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국가엔 당신이 없다, 경쟁과 카오스만 있을 뿐”

인문학 100년사 1980~90년대 (9)

2016-10-31     성지훈
   
▲ 손을 잡은 신자유주의옹호자인 밀턴 프리드먼과 로널드 레이건 미대통령(오른쪽)

 

1980년대에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이른바 ‘제3차 산업혁명’이 촉발됐다.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 하에,  국가 단위의 산업구조가 규제완화, 민영화, 자유화로 새롭게 재편되던 시기였다. 전후 계획경제와 복지정책을 이끈 케인스주의는 이 무렵에 등장한 영국의 마가렛 대처 전 총리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내건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구시대의 공허한 사상으로 밀려났다.   
앵글로 색슨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로 부상하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불안정해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져 갔다. 또 기업활동을 위한 규제완화로 인해 환경파괴가 심화되고, 오염성 물질 배출이 증가하는 등 지구촌 곳곳이 병들어 갔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마침내 미국 자본주의의 독주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1950~70년대에 사회학, 민족학, 언어학, 정신분석학, 사학, 미학과 정치이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1980년대는 평형추가 되돌아온, 즉 개별성이 부각된 ‘개인 행위자의 회귀’로 요약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인 비판은 사회학 분야에서 나타났다. 중도우파 학자로 알려진 레이몽 부동과 프랑수아 부리코는 1982년 <사회학의 비판적 사전>을 출간했는데, 당시 이 책은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쟁 선포처럼 여겨졌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사회학에서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현한 지배적 구조주의에 맞서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패러다임을 확립하고자 했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구조의 산물인 ‘개인’을 사회분석에서 등한시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부동은 사회학의 행보가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삼아야 함을 주장했고, 막스 베버, 알렉시 드 토크빌 등 고전 저자들의 철학에서 정당성을 찾았다. 
“한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려면, 관련된 개인의 동기를 재구성하고 이 현상을 그 동기가 규정하는 개인적 행동들이 집결된 결과로 파악해야 한다.” 
한편 부동의 사전이 출간된 지 2년 후인 1984년, 알렌 투렌은 저서 <행위자의 복귀>에서 행위자의 사회학을 강조해 탈산업사회의 사회이론 전반을 고찰하고 현재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의 사회학적 중심개념들은 주체, 역사성, 사회운동이다. 그는 사회의 통합과 질서를 전제하는 사회체계론이나 자연진화론을 거부하는 대신, 내재적 갈등과 창조적 행위자에 의한 역사적 변화를 강조한다. 탈산업 사회의 지식과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한 그는 “지식인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을 분석 및 해석하는 역할을 통해 ‘사회학적 개입’을 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차원을 끌어올리고, 압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 관계 생산의 조건을 만드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투렌이 노동자 운동의 쇠퇴 현상을 반영한 견해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관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운동들이 노동운동의 바통을 이어받아 일어났는데, 이미 10년 전부터 사회학자들은 여성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학생운동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예를 들면, 프랑수아 뒤베는 고된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체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역사와 행위자들

‘개인 행위자의 복귀’는 사학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지만, 전기(傳記), 개인, 사건 그리고 특히 문제시됐던 정치성의 복귀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페르낭 브로델이 창안한 ‘고정된 역사’ 혹은 구조의 역사와 반대됐다.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1984)의 조르주 뒤비는 아날학파의 창시자 중 하나인 뤼시앵 페브르의 유산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뤼시앵 페브르는 <마틴 루터>와 <라블레> 등의 전기에서 개인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로 이 1980년대 초에, 이탈리아 사학자 카를로 긴츠부르그(1939~)가 구현한 ‘미시사’ 역시 유행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역사를 구현하되, 개인들의 일상생활에 초점을 맞추는 개인적 차원의 역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은, 개인주의에 호의적인 이론적 관점이 아니다. 이는 방법론적 변화이자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는 또 다른 방식을 의미했다. 1980년대를 ‘인문학의 성숙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이제는 단순히 사회집단의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적 상호작용의 차원까지 더해져 한층 복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찰 가능한 인문학이 도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회적 과정과 집단적 의사결정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밀려오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밀턴 프리드먼이 1947년 컬럼비아대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당시, 케인스 학설은 ‘유일한 공인교리’로 영향력을 떨쳤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 프리드먼이 그 철옹성을 무너뜨리러 나섰으며, 다른 학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프리드먼이 영감을 불어넣었던 통화론 이후, 하나의 공통목표를 지닌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그 목표란, 경제생활에서 국가를 몰아내고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자유방임주의의 옹호자들이 점차 학문적 논의에서 득세하기에 이르렀지만, 자유방임주의적 정책들이 실제로 적용됐던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실질적 위기(1973년 및 1979년의 석유파동,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의 동반 상승, 효과 없는 경제부양책)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케인스에 반대하다

