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사업가가 된 모로코 국왕의 부도덕

2016-09-30     피에르 돔

10월 7일 열리는 총선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모로코 왕국에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다. 야당은 2011년 채택된 새 헌법 덕분에 얻은 보잘 것 없는 권리들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고, 언론은 권력에 순종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하메드 6세 국왕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다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우리가 투표를 하길 바라는가?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정치인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다!” 후신 자말, 드리스 카두르, 압두 칼릴에게 정치인들은 “오직 돈을 챙기기 위해” 선거에 나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 세 사람이 돌아오는 10월 총선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친구지간인 이 30대 남성 세 명은 카사블랑카에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쿠리브가에서 태어났다.(1) 인광석 광산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단 하나의 고용주만 존재한다. 바로 2만 1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모로코 최대 기업이자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값비싼 비료를 생산하는 모로코 인광석 공사(OCP)다.(2)
“OCP에서 일하면 한 달에 1만 디르함(920유로)을 받고, 주거보조금, 의료보조금까지 받을 수 있다”며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후신 자말이 설명했다. 예전에 OCP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 아들의 주장에 의하면 - 인광석 가루 흡입으로 발병한 암 때문에 오래 전 사망했다. 
용접을 배운 그는 5년 전부터 실직 상태인데, 정부 보조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수입원은 한 달에 며칠, 농사일이나 공사장 일을 통해 받는 시간당 1유로 남짓한 임금이 전부다. “비참한 상황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 지역에는 모든 마을 입구마다 빈민촌이 들어서있고, 차도 옆으로는 허름한 차림의 아이들이 엄청난 양의 물 양동이를 나르는 당나귀를 몰고 지나간다.

