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지만 앞으로, 아직 가시밭이지만…

[Dossier] 아프리카 독립 50주년, 빛과 그림자

2010-02-04     안세실 로베르|<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민주주의와 주체의식, 다원주의 정신 차츰 확산
일부 국가 쿠데타 여전…세계화엔 무방비 노출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토고는 2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도 민주주의가 확산되었지만, 아직은 갈 길이 요원하다. 기니의 쿠데타, 이미 여러 차례 연기된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선거만 봐도 그렇다. 2010년이 아프리카 16개국의 독립 50주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1990년대 시작된 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점검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온몸이 극도로 긴장해 있는 상태로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오른쪽 뒷목에 부상을 입은 대통령이 쓰러졌다. 경호대가 무기를 꺼내들고 달려왔고, 곧 총격전이 벌어졌다. 부상당한 대통령을 옮기는 사이, 나는 현장을 빠져나왔다.”(1) 부상당한 대통령은 2008년 12월 23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무사 다디스 카마라이다.(2) 저격범은 측근이던 아부바카르 ‘툼바’ 디아키테였다. 지난 2009년 12월 3일 발생한 저격 사건 이후 디아키테는 도주 중이다. 현재 카마라 군정 지도자는 라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한 뒤 부르키나파소에서 요양하고 있고, 세쿠바 코나테 장군이 임시로 국정 책임을 맡고 있다.

기니는 아프리카 정치의 악몽을 대표하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군부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고, 부정부패와 폭력과 빈곤이 만연해 있다. 현 군정 이전 지도자였던 랑사나 콩테 대통령도 198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뒤이은 카마라 군부도 2009년 9월 28일 코나크리에서 무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피를 적셨다.

1990년대 초 단일 정당체제가 하나씩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헌법을 채택하면서 아프리카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엿보이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로 들어선 이후 아프리카는 실질적으로 정치적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90년대 싹튼 민주화, 오히려 쇠퇴

식민통치기부터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한 내란의 여파는 여전히 잔재한다. 정치 안정화로 대표되던 코트디부아르 같은 국가에서도 2002년의 사건은 내란의 위험이 아직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국가 형태가 탄탄히 정립되지 못한 코트디부아르는 정당 간에 선거인단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2005년 이후 현재까지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선거는 이미 수차례 연기되었고, 코트디부아르는 사실상 로랑 그바그보의 군주적 통치하에 있다.(3)

이러한 파렴치한 행위 이외에도 민주주의의 이행을 막는 다른 사례가 있다. 재선을 위해 대통령이 헌법을 독단적으로 개정하거나 조작하는 것이다. 기니와 카메룬에서 2001년과 2008년 이같은 일이 발생했는데, 대통령 재임 제한을 없애는 것이 핵심이었다. 토고의 경우 2002년 1차 투표제를 채택했는데, 이는 당시 집권당에 유리한 제도였다. 니제르에서는 2009년 마마두 탄자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야당의 반대에도) 국민투표를 실시해,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재선 제한을 없앴다.

이렇듯 아프리카의 정치는 여전히 폭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검은 대륙이 보여준 진보는 실재하며, 1990년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말했듯 “아프리카는 아직 민주주의를 도입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4)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자유는 많은 제약에 부딪혀 약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선거는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근대’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여전히 단일정당 체제를 유지하는 에리트레아만이 대통령제나 의회제를 도입하지 않았다.(5) 비록 오점으로 얼룩져 있으나, 아프리카 곳곳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있다. 2007년 토고는 최초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콩고민주공화국은 2006년 7월 사상 처음으로 자유총선을 실시했다.

아프리카연합(AU)은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군사 쿠데타를 금지하며, 이전의 아프리카통일기구(OAU)와는 달리 이를 어길 경우 제재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카마라 군정하의 기니가 아프리카연합 회원 자격을 정지당한 것이 좋은 예다. 재정 원조 또한 일정한 정치 관련 규정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 쿠데타 관행조차도 근대화되었다. 기니비사우 군부는 2003년 쿠데타 당시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의장에게 공식적으로 전화를 걸어, 군사 쿠데타가 진행 중이나 곧 선거를 실시할 예정임을 알렸다(2004년과 2005년에 실질적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또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시민 권리 회복을 위한 ‘민주적인’ 쿠데타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1991년 말리와 2003년의 모리타니가 이에 속한다).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권리 의식이 확산되면서, 일반 국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펼침막으로 내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선거에 대한 여론화도 활발하며, 유권자의 관심도 높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리샤르 바네가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을마다 시민으로 구성된 행사준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국회의원 후보자나 정당 총재가 방문할 경우, 이들의 사진과 홍보자료를 내겁니다. …이들이 떠나고 나면 즉시 홍보물 수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깨끗이 자리를 청소하고, 다음 후보자의 도착을 준비합니다. 정치인의 방문이 잦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하는 장소마다 탐탐과 각종 악기, 벤치, 의자 등이 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6) 언론 자유는 널리 확산되었고, 블로그에 신랄하고 회의적인 의견을 개진하거나 활발한 정치운동을 펴는 사람도 많다.

