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X는 아직 살아있다

2016-10-31     아실 음벰베 l 위트와테르스란트대학 교수
   
▲ 말콤 X와 할렘에서의 만남, 뉴욕, 1963 - 브루스 데이비드슨

 

미국 퍼거슨과 배턴루지에서 발생한 시위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주어진 쇠락의 길을 거부한 흑인 청년들을 위해, 범죄자 출신 운동가이자 무슬림 개종자이며, 제3세계 옹호자인 말콤 엑스가 오늘날과 같은 역경의 시기에 불사조 같은 신화로 되살아난 것이다.
 
1965년 말콤 엑스가 총알세례를 받고 쓰러졌을 당시, 많은 이들이 위협적인 존재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대륙은 그들이 예상했던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다. 말콤 엑스가 다시 부활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1) 미대륙의 흑인들은 말콤 엑스가 그리 일찍, 그런 시기에,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도록 허락지 않았다.(2) 
 
그러나 최초의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고서, 어떻게 말콤 엑스를 이해할 수 있을까? 블랙 아프리카에서 2천만 명 이상의 남녀를 강제로 데려와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 말이다. 또한, 타락한 인류의 형태를 보여주는 노예제도, 흑인의 목숨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고통과 불행의 세계, 서방국이 자신을 규정하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어느 누구의 얼굴도 나타내지 않는 가면을 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들이 차례로 무너져가는 사건 등, 이 모든 것을 언급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3)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아프리카 후손의 고난은 계속됐다. 과거 신대륙에 존재했던, 흑인을 둘러싼 감옥은 이름만 사라졌을 뿐, 현재에도 문이 굳게 닫혀있다. 새로운 소외의 형태로 계속되는 감옥살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콤 엑스는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이름부터 손을 대기로 한다. 1925년에 말콤 리틀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엑스’라고 불렀다. 괴상하고, 유쾌하면서도, 신성모독적인 이름이다. 서방국은 희생자를 괴롭히고, 이들의 죽음을 당사자의 탓으로 돌리고, 그 시체를 욕보였다. 그러던 중 서방국 혼자서만 고집스럽게 부인하는 이 낡은 사고방식을 말콤 엑스가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사기꾼, 남창, 범인, 죄수, 마약중독자, 반유대주의자, 남성 우월주의자, 순교자, 비열한 놈(정말 비열했다!)으로 방황하던 시절의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말이다.(4)
 
투옥된 후, 말콤 엑스는 알라신을 의지하게 된다. 미대륙의 많은 흑인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큰 의미이자, 서방국의 가면을 벗겨버릴 수 있는 모든 징후의 주인인 알라신을 믿게 됐다. 이것은 서방국의 거짓말을 깨버리기 위해 무슬림으로 개종한 것이다. 그는 거짓 신분을 버리고, 망치질과 날카로운 웃음으로 서방국의 추한 얼굴이 드러나게끔 했다.(5) 
 
오늘날 말콤 엑스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미국의 정체성 논란이 재점화된 것을 들 수 있다. 공론가(공화주의와 민주주의)들은 오랜 동화정책이 수그러드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실제 동화가 이루어졌었다 하더라도, 이주민들에게 본래의 정체성을 버리고, 앵글로색슨과 유대-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서양의 문화와 전통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식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폭력들을 바탕으로 미국은 독보적인 국가로서의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했고, 자신만의 개성과 민주성을 쌓아갔다.
 
따라서 미국은 이렇게 주장한다. 미국 이외의 아프리카·이슬람·아시아·기타 지역에 기원을 둔 전통들은 미신, 전제군주제, 종교적 맹신이 깔려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일 것이라고. 그러므로 이러한 전통들은 극심한 폭정 속에서 인권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미국의 공화주의 기반을 위협할 것이라고 말이다.(6) 미국의 정체성 논란이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부당함과 인종억압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진정한 사회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프리카 노예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말콤 엑스는 이미 30년 전에 이 문제를 제기했었다. 
 
