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이 활개치는 몰도바 대선

2016-09-30     줄리아 뵈르크

현재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에는 거액의 국가예산을 빼돌린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친러 세력과 친서방 세력 할 것 없이 모두들 한 목소리로 과두정치 시스템을 비난한다. 그러나 대선이 10월 30일로 다가온 지금, 정치인들은 해묵은 갈등에만 집착하고 있다. 몰도바 국민들은 더 이상 지정학적 대립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하다. 

“저 뚱뚱한 국회의원을 좀 봐. 훔칠 수 있는 건 다 훔친 사람이야 / 국민들은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리는데 그들은 호화로운 대저택에 살지 / 훔친 수십억 달러를 모조리 써도 처벌을 피하지 못할 날이 언젠가는 올거야….”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 도심의 소규모 광장에서 힙합 음악이 울려 퍼진다. 트라이안 바르바라가 도시문화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20여 명의 젊은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랩을 선보인다. “이 노래는 2013년에 썼어요. 하지만 2년 후에 그들이 정말로 10억 달러를 훔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이 젊은 래퍼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도 놀란 듯했다.
 
몰도바는 1991년 독립했지만, 복잡한 사회 구성으로 인해 여전히 제대로 된 국가로 바로서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가가우지아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다, 언어적(루마니아어, 러시아어), 종교적(그리스 정교, 러시아 정교, 불가리아 정교), 지역적(트란스니스트리아의 독립)으로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
 
게다가 정치권은 이런 분열상황을 놓고 대서양동맹과 EU에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려 대립하고 있어,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린 상태다.(2) 최근 들어 표출된 부정부패와 과두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친서방 세력(또는 EU와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에서 친유럽 세력)과 친러 세력으로 대표되는 몰도바 내부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국민들은 깨달았다
도둑질을 당했다는 것을

변화의 첫 번째 신호는 2015년 4월에 감지됐다. 당시, 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은 몇 개월 전부터 몰도바 은행에서 거액의 국가예산이 사라졌다는 의혹을 제기해오고 있었다.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자, 정부는 3개 주요 은행이 이틀 만에 10억 달러가 증발됐음을 인정했다. 이는 인구 350만 명의 구소련권 국가, 몰도바 GDP의 13%에 달하는 금액이다.
 
2015년 5월 3일에는 소수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시민단체 ‘가치와 정의(Demnitate si Adevăr, DA)’의 주도 하에 5만여 명의 시민들이 ‘10억 달러의 반환’을 요구하며 수도 키시네프의 주요 도로를 점령했다. 독립 이후 몰도바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친러 세력은 친서방 성향으로 알려진 DA의 활동에 동참했다. 시민들은 이번 횡령 사건의 공범이자 책임자로 지목되고 있는 집권 연정당 유럽통합동맹(AIE)을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있다. 그밖에도 ‘세기의 횡령’이라 불리는 이번 사건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왔다. 몰도바의 화폐 레우의 가치가 불과 몇 개월 만에 30%나 떨어지면서 수입산이 대부분인 식료품 가격과 연료비, 그리고 집세가 폭등했다. 몰도바의 집주인들도 다른 서유럽과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집세를 유로로 받고 있는 까닭이다. “거의 최초로, 몰도바 국민들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통일된 의견을 갖는데 성공했습니다.” 민간 TV 채널의 정치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기자인 나탈리아 모라리가 말한다. “출신과 언어를 막론하고 모든 몰도바 국민들이 자신들이 도둑질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한편, 몰도바 언론계의 거물 블라디미르 플라호트니우치는 부정부패의 상징이자 부의 축적에 측근들을 이용한 악덕의 상징이 됐다. 올해 52세의 사업가 플라호트니우치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몰도바의 대통령이었던 공산당 출신의 블라디미르 보로닌의 기업들을 경영하면서 재산을 불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일에 싸인 실세’에 불과했던 플라호트니우치는 2010년에 몰도바 민주당(PDM)을 ‘돈으로 매수’하면서 정계에 공식 입문했다.
 
PDM의 자금줄이었던 그는 PDM 의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스스로 국회부의장을 자처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실현했다. 친서방 성향의 집권당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플라호트니우치는 단숨에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떠올랐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에밀리안 갈라이쿠 파운은 플라호트니우치를 잡초에 비유한다.
 
