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대지진, 강요된 재앙

[Horizon]
제국주의 몰아낸 노예들의 국가… 건국 이후 침탈 계속
매판세력·정치폭력·재해 시달리다 끝내 최악의 참극

2010-02-04     크리스토프 와르그니

지진 참극을 빚은 아이티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3월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아이티를 돕기 위한 장·단기 계획이 마련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티 사회단체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어떻게 현실적 청사진을 내놓을 수 있을까?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약 15만 명이 사망했다. 1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은 건물이 없는 장소로 피신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아이티의 역사는 재해로 점철되어 있지만 단지 자연재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폭풍이 몰아치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한 지역 전체가 고립되기도 한다. 포르토프랭스의 페티옹빌 지역에서는 학교 한 곳이 무너져 50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고가 심각하게 올라간 것도 아닌데 무리하게 1천여 명의 승객을 태운 400석 규모의 페리가 침몰하기도 했다.(1) 또 태풍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같은 태풍으로 쿠바나 플로리다에서는 네다섯 명의 사망자가 생겼을 뿐이다.

2008년에는 네 차례나 태풍이 몰려와 이미 2004년에 참사를 겪은 바 있는 고나이브시를 덮쳤다. 그때마다 부패한 정부는 무능력과 무기력으로 일관했다. 아이티는 비정부기구(NGO)들의 도움으로 국민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고 펜티코스트파와 같은 교회들을 이용해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국가다. 세계에서 가장 인색한 정부라고 할 만하다. 아이티는 2003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별 순위 100개 국가 중 공공서비스 지출이 가장 적은 국가다. 공공 예산 긴축에 가장 성공한 국가인 셈이다! 현재 보도되고 있는 증언과 영상들은 정부의 무능력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진 전에도 이미 기능 마비

아이티는 오래전부터 심각한 환경파괴에 직면해 있다. 농촌 지역은 곳곳이 침식되어 마치 달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열대성 폭우가 내리면 급류를 이루며 마을 전체를 휩쓸어버린다. 무능력한 정부는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세기 동안 잠잠했던 지각변동이 시작되어 이미 극도로 무질서해진 도시에 종말론적 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포르토프랭스는 강진이 발생한 2010년 1월 12일 이전부터 더 이상 도시라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반세기 만에 인구가 10배로 증가했고 매일 200여 명의 이주민들이 새로 몰려들면서 얼기설기 엮은 집단거주지 같은 곳으로 변해버렸다. 무원칙이 곧 원칙이 되어버린 이 도시에 도시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무단거주지들이 늘어가고 있고 열악한 불법 건축자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위험한 협곡에 집을 짓기도 한다. 판잣집의 50%는 산비탈이나 해변의 쓰레기 매립지 위에 지어진다. 인구의 4분의 3이 극빈 상태로 살아가는 아이티에서 집에 돈을 쓸 여유는 없는 것이다.

이번 지진은 자연재해였을까? 절반만 그렇다. 그러면 아이티 사람들의 잘못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운명으로 받아들일 일인가? 그렇게 말하기는 쉽다. 저주를 받은 것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저주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해답을 찾으려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이티는 독립을 쟁취한 날부터 오랫동안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선, 1802~04년 전개된 아이티의 독립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은 이 프랑스혁명의 사생아를 초반에 제거하지 못한 걸 원통해했다. 아이티는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이번 지진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보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노예들의 반란에 힘입어 성립된 최초의 국가인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배자들을 내쫓는 데 성공했다. 아이티는 그 후 북부와 남부로 갈려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프랑스, 독립 조건 거액 뜯어가


프랑스는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대외무역에도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생도맹그는 1789년 당시 세계 설탕 소비량의 반을 생산하는 곳으로, 가장 부유한 식민지 중 하나였다. 19세기에 전세계의 절반을 식민지로 삼게 될 유럽 국가들에 이런 반란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노예주들의 나라인 미국 역시 바로 옆에 아이티라는 나라가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기억에서 아이티를 지우는 것이었다. 아이티는 한마디로 존재할 권리가 없는 국가였다.

