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봉과 풀치넬라 신드롬*

2016-10-31     올리비에 피오

 

지난 8월 31일 대선결과 발표 이후, 가봉은 부정선거 논란에 따른 유혈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동안 짜고 치는 각본에 잘 따라주던 프랑스마저 이번에는 알리 봉고의 당선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알리 봉고의 재집권 여부와 상관없이, 최근 불안하기만 한 ‘프랑사프리카(Françafrique: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프랑스어식 합성어로, 프랑스 아프리카 간의 은밀한 밀월관계를 의미-역주)’의 상징으로 간주돼오던 이 중앙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는, 이번 사태가 역사적 전환점이 될 듯하다.

*풀치넬라는 이탈리아 희극의 등장인물로, ‘풀치넬라의 비밀’이란 ‘비밀 아닌 비밀’, ‘공공연한 비밀’을 의미한다.(-역주)

“지는 선거는 하지 않는다.” 
가봉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1967~2009년 집권한 오마르 봉고가 남긴 이 유명한 말은 오늘날 리브르빌에서 아주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8월 31일 시작된 부정선거 논란에 따른 유혈충돌 사태는 1993년 다당제 도입 이후 주기적으로 가봉을 뒤흔들어온 기존의 정국혼란 사태들과 쏙 빼닮았다. 그러나 그때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2009년 선거 때와는 달리 유럽연합(EU)·프랑스·국제연합(UN)이 일제히 무거운 침묵을 깨고 ‘개표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나선 점이다.(1)

2009년과 2016년, 두 번에 걸친 부정선거

2009년에는 최고령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이자 프랑스와 막역한 사이였던 고(故)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뒤를 잇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당시 알리 봉고의 대통령 당선 발표에 야당이 일제히 부정 선거 논란을 제기하며 맹렬히 반발했다. 국제선거감시단(유럽연합(EU), 아프리카연합(AU), 프랑스어권국제기구(OIF))이 파견되고, 시위대가 진압되고,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오마르 봉고의 친아들’임을 자처하는 알리 봉고(2)가 당시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환호 속에 끝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봉의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친구’의 당선을 축하했다.
당시 알리 봉고는 41.78%의 득표율로 경쟁자인 피에르 맘분다(25.64%)와 앙드레 음바 오바메(25.33%)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조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실은 개표결과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것이다! 2010년 12월 프랑스2 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전 아프리카 고문, 미셸 드 본느코르스는 부정선거의 진실 여부를 확인해줬다.(3) 몇 달 뒤인 2011년 9월, 이번에는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이어졌다. 프랑스주재 미국 대사였던 찰스 리브킨이 2009년 11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보에서 “2009년 10월 알리 봉고가 개표결과를 뒤집고 대통령 당선을 선언해버렸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소식을 접한 클린턴 국무장관은 곧바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알리 봉고의 당선을 인정해주지 말 것을 조언했다.