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속에서 피어난 오로라, 영화 <전함 포템킨>
2016-09-30 리오넬 리샤르
예술가들은 스스로 비정치적 존재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단의 역사가 혁명이나 독재처럼 위기 상황에 빠질 때가 아니라도, 정치는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착각임을 일깨워 주는 법을 알고 있다. 희망을 잃어버린 상황은 새로운 전망과 마찬가지로 창작을 시작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며, 창작의 구체적인 형태를 찾을 수 있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1925년 영화사 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손꼽히는 <전함 포템킨>으로 거장의 한 수를 선보였다. 1917년 10월 혁명의 최종 리허설격인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전함 선원의 반란을 다룬 이 실험적 걸작은, 민중을 역사의 주역으로 승격시켰다. 소비에트정부는 실패로 돌아간 1905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년 전 주목할 만한 영화 <파업>을 연출한 젊은 러시아 영화감독 세르게이 M. 예이젠시테인에게 작품을 의뢰한다. 예이젠시테인은 4개월 안에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마쳐야 했다. 그는 1905년 6월 27일 오데사 항구 근처 흑해에 있던 전함에서 일어난 선원의 반란이라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에 역량을 쏟기로 결정한다.
1920~30년대 서방세계 최고의 영화평론가인 독일의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프랑스의 레옹 무시낙과 조지 샤랑솔과 조지 알트만은 이 영화에서 예술적 천재성을 발견했다. 알트만은 이 영화에 “소련 영화의 진정한 특색”, 다시 말해 “집단과 공동체와 대중의 운동이 지닌 강력한 표현”이 담겨있다고 평가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전함 포템킨>은 당시 통치자들의 반소비에트주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거나, 상영이 금지되거나, 편집된 버전만 상영이 가능했다.
1925년 12월 21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최초 개봉돼 호평을 받은 <전함 포템킨>은 묘하게도 편집된 사본으로 곧 전 세계적으로도 성공을 거둔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에서 영화사학자 100여 명은 ‘전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영화’로 이 영화를 선정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런 명성이 영화가 오데사의 혁명적인 날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1905년,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든 것은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됐다. 대중들은 조용히 도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고결한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한 달 전, 두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면서부터 연대의식이 발로한 파업이 여러 공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파업노동자들은 ‘친애하는 아버지’가 그들의 생존조건을 고려하길 바라는 청원을 적은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자 행렬이 ‘겨울 궁전(현 에르미타주 미술관)’ 앞에 도달하자마자 러시아 황제근위대 소속 기병은 발포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1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죽고 2천 명 이상이 다쳤다.
모든 집회를 유혈진압하라고 명령한 차르와 측근들은 그들이 기대하던 바와 정반대되는 결과를 접하게 됐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은 러시아 전역에 있는 공장에서 파업이, 농촌에서 폭동이, 군에서 반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10월에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철도원이 파업에 들어갔다. 우체국과 다른 공공기관 공무원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독재체재의 변혁을 꿈꿨다. 그들의 목표는 시민권 부여, 정치범의 사면, 직접보통선거를 통한 제헌국회의 선출이었다. 경쟁을 뚫고 혁명을 주창하는 기구와 정당의 대표들은 헌법 수립을 요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궁지에 몰린 정부는 1905년 11월 말 결정적인 전투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파업위원회’ 또는 ‘노동자회의(소비에트)’의 대표자는 즉각 체포됐다. 업무 복귀를 거부하는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내쫓겼다.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파업의 물결은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12월 초 모스크바에서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투쟁연방위원회를 창설한 사회민주당의 두 계파인 멘셰비키(온건파)와 볼셰피키(급진파)의 지원을 받은 소비에트가 11월 21일 모스크바에 설립됐다. 12월 6일 총파업이 선포됐다. 곧바로 무장반란이 시작됐다. 노동자 8천 명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동네마다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정부는 전술을 바꾸지 않았다. 12월 8일 밤 사회민주당 연방위원회의 모든 구성원이 체포됐다. 소비에트를 지휘하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모스크바 수비대로는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근위연대가 투입됐다.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한 공세가 시작됐다. 무장을 한 노동자 무리는 9일간 저항하다가 12월 18일 마침내 무너졌다. 1905년은 이렇게 체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정부는 보복의 칼을 휘둘렀다.
1917년 10월 혁명은 1905년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노동자 운동은 무력 봉기와 대규모 파업, 소비에트 구성을 연계하는 방법을 배웠다. 지역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급증한 소비에트가 쌓은 경험으로 혁명 전략을 보강했다.
세계적으로 1905년의 기억이 거의 희미하지만 예이젠시테인과 그의 작품 ‘전함 포템킨’의 공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영화는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독립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전체를 위한 일부’ 기법을 사용한 예이젠시테인은 “1905년 벌어진 역사적인 모든 사건을 감정적으로 구현”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1907년 10월 혁명의 승리를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다. 오데사 항구를 출발해 다시 당당하게 바다로 뻗어나가는 전함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상징적이다. 전함이 떠나고 정부의 탄압으로 5~6천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영화감독의 시선에 가장 중요하게 비친 것은 무너지지 않는 혁명 정신이었다.
유명 인물을 찬양하는 단편적인 일화로 점철된 영화가 소위 역사영화를 표방하며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제작되던 추세 속에서 예이젠시테인은 비록 실패로 끝났을 지라도, 민초들의 결집이 어떻게 역사의 동인이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 것이다.
글·리오넬 리샤르 Lionel Richard
역사학자, 피카르디 대학교 명예교수, 최신작으로 <하나의 종말론에서 다른 종말론으로, 독일의 지적인 삶 1900~1930년>, 아덴, 브뤼셀, 2016년(1976년 초판)이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