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입구로 들어간 파키스탄 분쟁, 그러나 출구는 없다

미국 대리전 벌이는 정부와 전투 자체가 목적이 된 탈레반
접경지역 주민들, 미군 무인항공기 공습 겹쳐 무고한 희생

2010-02-04     무하마드 이드리스 아마드

서방 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2009년 11월 19일 카불에서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8년에 걸친 외국군의 군사 개입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 회오리바람에 이웃 국가 파키스탄까지 휘말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군 폭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와 공공 세력의 철수로 극렬주의가 활개치는 국경 부족지역에서 두드러진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와지리스탄에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이미 몇 달 전 스와트 계곡에서도 같은 유형의 작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었음은 본지 특파원의 취재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나는 2009년 9월 중순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서쪽 근교의 하야타바드로부터 바람 소리에 뒤이어 폭발음이 나는 것을 9차례 들었다. 어디를 겨냥한 로켓 발사였을까? 키베르 부족지역에 잠입하기 위해 장벽을 넘는 이들을 감시하는 국경 경비초소가 목표물이었다. 
 2002년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의 부추김 속에 탈레반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그 일환으로 연방직할 부족지역(FATA·Federally Administrated Tribal Areas)에서 수많은 군사작전을 펼쳤다. 파키스탄 북서부에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따라 분포한 이들 지역은 7개 구역과 6개 지방으로 나뉘며, 거주민 수는 300만 명으로 파키스탄 인구의 2%를 차지한다. 패전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는데, 북와지리스탄 구역은 대소련 항쟁의 사령관이던 잘랄루딘 하카니가, 바자르 구역은 굴부딘 히크마티아르가 이끄는 이슬람 정파 ‘히즈베이슬라미’가 지휘했다. 당초 파키스탄 연방정부는 자국에 우호적인 이들 아프간인을 인도의 아프가니스탄 영향력 확대에 맞설 대항마로 간주해 공격을 자제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 ‘이방인’을 체포하기 위해 남와지리스탄에 군을 투입했다.(1)

   취재 현장서 9차례의 폭발음
 손님으로 찾아온 탈레반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부족들에게 정부의 탄압이 가해졌고, 이 부족들도 연대해 중앙세력에 저항했다. 아프간 탈레반보다 전반적으로 훈련이 덜 된 파키스탄 탈레반에 여러 군사조직이 합류했고, 나이가 들어 효율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은 버려지거나 살해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지 권력을 거머쥔 대표적 인물이 카리스마 넘치는 네크 무하마드다. 그는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아프가니스탄의 대소련 항쟁에 참여한 바 있으며, 파키스탄에서도 적극적으로 미국에 저항했다.
 대소련 항전 당시에도 아프간 반군과 그들의 무기가 이들 지역을 거쳐갔지만, 정치조직이 변하거나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파키스탄의 저명한 분석가 루스탐 샤 모흐만드는 말한다. “정부 정책과 현지 주민들의 염원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첫째 2001년 페르베르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둘째 순전히 미국만을 위한 이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무력을 남용했으며, 셋째 실종되거나 미국에 인도된 용의자 중에 무고한 사람이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주민과 정부 사이에 골이 깊어진 것이다.
 2002년 선거 때는 이 지역에서 (집권당에 집단 반발하는) ‘징벌적 투표’ 행태가 두드러졌다. 그 결과 ‘북동변경주’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종교 정파들의 연맹인 ‘행동연대위원회’(MMA·Muttahidda Majlis-e-Amal)가 집권하고,(2) 기존 조직이 와해됐다. 특히 19세기 중반 영국 식민통치 이래 ‘말리크’라 불리는 부족장들과 연방정부를 연계하는 역할을 한 ‘정치중개사무국’이 붕괴됐다. 부족들의 전통적 인프라와 지역자치라는 개념이 훼손되면서 치안이 악화되었다.