(4) 지난 1월 TV 토론 프로그램 <우리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어요>에 출연한 마뉘엘 발스 총리도 부주의하게 2009년 알리 봉고 대통령의 당선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당선은 아니다”라는 말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현재 논란의 씨앗으로 떠오른 것은 봉고 가문의 고향인 오트오고웨 주에서의 2016년 대선 개표결과다. 오트오고웨주에서는 투표율이 무려 99.88%에 육박한 가운데, 봉고 대통령에게서 자그마치 95.46%의 몰표가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7만 1,714명의 유권자 중 선거에 불참한 사람은 50명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오트오고웨주가 봉고 가문의 진정한 텃밭이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릇된 신화를 버려야 한다. 알리 봉고는 아버지만큼 지지를 얻고 있지 못하다”고 가봉의 유명 인사이자 자유업 종사자인 클레르 H.가 개탄했다.(5) 그렇다면 왜 9개 주 중에서도 유독 이 지역에 이토록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것일까? “알리 봉고는 다른 9개 주의 선거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가봉의 탐사전문 기자 귀스타브 D.가 운을 뗐다. 그는 “다른 지역들의 경우 아무리 선거조작을 해도 소용 없을 만큼 장 핑 후보와 득표 차이가 너무 벌어졌다. 무려 6만 표에 달하는 격차를 메우고, 상대 후보를 앞지르기 위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오트오고웨주를 승부처로 삼아 선거부정에 나섰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태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기 위해 쥐었던 묵직한 줄은, 어느덧 스스로의 목을 옥죄는 교수대 밧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리브르빌의 유명 가봉인 변호사 피에르 P.는 참관인들을 재촉해 오트오고웨주의 297건 개표기록표 중 중요한 부분을 입수했다. 그는 “유럽연합선거감시단은 더 이상 현 상황을 좌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2009년 야당의 위헌소송을 담당했던 이 법률가는 현 사건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가봉에 파견된 유럽연합선거감시단(MOEG)은 가봉의 주권과 절차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예비보고서상에 ‘변칙선거’를 운운하면서까지 알리 봉고 측에 경고를 날리고 있다.” 
그렇다면, 2009년의 상황이 재현될 우려는 이제 없는 것일까? 전 고위관료 출신 미셸 K.는 “과거 상황이 재현될 염려는 없다. 2016년의 가봉은 2009년의 가봉과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여전히 봉고 가문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 중인 미셸 K.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물론 마리 마들렌느 보란츠오 헌법재판소장은 정부의 어용인사가 맞다. 그러나 가봉 사회는 변했다. 알리 봉고는 과거 아버지와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아버지가 이룩한 중앙집권적 단일국가체제를 오로지 봉고 왕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작동하는 진정한 약탈적 국가체제로 전락시켰다. 그 바람에 가봉 국민들에게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고 말았다.”