왕국의 권력에 손대지 못하는 헌법

이들 세 청년은 모로코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로코 전체 인구 3천4백만 명 중 선거권을 가진 18세 이상 인구는 2천2백만이다. 하지만 이들 중 선거인명부에 등록된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내무부에 의하면 1천3백만 명에 불과하다. 최근 있었던 2011년 선거에서는 잠재적 유권자의 1/4에 불과한 6백만 명이 투표소로 향했다. 
모로코 사람들은 정의발전당(PJD)의 압델리라 벤키란 총리에게는 별반 비중을 두지 않는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 이슬람주의 정당은 2011년 27%의 득표율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중산층을 겨냥한 자유로운 경제공약(불평등 해소, 부패 척결)과 보수적인 사회윤리(무슬림 가치 강화, 신앙의 자유 금지, 동성애 비난) 공약을 내세웠었다. 젊은 실업자 살라 벤진은 “벤키란은 좋은 사람이지만 아무 힘이 없다”고 말한다. 라바트 남쪽 로마니 근처 마을에서 친구들과 한 판에 2디르함(18상팀)짜리 당구를 치며 무료함을 달래는 그는 덧붙였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건 왕이다. 경찰, 사법권,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한다.”
이 젊은이의 설명은 옳다. 반짝 주목 받았던 모로코 ‘아랍의 봄’의 여세에 2011년 7월 모하메드 6세 국왕의 제안으로 97.5%의 찬성을 받아 채택된 새로운 헌법은 군주의 절대권력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단지 서방국가의 대사관들만이, 특히 프랑스 대사관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라 칭찬했을 뿐이다. 현 국왕은 1999년 사망한 그의 아버지 하산 2세처럼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원한다면 의회를 해산시킬 수도 있다. 국왕은 또한 법관과 주요 공공기관장들을 임명한다. 라바트 대학의 정치학 교수 모하메드 마다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헌법 개정은 2월 20일의 운동(3)에서 이미 이뤄졌던 약속이다. 베르베르어를 공용어로 인정했고 양성평등을 선언했다. 또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의 이슬람 정체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헌법은 군주의 핵심권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국왕은 여전히 모로코의 모든 시스템, 입법, 행정, 사법 시스템의 핵심으로 남아있다.”
여기에 재정 시스템을 추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왕가가 지분 60%를 소유한 국립투자회사(SNI)를 통해 모하메드 6세는 모로코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주체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매출액이 모로코 국내총생산(GDP)의 3.5%를 차지하는(2015년 기준) SNI는 모로코의 거의 모든 경제 주요분야 - 은행, 보험, 통신, 자동차 유통(푸조와 시트로엥 독점 수입원 Sopriam), 대형 유통체인, 부동산, 관광, 그린 에너지 등 - 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국왕은 개인적으로도 모로코 최대의 농지 소유주이기도 하다. 모로코의 권력을 상세히 분석한 책, <가면 뒤의 모하메드 6세>(Nouveau Monde, 2014)를 펴낸 기자이자 대학교수 오마르 브루크시는 이렇게 말했다. “국왕이 사업가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가 기업가이면서도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 등 여러 지위를 겸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경쟁이 불가능하다.”
SNI의 자회사들은 SNI의 주요 주주인 국왕이 임명한 고위 공무원들이 발주하는 공공입찰을 정기적으로 따내고 있다. 과연 모로코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특히 2015년 잡지 <포브스>가 개인재산이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 추산한 그들의 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국왕과 관한 주제를 묻는 것은 금기사항이므로 이 질문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어떤 여론조사 기관이나 신문사에서도 이런 조사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법으로 명백하게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헌법(46조)에 의하면 “왕의 인격은 불가침이며, 왕을 존경하는 것은 의무다.”
가장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정치 활동가들조차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하산 2세 시절 수감생활을 했던 한 나이 지긋한 극좌파 활동가는 “모로코에서 하늘에 있는 신을 건드린다면 진압부대가 관대함을 보일 수 있겠지만, 땅에 있는 신을 건드렸을 때는 그렇지 않다”며 비꼬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제발 부탁이다, 내 이름은 밝히지 말아 달라!” 정권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정당인 통합사회당(PSU)의 나빌라 무니브 대표는 말한다.
“우리는 왕정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관을 민주화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왕이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제, 즉 권력이 분리된 정치 시스템에 찬성한다.”
가장 용감한 이들은 아마도 ‘자마 알아들 왈 이흐산(정의 및 자선)’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이 조직은 오래된 이슬람주의 조직으로 하산 2세 시절 억압받았으나 모하메드 6세에 의해 가까스로 용인되고 있는 조직이다. 1973년, 일명 지도자 야신이라 불리는 중등교육 장학관 압데살람 야신이 만든 이 조직은 가장 빈곤한 이들을 위하는 동시에, 왕국을 근본적으로 부인한다. 조직의 창시자는 오랜 기간의 수감생활과 거주지 지정 조치 후 2012년 사망했다.
그의 딸 나디아 야신은 2011년 성(性)적 음해공작(모로코 정권이 적수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검증된 방법)의 대상이 됐고, “왕국보다 공화국을 선호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마’라고 부르는 이 조직은 살레(라바트 자매도시)에 본부를 두고 있으나 모로코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공집회를 열 수 없다. 자마의 회원인 모하메드 함다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이슬람의 큰 원칙들에 부합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변화를 원한다. 자선과 관련해서, 전국에 있는 우리 활동가들이 정부가 종종 손을 놓고 있는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정의와 관련해서 우리는 국가재산의 공평한 재분배를 요구한다. 현재 모로코에서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1천2백만 명에 달하는 반면,(4) 국왕에게 부가 편중돼 있다. 그가 부유하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무슬림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왕의 부가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된 것인지, 또한 그 부가 가난한 이들에게 올바르게 재분배됐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2011년과 2016년 사이 국왕의 재산은 큰 폭으로 증가했고, 모로코의 빈곤 또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관용주의의 끝”, 고문과 불법 체포

