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공(民工)’, 중국경제 성장 둔화의 희생자들

2016-10-31     루 에스파르질리에르 & 테오 모네

그들의 부모는 ‘세계의 공장’을 움직이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부모가 그러했듯, 수백만 명씩 시골을 떠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중국 대도시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던 대도시의 꿈은 지금 국가경제 성장 둔화에 맞닥뜨렸다. 1980~1990년대에 태어난 민공 2세대를 광저우의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만났다.

일주일간의 고된 신발생산 작업으로 지쳐버린 27세의 장이 멍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이윈에 온 지는 이제 일 년이 됐다. 아내와 아들은 아직 광시성에 있다. 원래 소작농이었는데 돈을 벌러 여기 왔다.”  약 2억 8천만 명의 다른 중국인들처럼(1) 그 역시 고향 마을을 떠나 ‘민공(이주노동자, 직역하면 농민-노동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중국농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대도시에 왔다. 농민들의 이주는 1979년, 덩샤오핑이 세계경제에 대한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시기에 시작됐다. 건설노동자, 생산노동자, 청소부들은 40년 전부터 중국 성장을 이뤄내는 작은 손들이었다.  
공동숙소 건물, 작은 섬유공장, 없는 게 없는 노점들이 들어선 광저우 북쪽의 노동자 거주지역에서는 민공세대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노후한 건물 그늘 아래, 동네의 한 식료품점 테라스에 앉은 장이 계산을 해본다. 긴긴 여름날에는 더위를 견디기 힘든 제조공장에서 그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일한다. 법정 노동시간 44시간을 28시간이나 초과한(이주 노동자의 85% 이상이 법정 노동시간을 초과해 일한다)(2) 고된 노동시간을 감당해내면서도, 그 역시 중국에서 보편화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게으르다. 부모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게 일했고, 같은 시간에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해냈다.”