분리주의자와 통합주의자의 대립
 
지난 12년 동안 미국 흑인의 정치적 소외 및 경제적 쇠락은 더욱 심각해졌다. “미국은 노예제도에 대한 역사적·연대적 책임이 없다”는 신념이 가혹한 보수정책으로 인해 더욱 확산됐다. 이에 따르면, 흑인의 문제 대부분은 전적으로 흑인 사회의 ‘올바른 도덕성’(혼인제도의 붕괴, 혼외출산 증가, 친족살인, 정부보조금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의 부재 때문이고, 미국의 근간이 되는 가치들, 그중에서도 가족 중심적 가치를 중시하는 흑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막대한 돈을 들여 흑인 복지정책을 유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며, 흑인사회를 좀먹는 자기 파괴적인 추세를 멈추려면, 개개인을 갱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말콤 엑스는 이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관점에서 갱생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바로 실력주의와 자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그의 기본적인 정치철학 중 하나였다.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새로운 유형의 포퓰리즘 정책들이 수년 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반동적 성격을 띤 이 정책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중심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치의 재건을 꿈꿨다. 그리고 모두의 행동과 가치를 통일할 것을 강요했다. 미국의 내적 응집력이 달린 문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제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 분야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콤 엑스는 이미 20년 전에 깨닫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대놓고 인종적 분리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이후 사망하기 전에 입장을 바꿨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공동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미국의 다민족성과 다문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된 개념으로, 멜팅 포트(Melting-pot) 보다는 만화경에 가까운 개념이다. 미국에는 역사적 경험과 가치가 다른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는 기초적인 다원주의를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관용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차별철폐 조치’라 불렸던 정책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흑인들을 정치적 공동체에 유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선, 인종차별적 행위를 형사처벌할 수 있게 됐고, 고용시장과 일터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적 장벽이 철폐됐다. 이 같은 정책은 흑인 중산층이 서비스업과 더불어 공업 분야에 진출하는데 일조했다.(7) 
 
그러나 1980년대 보수주의가 부활하면서, 통합을 추구하던 분위기는 사그라져갔다. 이에 따라 시민권운동으로 일궈낸 법적·경제적 성과들이 대부분 철폐되거나 의미가 퇴색됐다.(8) 계속되는 대선 실패로 고민하던 민주당도 백인 중산층 지지자들을 잃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을 잡기 위해 인종평등에 대한 입장을 ‘완화’시켜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흑인사회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길이 제한됐고, 이들의 불만을 중재하는 장치는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에 따라 흑백체제에 맞서 호민관 역할을 하며 집단적·종교적 정체성을 정치화하는데 평생을 바친 인물들이 흑인 서민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말콤 엑스도 이 경우에 속했다.
 
한편, 지난 30년간 흑인 빈민가가 겪은 경제변화를 언급하지 않고서, 말콤 엑스가 오늘날 미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선 제조업 일자리가 가장 먼저 경제변화의 타격을 입었다. 탈산업화와 해외이전(도심에 자리 잡은 산업이 값싼 인력이 있는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흑인 노동자가 대거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동시에 사회 조직망을 형성하고, 응집력과 안정감을 제공하던 교회와 같은 전통적 기관들, 사교클럽, 주민협회 등의 활동기반이 약화되고, 가정형태가 붕괴됐다. 사회화 역할을 하던 전통적 기관들이 흔들리자, 흑인 신 중산층이 빈민가와 범죄소굴을 벗어나 대이동을 했다. 
 
공화당이 정부보조금과 원조를 폐지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나마 정부보조금과 원조 덕분에 소득하락의 피해가 경감되고, 빈곤층에게 저렴한 임대주택을 제공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제대로 된 합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과거 전통적 리더십을 통해 제공되던 제도적 장치가 사라지자, 빈민가의 흑인 청년들은 결국 지하경제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중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마약시장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후 선포된 ‘마약과의 전쟁’은 빈민가를 무장화시키는데 일조한 결과, 사실상 이곳을 무력충돌지대로 만들어버렸다. 아시아와 히스패닉 이민자가 새로 유입됐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기존의 인종갈등 문제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갈등만 더해졌다. 점점 고갈되는 자원을 분배하면서 불거진 갈등이었다. 
 
마약시장의 성장과 함께 ‘거리의 문화’와 ‘사기의 덕목’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문화는 흑인 청소년층의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콤 엑스도 똑같은 청년기를 거쳤기 때문에, 암흑에 빠진 흑인 청년들은 말콤 엑스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거리의 문화’와 ‘사기의 덕목’은 겉모습, 쾌락, 무한한 권력, 성욕, 개인의 욕구 충족을 추구했으며, 이를 얻기 위한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포식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문화는 다소 역설적이게도 공화당 정부가 집권한 12년 간 더욱 심해졌다. 흑인 빈민가의 수많은 청소년이 양심의 가책도 연민도 없는 레이건 같은 인물들의 이미지를 쫓아 권력, 부, 섹스를 탐했다(도널드 트럼프나 미국드라마 ‘댈러스(Dallas)’에 등장하는 J.R.유잉을 따라했다). 
 