단일정당 체제 시대와 달리, 야당은 사회활동의 주체로 받아들여졌고,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와 함께 ‘국가의 활력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은 국제원조 속에서 자라났는데, 1970년대 부재했던 정치적 다원주의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 아프리카 국가 내 ‘국민회의’를 통해 민주화가 싹튼 것도 이러한 정치 운동가와 노조 지도자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은 독재자들을 놀라게 했다. 1990년 국민의 반대로 사임하면서, 베냉의 독재자 마티외 케레쿠는 ‘시민 쿠데타’라고 이를 비난했다. 정치가 막다른 상황에 놓일 때마다 시민은 시위에 참가했다. 때로는 각기 다른 정당 지지자들이 개별적으로 시위를 조직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008년 치러진 선거 결과의 신뢰성을 두고 야당의 안드리 라조엘리나와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이 대립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대통령은 사임했으나, 야당도 집권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연합의 주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여야는 통합정부를 구성하게 된다.(7)

비록 초보적인 진보가 엿보이지만 정당한 경쟁에 대한 선거윤리는 아직 미약하다. 정치 지도자들은 표면적으로 선거윤리를 지키지만, 표를 얻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선거 부정이 다반사이며(발견되기 전까지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투표용지들을 생각해보라!), 국제사회가 늘 주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제사회가 짐바브웨에서 로버트 무가베를 상대로 보인 엄격함은 정당했지만, 반대로 친프랑스 노선인 가봉의 알리 봉고 대통령이나 부르키나파소의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2009년 가봉의 대통령 선거를 두고, 코트디부아르의 테오필 쿠아무오는 자신의 블로그에 “승인을 나타내는 프랑스의 절제된 표현”과 “민주화 문제를 이란에서만 찾는 미국과 영국의 침묵”(8)이라며 비난 글을 올렸다.

보편화된 선거, 더 보편적인 부정

독재의 위험은 과거 독재를 경험했던 나라를 포함해 여전히 여러 나라에 도사리고 있다. 세네갈의 와데 대통령을 비난하는 책을 발간한 기자 출신 작가 마무두 쿨리발리는 협박을 받았다. 또 정권을 잡은 쪽은 선거에서 이기고자 유럽에서 법률고문이나 홍보담당을 고용하는 등 사치스러운 선거전을 벌이는데, 이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국가 자원을 낭비한다. 이에 맞서는 야당에 선거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는 재력 있는 후원자들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이 선거부정 스캔들을 겪으며 1990년대 선거자금 및 정당자금을 규제하기 시작했다면, 아프리카에서의 정치자금 규제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고, 팽팽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규제 도입이 진행 중이다. 독재체제하에 있는 일부 국가에서는 야당이 국가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것을 일종의 부정부패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야당을 분산시켜 정권을 유지하고자 일부 지도자들은 군소정당 창립을 장려하기도 한다(가봉·카메룬·부르키나파소가 그런 경우다). 이 때문에 몇몇 국가에는 선거 참여가 가능한 정당 수가 100여 개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이곳 민주화는 아직도 프랑스 정치학자인 장 바야르가 지적한 대로 ‘착복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9) 인기 전술이 만연한 이곳에서는 후보자들이 현금이나 현물 등 선물 공세를 펼친다. 빈곤에 시달리고 극단적이기까지 한 부의 불평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유권자는 선물 공세 전략을 정당한 보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훔쳐간 것을 받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가난은 정치인들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착복하는 부를 생각하면 우리가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때문에 선거에서도 표를 팔다시피 할 수밖에 없는 거고요.”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폭력적 탄압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물론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경쟁자인 모건 창기라이가 2008년 기동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부어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을 보면 폭력이 언제든 다시 사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카메룬 출신 기자이자 통합아프리카네트워크 의장인 에티엔 드 타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상대가 공무원이면 사임시킬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씁니다. 일반 기업에 직장을 둔 사람일 경우 고용주를 압박해 해고시키도록 합니다. 자영업자라면 공권력을 동원해 제품 판매처를 막아버리고 모든 거래처가 거래를 끊도록 합니다. 주변 사람에게도 압박을 가해 일절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합니다. 심지어는 부인에게 위협을 가해 부인이 남편을 떠나도록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10) 정치적 경쟁자를 비참하게 만들고 고립시키는 방법은 ‘생계 협박’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어떤 정치인은- 국민과 재정 원조자들의 요구로 지난 몇 년간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부패’를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한다.(11) 경쟁자들이 석연치 않은 부패 혐의로 법정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곤 하는데, 2007년 나이지리아의 아티쿠 아부바카르와 세네갈의 이드리사 세크의 부패 사건도 이에 해당한다. 결국 속임수에 걸려든 일부 야당 지도자들은 외면 속에 힘들게 사느니 망명을 선택하기도 한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타요의 설명에 따르면, 창길라이처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서방국가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니의 군정과 나이지리아의 헌법 조작 사건과 관련해, 코트디부아르 출신 작가인 브낭스 코난은 이렇게 비꼬았다. “우리의 지도자 중 비웃음을 사지 않고 탄자(니제르 대통령)와 다디스 카마라에게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에 대해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이는 과연 누가 있을까?”(12)