식민주의자들의 의도는 아이티 엘리트들과의 합의로 관철되었다. 1825년 아이티 엘리트들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받는 대가로 프랑스에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2) 그 후 아이티 경제는 오랫동안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합의에 서명한 양국 모두 별 이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아이티는 구대륙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막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에 의해 고립되는 처지에 놓인다. 1915~34년 미국에 점령당한 20년 동안 아이티의 비참은 최고조에 달했다. 부적절한 경제모델이 도입되었고, 사회불안으로 수천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1957~86년 집권)의 장기 집권 30년 동안 3만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티에서 정치적 세력 다툼이 야기하는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쿠바 바로 곁에 있는 반공국가인 아이티에서 인권이 침해받고 해외 원조가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눈감아주었다. 아이티의 땅은 부식토로 되어 있어 자연재해로부터 더 큰 피해를 입는다. 뒤발리에 정권 시절 시작된 두뇌 유출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경우 경제발전의 가능성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아이티가 저주를 받은 거라면, 그 저주를 내린 서구 국가들은 목표 달성을 못한 셈이다. 운명 탓으로 돌려야 할까? 그러나 아이티를 침식하고 있는 건 부식토가 아니라 참담한 불평등과 지방 권력집단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비참한 현실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아이티를 병들게 한 장본인들이 불과 몇십 년 전부터 이 병든 나라를 치료해보려 애쓰고 있다. 치료 효과가 어땠는지 살펴보자. 시장개방으로 농촌이 황폐해지고 잘못된 구조개혁으로 공공지출이 삭감되었으며, 지배계급만이 대외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역겨운 엘리트들”(morally repugnant elite)이라고 비난한다.(3)

2009년에는 오랜만에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아이티 국민은 최저 일당 200구르드(약 3.5유로)(4)를 요구했다. 그런데 아이티는 인구 중 4분의 3이 하루 1.5유로 이하로 살아간다.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르네 프레발 대통령에게는 지나친 요구였다. 그 전해에 프레발 대통령은 쌀과 석유 가격 폭등을 방관하다가 굶주린 주민의 폭동에 맞서야 했으며 그가 야기한 오랜 정치적 위기로 인해 해외 원조가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2008년 총리로 임명된 미셸 피에르 루이는 농민층을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고 의욕 넘치는 정책으로 지식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몇몇 사회운동을 지지하기도 했다. 2010년 선거를 준비하던 프레발 대통령에게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3세기 동안 계속된 서방의 착취

현재 200만 명이 넘는 아이티인들이 세계식량계획(WFP)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해 20년 전부터 1인당 국민총생산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국제 원조가 국가 수입의 반을 차지할 정도다. 마약 판매 수입과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이 보내주는 돈을 합친 액수가 국가 예산의 3배에 달한다! 이들 수입마저 경제위기로 2009년부터 감소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수입원이 빈사상태에 빠진 아이티 경제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장클로드 뒤발리에 집권 시기에 들여온 차관 중 일부분은 현재 유럽의 은행 계좌에 예치되어 있다. 2년 전부터 아이티가 부채 탕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10억 달러 정도의 부채가 남아 있다.(5) 세계은행은 부채 상환 중지를 선언하고 “부채 전액 탕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은행이 얼마나 노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1월 12일 지진 발생 후 신속하게 대규모 인도적 원조가 이루어지는 한편, 신속하게 많은 수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유엔 아이티 안정화군(MINUSTHA)은 이미 2004년부터 아이티에 주둔 중이지만 권위가 상당히 실추된 상태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는 브라질이다. 안정화군의 임무는 아이티 정부의 국가권력을 다시 공고히 하는 것이다. 성과는 미미한 수준이다. 선거 실시, 조직폭력 감소, 경찰력 재편 같은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인권 인식은 여전히 낮은 편이며, 수형시설 내 환경도 개선되지 않았다. 사법체계는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번 지진으로 대통령궁을 비롯해 정부청사와 법원 등 많은 정부기관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애초부터 유명무실한 정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진을 틈타 4천 명의 죄수가 탈출해 이미 무정부 상태에 빠진 치안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아이티는 피고의 80%가 변호사도 재판장도 없이 판결을 받는 나라다!

