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체성’이라는 전염병

2010-02-04     로랑 바쟁

‘국가 정체성’에 관한 토론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최근 논쟁에 불씨를 댕긴 사르코지 대통령은 흡족해한다. 그는 12월 말 “지방선거를 두 달 앞둔 상황에서 언론과 반대파들이 미끼를 물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에 소개된 두 국가처럼, 국가 정체성 논란은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가 번식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와 우즈베키스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러 나라들이 그랬듯이, 이 두 나라도 1990년대부터 ‘국가 정체성’(1) 형성의 시대를 경험했다. 코트디부아르와 우즈베키스탄은 당시 전세계에 일반화돼가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탈식민화를 거쳐 탄생한 민족주의와 1990년대 ‘원주민’이라는 새롭게 발명된 정체성에서 탄생한 민족주의의 차이를 일별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이부아르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선거 전략 차원이었다. 1993년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앙리 코난 베디에는 반대파를 억누르고 자신의 정통성 부재를 숨기려고 이 개념을 사용했다.

‘이부아르 민족성’은 1994년 12월 새로운 선거법과 함께 선포되었다. 새 선거법에는 두 개의 놀라운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서 온 외국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고, ‘이부아르 민족성 조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조항은 대통령 피선거권 자격을 “이부아르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부아르인들”로 국한하는 것이었다. 이들 조항은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알라산 우아타라 전 총리를 몰아내고, 오랜 숙적인 로랑 그바그보의 선거 전략을 자기 것으로 빼앗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부아르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일단 하나의 용어로 굳어지자마자 이데올로기적 함정으로 작용했다. 이 개념은 코트디부아르 정치 무대를 분열로 몰고 감으로써 사회 해체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2)

코트디부아르에 등장한 ‘민족성’

치밀한 방식으로 사회 긴장을 초래한 베디에 대통령은 곧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그는 1999년 12월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2년 후, 그의 숙적 그바그보가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사실상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 이 분쟁의 중심에는 ‘이부아르 민족성’이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아타라 전 총리는 법정에서 ‘국적이 의심스럽다’는 판결을 받고 출마를 저지당한다. 투표인 명부 작성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국민의 코트디부아르 국적 자격을 심사하는 ‘신원 확인’ 작업이 진행된다. 시민권을 부정하려는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북쪽의 이슬람교도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코트디부아르에서 몇 세대에 걸쳐 거주해오던 외국 출신 주민은 그 수가 전 인구의 4분의 1에 달함에도 국적과 정체성이 불분명해졌다.

정당들의 권력 분할을 규정한 평화협약이 체결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신원 확인’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선거가 계속 연기되고 있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의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한 이슬람 카리모프는 1991년 독립공화국이 된 우즈베기스탄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야당을 인정하지 않았다. 두 야당 당수들은 1993년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치 권력은 독립을 쟁취하자마자 급격하게 민족주의로 선회했다. 상당수의 비(非)우즈베키스탄 출신 주민을 배제한 채 전 사회와 국가가 급격하게 ‘우즈베키스탄화’돼갔다. 1991년 당시 전 인구의 20%를 차지하던 이들 주민은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타타르, 조선, 독일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경제 불황으로 신임을 잃은 현 정부는 억압적 공포정치로 모든 반대파를 탄압하고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국민의 ‘국가 정체성’을 고무하고 ‘국가 독립의 실현’이라는 열광적 구호 를 외치며 번영된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물론 권력의 정통성을 구축하려는 의도에서다.

인민과 국가 권력의 정책이 공식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는 소비에트 모델에 따라 카시모프 대통령은 ‘국가 이념’(러시아식 용어)을 지도 이데올로기로 채택한다. ‘국가 이념’은 과학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었다. 과학아카데미는 철학을 중심으로 민족학·역사학·고고학·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런 과학의 재구성은 1924∼36년 스탈린이 19세기 유럽에서의 국가 성립 과정을 본떠 다양한 ‘민족성’을 구별지으려 시도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비에트 학자들은 각 ‘민족성’이 지닌 고유의 혈연, 언어, 문학 전통, 역사, 풍습과 전통 등을 밝혀내는 임무를 수행했다.(3)

새로운 역사적 진실을 ‘생산’하기 위해서 가장 오래전부터 현재 영토에 거주하던 우즈베키스탄인 선조의 흔적을 찾아내야 했다. 이런 작업은 필연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원주민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거기에 ‘우즈베키스탄 민족의 국가성’(4)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줄기를 삽입한다. 그리하여 국가와 원주민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에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된다. 이른바 원주민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코트디부아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부아르 국민성과 그 변형태들을 둘러싼 분쟁은 사실상 시민권과 정치적 정통성 개념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순전히 발명품에 불과한 원주민이라는 개념이 분쟁의 초점이 된 것이다. 1990년대 전만 해도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탈식민화로 탄생한 정권은 1967년 이부아르 민족성을 주장하는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다가 1974년 지지부진한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우선’ 개념을 제도화한다. 당시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경제발전과 사회 현대화를 앞당겨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었다.