계승과 단절로 점철된 정권의 역사

봉고 정권의 역사는 그동안 계승과 단절이라는 이중의 경향으로 점철돼 왔다. 기이하게도, 이 두 가지 경향이 함께 현 정국혼란을 부채질했다. 먼저 과거 계승의 경향부터 살펴보자. 가봉공화국은 1960년 독립 이래, 줄곧 지대추구정책에 의존해 번영을 누려왔다. 결국 온 경제가 오로지 천연자원의 생산과 수출에만 매진했다. 파리 1대학(팡테옹소르본) 명예교수인 지리학자 롤랑 푸르티에는 “식민지 시절, 값비싼 오쿠메 목재는 가봉을 비롯한 프랑스령적도아프리카 전체를 먹여 살렸다. 이후 망간과 우라늄, 그리고 석유가 그 역할을 대신 했다”고 설명했다.(6)
1973년 가봉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했다. 봉고 대통령은 OPEC 가입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알베르베르나르 봉고에서 이슬람식 이름인 엘 하지 오마르 봉고로 개명했다. 이후 가봉의 경제는 비로소 ‘영광의 12년’이라 불리는 황금기를 맞이한다. 물론 1985년 잠시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어 1990~2014년 다시금 번영기로 들어섰다.
본래 국토의 85%가 숲으로 뒤덮인 가봉은 삼림개발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후 광물 및 석유 산업이 이 자리를 대체한다. 가봉의 원유생산량은 1975년 일일 25만 배럴 수준에서 출발해, 1997년 일일 35만 배럴, 즉 연간 1천8백5십만 배럴이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도달했다. 가히 ‘열대의 수장국’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 했다. 2013년 인구 규모가 단 1백8십만 명에 불과한 가봉은 원자재 가격 추이에 따라 증감하는는 지대소득(자원이윤)을 기반으로 먹고 살았다. 이러한 시스템 뒤에는 “삼림·석유·우라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기업을 필두로 한 해외유수기업과, 20% 정도의 지분을 보유한 가봉 정부가 한 팀을 이뤘다”고 롤랑 푸르티에가 설명했다. 지대소득(자원이윤)은 40여 년에 걸쳐 수십억 CFA프랑을 제공하며 집권 엘리트층의 귀한 소득원이 됐지만, 정작 국가경제에 재투자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치학자 토마 아탕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대추구경제에 입각한 가봉정부는 수십 년 간 지도층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마구잡이로 약탈했고, 이러한 경제체제는 기생적인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며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기는커녕 결국 파탄으로 몰아넣었다.”(7)
오래 전부터 ‘프랑사프리카’의 상징(박스기사 참조)으로 간주돼오던 가봉은 오마르 봉고를 수장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정부패와 지역·인종·정치세력 간의 지능적인 이익 안배에 입각한 재분배 시스템을 창출했다. 오늘날 이처럼 지대소득(자원이윤)을 ‘극히 일부분’ 공유하는 정권의 수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때로는 정권의 측근이나 행정조직에 ‘봉투’를 지급하는 식으로 공식적인 루트가 이용되기도 했고, 때로는 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매 상황에 맞춰 대학·병원 등에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정부, 혹은 측근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쥐어주는 비공식적 루트가 활용되기도 했다. 롤랑 푸르티에는 “한때 리브르빌의 모든 동네는 국가지도층의 ‘난잡한 성생활’에서 비롯된 관대한 호의 덕에 먹고 살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대소득-부정부패’에 의거한 국가체제는 이미 프랑스나 미국의 많은 대학교수들 간에 세밀한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8)
2009년 봉고 왕국을 물려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이런 국가체계를 근본적으로는 손대지 않았다. “요컨대 가봉의 국가 및 경제체제는 과거를 그대로 계승했던 셈이다”라고 롤랑 푸르티에가 지적했다. 그러나 몇 가지 과거와 단절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전 정권의 일부 측근, 가령 오마르 봉고의 딸이자 알리 봉고의 누이인 파스칼린 봉고 여사가 정치무대에서 배제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009년 이후 작은 ‘황실의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 여당인 가봉민주당(PDG) 내에서도 신진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 물갈이가 진행됐다. 대표적인 신진인사가 바로 알리 봉고 대통령 비서실장 맥상 아크롱베시(베냉 출신)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향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가령 고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옛 정부인 마리 마들렌느 보란츠오 헌법재판소장(헌법재판소는 1991년 다당제 도입과 함께 신설됐다)은 오늘날까지 20년째 요직을 꿰차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봉고 대통령은 2009년 야심차게 마련한, 산업화와 지속가능한 자원 개발을 뼈대로 한 ‘가봉부상전략’(PSGE)을 들고 대선에 출마했다.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한다는 명목을 지닌 이른바 PSGE는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편입’해 ‘신흥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바람과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정책은 1990년대 구조조정프로그램을 강요한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의 요구에도 함께 부응했다. 물론 PSGE 덕에 몇 가지 혁신적인 일이 실현되기도 했다. 가령 목재산업분야의 경우, 외국기업들은 더 이상 미가공 상태의 통나무를 가봉 밖으로 수출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가봉 목재가공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가구공장이 탄생했다. 농식품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팜유나 파라고무나무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가 진행됐다. 그러나 집권 7년 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봉 정부는 좀처럼 오일머니나 대외식량수입에 대한 의존도(수입품의 80%)를 낮출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원자재 의존 경제를 위협하는 일명 ‘네덜란드병’의 전형적 특징이다.(9)