투쟁할 수단도, 용기도 갖춘 젊은 세대

대개의 경우 독자로 태어나 조부모의 손에 길러진 젊은 민공 세대는 중국 공산주의의 가장 힘든 시기를 겪은 부모 세대보다 까다로운 한편, 근면함은 떨어진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식료품점 근처의 한 작은 공원에는 하교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이 공원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30대의 다이를 만났다.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수척한 얼굴의 젊은 엄마, 다이는 더 많은 일을 원했다. “2006년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지금은 주문이 줄어서 하루에 8시간 밖에 일을 못한다.” 2015년 중국의 성장률은 6.9%로, 2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3) ‘세계의 공장’을 이루고 있는 광둥성(광저우 지방)의 공장들이 가장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바이윈의 민공들은 고용불안과 함께, 경제침체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받고 있다. 공식 급여인상(2008~2014년 연평균 10.7%)(4)으로도 메울 수 없는 수준이다.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죽을 지경이다!”라며 30세의 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광저우의 섬유공장에서 10년을 일한 그는 생산량에 비례해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에게 주문 감소가 야기하는 ‘도미노 효과’를 두려워했다. 그는 “많은 소규모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을 지켜봤다. 장도 그런 경우를 목격했다. “어느 날 우리 공장 옆에 있는 공장의 사장이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 역시 미수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사장은 물건을 팔고서 그 돈을 가지고 떠나버렸다.”
그로 인해 지방정부가 공장 건물을 팔아서 회사의 빚을 청산하고, 급여 지급을 위해 건물을 압류했다고 말하며 그는 안도했다. 
몇 해 전부터 광둥성의 공장들에서는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5) 현행법령의 준수는 노동자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다. 사실, 많은 사장들이 직원들을 위해 사측에서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보험’ 비용 지불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업과 공장점거는 노동자들이 사장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주요수단이다. 홍콩 소재 노동자 보호 비정부기구 중국노동회보(CLB)는 2015년 2,774건의 파업이 있었다고 집계했다. 이는 2014년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광둥성 한 지역에서만 2015년 8월에서 2016년 1월 사이 총 281건의 파업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들 공장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가 이주 노동자들이다. 
‘중국노동회보’의 제프리 크로솔 대변인은 약 3억 명의 중국 임금노동자를 대표하는 주요 노동조합 조직인 중화전국총공회(All-China Federation of Trade Unions, ACFTU)의 무능함을 비난했다.(6)
“정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화전국총공회는, 공장이 문을 닫을 때 그 공장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 조직의 역할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그들을 다시 작업장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리 역시 “정부에 대항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몇 해 전, 광저우 남쪽 판위구에 위치한 대규모 공장에서 일했었다. 노동자들의 수가 많은 경우에는 당국으로부터 답변을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기업별로 기껏 20명 정도 참여하는 파업으로는, 우리는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한다.”
2010년, 공장의 청년들이 봉기했다. “서구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과장해 보도했지만 말이다”라고 연구원 루오 시치가 말했다. 광저우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포산의 혼다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자동차 산업분야 6만 명의 노동자와 견습생들을 “우리는 800위안을 더 원한다!”라는 슬로건 하에 단결시켰다. 시치에 의하면, 이들이 당시 받던 월 급여는 평균 1,500위안(약 204유로)이었다.(7)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민공들의 불만은 끝나지 않고 있다. 장은 전 세대와 현 세대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전 세대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 세대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새로운 세대는 투쟁수단도 많이 가지고 있고, 전 세대보다 용감하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잘 알고, 고용주들에게 맞서기까지 한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크로솔 대변인은 말했다. “4~5년 전 우리는 임계효과를 경험했다. 요즘 고용주들이 깨닫고 있다. 지금의 경제상황이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던 시기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민공 자녀들의 교육을 
가로막는 호구제도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하거나, 가족 또는 친구들과 그룹 채팅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공장에서 먹고 잔다. 월급에서 거의 지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이 곧 나를 만나러 와서 몇 달 간 함께 지낼 예정이다. 그때까지 좀 더 큰 집을 빌리려면 돈을 모아둬야 한다.” 이렇게, 많은 젊은 부모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도시에 가족들과 터전을 마련하기를 원한다.
다이는 아들을 광저우로 데려오기로 결심했을 때를 회상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다. 밥도 먹여주시고 옷도 빨아주셨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작년에 고향에 갔다가, 아들 녀석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봤다.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내가 아들을 직접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는 이렇게 아들을 데려온 이유를 설명하며 웃었다. 이웃 광시성 출신의 광택공 단 위옹의 경우도 비슷하다. “아들을 부모님께 맡겼었는데, 부모님이 너무 연로하셔서 아이를 잘 돌보시지 못했다. 여덟 살짜리가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숫자를 100까지 세지도 못했다.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 달 전에 이곳에 온 단 위옹의 아들은 아직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단은 출근할 때 아들을 보육시설에 맡기고, 퇴근 후 데려와 숙소에 상을 펴놓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친다. 그는 머지않아 광저우의 학교에 아들을 입학시키고 싶어 한다. 대도시에서 민공들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그들 자녀의 교육문제는 여전히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장애물은 ‘호구제도’에서 비롯된다. 이 제도는 1958년 마오쩌둥 시절, 국민들의 이주를 억제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도시 원주민과 농촌 원주민들 간에 사회적 지위 격차를 만들어, 농촌 출신들의 공공 서비스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호구제도 완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고, 바이윈에서도 2012년 그러한 노력이 시작됐다.(8) 거주 연수, 교육제도 관련 기부금, 자원봉사, 헌혈 등을 통해 공립학교 취학에 유리한 점수를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조건은 대부분 민공들이 충족시키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민공들은 사립 교육기관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립 교육기관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 2,600명의 정원 중 98%가 이주노동자들의 자녀인 광저우 후이장 사립학교의 링 위밍 교장은 수용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사립학교에서는 교육의 질이 공립학교에 미치지 못한다. 도시의 공립학교 교사들은 대졸 이상의 교육 수준을 갖고 있지만, 이 곳 대부분의 교사들은 전문학교 출신이다”라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1985년부터 자신의 호구지역 내에 취학한 모든 중국 아이들에게 9년간 무료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이런 무상교육은 해당되지 않는다. 사립학교의 한 학기당 학비는 3~4천 위안(약 407~543유로)으로, 이주노동자들의 평균 월 급여 3,072위안(약 417유로)(9)과 맞먹는 금액이다. 이중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다.
“매 학기 학생들은 675위안(약 92유로)에서 1,200위안(약 163유로)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고 링 교장이 설명했다. 학교도 교육개선 지원금으로 매년 1백만 위안(약 13만 5,800유로)을 받는다. 교장은 이런 지원책들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호구제도를 완화하려 점수제도를 도입한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 정부는 민공들을 더욱 지원해야 한다. 민공들이 중국에 제공하는 노동에 비해, 받는 것은 빈약해 제대로 삶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부당하다.”