경제봉쇄했던 미국의 파병

최신식 장비를 갖춘 1만3천 명의 미군 병력은 수적으로 안정화군에 맞먹는다. 미국의 지원은 모두에게 환영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즉시 대규모 지원체제를 동원해 빈사상태에 빠진 아이티 정부를 도와 인도적 지원을 펼쳤다. 그러나 현지 주둔군은 안정된 작전 수행을 위해 거만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행태는 아이티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번까지 포함해 지난 16년간 아이티에 대한 군사 개입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 세기 가깝게 계속되어온 군사 개입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1994년 아이티는 3년간의 경제봉쇄로 경제가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때 미군 병력 2만 명이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6) 정권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아이티에 상륙한다. 미군에 의해 라울 세드라는 신속하게 제거된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미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으로 축출됐던 아리스티드는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권력을 되찾는다. 미국의 군사 개입 목적 중 중요한  두 가지는 페티옹빌 거주지를 보호하고 아이티 정부의 기밀서류 일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5년 무력 개입의 권한이 안정화군에 이양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미군은 프랑스와 협력해 다시 아이티에 개입한다. 이번엔 독재로 선회한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몰아내고 내전을 예방한다는 구실이었다. 그 후 남미 국가들이 주축이 된 안정화군이 미군의 뒤를 잇는다. 2006년 프레발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서구 국가들이 내세운 제라르 라토르튀가 임시정부의 수반을 맡게 되지만 부패와 인기영합주의, 정파 간 복수극은 끊일 날이 없었다.

복구가 아닌 재건 필요

오바마 정부의 개입이 순수하게 인도적 지원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카리브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을 미국인에게’라고 주창한 먼로 독트린은 다른 서구 국가와의 관계에서보다 이 지역에서 더 철저히 관철되었다. 마이애미에서 불과 1천km 떨어져 있고 쿠바와 인접한 아이티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에는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아이티가 붕괴되면 엄청난 수의 난민이 미국으로 몰려들 게 뻔했다. 1994년 클린턴이 아이티에 개입한 것도 그런 우려에서였다. 클린턴에게 아이티는 손쉽게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혹시 오바마도 지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외부적 요인으로 부당한 처지에 놓인 이웃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인가?

현재 진행 중인 국제적 연대의 손길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인가? 그 속성상 변하기 쉬운 미디어에 그러한 지속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또한 현재까지 모인 돈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누가 활동의 주체를 맡을 것인가? 미국? 유엔? 혹은 이런 종류의 재해에 개입할 임무를 띤 새로운 국제기구? 철학자 레지 드브레가 제안했듯이,(7) 아이티는 ‘인류의 피후견인’ 자격을 얻을 수 없는 걸까? 아이티가 ‘실존적 잉여장소’(8)라는 위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프랑스와 미국이 투생 루베르튀르(아이티의 독립 영웅-역자)의 조국에 가했던 폭력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아이티를 고립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주민들이 비대해진 도시를 떠나 농촌에 다시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어떻게 하면 특정 계층이 아닌, 하층민과 우수한 해외 이민자를 포함한 전체 아이티 민중이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의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해적 집단에 가까운 정부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로 바꿀 것인가?

미국, 도미니카공화국, 캐나다, 프랑스의 차례로 아이티 난민이 몰려들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은 카리브 지역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유럽연합(EU)은 아이티에 투자를 가장 많이 하고 있다. 아이티 사회의 모든 층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 국가들이 추진하는 어떤 계획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지진으로 파괴된 국가를 복구하는 데만 집중한다면 같은 재앙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아이티의 도시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무너진 포르토프랭스와 그 인근 지역을 복구하는 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아이티를 재건할 것인가?

글•크리스토프 와르그니 Christophe Wargny
파리국립예술직업학교(Conservatoire national des arts et metiers) 언론학 교수, 역사학자, 아이티 전문가. 주요 저서로 <아이티는 없다: 1804~2004, 200년 동안의 고독>(Autrement·2008)과 <노예제도, 16세기에서 오늘날까지>(Autrement·2008)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1993년 ‘넵튠호’가 침몰했고, 2009년에는 수십 명의 보트피플이 목숨을 잃었다.
(2) 처음엔 5개월간 분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1838년 9천만 금화 프랑으로 지급액이 줄어든 후에도 1893년에 가서야 지급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빚을 진 아이티는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의 금융지배를 받게 된다.
(3) 1980년대 <뉴욕타임스>에 실린 말이다.
(4) 가정에 고용돼 일하는 상당수 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액이다. 현재 그들이 받는 최저 일당은 120구르드다.
(5) 대출금액 순서대로 채권국과 기관들을 나열해보면 미주개발은행(IBD), 국제통화기금(IMF), 베네수엘라, 대만, 세계은행 순이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의장으로 있는 IMF는 아이티에 향후 5년간 부채 상환을 면제해주겠다는 발표와 함께 제2의 마셜플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 계획)을 선전했다.
(6) 1990년 아이티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득표율 67.5%).
(7) <르몽드>, Paris, 2010년 1월 20일자.
(8) Rene Depestre, ‘오늘날의 아이티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4월호. 