소득은 늘었는데, 국민생활은 곤두박질

유일하게 눈에 띄는 대규모 단절은, 가봉 대통령도 미처 관리하지 못한 변수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바로 유가 폭락이다. 물론 2016년 가봉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나이지리아·앙골라·콩고·브라자빌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양의 원유를 생산하는 산유국에 해당했다. 그러나 가봉에 그토록 중요한 소득원이 돼주던 원유의 가격이 2014년 여름 돌연 급추락하고 만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를 하던 원유가가 2016년 배럴당 40달러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그 여파로 가봉은 부채 규모가 급등하는 한편, 예산이 줄고, 투자가 쪼그라들었다. 가봉의 대표적 경제 도시 포르장티는 유가하락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질식사할 지경이었다. 1년 만에 주요 석유회사들(토탈·쉘·발코 등)과 하청업체들(슐름베르거·아닥·사트람 등)이 완전히 투자를 중단해버렸고, 생산현장을 폐업하거나, 대규모 감원조치를 단행했다. 가봉석유노동자조합(ONEP)에 의하면, 이 시기 약 4천 개의 일자리가 불과 18개월 만에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아예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가봉에서 경기변화는 순식간에 사회의 심장부를 가격했다(세계은행에 의하면, 농식품·건설·임업·교통 등의 분야도 타격을 입었다).(10)
사실상 지대추구경제에 기초한 약탈적인 국가체계는 대개 시민들이 일상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여력을 남겨두지 않는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그 순간 사회적 비극으로 이어진다.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선두권을 달리던 가봉(구매력평가기준으로 추산할 때, 가봉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9년 1만 5,100달러에서 2015년 초 2만 1백 달러로 증가)은 의료·교육 등 사회적 요소를 고려한 인간개발지수(HDI)가 세계 112위까지 곤두박질쳤다. 그 결과, 오늘날 가봉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6년 8월 가봉의 정국혼란 사태가 이토록 심각하고 격렬해진 데는, 지대추구국가체제의 존속·부정부패·경제적·사회적 현실의 악화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최근 몇 년 간 가봉에서는 수도는 물론, 대부분 도시(가봉 국민의 85%가 도시지역 거주)에서조차 국민들의 일상생활이 크게 악화됐다. 이에 따라 불안정하던 사회구조는 해체의 위기에 놓였다. 인류학자 알리스 아테리아뉘스 오왕가, 사회학자 제조프 통다는 최근 가봉 국민의 일상적 고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두 저자는 실업으로 고통 받는 가봉의 청년 빈곤문제(전체 활동인구의 30%가 실업자이며, 그 중 60%가 청년층)와 학생·노동 운동(2016년 1월 이후 시위가 크게 증가) 참가자들의 무차별 체포 현실, 의료 서비스 이용의 어려움(입원하려면 30만 CFA프랑(약 450유로)의 보증금을 지불해야 함), 미흡한 공공 서비스, 잦은 단전 사태 등에 대해 줄줄이 열거했다.
특히 두 저자는 이런 현실이 “물리적인 직접 폭력행위에서, 공격적 심리나 사회적 박탈감 등을 일으키는 행위나 반응, 심지어 국가와 정부 책임자들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폭력행위와 강제진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11) 이런 다양한 형태의 폭력성은 90년대 많은 젊은이들이 급진적인 힙합문화에 경도된 현상 속에서 두드러진다. 이는 결코 부수적인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다. 최근의 추산에 의하면, 가봉 전체 인구 중 무려 64.1%가 30세 이하이기 때문이다(15세 이하는 전체 인구의 34.7%).
프랑스 출신의 연구가 알리스 아테리아뉘스 오왕가는 3년간의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일부 집단의 경우 랩이 권력의 폭력에 항거하는 ‘전복’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존의 전통음악이나 대중음악의 경우에는 흔히 “식민지 독립 이후 정권의 기획이나 가치관을 선전하거나 일당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뤄왔다면, 랩은 그와 반대로 “일당체제·독재정권·부정부패·사회적 불평등 등 현 사회 및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매개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12)