후신 자말과 그의 친구들 역시 너무도 빈곤한 국민들과 대조되는 왕족의 이러한 부가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안다. 2011년 이들은 쿠리브가에서 열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카사블랑카나 라바트의 시위대처럼 시스템을 바꾸려던 게 아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했을 뿐이다.” 시위 참가자 중 일부는 OCP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국왕이 정치적 권력을 포기하고 그의 재산을 모로코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병원을 짓고, 의사 급여를 지급하는 데 쓸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다면 이들은 참여할 수 있을까? 질겁한 표정으로 압두 칼릴이 소리쳤다. “그건 공상과학영화다! 그런 시위는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그런 시위가 열린다고 해도 시위에 참가하는 즉시 체포돼서 감옥으로 가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들의 공포에는 이유가 있다. 하산 2세는 자신에게 반대했던 이들을 무조건 고문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1999년, 매우 권위적이었던 하산 2세 국왕이 죽자 희망이 피어났으나, 이내 사라져버렸다. 라바트 근교 테마라 지역의 국토감찰국(DGST) 내에서는 고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CIA는 테러 용의자들, 그리고 실상 모로코 정권에 거슬리는 자국민들에게도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5)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집계에 의하면, 2010~2014년 총 173건의 고문이 발생했다.(6) 고문피해자 중 한 명인 무에타이 전 세계챔피언 자카리아 뭄니는 압델라티프 하무치 국토감찰국장을 자신을 고문하는 데 직접 참여한 혐의로 프랑스 사법당국에 고발하며 프랑스와 모로코 간 외교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7) 
몇 해 동안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어졌으나, 곧 개인의 자유는 제한됐다. 2003년 5월, 45명이 사망하고(이중 12명은 자살테러범) 1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카사블랑카 테러 다음날 국왕은 “관용주의의 끝”을 알렸다. 시위가 진압됐고 시위 참가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2011년 봄, 시위의 규모가 커지자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압박의 수위를 낮췄다. 모로코 인권협회(AMDH) 대표는 그 때 상황에 대해 “그러나, 정권은 2월 20일의 운동이 정체 조짐을 보이자 그동안 용납했던 자유를 거둬들였다”고 설명했다. 
AMDH는 용기 있는 많은 회원들 덕택에, 모로코 정부가 시민들에게 자행하는 권력 남용을 고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다. “2015년에만 251건의 불법체포가 집계됐다. 이는 대부분 평화적인 시위에서 행해진 것들이다.”(8) 그러나 최근 몇 달간 AMDH도 활동이 현저히 줄었다. 세미나, 회담, 학회 등 모든 것이 금지됐다. “우리가 중요한 행사 때문에 호텔의 홀을 예약하면 당국에서 호텔 사장에게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하라고 요구한다.”

‘자애로운 국왕폐하’
무슬림이어야 하는 모로코인들

 후신 자말과 그의 친구들을 비롯해 모로코의 여러 곳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체제나 ‘절대 권력’인 왕에 대항해 결집하지 않는 이유가 단지 억압에 대한 위험 때문만은 아니다. “모하메드 6세는 아주 정교한 소통의 기술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그 기술은 효과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국왕은 꾸밈없는 사람이며 국민들과 친근하다고 믿는다”고 오마르 브루크시 교수가 설명한다.
국왕의 선전도구들 중 ‘인류개발국가계획(INDH)’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하메드 6세가 2005년 시작한 INDH는 10년 예산이 10억 유로로, 수천 가지의 소규모 프로젝트(협회 건물, 청소년 센터, 보건소, 아르간 오일 생산 여성협동조합 등)에 자금을 조달한다. INDH의 대외적 목표인 극빈곤 퇴치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이뤄진 바가 없다. 하지만 INDH 덕분에 ‘국왕 폐하’는 원하는 만큼, 빈곤층을 돕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게다가, 국왕에게 아주 호의적인 언론 매체들이 있으니 말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반대파 인사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부의 요직과 그에 따른 부차적인 수익을 받아들이고 나서 갑자기 우호적으로 돌변했는지,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한 일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국왕은 모로코 무슬림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가 아미르 알무미닌(신자들의 지도자)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6년 8월 20일, 대국민 담화문에서도 자신이 직접 언급했듯이, 성전 과격주의와는 거리가 먼 ‘진실한 이슬람’을 보증하는 수장 말이다. “모로코의 권력은 늘 종교에 기반해 자신의 적법성을 세워왔다. 왕에게 항의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 종교에 항의하는 것이 된다”고 카사블랑카 대학교의 물림 엘아루시 철학 교수가 설명한다.
그러나 관광객들과 서방국가 정부들에 대해 내보이는 ‘관용적인 이슬람’의 ‘개방적’인 겉모습 뒤로, 모로코에서는 어떤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로코 동부의 베니 멜랄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표현한 것처럼 “당신네 기독교인들, 당신들은 기독교인이 될 권리가 있다. 거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기가 무슬림이 아니라고 하는 모로코 사람? 안 된다! 동의할 수 없다!” 인터뷰에 응한 모든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매번 답변은 똑같았다.