 2004년 무샤라프 대통령을 노린 두 차례의 테러가 발생한 후 파키스탄 정부는 남와지리스탄에 전투용 헬기와 군인 5천 명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들 병력은 현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정부는 네크 무하마드와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18일 이 젊은 지도자가 미국의 공습으로 숨지면서 휴전 상태는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미국에 주권을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파키스탄 연방정부는 이 사건을 자신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2개의 평화협정이 추가로 체결됐다. 그러나 2007년 8월 파키스탄군은 친탈레반주의자들이 점거하고 있던 이슬라마바드의 한 이슬람 예배당을 기습 공격했다.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자 다른 대도시에서도 테러가 잇따랐다. 파키스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작전 무대를 바자르·모흐만드·키베르 등지로 확대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승자는 없었고, 피난을 떠나는 수백만 명의 주민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분노만 커져갔다.

 

    평화협정, 체결과 파기 반복
 스와트 계곡에서 2년 전부터 꿈틀대던 긴장감은 2009년 들어 정점에 달했다. 지역 사법제도의 복원을 요구하는 현지 정당 ‘이슬람법 적용을 위한 운동’(TNSM·Tehreek Nifaz-e-Shariat-e-Muhammadi)과 파키스탄 정부가 체결한 새로운 평화협정인 ‘이슬람 법질서’(Nizam-e-Adl)가 실패로 끝나면서 파키스탄군이 이곳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말라칸드 지역을 구성하는 세 구역, 즉 치트랄·디르·스와트는 1969년까지 독립된 왕국으로 고유의 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법은 스와트 계곡에서 통용되던 이슬람법의 변형이었다. 왕국이 파키스탄에 편입되면서 법 또한 파키스탄 국법으로 대체되었지만 기존 사법 절차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법원에서 처리되지 않은 사건들이 쌓여갔고, 판결은 하염없이 미뤄졌다. 급기야 1970년대 말 예전 제도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수피 무하마드가 1989년 ‘이슬람법 적용을 위한 운동’을 세우면서 여기에 가세했다.
 이 정당은 이후 몇 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무장투쟁을 벌였고, 1994년에는 베나지르 부토 정권에, 1999년에는 나와즈 샤리프 정권에 폭력 종식을 약속하며 각종 양보를 얻어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고, 정당 세력은 확대되었다. 수피 무하마드는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1만 명을 이끌고 아프간으로 출격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목숨을 잃거나 생포되었고, 무하마드는 크게 신뢰를 상실한 채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데라 이스마일 칸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2005년 그의 사위인 마울라나 파즐룰라가 ‘이슬람법 적용을 위한 운동’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었다. 부족지역에서 미군 무인정찰기의 공격을 피해 모여든 저항세력들이 대거 합류한 덕분에 이 운동은 급진성을 더하며 강화되었다. 2007년 12월 파즐룰라가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TTP·Tehreek-e-Taliban Pakistan)으로 개명한 후 조직은 빈곤층 사이에서 지지도가 상승했다. 지도자인 바이툴라 메수드는 대중주의적 화법과 신속한 판결 방식, 그리고 구태의연한 봉건 엘리트에 대한 비판으로, 불만에 가득 찬 많은 젊은이들을 규합했다. 정치 분석가인 아시프 에즈디는 젊은이들을 “국가가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파키스탄의 극렬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증대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 서민의 빈곤화를 조장하며 절망을 심화시킨 엘리트들의 행동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젊은이들은 실업난을 겪으면서 탈레반 대열에 대거 합류했다. 덕분에 무기를 손에 넣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유난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민영 언론이 정치 참여를 부추긴 면도 있다. 아울러, 탈레반이 전개하던 전쟁이 엘리트에 대항한 투쟁으로 비친 것도 젊은이들을 끌어들인 요인이었다. “일부 지역의 무토지 농민은 부유한 지주에게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에즈디는 설명한다. “서민에게 사회적 장벽을 넘어설 기회가 거의 없어 보이는 이런 나라에서는 정부, 정치체제, 엘리트가 모두 서민을 적으로 삼아 연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혁명적·종교적 열기가 결합하면서 탈레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3)

      탈레반도 싫지만 정부는 더 싫어