국제기구들의 이중성

아프리카의 민주화는 독립 후 국가발전 전략이 실패로 끝나면서 국가가 신뢰를 잃은 가운데 진행되었다. 다원주의의 도래는 1980년대 국가 채무위기 이후 국제 금융기관들의 철저한 압력하에 이루어졌다.(13) 복수정당제 허용과 인권 존중을 조건으로 원조를 하면서 국제 금융기구, 유럽연합 같은 재정 원조자들은 경제적 성격의 조건도 함께 걸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정당들이 구조조정 계획과 빈곤 퇴치 프로그램을 포함한 일률적인 거시경제 정책을 내세우며 건설적 비판과 논쟁을 벌이는 정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국제 금융기구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정치인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정치인이 국민보다 오히려 재정 원조자들의 눈치를 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한 재원도 없고, 외국이 강요한 제약에 속박된 채 아프리카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기반을 갖출 수 있겠는가?

1960년대의 무관심한 엘리트 계층(프랑스 흑인학생연맹을 예로 들 수 있다)을 대신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고심하는 부패한 특권층이 자리를 차지했다. 공격적인 다국적기업, 프랑스·영국·중국 등 외국 정부와 돈에 매수된 엘리트들은 서로 역할을 나누어 끔찍한 연극을 벌이고 있고, 시민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다국적기업인 엘프가 오랫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콩고 브라자빌 출신의 한 반세계화 운동가는 서슴없이 쿠데타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둔 정당성이 있고, 석유에 기반을 둔 정당성 두 개가 존재합니다.” 아프리카 내 진보주의자들이 강대국의 승인하에 물리적으로 제거되었음에도(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나 부르키나파소의 토마스 상카라가 이런 경우다)(14), 많은 아프리카 출신 정치평론가들은 민주주의의 부진을 아프리카 현지의 문제로 보고 있다. 가나 경제학자인 조르주 아이테이는 정부 관료에 대해 “독립 후 아프리카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을 배신한 ‘나태한 하마’ 같은 족속들”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예를 들어 조지프 모부투는 루뭄바를 제거하려는 벨기에 첩보기관의 병력 역할을 했다). 그는 국가의 자원을 착복하면서도 자국민의 불행의 씨앗으로 과거 식민지배를 탓하는 ‘국민의 고혈을 빠는 흡혈 정부’(15)에 분개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제 금융기구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권고한 정책이 ‘병을 키우는 약’을 처방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주의와 제약 없는 완벽한 자유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코트디부아르 부아케대학 사회학 교수인 프란시스 아킨데스는 “민영화를 위시한 구조조정 정책의 효율성 논리와 민주주의에 불가분적인 형평성 논리 사이의 복잡한 모순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16)

정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짐에 따라 군부는 정의의 수호자를 자청하고 있고, 차드의 경우가 그러하듯 무장반군은 속수무책인 정부를 대신할 당연한 해결책으로 부상했다. 또한 콩고민주공화국 사례에서 보듯, 사회적 불평등이 초래하는 폭력은 언제나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토고 장관 출신인 아추체 코쿠비 아그보블리는 “외세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가 민주화될 수 있는가?”라고 핵심을 꼬집었다.(17) 민주주의가 안착되려면 국가의 주권과 국민 주권이 실제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적 신탁통치와 더불어 오늘날의 아프리카는 ‘국제사회’의 그늘 아래에 있다.

