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밝은 비글은 어두운 실험실로 보내졌을까?
2016-10-31 유영재
![]() | ||
우리에게 친숙한 만화, <스누피>의 모델이 된 개는 ‘비글’이라는 견종에 속한다. 19세기부터 무리지어 초원을 질주했던 비글은 원래 사냥견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곁의 ‘스누피’, 비글은 대개 실험견이다. 따라서, 가장 많이 ‘안락사’되거나 해부로 주검을 맞이하는 비운의 개다.
그러면 어쩌다가 초원을 누비며 왕성한 에너지를 자랑하던 비글이 어두운 실험실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지난 200년 간 사냥에 특화돼온 비글은 사람과 가까운 개 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좋아하고 따른다. 이런 성격 탓에 가장 많이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 비글은 성격이 매우 밝고 낙천적이며 활동적이다. 이런 점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영국과 미국에서는 10년 이상 가장 키우고 싶은 중형견으로 인기를 누려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밝고 낙천적이며 사람을 잘 따르는 비글의 특성은, 인간이 그들을 어두운 실험실로 몰아넣는 계기가 됐다.
사람을 잘 따른 결과, 사람에게 고통 받다
신약개발처럼 정밀한 과학적·의학적 데이터를 얻기 위한 실험에서는 인간과 가장 장기가 비슷한 동물인 개를 실험에 많이 활용한다. 아무리 사람과 가장 친한 동물이라지만, 개들에게 매일 주사바늘 등 실험도구로 고통을 가한다면 도망치려 하거나 연구원을 물 수 있다. 하지만 비글은 연구원이 다시 주사바늘을 꽂으려 해도 그 두려움을 눈빛으로만 표현할 뿐, 이내 꼬리를 흔들며 연구원을 반긴다고 한다. 실제로 구조한 실험비글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서 알코올 냄새가 나는 탈지면을 들이대면, 비글은 그 순간 꼼짝 않고 인형처럼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에게 친밀함을 표시하는 비글의 습성을 우리 인간의 이익에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동물실험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해도 지구의 생명체 중 다른 존재에게, 그것도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존재에게 칼을 들이대는 종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실험실에서 구조해온 비글들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처음 세상 밖을 나온 비글들은 곁에 사람이 다가가면 꼬리를 흔들기는 한다. 하지만, 막상 얼굴에 손을 가까이 대면 구렁이처럼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움츠린다. 그들은 사람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 손은 두려운 것이다. 늘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줬던 손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의 시선을 피한다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처음 만난 비글들은 절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시선을 피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길거리에서 구조한 비글들은 처음 보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어댄다. 전형적인 비글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실험실 비글들이 처음 보는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실험자, 즉 연구원들에 의해 길들여진 습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구원들도 사람인데, 엄연히 살아 숨 쉬는 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실험을 하면서 그와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애초에 그들을 생명체로 여기지 않는 연구원의 경우에도, 실험대상에 불과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실험을 받으며 굳어진 이런 습관 때문에, 실험실에서 구조해온 비글들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험실의 비글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나의 존재를 의미하며, 그 존재에게 생명력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그러나 어두운 실험실 속에서 한낱 실험도구로만 인식되는 비글들에게는 이름 대신 고유의 일련번호가 주어진다. 이 일련번호는 “우리는 너희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실험이 어려워지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는 표식인 것이다.

‘인도적’처리? 위령제?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동물실험실은 엄청난 ‘고통의 공간’이다. 동물이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동물실험과 가장 밀접한 바이오산업계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한다. 비글 외에도 마우스(Mouse), 래트(Rat), 기니피그(Guinea pig) 등 쥐나 토끼, 돼지, 고양이, 원숭이 등 많은 종류의 동물이 실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자연 상태에 있던 동물들을 잡아다가 실험을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 대부분의 실험동물들은 ‘동물실험 전문 사육장’에서 길러진다. 실험을 통해 정확한 과학적 데이터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실험동물이 유전적 결함이나 건강상태에 이상이 없어야하기 때문에, 실험동물은 대부분 무균 번식장에서 엄격한 관리 하에 생산되고, 실험실로 공급된다.