 그러나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범법자들까지 조직에 동참했다. 탈레반의 즉결심판을 피할 수 있는데다 무기와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라이벌과 주민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현지 탈레반은 자신들의 이슬람 교리 해석에 따라 여성의 교육을 금지했으며 100곳 이상의 학교를 폭파시켰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지지도는 급격히 하락했다.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은 대변인 마울비 오마르의 입을 빌려 이러한 결정에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한 북서변경주의 파슈툰 정부는 2008년 수피 무하마드를 석방했다. 무하마드는 폭력 사용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뒤 2009년 2월에는 정부와 협상 끝에 일종의 타협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법질서’ 협정을 이끌어냈다. 이슬람법을 기본으로 삼고 국가법을 적용하는 이슬람 법원을 연방정부가 인정하는 대신 탈레반은 적대적 관계를 종식하고 무기를 내려놓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협정은 2009년 4월 14일이 돼서야 비로소 조인됐다. 스와트 계곡은 잠시 정상을 되찾는 듯했으나 주민들 간의 평화는 회복되지 못했다. 양쪽 모두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 평론가 및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현지인들은 새로운 법제도를 즉각 비난했다. 그들은 파키스탄이 벼랑 끝에 몰려 있으며 수도 인근까지 진출한 탈레반이 핵무기를 수중에 넣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주장했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대한 압력은 갈수록 거세졌다. 지난해 5월,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의 한 투쟁조직이 인근 부네르 계곡에서 선동적 모습의 오토바이 경주를 펼쳤다. 당시 언론은 이를 수도에서 시위를 벌이기 위한 전초전처럼 소개했으며, 탱크가 출동하기까지 했다.
 파키스탄군은 이들을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군사작전 이후 약 300만 명의 민간인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다. 남아 있던 이들도 상당수가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이러한 행위를 비난하며 필요한 원조 가운데 3분의 1가량만을 제공하겠다고 못박았다. 대부분의 난민은 가족, 친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기거할 곳을 찾았다. 파키스탄 정부는 아무런 지원책도 내놓지 않았으며 외국의 원조도 부패한 정치인들이 대부분 착복했다. 파키스탄 동부의 신드주와 펀자브주의 지도자들은 난민 유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했고, 이는 분쟁에 감춰진 인종차별적 측면을 드러냈다. 파슈툰족은 이러한 조치가 겨냥하는 주요 부족이었다.
 하지만 부족지역에서 이루어진 군사 개입과 달리 이번 작전은 파키스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지난여름 실시된 각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지율 41%).(4) 또한 정치 지도자, 군, 언론도 이를 성공적이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모두들 무력 사용까지는 지지하지 않았으나 말라칸드의 저항세력과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저명한 기자이자 분석가인 라히물라 유수프자이는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행동 주체가 아니다.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압력을 행사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파키스탄 정부는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파키스탄이라는 국가에나, 보유한 핵무기에서나 저항세력이 위협으로 작용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정부에 따르면 탈레반 수는 기껏해야 5천 명을 넘지 않는다. 이들이 스와트 계곡을 장악하고 부네르 지역에 진입해 있기는 하지만 수도 진격에 투입될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파키스탄 인구는 1억6300만 명으로 그중 100만 명이 군인이며 최신 장비로 무장한 공군력을 갖추고 있다. “탈레반은 수도로 진격할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고 유수프자이는 말한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곳은 말라칸드뿐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7개 지구 가운데 3곳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편 과거 정교분리주의를 표방한 2대 정부와 맺은 협정들과 더불어 이슬람법을 통치에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한 ‘이슬람 법질서’ 협정도 쌍방의 양보 조치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일각에서는 수피 무하마드가 자신의 세력을 활용했다면 분쟁의 근원을 제거하고 급진주의자들을 배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파키스탄 정부 각료 출신 논평가인 로에다드 칸은 과연 정치적 선택 가능성을 모두 타진했던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우리는 이보다 더 쓸모없고, 정당화하기도 힘들며, 승리하기도 어려운 전쟁을 본 적이 없다. 반군들의 비전통적 방식에 맞서 오로지 무력에만 의존하다보니 승산이 높지 않다. 반군들로서는 굳이 승리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만이 관건이다.” 또 다른 논평가인 루스탐 샤 모흐만드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국가에 적대적인 요소를 제압하는 것이 개입의 목적이었다면 그저 그들만을 공격했어야 한다. 무슨 이유로 정부는 모든 구역을 점령하려 했는가? 공군력을 동원하고 무분별한 공격을 감행하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은 당연했다.” 스와트 계곡에서 정부가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탈레반의 대두를 초래한 사회·경제·정치적 원인이 해결되지 않고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른바 ‘피러스의 승리’(로마를 공격한 피러스왕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유명무실한 승리-역자)라 일컫는 실속 없는 승리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모흐만드의 견해다.