시민이 되려면, 마음 속 ‘아버지’를 죽여야

‘무슬림이 돼야 한다’는 이 ‘의무’는 특히 라마단 기간에 더욱 두드러진다. 몇몇 관광지를 제외한 실제 모로코 내에서 공개적으로 단식 계율을 어기는 것은 강력히 금지된다. 놀랐다는 듯 후신 자말은 이렇게 외쳤다. “당연하다! 그건 존중의 문제다! 만약 내 친형제가 라마단을 지키지 않는다면 난 그를 때려주고 평생 다시는 보지 않을 거다!” 2009년 ‘단식 거부’를 선언한 10여 명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들이 모하메디아(라바트와 카사블랑카 사이에 위치한 해변 도시)에서 라마단 기간에 정오의 공개 피크닉에 사람들을 초대하며 도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즉시 체포됐을 뿐더러 그들의 행위는 국민들의 반감만 불러일으켰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의 수가 몇 안 되는 참가자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극좌파 진영에서도 이와 관련한 문제에서는 아예 손을 뗐다.
“10년 전 라마단 기간에 시위가 있었는데, 당시 나는 음수대 앞에 멈춰 서서 물을 몇 모금 마셨다”고 투리아 타나니 PSU 베니 멜랄 지부장이 회상했다. “지금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린치를 당할 것이다.” PSU의 내부 회의에서도 라마단 기간에는 아무도 물병을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회의장 밖으로 나오면 물을 마시기 위해서 숨는다”며 한 당원이 난처한 듯 말했다.
그러나 모로코가 사실상 이슬람 정체성을 인정했다고 해서 몇몇 극좌파 정당이,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인 자마 알아들 왈 이흐산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손을 내밀 준비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2011년 봄 자마 역시 2월 20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12월 돌연 철수해 이 운동이 쇠퇴하는 시발점이 됐다. “그 사람들이랑 같이 일한다고? 절대 그럴 수 없다! 난 무신론자다!”라고 한 나이든 극좌파 당원이 외쳤다. 2014년 4월, 좌파 경제학자 푸아드 압델뭄니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새로이 친목을 도모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역사학자이자 지식인인 마아티 몬지브는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를 통해서 이러한 결합만이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저항은 아직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카사블랑카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일하는 38세 유세프 엘푸투히는 2011년 봄의 운동에 매우 열심히 참여했다. 그 한계를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세프 엘투히는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의 실패 속에는 우리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가부장적 관계가 있었다. 왕과 국민, 부모와 자식, 직장 상사와 부하, 그리고 가입한 노조나 정당 대표와의 관계에까지 말이다. 우리는 내면 깊이 그들을 존경해야한다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권위를 비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만일 모로코 사람들이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시민의 지위를 얻길 원한다면 상징적으로 그들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화신들을 죽여야만 할 것이다.”
현재 그는 폭력, 여성, 권위 등 모로코 사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주제에 대한 거리연극에 참여 중이다. 