즉, 이들은 애초부터 실험을 위해 태어나 길러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실험용’ 비글은 ‘가정용’ 비글보다 훨씬 비싸다. 그래서 제약회사에서 비글로 실험을 한 후, 안락사 시키지 않고 다른 교육기관으로 다시 보내곤 한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많은 학생들의 수술실습용으로 쓰이던 비글은,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해부실습을 위해 부검대에 오른다. 한마디로, “본전을 뽑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비글들에게는 편안한 죽음, 형체를 유지한 주검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단 한 번의 실험을 마친 직후 안락사 되는 비글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행 실험 동물법에서는 이들의 안락사를 ‘인도적 처리’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400개가 넘는 전국의 동물실험기관에서는 매년 ‘실험동물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대체 이 위령제는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로 고통스러운 실험에 희생된 동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것인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하고 이기적인 행위에 대한 변명과 위안을 위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내가 구조하려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동물실험은 인간의 과학적 행위 중 가장 낙후된 방법이다. 바이오산업은 이제 신의 영역인 생명체를 복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물로 실험을 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는, 이토록 과학이 발달한 오늘이나 한 세기 전이나 거의 달라진 바가 없다. 지난 세기 우리 인류가 이뤄온 바이오산업의 수준에 비해, 잔인한 동물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의 수준은 턱도 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동안 과학계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쫒아왔을 뿐, 발전 과정에서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려는 노력은 게을리해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리를 세워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동물실험을 하는 이들이나 동물실험을 옹호하는 이들은 주장한다. “동물실험이 잔인하다 해도 불가피한 선택이며, 희생된 동물들이 인류를 위해 값진 희생을 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희생되는 존재가 스스로 원한 것일 때 ‘값진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종”이라는 이유(또는 착각)를 앞세워, 다른 종을 우리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이고 잔인한 폭력일 뿐이며, 이를 합리화하는 것은 우리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한편, 고통을 느끼고 존엄성을 갖춘 생명체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과연 우리 인류에게 진정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행위인지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동물실험으로 얻게 될(것이라 생각하는) ‘과학적 데이터’라는 이점은 어디까지나 우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자신보다 약한 존재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인간성’은 우리 삶이 지향해야할 ‘목적’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 ‘수단’을 위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목적인 ‘인간성’을 잃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왜 그토록 어려움을 무릅써가며 그렇게 열심히 비글들을 구조하느냐고.
그 질문에 대답하자면, 내가 ‘비글’이라는 특정 견종을 좋아해서 라기 보다는, 비글이 ‘실험동물’의 상징, 즉 잔인한 동물실험으로 인한 피해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비글들을 구조하면서 이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떠한 고통을 당해왔으며, 미처 구조되지 못한 대부분의 실험동물들이 어떻게 고통 속에 죽어 가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동물실험에 대해 알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점차 비글로 대표되는 실험동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앞으로 무모하고 불필요한 동물실험은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비글을 구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구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다. 비글 구조를 통해, 우리가 잃어가는 인간성을 구조하고 있는 중이다.
글·유영재
비글구조네트워크 대표, 오보 베지테리언(Ovo-vegetarian: 육류, 생선, 유제품을 먹지 않고 알류는 먹는 채식인) 2년 차이며, 충남 논산의 비글쉼터에서 50여 비글들과 함께 살고 있다.
비글구조네트워크
2015년 11월 국내에 설립된 동물보호단체. 미국 ‘비글 프리덤 프로젝트(Beagle Freedom Project)’의 한국 파트너로 2016년 7월 부설 동물보호소를 건립했다. 주요 활동은 길거리와 실험실에서 고통 받는 비글들의 구조 및 보호, 동물실험반대 캠페인, 불법 동물실험에 대한 감시 및 고발 등이다. 동물실험대체 분야의 노벨상 격인 ‘러쉬 프라이즈(Lush Prize)’에 2016년 아시아 최초로 홍보 부문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웹사이트: www.beaglerescuenetwork.org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groups/Beagl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