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번먼트로 변질된 거버넌스

2016-09-30     안세실 로베르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차기 대선 후보자 대부분은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정치제도를 어떤 방식으로든 개혁할 것을 제안한다. 수많은 후보들, 연구자들, 활동가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지만, 악의 근원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바로 은밀히 세력을 넓혀가는 중인 ‘거버넌스’라는 새로운 정치제도가 유럽을 실험장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극적인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덕분에, 이제는 유권자가 특정후보를 택해 이끄는 대신 정치지도자가 시민을 평가하고 있다. 예컨대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리오넬 조스팽이 1차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나 2005년 EU헌법조약 관련 국민투표가 부결됐을 때처럼, 2016년 6월 23일의 ‘브렉시트’ 이후 영국인들은 거친 정신분석을 당하고 있다. 만일 국민투표의 결과가 EU 내 영국의 잔존으로 결론 났더라면, 이렇게 다양한 매체가 완벽하게 합심해 이런 행태를 보이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더군다나 그 누구도 ‘이렇게 중요한 주제’를 국민투표로 다룰 수 있다는 원칙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 어떠한 원칙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편견이다. 이런 편견은 계급적 경멸감,(2)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분석된다. 
 
 
계급적 경멸감,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먼저 계급적 경멸감은 언제나 능수능란한 정치고문 알랭 맹크(<르몽드> 전 감사)의 입에서 숨김없이 흘러나왔다. “이번 국민투표는 대중이 엘리트계급에 거둔 승리가 아니라,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이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에 거둔 승리인 셈이다.”(3) 시민들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난 60년간의 실망스러운 경험에서 논리적인 교훈을 이끌어낸 것이라는 생각은 정치지도층의 머릿속에 단 한 번도 스쳐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계급 간 분열을 넘어서는 철학적 문제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핵심이념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행태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념이란 “공권력은 국민의 의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세계인권선언 제21조 제3항), 그리고 사회의 전 구성원이 바로 시민이며 각 구성원의 출신 및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다함께 일반의사의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수백 년간의 사회정치적 투쟁으로 자리 잡은 이 철학이 오늘날에는 ‘하나의 유럽 건설’이라는 절대명령에 밀려 대대적인 이념적 공습의 대상이 된 것이다.
 
공화당의 알랭 쥐페 전 총리처럼 프랑스에서는 “EU문제 관련 국민투표를 위한 ‘조건’이 완성되지 않았다”(4)고 판단하거나, 사회당의 마뉘엘 발스 총리처럼 이러한 국민투표를 원하는 사람들을 “본인이 감당 불가능한 일을 유발하려 한다”(5)고 평가하는 이들을 보면, 그 자신이 진정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즉 정치지도층은 국민투표에서 이 문제들이 가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의견을 아예 묻지 않는 편을 선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 정치지도자들은 조약을 하나씩 맺어가며 화폐와 예산관련 권한 같은, 보다 중요한 주권을 EU에 이전하는 상황에서조차 국민의 지지 없이 통치하고 있는 셈이다.
 
각국 내부 차원에서도 유럽연합은 민주주의의 불법화를 보여주는 형태로서 작동한다.(6) 이제 더는 여느 위기의 차원이 아니라, EU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삼은 정치체제의 점진적 변화인 셈이다. ‘거버넌스’라는 이름의 이 체제에서 국민은 시장, 전문가, ‘시민사회’ 같은 또 다른 주체와 다함께 공권력의 원천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왜곡에 이용당하는 ‘시민사회’
 
EU조약 입법자들이 ‘전문가 지배체제(Expertocracy)’에 부여한 전략적 역할은 잘 알려져 있다. 각자의 ‘역량’에 따라 선출된 ‘독립적’ 집행위원들로 이뤄진 EU 집행위원회가 내각이나 의회 등 정치기구를 대신해 ‘조약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중추를 이루는 이 핵심적 요소는 정기적으로 신랄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그 역할이 점차 더 커져가며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2009년 발효된 리스본 조약 제11조는 EU기관들이 ‘시민을 대표하는 단체 및 시민사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정기적인 대화’를 유지할 것을 권고한다. ‘민주주의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보강된 이 ‘시민사회’라는 표현은 정의하는 바가 워낙 넓은 나머지, 노동시장 주체나 비정부단체(NGO), 비영리단체, 종교단체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해석으로 이어진다.(7) 따라서 이 중에서는 노조나 진보 성향의 단체뿐 아니라 로비단체, 경영자단체, 전문가 사무실, 심지어는 특정 종파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시민사회’의 기반에는 그 어떠한 대의성이나 적법성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아주 다양한 양상을 지닌 이 시민사회는 불평등이 군림하는 곳인데, 이 시민사회의 주체들이 보유한 수단은 그들이 옹호하는 권리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엘렌 미셸은 시민사회에 대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사회’는 그 자체로 유럽연합 운영의 한 주체가 됐다. 더욱이 이제는 시민사회와 대화하는 기관을, 그와 관련된 공공정책을, 그를 표방하는 주체를 정당화하는 권한을 지닌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의미하는 바도, 시민사회의 정치참여 형태도 안정화되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를 아주 다양한 용도로 이용 가능한 것이다.”(8)
 
