 말들을 쏟아냈다. 깊숙한 진부함 속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힐러리는 미국이 오늘날 “진실의 순간”이라는 아주 심각한 과제에 직면해있다고 했다. 그렇다, ‘공존(Togetherness)’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들이 우리를 서로 떼어놓고자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어서기 위해 함께 일해 나갈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 위협은 바로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힐러리는 그가 “우리를 다른 세계로부터, 또한 내부적으로 각각 분리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도덕적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국가의 번영과도 연결된다. “미국은 더 훌륭하고 더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우리 모두의 힘과 재능과 야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마음 깊이 믿고 있습니다.”
힐러리는 자신의 철학 또한 빠뜨리지 않고 상기시켰다.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한 모든 선을 행하십시오.” 또한 세세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실제적이고 진보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클리블랜드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좋은 일자리와 임금 인상”을 약속했으며,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그림을 간략히 설명했다.
“중산층의 번영이 미국의 번영을 가져오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돈의 지배력으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킬 수 있으며 투표권을 제한하기보다 확대할 수 있는 대법관을 선출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필라델피아에 모인 청중들은 문제와 해결책 간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무대에 오른 힐러리처럼 청중들 역시 쇠락한 중산층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올해 뿐 아니라 언제나 그랬듯이, 두 정치 진영을 가르는 진짜 경계선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데에 있다. 바로 선과 악의 격차다. 이쪽에는 선한 이들이, 저쪽에는 악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게 있어 선은 파생되는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문제다. 2016년 미국 대선은 선함과 천박함의 대결구도가 될 것이다. 힐러리는 “우리는 우리를 분열하려는 모든 말과 비열한 비유에 맞설 것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장애인, 멕시코인, 흑인에 대한 수없는 막말을 쏟아냈던 상대 후보를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이해할 수 없을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미국은 위대합니다. 미국은 선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적 선, 바로 그것이다. 훗날 2016년 대선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면, 나는 아스팔트의 열기까지 더해져 뇌를 마비시키는 것 같은 더위 속에서, 필라델피아 웰스파고센터 앞의 거대한 주차장을 걸어가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가드레일을 따라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담 너머로 한 사람이 스쿨버스 한 대를 간신히 갖다 대고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전당대회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확성기를 켜고 교육과 혁신의 중요성에 대해 외쳤다.
한 가지 더, 클리블랜드의 외곽을 지나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보였던 광고판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광고판에는 미국 우파가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비상식적인 슬로건 하나가 적혀 있었다. ‘좌파 언론을 믿지 말라!’ 이 광고판은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고속도로와 거대한 주차장, 다섯 개의 철로가 교차하는 길 사이에 서있었다. 각종 생산 설비와 교통수단의 소음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도대체 누구에게 보내는 메시지란 말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탄 열차를 지나쳐가던 화물열차의 기관사를 위한 것인가? 이는 그들의 편집증을 따르라는 초대장이나 마찬가지다. 특정한 대상도 없지만, 멀리서도 눈에 띠게 만들어 둔, 의미 없는 초대인 것이다.
글·토마스 프랭크 Thomas Frank
주요 저서로 보수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분석한 <난파선의 선원들>(The Wrecking Crew), <왜 가난한 자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등이 있으며, 특히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를 통해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도 변화무쌍한 집권전략을 폭로하였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어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백악관 비서였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감추려 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결국 1998년 위증이 입증, 탄핵 위험에 처했었다.
(2) 2008년과 2012년 미국 대선 당시의 공화당 대선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