왕을 부를 수 없어, 정부를 향해 외친다

2011년 봄의 소요가 있은 지 5년 후, “저항운동은 완전히 그 불씨가 꺼졌다”고 투리아 타나니는 주장했다. 베니 멜랄에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거리로 나온 때는 2016년 3월, 동성애 커플에 대한 공격 사건이 있은 후였다. 아이트 하이시 마을 주민 10여 명이 동성애 커플에 집에 침입해 동성애 커플을 피를 볼 때까지 폭행했고 일부는 그 과정을 촬영해 온라인에 공개했다. 당시 유일하게 피해자들을 지지했던 PSU의 당원은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될 때 마을 주민 모두가 가해자들을 위해 시위를 벌였다”고 설명했다.(9)
“동성애자들은 죽여 버려야 한다!” 베니 멜랄의 한 호텔 프론트에서 일하는 한 직원에게 당시 사건을 언급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분노했다. 대학생인 이 젊은 직원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2011년 봄의 시위에 참여했었다. “좌파 정당 내에서도 동성애자들을 처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투리아 타나니가 씁쓸하게 털어놓았다. 
물림 엘아루시 교수는 말한다. “2월 20일의 운동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소셜 네트워크상에서 좀 더 비밀스럽게 문화적인 움직임으로 잔존하고 있다. 두려움의 벽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할 것이다.”
라바트와 카사블랑카에서는(지방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지만) 실제로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시위들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시위에 모이는 사람들은 주로 고학력 실업자들,(10) 실습교사들, 의사들, 퇴직자들이다. 이 시위들은 별 영향력도 없어 보이지만, 이들은 정부만을 겨냥하고 있다. “벤키란은 물러나라!”고 시위 참가자들은 외친다. 그러나 총리의 실제권력이란 어떤 것인가? “총리는 아무런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시위 중 만난 조흐라 알우리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환경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3년째 공무원 채용을 기다리고 있다. “왕의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부를 향해 소리치는 것이다.” 이 젊은 여성도 그녀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 2월 20일의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끝났다. 만일 나에게 일자리만 준다면, 나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입을 다물 것이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 처리했으며, 출신 마을 이름도 모두 바꿨음. 취재팀이 방문하는 곳마다 카이드(내무부 대표)가 취재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프랑스 기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심문했음. 
(2) US Geological Survey, <Mineral commodity summaries 2016>, Reston (Virginie), 2016년 1월.
(3) 튀니지와 이집트의 봉기 이후, 모로코에서의 첫 시위는 2011년 2월 20일에 발생했다.
(4) UN식량농업기구(FAO, 2015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360만 명에 ‘불과’하며 전체 인구 중 11%에 해당한다. 알제리에서 이들의 비율은 8%, 튀니지는 4.3%이다. UN개발계획(UNDP)의 2015년 인간개발지수 보고서에는 모로코가 전체 188개국 가운데 126위, 튀니지가 96위, 알제리는 83위를 차지하고 있다. 
(5) Cf. Open Society Foundations 보고서, <Globalizing torture. CIA secret detention and extraordinary rendition>, New York, 2013 (온라인 열람 가능).
(6) Amnesty International, <Shadow of impunity. Torture in Morocco and Western Sahara>, 런던, 2015.
(7) Florence Beaugé, '모로코 감옥이라는 지옥, 그곳의 자카리아 뭄니Zakaria Moumni dans l’enfer des geôles marocain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12.14, '프랑스-모로코 관계에 불어 닥친 한파Coups de froid dans les relations franco-marocain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2.25.
(8) 다음 기사 참조. ‘반군과 다시 손잡는 모로코 청년들Les jeunes du Rif renouent avec la révol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10월호.
(9) 가해자들은 징역 2개월에 집행 유예를 받았고, 피해자들은 징역 4개월에 확정형을 받았다.
(10) 모로코 기획위원회에 따르면 2016년 2분기 실업인구는 백만 명(경제활동 인구 중 8.6%)이다. 대학 졸업자 중 약 1/4은 실업자다.