 TV 채널 속, 라틴아메리카의 두 얼굴

 1월 12일, 아이티. 국제구호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처음 부상자들을 돌본 건 쿠바 의료진 344명이었다. 그들은 12년 전부터 ‘국제사회’에서 외면당한 아이티 주민을 지원해왔다.

1월 19일 밤 8시 35분, 문화공영 TV 채널인 <아르테>(프랑스·독일 두 나라가 공동 운영하는 공공채널)에서는 카를 제로 감독의 다큐멘터리(1)가 방영됐다. 광기 어린 표정으로 불쌍하게 병석에 누워 있는 피델 카스트로의 이미지가 화면을 채웠다. 카를 제로 감독은 작가 조에 발데스와 협력해 시나리오를 썼다. 조에 발데스는 그의 책 <소설 피델 카스트로>(갈리마르·파리·2009)가 출판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짜나 이름, 실제 벌어진 사건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픽션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부분만 취하면 된다. 나는 역사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다.”(2)

서가를 배경으로 찍은 화면 속에서 카를 제로는 카스트로의 입을 빌려 1인칭으로 말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친구, 코카인 중독자, 잉카인 얼굴을 한 저열한 아첨꾼”이고, 체 게바라는 “증오에 가득 찬, 피를 좋아하는 살인 병기”이며 “고집이 세고 대중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단 일을 저지른 후에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현 쿠바 대통령 라울 카스트로(카스트로의 동생)에 대해서는 “내 부모님은 그렇게 해서 라울을 낳았다. 그 녀석은 아직 완제품이 아니다. 사용법도 모른다. 바보 같은 녀석이다. (중략) 그러나 순수한 공산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아프리카에서 쿠바의 역할에 관해, 가령 앙골라에 대한 지원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화나게 한 일이라든지, 나미비아의 독립을 지원한 일에 대해 이 다큐멘터리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한다. “브레즈네프가 내게 컨테이너 여러 대분의 캐비아를 보내준 대가로 총알받이들을 제공했을 뿐이다.”

카를 제로가 스스로를 새로운 유머를 구사하는 도발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고 주장하는 마당에 이 영화를 그냥 2급 다큐멘터리로 여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영화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단지 정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같은 채널에서 2월 초, 밤 11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다른 시각을 담은 다큐멘터리(3)가 방영된다. 곤잘레스 아리혼 감독은 ‘라틴아메리카의 이 모든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나선다. 이 변화란 볼리비아·브라질·에콰도르·베네수엘라에 다시 불고 있는 희망의 바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목소리를 통해 이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이라는 타락하고 기만적인 신”에 의해 지배당해왔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2001년 1월,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현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선두에 선 모습이라든지, 카라카스에서 만난 한 베네수엘라 시민이 차베스에 대해 하는 말 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완전히 미쳤어요! 제 말을 오해하진 마세요. 애정을 담아서 하는 말이에요.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말해요.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겠어요?” 볼리비아의 고원에서는 에보 모랄레스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대통령 취임 이후 새로 배우게 된 지식을 전수해준다. 에콰도르에서는 라파엘 코레아가 제헌의회를 구성한다. 한 에콰도르인은 이 제헌의회 구성이 “에콰도르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가령 베네수엘라 사회는 분열되고 있다.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세스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볼리비아에서는 2007년 10월 ‘집단 이기심’이 광부들끼리의 충돌 사태로까지 치달았다(16명 사망).

콩 재배를 둘러싸고 시끄러운 브라질 산타렘의 주민들은 실망감에 싸여 있다. “정부는 왼손으로는 농민에게 콩고물을 주면서 오른손으로는 거대자본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

볼리비아 반대파의 본거지 산타크루스의 주지사 루벤 코스타는 정부와 권력을 장악한 인디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난뱅이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희망을 꺾지는 못한다. 모랄레스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리혼 감독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들의 넘칠 만큼 지나친 열정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1) <피델 카스트로 되기>, 감독 카를 제로 & 데이지 데라타, 조에 발데스 각색, Arte France, La Mondiale de productions & Troisieme oeil productions.
(2) <르쿠리에>, Monreal, 2009년 5월 9일자에 실린 글. 블라디미르 마르시아스가 2010년 1월 17일 <조에 발데스와 카를 제로의 직업적 동거>에서 인용. www.legrandsoir.info.
(3) <스스로를 재정복하는 라틴아메리카>, 곤잘레스 아리혼 감독, Dissidents/Arte France. 2월 5일 11시, ‘Grand Format’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