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에는 없고 <암살>에는 있는 것

<암살> 이전과 이후,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들

2016-10-31     강성률

충무로의 기이한 현실 하나. 2015년 개봉한 <암살> 이전에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지만, <암살> 이후 개봉한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왜 그런 것일까? 불과 일 년 사이에 영화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그 사이 관객들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암살>은 일제강점기를 다루면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영화사에 기록될 가치가 충분한 영화다. 한국영화가 긴 암흑기를 벗고 되살아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들은 흥행하지 못했다. <아나키스트>,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라듸오 데이즈>, <기담>, <청연>, <모던 보이>, <마이 웨이>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감독들이 출사표를 던진 영화들이 계속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결국 “충무로에 일제강점기의 귀신이 씌였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암살>의 흥행 성공으로 상황은 단숨에 반전됐다. 
<암살>이 흥행에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대중영화적 코드를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3막 구조의 내러티브를 구사해 쉽게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반민특위 문제를 정면에서 조준하면서도 패배적 시각으로 끝을 맺지 않았다. 환상적으로나마 과거 청산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 것이다. 물론 전지현과 하정우, 이정재 등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출연한 점, 그리고 이들의 액션과 멜로,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 자체도 매력 포인트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지만,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논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어 ‘하나의 역사’만 가르치겠다는 것은, 결국 친일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려는 의도로 비춰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역사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가졌던 것이다.
<암살>이 흥행에 성공하고 2016년이 되자마자,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계속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동주>는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의 시와 관련해 재해석한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내레이션으로 읊는 시와 매혹적인 영상이 기막히게 조우하는 풍경을 이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동주>가 그리는 영화적 대상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면서 처연하게 죽어갔던 시인의 삶이다. 북간도에서 경성, 다시 교토와 도쿄로 이어지는 그의 생에서 도저히 저버릴 수 없었던 순수한 마음이 식민지의 저열한 폭력과 대조하며 흑백 화면에 담겼다. 
<동주>가 식민지 피지배자가 어떻게 희생됐는지 고결한 시를 통해 재현했다면, <귀향>은 식민지 지배자의 폭력을 스크린 속에 노골적으로 전시한다. 시골의 청순한 소녀가 일제의 강압으로 끌려온 (성)폭력의 현장을 카메라는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귀향>에서 관객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했던 소녀들의 모습을 매우 고통스럽게 지켜봐야만 했다. 이토록 거칠고 직설적인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2015년 연말 갑작스럽게 정부가 체결한 위안부 협약에 대한 반향이 크게 작용했다. 과거를 청산하자며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조약을, 피해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조차 반대하면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지키려는 대학생들의 몸부림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귀향>의 흥행과 이어졌다. 단언컨대 <귀향>이 이렇게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부 ‘덕분’인 셈이다.

‘민족주의’라는 흥행코드,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
 
<동주>와 <귀향>이 저예산영화인 반면, <덕혜옹주>와 <밀정>은 상당한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다. 두 영화는 공히 역사적인 인물,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덕혜옹주의 삶을 영화로 재현했고, <밀정>은 총독부 경찰 황옥의 스파이 사건을 의열단의 활동과 함께 재현했다. 이렇게 보면 두 영화는 공히 민족주의의 자장 안에서 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혜옹주>는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영화다. 고종이 독살당한 뒤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대마도 번주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마침내 정신병에 걸린 기구한 여성의 한평생을 따라간다. 여기서 덕혜옹주는 식민지의 철저한 피해자이며, 독립을 위해 싸우다 다시 고통을 받는 인물로 그려지면서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연말에 맺어졌던 위안부 합의와 <덕혜옹주>의 흥행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인과 강제결혼한 뒤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평생 고생한 이야기는 상당 부분 위안부의 고통과 겹쳐진다. 역사왜곡 논란에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런 요소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밀정>도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향해 총독부의 고위 경찰이 된 인물이, 다시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는 설정 그 자체로 매우 매혹적이다. 사실에 의거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이 영화에서 김지운 감독은 허무주의적 시각에서 결말을 맺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강인한 의지의 독립군을 그려내며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증명했다. 선택의 길에서 독립운동이라는 ‘의(義)’를 향해 달려갔던 한 인간의 이야기.
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을 보면, 이전의 영화들이 왜 흥행에 실패했는지 알 수 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간악한 일제의 억압에 맞서는 용감한 인물들의 등장, 또는 일제의 억압에 속수무책으로 고통 받아야 했던 피해자의 나열. 이 모습들을 영화적으로 고통스럽게 재현함으로써 2015년과 2016년의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이전의 영화들은 그렇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아예 다루지 않거나, 다룬다하더라도 <모던 보이>, <아나키스트>, <라듸오 데이즈>, <기담> 등에서처럼 근대화의 환상 속에서 미미하게 그려내다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를 다루면서 흥행에 성공하려면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우리는 여전히 반일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부의 국정 교과서나 위안부 협약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면서,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저항적 민족주의가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곡성>의 흥행도 예외는 아니다. 전통적 산신과 일본의 악귀가 대결하는 영화가 <곡성> 아니던가.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맺자니 아쉽다. 식민지의 폭력을 신랄하게 재현하는 영화, 식민지의 폭력에 강하게 맞서는 저항을 그리는 영화가 흥행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 현 정부의 역행적인 정책을 보면서 이런 영화들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강한 민족주의 자장 안에만 머물면서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아가씨>는 특이한 영화였다. 식민지 지배자의 폭력을 남성의 성적 폭력에 빗대어 알레고리적으로 대치한 후, 그 피해의 대상자인 여성들끼리 연대해 식민지 폭력의 발상지인 일본, 그리고 같은 폭력이 자행되는 조선을 탈출해 당시 국제도시인 상하이로 간다는 결론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우리는 언제쯤 식민지의 폭력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진정한 세계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생각들이다.  
 
 
 
 
 
글·강성률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영화관이 없는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에서 처음 본 영화, <황금박쥐>의 감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교 진학을 위해 상경한 후 극장에서 숱한 시간을 보내며 영화에의 꿈을 꿨지만, “영화를 전공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국문학과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어떻게 친일의 길을 갔는지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친일 영화>, <한국영화, 중독과 해독>, <영화는 역사다>, <영화비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