봉고 일파의 ‘척추’를 박살낼 수 있을까

귀스타브 D.에 의하면, 대부분의 야당 인사들은 리브르빌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알리 봉고가 시위진압대 중 ‘더러운 일’을 대행할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9월 8일, 마침내 야권인사 장 핑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심했다. 변호사 피에르 P.는 이렇게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곳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늘 그렇듯, 가봉은 민주주의 국가로 위장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마치 투명성을 보장하고 법률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기관, 헌법재판소와 선거관리위원회(CENAP)가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껍질을 벗겨보면 두 기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기관들은 글자 그대로 완전히 정권과 한 몸이 돼버렸다. 장 핑 진영이 위헌소송을 오랫동안 주저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구성(헌법재판관 9명 중 대통령이 3명을 임명하고, 봉고 가문의 측근인 상원의장과 하원의장이 각각 3명씩 임명한다) 및 역사(현 헌법재판소장은 7년 임기의 헌재소장직을 4번이나 연임했다)를 살펴보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피사의 사탑’이라는 별명이 실로 잘 어울리는 기관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한 방향, 권력으로만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가봉 국민들도 실상에 대해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의 국가는 수십 년 간 국민들이 거대한 그림자 게임에 익숙하게끔 만들어왔다. 이 게임에서 각각의 진실은 꼭꼭 잘 숨겨진 듯 보이지만, 실은 진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풀치넬라’ 신드롬에 대해서는 프랑스 출신의 플로랑스 베르노 교수가 제대로 분석해놓았다.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베르노는 “가봉 지도층과 정치계급의 결코 변하지 않는 특징은 의존관계·장수(長壽)·약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베르노는 이렇게 자문했다. “대통령과 그 일파가 만든 동맹·고객·이권 등으로 얽히고설킨 네트워크, 신경망처럼 이 나라를 장악해버린 이 네트워크는 이제 인체의 척추처럼 필수불가결한 시스템이 돼버린 것은 아닐까?”(13)
현 위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선거는 2009년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민중과 시민단체, 노동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2009년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확신하는 많은 가봉인들이 다른 외국의 사례에서 용기를 얻어 저항에 나선 것이다. 그들은 2011년 ‘아랍의 봄’과 독재정권의 붕괴, 봉고 대통령의 ‘친구’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2012년 프랑스 대선 패배, 그리고 무엇보다 2014년 부르키나파소의 블레즈 콩파오레 독재정권의 몰락에 크게 고무됐다.(14) 2011년 총선 보이콧 이후, 다양한 단체가 조직돼 정치 및 제도 개혁실현에 팔을 걷어붙였다. ‘운동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2012년부터 ‘더 나은 정부’, 그리고 ‘2016년 투명한 선거 개최’라는 목표를 세우고, 프랑스와 국제기구들 대상으로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벌여왔다. 특히 파리와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수많은 회의를 중점적으로 공략했다.
이 단체는 다른 많은 시민운동과 마찬가지로 8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부정선거 위험에 대해 수차례 경종을 울렸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2012년 5월 집권 이후 이 단체로부터 ‘위기 해법’에 관한 보고서를 받았다. 말하자면 장 핑 후보를 중심으로 이룬 야권의 후보 단일화는, 향후 부정선거 대비 전략의 마지막 수순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사법적 해법을 동원하는 것만으로 과연 봉고 일파의 ‘척추’를 박살낼 수 있을까? 1999~2009년 국방장관을 역임한 알리 봉고는, 군경의 충실성에 기대를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이 조직들도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다. 이미 2014년 콩파오레, 2011년 튀니지의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가 그런 현실의 결과를 처절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외국의 지원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에 임기가 끝나는 봉고 대통령은 아프리카 대륙 내에 확실한 우방이 없다. 더욱이 2009년 선거 때와는 달리 프랑스·미국·유럽연합·프리카연합 등도 공공연하게 선거 ‘부정’ 사태를 애석해하며, 국제감시단의 입회 아래 선거사무소별로 ‘재검표’를 실시함으로써 ‘투명성’ 제고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9월 18일, 파리. 피에르 P 변호사가 야권 일인자에 대한 봉고 일파의 공격에 대해 한 마디 했다.