집행위원회는 이 시민사회 가운데서 대표성이 있고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골라낸다. 그리고 이는 결국 시민사회를 견고하게 만들 수 없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EU와 ‘시민사회’ 간의 대화는 실질적으로 그 어떠한 종류의 결정권 공유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EU헌법조약이야말로 ‘시민사회’에 일부 자문을 받아 생겨난 산물이 아니었던가? 또한 2014년 가을 범대서양자유무역지대(TAFTA)에 관해 시민사회에 구했던 중요한 자문은 EU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다. 평화적 대화정신 등의 긍정적 가치를 표방하는 이 시스템은 ‘시민들의 유럽’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 연방주의 운동, 유럽시민사회 상설포럼, ‘시민연단’, 혹은 공익단체유럽위원회(CEDAG) 등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예상치 않은 원군을 맞이하고 있다. 엘렌 미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처럼 ‘시민과 더 가깝기 때문에 더 민주적인 유럽’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사회, 환경, 인도적 분야에서 활동하는 각종 NGO를 이면에서 이끌고 있는데, 이 단체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행동과정에서 진정 인정받기를 요구한다.”
 
대중 결정자들의 결정이 전문가의 결정으로 대체됐듯, 정체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 ‘시민사회’가 자칭 시민의 대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온갖 명분을 지닌 행동주의자들에게 중대한 지위를 부여하며, 이 지위는 (선거가 아니라) 여론조사 따위로 소위 ‘대표성’이 판단되는 SNS나 부주의한 언론에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국민은 그저 수많은 압력단체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투표용지를 경계하는 유럽연합 내부에서 ‘시민사회’와 ‘국민’이 각기 지닌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순전히 기술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거버넌스’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특히 미국에서 유래된 영미권 행정학을 기반으로 한 이념적 개념이다. 국가의 힘은 줄이고 시장의 규모는 키우며 ‘견실한 경영’을 목표로 한다.(9) 불어권에서는 이 ‘견실한 경영’을 종종 이탈리아의 유명 화가 암브로지오 로렌체티의 대표작에 묘사된 ‘좋은 정부(Buono Governo)’와 혼동하곤 한다.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사에 전시된 이 1339년도 작품은 민중의 감시 아래서 정의와 지혜가 시행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데, 여기서의 정의와 지혜란 오늘날 정치지도층의 머릿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 회계적 차원의 근심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케냐부터 코트디부아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국제금융기구들이 시행하는 ‘좋은 거버넌스’의 증명을 받고서는 곧 대혼란 속으로 몰락해갔던가? 또한 당시 IMF 총재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총재가 2009년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던진 말은 IMF 측이 2011년 1월의 아랍혁명을 거의 예상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튀니지에 도입된 경제정책은 건실한 정책이며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따라야 할 롤모델이 될 것이다.” 시장경제, 거버넌스, ‘시민사회’라는 용어들은 모두 후기민주주의(post democracy)의 이념적 말뭉치에 속한 것들이다.  
 
거버넌스를 통해 민중의 권력을 소외시키는 현상은 유럽, 특히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이 선거의 심판을 좀 더 쉽게 피해가도록 해준다. 선거의 정당성은 일부 유권자에게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실이야말로, 자국 국민에게 자문을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고자 하는 영국의 행보가 어째서 충격을 야기했는지 설명해주지 않을까. EU에 닥친 신뢰 위기, 더 나아가 유럽연합 자체에 대한 거부감 확대는 EU 내에서 본인을 대표해줄 이를 선출하는 ‘유럽국민’의 도래에서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일례로 프랑스 경제부장관 엠마뉘엘 마크롱은 유럽 국민투표를 개최하자고, 녹색당 의원 에바 졸리는 ‘유럽 입법의회’를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유형의 시도는 이미 2006년 독일의 오스카 라퐁텐, 프랑스의 장뤽 멜랑숑 등의 사회파 의원들이 내놓았던 계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다음의 문제가 사전에 이미 해결됐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각국 국민이 유럽국민이라는 더 거대한 하나의 공동체로 녹아드는 것을 용납하느냐는 것이다. 유럽연합 거주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하나의 ‘유럽정치공동체’가, 다수결 원칙으로 통치되는 공통기관들의 결정을 유럽인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가 된 유럽’이 진정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브렉시트’를 초래한 영국 국민투표, EU-우크라이나 협정에 반대한 네덜란드 국민투표 등 최근의 국민투표 결과로 미뤄볼 때 대부분의 유럽인은 여전히 국민국가를 민주주의의 정당한 기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나갔지만, 이러한 단절을 상징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2006년 1월 19일, EU헌법조약 관련 프랑스 및 네덜란드의 국민투표 결과를 교묘히 피해갈 수단을 찾길 요하는 결의안을 유럽의회가 가결했던 것이다.
 