 

박스기사

“취재를 위한 조사? 어림도 없다”


“국왕 폐하께서 신투자개혁계획 발표식을 주재하셨다”, “국왕 폐하께서 총 투자액이 32억 디르함에 달하는 라바트 우회 고속도로 개통식을 거행 하신다”, “국왕 폐하께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센터 개막식에 참석하셨다.” 모로코 주요 신문들의 1면을 훑어보면 매일 “국왕 폐하(아랍어로는 잘라라투 알말리크)”와 국가 발전을 위한 국왕의 활동,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국왕의 자비로움을 칭송하는 이야기들뿐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모로코의 문맹률은 30%), TV 채널들에서도 군주와 군주의 빛나는 업적을 찬양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비판적인 의견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혹시라도 권력에 방해가 될 만한 취재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로코 언론은 마그레브 지역에서 가장 비굴한 언론처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10년 빚투성이였던 주간지 <르주르날>의 폐간과 같은 해 주간지 <텔켈>의 복종(그리고 아흐메드 벤셰므시 텔켈 대표의 도미) 이후 모로코 미디어의 풍경은 다시금 완벽하게 순종적으로 변했다.
<르주르날>의 편집장을 지냈던 오마르 브루크시는 AFP에서 몇 년간 일한 뒤, 정부의 비난에 시달려 결국 다른 동료들처럼 백기를 들고 말았다. 브루크시가 그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1999년 하산 2세 국왕의 사망 이후 2010년까지 모로코 언론은 10년 간 아주 흥미로운 시기를 보냈다. 우리 신문에서는 다소 정치적인 취재 기사도 실을 수 있었고, 텔켈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닥치는 대로 다뤘다. 하지만 이 두 신문은 많은 소송에서 졌고 광고주들도 다 떠나갔다.”
자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모하메드 마다니 라바트 대학 교수는 한탄하며 말했다. “모로코에서는 독립적인 추적 보도는 불가능해졌다. 집권자 즉 왕이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자신에 대한 취재를 거부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기자라는 직업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중간 책임자들은 언론에 실린 자신의 발언이 혹시나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에 떤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용기의 부족은 아주 슬픈 일이 됐다.”
이제 마지막 남은 신념 있는 기자들은 Lakom2.com, Alaoual.com, Ledesk.ma, Badil.info 같은 온라인 미디어를 은신처로 삼는다. 하지만 광고주 설득이 무척 어려워, 몇 안 되는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도 힘들고, 사법당국은 악착같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2013년, Lakome.com을 만든 알리 아누즐라가 5주간 수감된 일이 있었다. 사이트에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로 연결되는 링크를 올려놨는데, 이 스페인 일간지의 페이지 역시 기사 참조용으로 올라온 테러리스트의 영상으로 연결된다는 이유였다.
사실 한 달 전 아누즐라는 모하메드 6세의 심기를 아주 많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 스페인 소아성애자가 ‘왕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것을 밝혀내, 모로코 내에서 아주 강한 불만의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다. “Lakome.com이 금지된 이후 Lakome2.com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자유롭게 하지는 않고 자체검열을 거치고 있다. 사이트의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더욱이 그에 대한 재판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다모클레스의 검과 같은 상황이다.”
다른 일곱 명의 기자들 역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중에는 마아티 몬지브도 포함돼 있는데 그는 아랍어, 불어, 영어가 능숙해 외국의 대학교에 자주 초대되는 지식인이다. 이들의 혐의는 모두 같다. “국가 내부안보 침해”라는 혐의다. 그들의 죄라면? 추적 보도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들(인터넷, 스마트폰 등)에 대한 교육을 기획하기 위해 외국 비정부기구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최대 10년의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
여론에 이들의 평판을 더럽히기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이 동원된다. 마아티 몬지브의 절친한 동료인 히샴 만수리는 “자기 집을 매춘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2015년 3월의 어느 아침, 10여 명의 경찰관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한 여성과 함께 있던 그를 발견했다. 법원에서는 즉각  그에게 10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6개월 전에는 두 명의 건장한 남성이 길 한복판에서 그를 공격해 그를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