“그들은 이제 핑에 대해, 그리고 집권 시 그가 펼칠 정책에 대해 큰 환상을 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는 과거 봉고 일파의 일원이었다. 그 사실을 잊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봉고 왕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그것이 핵심이다.”
별안간 피에르 P.는 라디오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지난 9월 6일 법무장관직을 사임한 세라핀 문둥가(Séraphin Moundounga)가 프랑스의 수도를 방문해, RFI 라디오에서 자신이 암살당할 뻔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둥가는 가봉에서 일어난 암살미수 사건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피에르 P.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가봉 민중은 이번에는 절대로 가만히 앉아 유권자의 권리를 무참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위헌청구소송과 국제선거감시단의 활동으로도 봉고 대통령이 투명한 개표결과를 밝히고 패배를 인정하게 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직접 그를 심판할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국민들이 치르게 될 대가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글·올리비에 피오 Olivier Piot
필자는 본 기사의 취재를 위해 지난 9월 가봉으로 출장 갔으나 현지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본사의 항의로 뒤늦게 입국이 허용됐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hilippe Leymarie, ‘가봉, 알리 봉고의 불장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블로그 국방란 게재 기사, 2009년 8월 31일, http://blog.mondediplo.net.
(2) 2000년대부터 알리 봉고의 친자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가 진짜 오마르 봉고의 친아들인지, 1950년대 비아프라에서 입양한 아들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대선 출마를 위해서는 가봉 태생이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3) Patrick Benquet, <프랑사프리카: 비밀의 장막 뒤에 감춰진 50년대>, 앵프라루즈, 2011년.
(4) Régis Marzin, ‘가봉, 2009년 선거 쿠데타에서 알리 봉고의 조기 퇴진까지’, 블로그 게재 기사(Regard exentrique), 2015년 1월 2일.
(5) 신변 안전을 위해 일부 인터뷰 대상의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6) 아르마탕 출판사(파리, 1989년)에서 출간된 <가봉>(총 2권)의 저자.
(7) Thomas Atenga, ‘가봉, 석유 없이 사는 법을 배우다’, <아프리카정책>, 제92권, 파리, 2003년 12월.
(8) Douglas Yates, ‘The Rentier State in Africa: Oil Rent Dependency and Neocolonialism in the Republic of Gabon’, <African World Press&the Red Sea Ress, 트렌턴(뉴저지), 1996년.
(9) Bertrand Feutemio, <가봉, 그토록 부유하고 그토록 가난한 나라>, 퍼블리북, 파리, 2012년.
(10) 세계은행, ‘가봉에 대한 개괄’, 2016년, www.banquemondiale.org.
(11) Alice Aterianus-Owanga, Maixant Mebiame-Zomo, Joseph Tonda, <리브르빌, 일상의 폭력>, 아카데미아, 앙트로폴로지 포르스펙티브 총서, 루뱅라뇌브, 2016년 10월 출간.
(12) Alice Aterianus-Owanga, ‘랩과 현대 가봉의 민주주의’, <에뮐라시옹>, 제9호, 루뱅대학출판부, 2011년.
(13) Florence Bernault, Joseph Tonda, ‘가봉, 열대의 디스토피아’, <아프리카정책>, 제115호, 파리, 2009년 10월.
(14) David Comeillas, ‘부르키나파소의 청년단체, 시민 빗자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5년 5월.
 