유엔과 산하기관, 유럽연합과 국제사법재판소는 실제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정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인도적 구호나 분쟁 중재와 같이 대부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동 국가에서 저질러진 범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아프리카 범죄자들이 공론화된 후에야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18) 이러한 관계는 어처구니없이 보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유엔이 코트디부아르 선거 보고서를 보증하는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프리카는 점점 더 외세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작 불안정한 정세의 근원이 되는 문제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바로 국제관계의 폭력성과 불공정성이다.(19)

젊은 세대에 거는 희망

이렇듯 흥정이 난무하고 와해될 대로 와해된 아프리카의 정치 세계는 재건되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독립 후에도 공공 이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역시 ‘굿 거버넌스’가 가진 부작용 중 하나다. 재정 원조자들의 눈에는 ‘국민을 위한 정부’와 ‘훌륭한 공공관리’는 서로 무관한 개념으로 비치는 듯하다. 정치 논쟁과 사회관계는 실용주의에 의해 묻혀버렸고, 한때 구조조정 계획으로 무너졌던 중산층이 몇 년 전부터 제자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공동체 정신보다는 이기적 시기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요하네스버그대학 교수이자 사학자인 아실 므벰베가 근심하는 점이다.(20)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는 부족 공동체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남아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우처럼 국가 의식이 상당히 활성화된 듯 보이기는 하나, 아프리카에서 복수정당제는 실상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적 속성을 띠고 있으며, 공동체 의식도 여기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 콩고 출신 법학자인 브와일라 치엠베는 선거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이러한 특성을 반영한 대표 선출제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21) 이러한 시스템이야말로 케냐에서 벌어졌던 정적에 의한 ‘민족 정체성’ 악용을 막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구식 개인주의를 재정의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민주주의 모델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22) 민주주의 제도의 상당 부분이 유럽에서 들어왔고, 많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이 프랑스의 제5공화정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아프리카에 맞는 방식으로 채택되었는지 의문이다. 카메룬의 마리 루이즈 에테키 오타벨라는 ‘행정상의 이유’로 대통령 선거 출마가 금지됐다. 오타벨라는 국민으로 구성된 의회를 설립해 국민의 바람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메룬 출신 작가인 셀레스틴 몽가는 아프리카가 처한 불행의 깊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프리카 문화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상당 부분 토대를 상실했습니다. 아프리카는 다음의 네 가지 요소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로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자존심과 자신감의 부재, 둘째 지식과 학문의 부재, 셋째 리더십의 부재, 마지막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입니다.”(23) 그는 ‘행정적 복수정당제’를 탈피해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교육을 비롯해 생각과 행동의 일치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케냐 출신의 작가인 피로즈 만지가 파하무(스와힐리어로 ‘지식’을 뜻함)라는 단체를 설립한 이유다. 그는 신기술을 바탕으로 인권, 분쟁 해결, 언론의 역할 등에 대한 온라인 교육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 내 정치운동가들을 키워내고자 한다. 파하무는 아이테이가 ‘치타’라 부르는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배를 겪지 않았고, 그로 인한 콤플렉스도 없으며, 쉽게 속임수에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ecile Robertt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라디오 프랑스 앵테르나쇼날>, 2009년 12월 16일, www.rfi.fr.
(2) 질 니베, ‘기니 젊은 쿠데타 장교, 달변- 학살의 두 얼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참조.
(3)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코트디부아르 학생단체들의 광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를 참조할 것. 로랑 바진, ‘국가 정체성이라는 전염병’, 이번호 8쪽 참조. 
(4) 비록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말했듯, “아프리카인은 역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2007년 7월 26일 다카르 연설문).
(5) 스와질랜드는 선거를 실시하고 있으나, 정당 참여는 금지되어 있다.
(6) 리샤르 바네가스, <민주주의의 조심스러운 행보>, Karthala, 파리, 2005.
(7) 레미 카라욜, ‘마다가스카르에서 벌어진 두 남자의 결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3월.
(8) http://kouamouo.ivoire-blog.com.
(9) 장프랑수아 바야르, <아프리카 국가와 착복 정치>, Fayard, 파리, 1989.
(10) http://edetayo.blogspot.com.
(11) 나이지리아는 이에 따라 경제 및 금융 범죄 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문서상으로 특별위의 활동은 눈부셨다. 부정부패, 돈세탁 및 유사 범죄로 56건 이상을 처벌했고, 부패 공직자나 퇴진당한 정치 지도자가 소유한 50억여 달러의 자산을 동결하거나 압류했다. 은행장들은 기관 내 예치된 불법자금을 반환해야 했다. 여러 정치인들이 더불어 처벌받았다.
(12) 인테르, 아비잔, 2009년 10월 22일.
(13) 다미엥 밀레와 에릭 투생의 <부채에 대한 50문답>을 참조할 것. Syllepse, 파리, 2003.
(14) 파트리스 루뭄바(1925~61)는 독립 후 콩고의 첫 총리를 지냈으나 벨기에 첩보기관과 미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암살됐다. 범아프리카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토마스 상카라(1949~87)는 1983년에서 87년까지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을 지냈다. 쿠데타로 퇴진했으나 중도에 암살됐다. 상카라의 암살에는 아프리카의 친프랑스주의자들이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브루노 자프레의 ‘부르키나파소,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월호를 참조할 것.
(15) 조르주 아이테이, TED 회의, 아루샤, 탄자니아, 2007년 6월 10일, www.ted.com/index.php/talks/top10.
(16) 프란시스 아킨데스, ‘민주주의 전환에 대한 사실 검증.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회의 및 기타 민주주의 이행 과정 관련 보고서> 내 수록,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 Pedone, 파리, 2000.
(17) 아추체 코쿠비 아그보블리, <아프리카인의 운명과 세계>, L’Harmattan, 파리, 2002. 2008년 8월 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으며, 암살로 추정된다.
(18) 콩고 출신 토마스 루방가 딜료, 제르망 카탕가, 마티유 느구졸로 추이는 재판소에 구류되었다. 수단의 바히르 이드리스 아부 가르다는 2009년 5월 18일 법정에 출두했다. 체포영장이 우간다를 대상으로도 발부되었다.
(19) Indispensable Afrique, <세상을 보는 창> 108호, 2009년 12월~2010년 1월.
(20) 아실 므벰베, <인종에 관하여. 아프리카 흑인의 사고방식 비판에 관한 단상>, Fayard, 파리, 2009.
(21) 브와일라 치엠베, <다국적 국가와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정치 르네상스의 사회학>, Harmattan, 2002.
(22) 아프리카연합의 인권헌장은 공동체에 대한 시민 의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제법 문서 중 하나다.
(23) <Le Messager>, 두알라, 2006년 5월 14일. 