시장의 우월성을 신봉한 프리드먼은 실증주의자이자 열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케인스식 경기부양책들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통계자료를 통해 입증하려 했다. 프리드먼은 경제주체의 소비가 현 소득이 아니라 영구소득, 즉 실질소득과 향후 예상소득에 따라 계산한 소득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공공지출을 전제로 하는 경제부양책은 소비에 부분적인 영향밖에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경제주체는 영구소득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는데, 이러한 부양책은 일시적 소득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는 통화정책 공격에 나섰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제순환과정에 통화량을 투입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진작시키고 실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반면에 프리드먼은 이런 효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팽창적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경기부양책은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킬 뿐, 실업률을 낮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예산을 안정시키고, 생산총액의 변화에 따라 통화량의 변화를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의 열정과 학문적 시각을 경계했던 학계는, 프리드먼의 이론에 곧바로 설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성공리에 책을 출간했고 <뉴스위크>지에 시평을 썼으며, 미디어의 사랑을 받는 스타학자가 됐다. 1970년대의 경제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은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낳았고, 1976년 프리드먼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레이건 행정부를 비롯해 다양한 공공기관의 자문으로 활약했던 그는 제자들과 함께 1978년부터 1982년까지 통화정책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로 또 다른 사조들이 통화론의 행보를 이어나가면서 이를 급진화시켰다. 이 같은 양상의 격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실행됐다. 첫째는 미시경제적 관점을 채택하고 경제주체의 합리성에 관한 가설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예컨대 신고전학파의 주요 인물이자 1995년 노벨경제학자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는 1972년에 ‘합리적 기대’, 즉 각 개인이 합리적으로 현상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어떠한 경제정책을 펴더라도 미리 합리적으로 예상해 행동한다는 가설을 제창했다. 루카스에 의하면, 각 개인은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예상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가 행하는 모든 정책은 경제주체가 이를 좌절시키는 만큼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라는 지적이다.  
신고전학파가 주장했던 정책들, 즉 경제부양책과 예산적자를 멀리하고 중앙은행의 자립을 중시하는 것 등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유래했다. 유럽에서 20년 전부터 시행된 정책들을 상기시키는 수많은 권고도 마찬가지였다. 미시경제적 접근법은 역시 신자유주의적 물결의 일종인 또 다른 발전을 맞이하게 됐다.
둘째는 복지국가 비판론을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공급론의 옹호자들은 생산의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가의 개입이 부를 창출하려는 경제주체들을 좌절시키면서, ‘경제라는 기계’에 제동을 건다고 봤다. 1980년대에 확장된 조세저항운동에 학문적 의미를 부여했던 공급론자들은 곧바로 미국 정부의 최측근 자문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러한 경향을 구현하고 묘사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래퍼 곡선(경제학자 아서 래퍼의 이름에서 따왔다)이다. 이 곡선은 조세율이 특정 비율을 넘어가면, 돈을 더 많이 벌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가 꺾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경우 개인들은 일을 덜 하려고 하고, 결국 조세수입도 줄어든다. 세금이 너무 과하면 오히려 세수가 줄어드는 셈이다. 매우 상식적이었던 이 주장은 조세 감소 정책에 영감을 선사했다.
민영화, 조세 감소, 복지국가 해체, 규제 완화는 새로운 ‘공인교리’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상징했다. 미국 경제학자들이 만든 이 정책들은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와 대처 정부에 의해 적용됐다. 더 넓게 보자면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모든 서구 국가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이후 국제기관들의 영향 및 경제 세계화로 인해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계적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기술적·경제적·사회적인 다양한 요인이 한데 모여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됐다.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이 출현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매체의 발전과 신기술의 등장 덕분이었다. 1980년부터 1986년 사이에 이뤄진 미니텔(국영 프랑스텔레콤이 전화와 정보기술을 결합, 문자 기반의 통신서비스로 개발한 정보통신 단말기), 케이블, 마이크로컴퓨터 정보처리기술의 동시다발적 등장, 무선 라디오의 비약적 발전, TV채널의 민영화 및 다양화에 이어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성공과 무선전화의 열풍이 전체 그림을 완성했다. 이 시대에 커뮤니케이션은 정치적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정치광고가 등장했고, 정부 기구에도 관련 부처가 생겨났다. 이 무렵,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붐이 불어 닥쳤다. ‘보좌관’을 두는 것이 일반화됐으며, 대다수 정치인이 ‘이미지 관리’라는 절대과제에 순응했다. 메시지를 함축한 간략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 됐고, 여론조사 결과는 우선사항이 됐다. ‘쇼비즈니스 정치’의 시대가 온 것이다.
기업 또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 책임자’가 고위임원의 특권계급 속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미지와 화법을 쇄신하고, 정보의 공유를 권장하며, 소속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들이 부여받은 까다로운 임무였다. 기업에선 신입사원을 뽑으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커뮤니케이션과 결부된, 최신 유행의 심리학적 기법(신경언어학적 프로그래밍, 교류분석)을 연수기간 동안 교육했다. 이 연수를 통해 개인 상호간 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경영진의 관계적 잠재력을 증폭시킨다는 것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은 유의미한 활동, ‘최신 유행하는’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성을 완성하고 시민자격을 획득하는 ‘마법의 주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회 내 모든 층위의 관계적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윤활유의 기능까지 떠맡게 됐다.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개인 간 갈등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수많은 분쟁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중재자’의 존재다. 