박스기사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밀월관계에 울린 조종


현 부정선거 논란을 둘러싼 유혈 사태는 가봉의 ‘프랑사프리카(프랑스와 아프리카 간의 밀월관계)’에도 조종을 울릴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프랑스-가봉이라는 축이, 아주 오래 전부터 식민지 독립 아프리카 국가와 프랑스 간의 ‘특별한 밀월관계’를 상징하는 패러다임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가봉의 경우, 이 밀월관계는 매우 다양한 방면에 걸쳐 구축됐다.(1)
우선, 경제적 관계다. 목재, 망간, 우라늄, 건설, 인프라, 교통, 무기, 그리고 석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 대기업이 아프리카에 진출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긴밀한 경제적 관계가 형성됐다.(2) 가봉과 프랑스의 끈끈한 관계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 먼저 프랑스 지질학자들의 탐사(1928년)와 원유 개발(1956년)이 처음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원유 개발은 프랑스령적도아프리카석유회사(SPARF)의 비호로 이뤄졌다. 1949년 설립된 이 회사는 1968년 ‘ELF-SPAFE’로 바뀌었다. 이어서 5년 뒤 엘프가봉으로, 마지막으로 2003년에 ‘토탈가봉’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렇게 전략적 협력관계(프랑스는 에너지 자원을 확보, 가봉은 원자재 수출에 따른 이윤을 확보)를 이룬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측면에서도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게 된다. 40년에 걸친 온갖 폭로와 각종 ‘사건’으로, 두 나라가 고위급에 이르기까지 매우 끈끈한 정경유착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3) 가봉 정부와 프랑스 군대(1960년부터 가봉 주둔) 및 정보부(대외정보수집및방첩기구(SEDEC)와 대외정보총국(DGSE))간의 결탁관계에 대해, 대중에게 진상이 밝혀졌다.
이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전 SEDEC 소속 용병 보브 드나르(1929~2007년), 오마르 봉고의 대통령경호실에서 오랫동안 교관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한편, 1990년 여름 리브르빌과 포르장티에서 일어난 유혈충돌사태 때도 프랑스군의 개입 덕에 가봉 대통령은 위태로웠던 왕좌를 간신히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 제5공화국 내내 가봉으로부터 프랑스 정당 측에 ‘돈가방’이 은밀히 전달되곤 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1990~200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엘프 사건’에 이어, 현재는 봉고 가문의 부당재산 문제가 또 다시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정재계 인사들 간에 뜨겁게 화제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볼로레·베올리아·BNP·부이그·에라멧 등 프랑스 다국적기업들이 봉고 가문이 나랏돈을 불법으로 빼돌리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4)
그렇다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는 상황이 과연 달라졌을까?(5) 1981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대선후보들이 “프랑사프리카를 종식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허한 수사학에 불과했다. 그러다 2012년 가봉경제가 세계화 흐름에 동참하면서, 비로소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비록 프랑스를 비롯한 옛 ‘우방’에 의해 석유 부문에서는 빗장이 완전히 잠겨있음에도, 알리 봉고 대통령은 올람·어니스트팀버 등 중국 대기업들을 필두로 한 해외 유수 기업들과 손을 맞잡고 점차 교역상대를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2009~2012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의하면, “가봉은 중국·한국·인도·터키 등 신흥국에게 시장을 개방하면서 비로소 프랑스 기업의 지배에서 해방됐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는 것일까? 물론 2014년 봉고 대통령은 ‘토탈가봉’에 5억 8천5백만 유로의 세금을 추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그러나 2015년, 17개월의 위기 끝에 파트릭 푸야네 토탈가봉 회장은 말했다. “우리 아프리카 친구들과 늘 그래왔듯, 이번 분쟁도 평화롭게 해결됐다”고 말이다.


(1) Boubacar Boris Diop, ‘가봉의 독재자, 오마르 봉고의 죽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11월.
(2) Rufin Didzambou, ‘가봉에 진출한 프랑스 기업과 경제 및 사회 발전, 1960~2010년’, <우트르메르>, 제97권, 제368호, 파리, 2010년.
(3) Douglas Yates, ‘The Rentier State in Africa: Oil Rent Dependency and Neocolonialism in the Republic of Gabon’, <African World Press&the Red Sea Ress, 트렌턴(뉴저지), 1996년.
(4) Xavier Harel, Thomas Hofnung, <부당재산스캔들>, 라데쿠베르트, 파리, 2011년.
(5) ‘아프리카인 올랑드? 기로에 선 프랑스 대아프리카정책’, <문제의 아프리카>, 제13호,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 파리, 2012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