<위태위태한 선거전>

아프리카에서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란 아직 요원하다. 세네갈(2000), 말리(2002·2005), 베냉(2006), 가나(2008), 보츠와나(2009), 남아공(2009)이 그 예이다. 아직도 세습적 권력승계가 존재하며(콩고민주공화국· 2001), 가봉(2009)과 토고(2005)에서처럼 번번이 부정선거로 얼룩진다. 세네갈의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 카림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욕심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야당이 선거 참여를 거부하는 일도 정기적으로 일어난다. 수단(2000), 기니(2003), 지부티(2005), 차드(2006), 세네갈(2007)이 그 예이다.

토고(2007), 짐바브웨(2008), 가봉(2009)에서 볼 수 있듯, 선거 결과를 두고 반발하는 일도 빈번하다. 선거는 종종 살인적인 폭력으로 얼룩진다. 코트디부아르(2000), 에티오피아(2005), 나이지리아(2007), 케냐(2007~2008), 마다가스카르(2008)가 그러했다.

1970년대에 비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쿠데타도 여전히 잔존한다. 모리타니(2003·2005), 기니비사우(2003), 중앙아프리카공화국(2003)이 그러하다. 코트디부아르가 2002년 쿠데타를 간신히 피해갔다고 하지만, 사실상 국가는 양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