     상처뿐인 국지전 승리
 유수프자이는 정치적 맹목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인다. 파키스탄 당국은 지난 9월 탈레반 자문위원회인 ‘슈라’의 위원들을 협상 테이블로 초대한 후 체포한 바 있으며, 부족 간 원한이 대물림된 지역에서는 반탈레반 민병대(이라크의 반알카에다 무장 세력인 ‘사와’(Sahwa)와 유사)의 무장을 지원하는 전술도 구사한다. 또한 스와트 계곡에서는 파키스탄 정부의 명령으로 거주 단지를 파괴하는 일도 있었다. 먼 친척까지 함께 거주하는 이들 주택을 공격하면 도피 중인 아들 하나뿐만 아니라 항쟁에 가담하는 신참병 친지까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록 이곳에 불안정하나마 평화가 다시 찾아오고는 있지만, 내전이 끝난 이래 치안군이나 현지 민병대에 의해 아무런 재판도 없이 처형된 용의자와 반군 지지자 수가 200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탈레반을 무서워했지만 오늘날에는 정부군이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유수프자이는 말한다. 아울러 “누구든지 ‘탈레반’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누군가 담판을 지을 일이 있거든 상대를 탈레반 지지자로 몰아가기만 하면 된다. “당신의 집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고, 당신도 언제든 감금될 수 있습니다. 내일 갑자기 당신의 몸이 들판에 버려질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겁을 먹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탈레반의 활동은 지난 10월 군부대가 남와지리스탄에 진입하기 직전에 급증했다. 28살의 지도자 하키물라 메수드의 지휘로 전개된 작전의 주무대는 항구, 코하트, 샹글라, 페샤와르 등지였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정부 세력이 지상공격을 준비하면서 공중폭격을 강화하는 가운데 탈레반의 행동은 갈수록 놀라운 양상을 보였다. 펀자브에서 온 지지자들은 라왈핀디에 위치한 군 사령부를 공격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그러는 동안 미군 무인항공기들의 부족지역 공격은 계속되었다. <더뉴스>(5)가 발표한 한 조사에 따르면 2008년 1월 29일~2009년 4월 8일 60건의 폭격이 가해져 민간인 7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으나, 그 가운데 저항세력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14명에 불과했다. 이에 여론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6)
 충분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군부대와 미국의 지원에 의지하는 파키스탄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현하지 못한 것을 이뤄보겠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군사작전이 시간을 끌수록 국경지대는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고 희생자 수는 증가하며 치안은 악화될 따름이다. 봉기 사태는 이미 펀자브의 일부 구역까지 확산됐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엘리트와 서구 논평가들은 탈레반을 모조리 제거하기만을 바라고 있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탈레반 동조자라는 의심을 받곤 한다.