“그는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듯 보이는 잡초 같은 인물입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후에 그 잡초를 뒤늦게 베어내려 할 때쯤이면, 이미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려버려 제거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왜 난생 처음 시위를 벌였을까

‘세기의 횡령’ 사건이 터진 후 몰도바에는 극도의 정치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동안 정권이 세 차례나 바뀐 것이다. 2016년 초에 국회가 새로운 총리 임명 건을 놓고 논쟁을 벌일 당시에는 플라호트니우치도 총리 후보에 끼였다. 그러나 니콜라에 티모프티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거부권을 행사했다. 친서방 성향의 AIE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러 세력이 승리할 것을 우려해 총리직 임명을 서둘렀다. 1월 20일,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국회는 단 6분 47초 만에 민주당 출신의 파벨 필립을 총리로 임명했다. 파벨 필립 신임총리 역시 플라호트니우치의 측근이었다. 이를 계기로 집권 연정당 AIE에 소속돼 있던 정당들 일부가 떠나갔다.
 
신임총리 임명 건이 날치기로 통과됐다는 소식에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다. 농업에 종사하는 52세의 바실 니아가는 ‘모욕감을 느낀’ 나머지 첫차를 타고 수도 키시네프로 향했다. ‘라샤이에티(Răscăiesi)’라는 작은 마을에서 고추 재배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평생 시위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시민들 수천 명이 어둠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 건물 앞에 운집해 파벨 필립 총리의 취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루마니아와의 통일과 EU와의 관계 개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니아가는 시위에 참여한 다른 시민들의 면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3)
 
“주위를 둘러보니 저와는 전혀 다른 의견과 가치관을 가진 친러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 정부, 말로만 친서방을 주장하는 정부를 끌어내리겠다는 하나의 목적으로 대동단결했습니다.” 니아가는 말했다. 분노에 찬 시민들과 시위를 진압하러 온 경찰들 사이에서, 3명의 야권 대표는 국회로 진입하는 계단 위에 서서 양측의 중재에 나섰다. 친러 성향인 이고르 도돈(사회당(PSRM) 대표)과 레나토 우사티(과거가 잘 알려지지 않은 백만장자), 그리고 친서방 성향인 안드레이 나스타스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 것을 촉구했다. 
 
3월 4일, 헌법재판소는 신임총리 임명 건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차기 대통령은 간접선거가 아닌 보통선거 방식으로 선출돼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 야당 대표들 간에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야권 단일후보를 내기 위해 회의를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야권에는 우파, 좌파, 친서방 세력, 친러 세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단일 후보는 유권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도돈은 야권 단일화의 실패를 이렇게 해명하고, 10월 30일 선거에 단독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도돈 후보는 자신이 “친러도 아니고, 친서방도 아니고, 친몰도바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DA와의 돈독한 관계를 내세우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함께 찍은 사진을 선거 벽보로 사용한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야권의 다른 후보 나스타스, 그리고 ‘행동과 연대당’ 대표 마이아 산두는 친미를 표방했던 플라호트니우치와 관련 있어 보일 것을 우려해 친서방 성향임을 밝히기를 주저하고 있다. 최근에는 플라호트니우치가 빅토리아 눌런드 미 국무부 유럽 및 유라시아 담당 차관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됐다. 유럽출신의 한 외교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왜, 미국인들은 몰도바 국민들이 가장 혐오하는 인물과 사진을 찍었을까요?”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유럽 안보 관련 연구소의 한 국제 정책 전문가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현재 플라호트니우치는 사실상 몰도바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현재 몰도바의 내부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플라호트니우치는 몰도바의 안정을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2011년 키시네프를 방문한 미국의 조 바이든 부통령은 몰도바를 유럽의 ‘성공사례’라며 치켜세웠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오늘날 EU의 이미지를 오히려 깎아내리고 있다. 사실 EU는 그동안 유라시아 지역에서 연합 협정을 체결하고 비자를 자유화하면서 EU의 영향력을 키우고 동맹 관계를 강화시키기에 급급해, 몰도바의 정계 내막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말부터 상황은 삐걱대기 시작했다. AIE의 소속 정당들 간에 체결된 비밀 협정 내용이 공개됐는데, 국가의 사법기간, 정치기관, 금융기관을 나눠 갖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러한 불법 협정은 시민들의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켰다. 2012년 12월, 몰도바의 검찰 총장이 당시 자신을 포함한 고위관료들이 벌이던 마녀사냥 도중에 발생된 의문사를 은폐하려 하자, 블라디미르 필라트 총리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과거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플라호트니우치를 정계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필라트 총리 역시 ‘세기의 횡령’에 연루된 은행들 중 하나인 세이빙스뱅크의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지난 6월 그는 6년 형을 선고받았다. 한 서방국가의 외교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라트 전 총리마저 정계에서 축출되자, 이것이 과두정치 싸움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러시아 탱크의 귀환’을 들먹이며 
유권자 협박