정보커뮤니케이션학의 등장

아울러, ‘정보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학제간 학문이 각광받았다. 대학에서는 관련 학과나 학부가 속속 생겨났고, 관련 학술지, 학회, 연구단체들이 등장해 이론적인 연구 작업에 나섰다. 예를 들면, 도미니크 볼튼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TV, 언론매체, 영화, 신기술 등을 인식했고, 카트린 베르토라브니르는 정보통신 기술의 역사에 역점을 뒀으며, 아르망 마를라르는 경제와 정치의 관점에서 정보통신의 영향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니엘 다양은 수용이론, 기호학, 담론 분석, 인류학 등을 차용해 정보통신사회의 현상들을 연구했다. 
레지 드브레가 전수한 매체학적 연구들은 광범위한 역사학적 관점으로 볼 때 ‘문화의 물질성’이 지닌 가장 중요한 역할을 증명하는 데 전념했다. 이 역할은 강력한 상징적 기능을 떠맡았으며, 문명적 과정의 흐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매체학은 캐나다출신의 마샬 맥루한의 패러다임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다. 이 패러다임에 의하면 ‘메시지를 구성하는 매체’는 이념의 힘을 확대시킬 본질적인 위협을 지니고 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내부에도 비판적인 사조가 존재했다. 미디어학자인 뤼시앙 스페즈, 필리프 브르통, A. 마틀라르는 커뮤니케이션 이념 및 커뮤니케이션의 이상을 비판했고, 세르주 알리미,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디어 시스템의 일탈을 공격했으며, 폴 비릴리오, 장 보드리야르는 정보통신이 발휘한 마력을 비판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학문적 교차점은 상충되는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하나는 인문과학 및 사회과학(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경제학, 인류학)이라는 ‘전통적인’ 학문을 향한 주제 및 문제로 되돌아가자는 경향이었고, 또 하나는 통합적 주제, 방법론, 개념을 찾아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학문을 구성하자는 경향이었다.