“그럼에도, 지금보다 밝은 미래를 믿는다”

장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자신도 광저우의 호구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이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도시에서의 삶을 체념하며 받아들인 한편,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장성했을 때 결혼비용을 줄 수 있을 만큼 돈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다짐했다. “아들이 더 크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리고 광시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비록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쿵푸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럭저럭 살고 있어요.” 다이가 자신의 광저우 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다이는 “불평하지는 않아요. 당분간 일자리를 옮길 생각도 없고요. 경제가 침체되니 식료품점 같은 것을 차리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가볍게 말한다.
우 에뤠이는 창문을 열면 손이 닿을 만큼 앞 건물에 바싹 붙은 원룸에 산다. 그는 20㎡짜리 원룸에서 끈기 있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광저우에서 10년을 보낸 그는 섬유업계에서 오래 일했다. 그의 생활은 공장 위주로 돌아간다. 혼자 사는 그는 도시에 동화됐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 에뤠이는 환멸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기 풍습들이 고향 풍습과 너무 다르다.” 집에 오면 인터넷을 켜는 그는 “인터넷에서 러시아 여자들이 중국여자들보다 훨씬 예쁘고 개방적이며, 덜 속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라면서, 러시아 여자들의 장점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설명했다. 우 에뤠이는 러시아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 언젠가 돈이 생기면, 그는 후난성으로 돌아가 자신의 공장을 세울 것이다. 꿈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 당은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주지 못한다. “차이나 드림(현 시진핑 대통령의 정치구호)은 별 의미가 없다. 특히 나 같은 서민들에게는 말이다.”
탕은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18세에 이미 손톱관리사, 캐셔, 미용사 일을 경험한 탕은 현재 고깃집에서 월 3천 위안(약 407유로)을 받고 매일 13~14시간씩 서빙을 하고 있다. 탕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얻기 위해 일한다”라며 활짝 웃었다. 탕의 부모는 푸젠성을 떠나 광저우에 와서 작은 슈퍼마켓을 열었다. 탕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학업을 위해 부모님의 고향에서 잠시 살기도 했었다. 10년 전에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돌아온 탕은, 당연히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다. 검정색 나팔바지와 흰색 날염 티셔츠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한 탕은 전형적인 광저우 사람이기도 하다. 
장과 다이, 에뤠이 등 다른 이들처럼, 탕도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꼭” 아이스티 가게를 열 것이다. 그리고 부모보다 더 편한 삶을 살 것이다. 열의에 찬 목소리로 탕이 말했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라구요!”  


글·루 에스파르질리에르 Loup Espargilière, 테오 모네 Théau Monnet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이며 스트라스부르 저널리즘 교육 대학(CUEJ) 저널리즘 석사 2기 과정에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친구들(Les Amis du Monde Diplomatique)> 주최 대학생 콩쿠르에서 당선됐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중국노동회보(China Labour Bulletin) 2015년 통계자료, 홍콩, www.clb.org
(2) 중국 국가통계국, 베이징, www.stats.gov.cn
(3) 「중국, 25년만의 최저 성장률 La croissance chinoise à son plus bas depuis 25 ans」, <르몽드>, 2016.1.19.
(4) 「Wages, productivity and labour share in China」, 세계노동기구, 제네바, 2016.4.
(5) 다음 기사 참조. Martine Bulard, 「중국 공산당의 은밀한 세계 Le Parti communiste aux prises avec le mécontentement socia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9월호.
(6) 다음 기사 참조. Han Dongfang, 「분노한 중국 노동자, 노조에서 길을 찾다 En Chine, colère cherche syndicat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0월호.
(7) 다음 기사 참조, Isabelle Thireau, 「무구하던 ‘농민공’ 분노의 대장정에 나서다 Les cahiers de doléances du peuple chinoi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년 9월호.
(8) 바위윈구, www.baiyun.edu.cn
(9) 중국 국가통계국, www.stats.gov.c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