우즈베크의 원주민은 누구?

시민권을 얻는 데는 경제발전에 참여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비(非)이부아르 출신들이 장관직을 맡던 때였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남부 밀림 지역을 개간해 카카오 플랜테이션을 계속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코트디부아르 중부와 북부의 자국민뿐 아니라 부르키나파소, 말리, 기니 등에서도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유일당 체제 아래서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선거권을 갖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외국인들의 배를 불려준다고 끊임없이 비난받아오던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다양한 출신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국민도 ‘다민족적’(5) 경향을 띠었다. 학교 교재도 코트디부아르 인구에 대해 60여 개 민족그룹이- 수적으로 미미한 몇 그룹을 제외하고- 이웃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부아르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탄생되고 나서부터 정부는 돌연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던 이부아르 원주민을 대변하는 정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에트의 민족주의는 사회의 현대화, ‘신인류’ 창조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주의 이념의 틀 속에 융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우즈베키스탄에서 미래를 약속하는 지평은 “우즈베키스탄 민족정신의 부흥”이라 할 수 있다.(6) 그러나 경제적으로 황폐해진 이 나라의 미래의 지평은 막다른 골목일 뿐이고 계층을 가릴 것 없이 이민을 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옛 소련이나 옛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각 인민이 견지하고 있던 ‘민족성’이 ‘초민족적’ 시민권에 의해 포섭되었다. 또한 초민족적 시민권은 당·국가가 정의하는 이상에 종속되었다.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는 권력에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하고 시민권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시민권은 우즈베키스탄 원주민의 ‘민족 정체성’이라는 개념 속에서 정의되고 사실상 비(非)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람들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부터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면서 ‘우즈베키스탄적인 것’(o’zbekchilik)이라는 표현이 일상화되었다. 이 표현은 개인을 복종시키고 적절치 못한 행동을 교정하는 강제력으로 작용했다. 가령 젊은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른다든지, 모자를 거꾸로 쓴다든지, 결혼 전에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다든지 하면 “우즈베키스탄적이지 못한 행동”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우즈베키스탄과 코트디부아르에서 개념화되고 제도화된 국가 정체성은 시민권과 정치적 정통성이라는 개념을 뒤흔들어놓았다. 원주민의 정체성 위에 성립된 국가라는 개념은 외부를 위협으로 간주하게끔 만들었다.

코트디부아르와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이런 현상은 경제적 파탄이라는 맥락 속에서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두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표상은 경제 불황 속에서 의미를 잃게 되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위대한 조국 건설을 부르짖던 우즈베키스탄은 황폐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임금 일자리가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이일 저일로 연명하고, 집단적 빈곤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1980년대 경제위기를 맞은 코트디부아르도 공장들이 문을 닫고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했다.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은 지도층 엘리트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으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라는 이미지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이 두 국가의 예는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정치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배제가 현실화되더라도 국가적 쇠퇴라는 참담한 현실을 은폐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정부가 권력의 정통성을 조금 더 갖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로랑 바쟁 Laurent Bazin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와 일리노이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모니크 슬랭, 베르나르 우르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국가 정체성의 시대. 노동, 과학, NGO>(라르마탕 ‘비판적 인류학’ 시리즈·파리·2009)를 썼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각주>
(1) Laurent Bazin, Robert Gibb, Monique Selim 공저, <현대세계 정체성의 민족화와 국가화>, Journal des anthropologues, 특별 부록 <민족국가 정체성>, Paris, 2007, www.afa.msh-paris.fr.
(2) <사회적 해체 요인으로서 국가 정체성 이데올로기>, Savoir/Agir, Broissieux, n°2, 2007, pp.61∼69. Pierre Janin, ‘아비장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10월호.
(3) Eric Hobsbawm,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Gallimard, Paris, 1992.
(4) Marlene Laruelle, <지식인 엘리트들의 연속성, 정체성 문제의 연속성>, Cahiers d’Asie centrale, Tachkent, n°3 13-14, 2004, pp.45∼75.
(5) Bernard Contamin & Harris Memel-Fote, <이부아르 모델의 문제점>, Karthala, Paris, 1997. p.779∼798에 실린 Jean-Pierre Dozon의 글, ‘코트디부아르의 외국인들과 이민자’에서 따온 말.
(6) Frederique Guerin,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이데올로기 생산’, <The Illusions of Transition: which perspectives for Central Asia and the Caucasus?>, Cimera publications, Gen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