카오스 이론, 학계의 유행? 

정보통신의 마력에 직면한 세계는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세계화로 집약되는 1980년대의 변화무쌍한 시대적 혼란은 카오스 이론을 필요로 했다. 사실, 카오스 이론은 소위 ‘비선형적’인 특정 함수들의 불안정한 작동을 묘사하는 하나의 수학이론이다. 20세기 초에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발견한 이 이론은 1970년대부터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원인은 미미하나 그 영향은 거대하다.” 비선형적 함수들의 첫 번째 특징은 원래의 아주 작은 변동이 장기적으로는 중대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기후 변화를 컴퓨터로 모형화하다가 이 현상을 발견했다. 컴퓨터에 전송된 원 데이터의 아주 작은 변동이 완전히 다른 최종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기후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 셈이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 한편 이 나비 효과를 비방했던 이들은 “방금 재채기 했어? 지진 조심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카오스 함수들에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곡선이 갑작스럽게 괘도를 변경해 결국 하나의 고정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분기점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분기점을 ‘끌개(Attractor)’라고 불렸다. 하천의 경로가 고정돼 있지 않음에도, 결국에는 언제나 바다로 합류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비 효과, 갑작스러운 분기, 끌개…. 이 가설들은 물리학(유체동역학), 화학(특정 반응의 변화), 기상학 등을 막론하고 수많은 현상에 적용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카오스 이론은 당시에 불안정하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고, 세계는 이전 관점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곧이어 카오스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정확한 범위에 관한 논의가 빠르게 시작됐다. 일리야 프리고진, 에드가 모랭 등이 저자로 참여한 저서 <결정론 논쟁>에서는 비결정론적인 새로운 관점을 옹호하는 이들과 카오스 이론의 기만적인 해석을 규탄하는 이들이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비합리주의적’ 일탈을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수학자 르네 톰은 “명백한 카오스는 우연이 아니라 확실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격한 수학적 법칙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컨대 프랙탈 모형을 종종 카오스 이론과 연관 짓지만, 이 모형은 자연에서 접하는, 언뜻 보기에 혼란스러운 형태들이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들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르네 톰은 전형적인 비과학적 태도를 나타내는, 이러한 ‘비확실성을 향한 유혹’을 단호히 비판했다.

새로운 인간 묘사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카오스 이론이 직접 적용될 만한 부분이 얼마 없었다. 재정학 분야에서 사용됐는데, 카오스 이론의 모형이 주가 변동의 설명에 적용된 것으로 보였다(앙드레 오를레앙). 정신의학 분야의 일부 학자들은 이 카오스 이론이 정신적 위기를 모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것이 기만적이든 아니든 적용된 사례를 넘어서서, 카오스 이론은 인문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 중인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이전의 시대는 구조나 기능, 발전 법칙이라는 용어로 인간과 사회에 접근하는 결정론적 관점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제는 새로운 방식의 인간 묘사가 자리 잡았다. 불확실성, 미확정성, 무질서에 더 큰 자리를 남겨두는 묘사였다. 질서와 무질서의 만남은 자크 모노의 평론 <우연과 필연>(1972)의 주요 주제였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에드가 모랭의 <방법론>, 앙리 아틀랑의 <수정과 연기>(1979) 또한 그와 비슷한 견해를 옹호했다. 폴 발레리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주제에 영감을 받아 다음의 문장을 남겼다.
“질서와 무질서라는 두 가지 위험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글·성지훈
파리8대학에서 유럽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불편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 본지에 '인문학 100년사'를 연재하면서 오랫만에 오래된 책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공부할 즐거움에 들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