현 시점에서 EU 사무국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이번 횡령 스캔들이 친서방 정부의 행보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EU와의 파트너십을 마치 법치국가로 가는 지름길인양 내세우던 친서방 정부는 현재 답보상태에 빠졌고, 우크라이나에서와 같은 내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EU의 기관들은 ‘세기의 횡령’이 터진 후에야 뒤늦게 몰도바 자금 조달을 중단했다. 몰도바는 국가 예산의 1/4을 외부 지원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자금줄이 일찌감치 끊겼더라면 지금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4)
 
개발 및 사회적 활동 연구소의 정치경제 연구원인 발렌틴 로조바누가 설명한다. “우리는 EU가 몰도바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돈으로 정계를 접수해버린 사업가 출신의 정치인들을 제어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이 아닌 외부의 자금 조달자의 비위를 맞추고 또 그들로부터 아무런 제재나 비난도 받지 않게 되면, 민주주의 시스템 전체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몰도바의 지정학적 위치는 정치적 싸움에서 언제나 중심이 되는 주제다. “몰도바의 정치인들은 실질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국가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을 들먹이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키시네프에 위치한 공공정책연구소의 애널리스트 아르카디 바르바로시는 설명한다. 일례로, 201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AIE는 상대 진영이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탱크가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협박으로 유권자들을 선동했다.(5)
이번 ‘세기의 횡령’ 사건은 몰도바 시민들에게 언어와 민족을 넘어서는 시민정신에 대해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은 안타깝게도 정치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언론마저 친러 채널과 친서방 채널로 양분돼 있는 탓이다. 어떠한 정치인도 현재의 과두정치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사회학자이자 Platzforma.md의 공동 설립자 페트루 네구라는 말한다.
 
“문제는 사실 플라호트니우치가 아닙니다. 국가가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이 초래된 것입니다. 언젠가 과두정치가 사라진다 해도 곧 또 다른 과두정치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고, 결국 몰도바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글·줄리아 뵈르크 Julia Beurq 
기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장 말링, ‘트란스니스트리아, 동서경쟁의 새 불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3월호 
(2) Cf. 마테이 카자쿠 & 니콜라스 트리퐁, 몰도바 공화국, 진정한 국가로 거듭나려면, Non Lieu, 파리, 2010
(3) 기-피에르 쇼메트, ‘동구권 쪽으로 다시 기울어지는 몰도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2년 1월호
(4) 외부 지원금이 몰도바 국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3년에는 13.3%, 2014년에는 27%였다. Cf. 발렌틴 로고자누, <Potentialul asistentei externe : Mai poate mecanismul de conditionare promova reformele în Republica Moldova?>, IDIS Viitorul, n°4, 키시네프, 2016년 6월
(5) Cf. 뱅상 앙리, <몰도바, 인질이 된 국민들>, 국제전략관계연구소(IRIS) 보고서, 파리, 2016년 4월


박스기사

10억 달러 증발사건의 배후 

‘10억 달러 증발 사건’에는 몰도바의 3개 주요 은행이 연루돼 있다. 바로 국영 세이빙스뱅크, 소셜뱅크, 유니뱅크다. 이들 은행은 연금자산을 포함해 몰도바 은행 총 자산의 약 1/3을 보유하고 있다. 2015년 5월, 시위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국회의장은 크롤 보고서를 공개했다. 크롤 보고서는 몰도바국립은행(BNM)이 미국의 감사회사 크롤 사에 수사를 의뢰해 작성된 기밀 보고서다. 
횡령 사건의 정황을 상세히 분석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일란 쇼어라는 젊은 백만장자가 이들 은행의 지분을 일부 확보한 것이 본 사건의 발단이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 직전인 2014년 11월 25일과 26일에는, 135억 레우(7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이 몰도바 회사들과 영국과 홍콩에 등록된 회사들을 통해, 라트비아의 여러 계좌로 흘러들어갔음이 확인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이 은행들은 파산 위기에 처했고 결국 몰도바국립은행의 산하로 모두 편입됐다. 몰도바 정부는 국가자산의 횡령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해당 금액의 국고 회수를 약속했다. 지난 6월에는 검찰이 일란 쇼어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현재 그는 가택연금 상태다. 이 와중에도 국민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납세의 의무를 다하면서 비어버린 국고를 묵묵히 채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