마지막으로 말콤 엑스가 오늘날까지도 시사성이 있는 이유는, 흑인사회에 재등장한 어중간한 민족주의와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흑인이 미국사회에 동화되기 어려운 이유는, 고쳐야할 사회적 ‘모순’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구성하는 인종차별적 요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운동이다. 말콤 엑스를 상기시키는 민족주의의 부활과 신 급진주의는 흑인 청년층에 깊은 영향을 줬다. 사실상 이들 사이에서도 분리주의자와 다인종간 대화를 주장하는 통합주의자로 나뉘었긴 하지만 말이다.(9) 이 운동은 말콤 엑스 때처럼 루이스 파라한이 이끄는 ‘이슬람 국가’를 통해 형상화됐다.
 
이 운동은 아프리카중심주의 지지자에 의해 비종교적이고 학구적인 형태로도 재현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백인사회에서의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신념을 재정의하려는 입장을 표명했다.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중심주의는 흑인의 역사적 수난이 일어난 신대륙을 새로운 장소로 바꾸고자 한다. 다른 형태의 역사가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로 말이다. 새로운 장소 없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성립될 수 없다.(10) 다소 논쟁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중심주의는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했던 과거를 정당화하려던 파렴치한 언행을 백인사회에 똑같이 되돌려주자는 반인종차별적 차별주의다.(11) 
마틴 루터 킹의 시대가 저물고, 시민권운동의 위대한 상징성이 퇴화돼가는 상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극심한 역경의 시기에 말콤 엑스는 신대륙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노예 후손들에게 불사조 같은 신화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글·아실 음벰베 Achille Mbembe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위트와테르스란트 대학의 역사학 및 정치학 교수 
 
번역·이보미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사건의 개요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Malcolm X Speaks’(조지 브레이트만 George Breitman 편집), <First Black Cat Edition>, 뉴욕, 1966년; ‘The Speeches of Malcolm X at Harvard’, <Morrow>, 뉴욕, 1968년; ‘Malcolm X, The Final Speeches’, <Pathfinder>, 뉴욕, 1992년
(2) Cf. 데이비드 브래들리David Bradley, ‘Malcolm's mythmaking’, <Transition> no.56, 케임브리지, 1992년
(3) 신대륙의 노예제도를 다양하게 표현한 이 문단의 의미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올랜도 패터슨 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Harvard University Press>, 케임브리지, 1982년; 조셉 밀러 Joseph Miller, ‘Way of Death’,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매디슨, 1991년
(4) 말콤 엑스의 다양한 면모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Cf. 브루스 페리 Bruce Perry, ‘Malcolm: The Life of a Man Who Changed Black America’, <Station Hill>, 뉴욕, 1992년; 제임스 콘 James Cone, 'Martin, Malcolm & America’, <Orbis Books>, 뉴욕, 1991년
(5) 메 세제르 Aimé Césaire, ‘Discours sur le colonialisme(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Présence africaine>, 파리, 1956년
(6) Cf. 아서 M. 슐레신저 주니어, Arthur M. Schlesinger Jr., ‘La Désunion de l'Amérique’(미국의 분열), <Liana Levi>, 파리, 1993년; 로렌스 오스터 Laurence Auster, ‘The Path to National Suicide; An Essay on Immigration and Multiculturalism’, <American Immigration Control Foundation>, 1991년
(7) Cf. 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Deux "Amériques noires" séparées par les injustices de l'économie’(경제 불평등으로 둘로 분리된 “미국 흑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2년 1월
(8) Cf. 존 바운드 John Bound & 리처드 B. 프리만 Rechard B. Freeman, ‘What went wrong? The erosion of relative earnings and employments among young Black men in the 1980s’,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no.107, 케임브리지, 1992년
(9) ‘Les sources culturelles du nouveau radicalisme noir’(흑인의 신 급진주의의 문화적 배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2년 6월; 그레고리 스테판 Gregory Stephens, ‘Interracial dialogue in rap music: Call-and-response in a multicultural style’, <New Formation> no.16, 런던, 1992년 
(10) Cf. 몰레피 K. 아산테 Molefi K. Asante, ‘Kemet, Afrocentricity and Knowledge’, <Africa World Press>, 트렌턴, 1990년; 몰레피 K. 아산테, ‘The Afrocentric Idea’, <Temple University Press>, 필라델피아, 1987년 
(11) 앤드류 해커 Andrew Hacker, ‘Jewish racism, Black anti-semitism’, <Reconstruction> Vol. I, no.3, 케임브리지,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