무엇이 국민을 새롭게 각성시키는가
 
국민의 권력을 공격하는 방식을 통해 거버넌스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부상했던 대로의 형태로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18세기 당시 자기들끼리 통치하는 데 익숙했던 정치지도자 계층은 ‘포퓰리즘’과 ‘우민정치’를 독특하게 혼동했다. 공익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행태가 곧 근대성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소개됐을 때, 민중의 요구에 관심을 두는 태도는 일차원적인 인기전술로 여겨졌다. 이 사실로 미뤄볼 때, 자국 정부에 대한 국민의 더욱 긴밀한 통제는 현재 정책과는 아주 다른 정책으로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온당히 유추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789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주의는 오로지 대표자선거로만 실현될 뿐이며 ‘거버넌스’에 구속당한 프랑스나 수많은 EU국가에서 순전히 혁명적인 주장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다시금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과 ‘우민정치’로 이어진다고 여기는 태도는, 결국 정치지도층을 움직이는 의도, 그리고 이들의 계급적 경멸감보다 시민의 정치참여의사를 더욱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열띤 정치적 논쟁거리가 돼왔다. 좌파는 이 ‘부르주아적’ 체제가 시민의 이론적 평등놀음으로 노사관계의 폭력성을 부정한다고 곧잘 비난했다. 물론 칼 마르크스를 포함해, 좌파는 왕의 통치권이 국가에게로 양도된 것이 진보임에 변함이 없다고 봤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 간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하나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왕정을 문제시했던 이들(공화주의자)이 의회의 왼편(좌파당)에 앉게 됐던 것이다. 이후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한 운동들이 1789년 이후 획득된 정치권 옹호 운동에 통합되면서 교육, 사회권, 노조 및 노동자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적 이념을 구체화하는 데 필수적인 정책들을 요구했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가 공립학교, 정교분리 이념, 소득세를 위해 이끌었던 공화주의적 투쟁의 의미다. 그렇다 해서, 책임감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라는 또 다른 경제제도의 도입을 위해 투쟁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새천년의 초입에 들어선 유럽에서는 ‘좌파 국민’이 아니라 ‘국민’ 그 자체가 새롭게 각성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지난 2005년 EU헌법조약 관련 국민투표에서 대다수가 ‘부결’을 택한 반면,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좌파 지지자는 극소수에 그쳤던 것이다. 오늘날 국민의 각성을 일으키는 데는 사회적 위기, 불평등과 불공정의 급증 외에도, 그런 상황을 초래한 국민주권의 후퇴 역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과 및 국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Cf. 베르나르앙리 레비, ‘어째서 국민투표는 민주주의가 아닌가’, <르푸앙>, 파리, 2016년 7월 13일.
(2) 폴 메이슨, ‘브렉시트, 분노의 원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8월호 참조.
(3) <피가로>와의 인터뷰, 파리, 2016년 6월 29일. 
(4) ‘알랭 쥐페 왈, “오늘날 프랑스에서 EU 관련 국민투표를 개최한다면 무책임한 것”’, <르몽드>, 2016년 6월 27일. 
(5) 국회,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자 회의.    
(6) ‘(국민 따위는) 상관없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3년 11월호 참조.
(7) Cf. 유럽경제사회위원회(EESC), ‘유럽 차원에서 조직된 시민사회. 제1차 의회 회의록, 브뤼셀, 1999년 10월 15일~16일’, 22페이지(1999년 11월 17일 자 <유럽연합 공식저널> 제329호).
(8) Cf. 엘렌 미셸, ‘시민사회 아니면 유럽국민? 정치적 정당성을 찾는 유럽연합’, <알고 행동하라>, 제7호, 파리, 2009년 3월호.
(9) Cf. ‘거버넌스’, <국제사회학전문지>, 파리, 제155호, 1998년 1월 1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