 최근 2만8천 명의 병력이 남와지리스탄에 진입한 이후 다시 한번 대대적 피난 사태가 발생해 주민의 3분의 1가량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탈레반이 점차 지지세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도 난민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탈레반 만세!”를 외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도리어 이들을 적에게 인도하고 있다. 반감을 사는 것은 탈레반뿐만 아니라 정부도 마찬가지다. 파키스탄이 미국을 위해 싸워주고 있다는 심증은 확고하다. 일례로 정부군의 와지리스탄 공격도 미국 무인정찰기의 호위 아래 이루어지지 않았던가.(7)
 시에드 살림 샤흐자드 기자는 지난 7년간 탈레반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오히려 한층 강화된 모습을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공습을 피해 떠났던 스와트 계곡 지역에 이미 재집결했다. “눈이 내려 주요 물자 보급로를 뒤덮을 즈음이면 탈레반은 빼앗긴 영토를 재탈환할 것으로 보인다.”(8) 그럼에도 서구 논평가들과 언론은 여전히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서방의 낙관론이 사태 악화
 2002년 하야타바드에는 많은 아프간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극빈자들은 키베르로 향하는 잠루드 대로변의 카차 가르히 빈민촌에 터전을 마련했다. 많은 난민이 시내에 상점을 열었으며, 몇몇 구역에서는 교통과 상업을 장악했다. 그리고 여름이면 일부 난민들은 기후가 좀더 온화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다.
 오늘날에는 이들 난민 중 상당수가 치안을 이유로 하야타바드를 떠났다. 이제 여기에는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납치 사건도 빈번히 일어난다. 지난 9월 중순~10월 중순에만 적어도 3건의 자살 테러가 일어났으며, 4건의 로켓 공격이 있었다.
 내가 하야타바드에 로켓이 투하되는 소리를 듣던 그날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아프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섹션에 ‘파키스탄에서 모든 것은 장밋빛’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날 테러의 주모자로는 금지 단체인 ‘라슈카르에이슬람’의 지도자인 망갈 바흐 아프리디가 지목되었다. 과거 친정부 세력에 가담했던 그는 범죄자들이 키베르를 탈출하도록 돕고 NATO의 물자수송을 보호해주었다는 혐의를 받은 바 있다. 이처럼 각 세력은 쉽게 동맹관계를 맺고 파기하고 있다. 이는 민병대를 섣불리 지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야타바드에 로켓 공격이 발생한 다음날, 탄두리빵의 가격은 전날 2루피에서 15루피로 껑충 뛰었다. 반면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치솟고 있다. 거리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모두들 생활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글•무하마드 이드리스 아마드 Muhammad Idrees Ahmad
웹사이트 <펄스>(www.pulsemedia.org)를 공동 설립해 운영 중이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그라함 어셔, ‘남아시아의 위험한 관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월 참조.
(2) 행동연대위원회(MMA)는 2008년 총선에서 몰락했다. 장뤼크 라신, ‘파키스탄, 남아 있는 고역’, www.monde-diplomatique.fr, 2008년 2월 27일 참조.
(3) 아시프 에즈디, ‘고마워요, 수피 무하마드’, <더뉴스>, 이슬라마바드, 2009년 4월 29일.
(4) 이슬라마바드의 갤럽 파키스탄이 2009년 7월 26~27일 실시한 조사와 갤럽-알자지라 8월 13일 공동 조사.  http://english.aljazeera.net/focus/ 2009/08/2009888238994769.html.
(5) ‘무인정찰기 60대의 공격으로 알카에다 조직원 14명과 민간인 687명 피살’, <더뉴스>, 이슬라마바드, 2009년 4월 10일. www.thenews.com.pk/top_story_detail.asp?Id=21440.
(6) 2009년 8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파키스탄인의 59%가 주요한 위협으로 미국을 꼽은 반면 전통적 라이벌인 인도와 탈레반을 지목한 국민은 각각 18%와 11%(이후 비율 증가)에 불과했다. 또한 스와트 계곡의 군사작전을 국민의 41%가 지지하지만, 43%는 그보다 정치적 해법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 줄리언 반스와 그레그 밀러, ‘파키스탄의 군사공격을 돕는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 2009년 10월 23일.
(8) 시에드 살림 샤흐자드, ‘파키스탄에서 시작된 새로운 전쟁’, <아시아타임스>, 홍콩, 2009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