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혁명수비대의 ‘반혁명’

2010-02-04     베루즈 아레프/ 베루즈 파라하니

2010년 2월, 이란은 혁명 31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2009년 6월부터 가시화된 정권 반대 움직임은 1979년 이후 끊이지 않은 사회적 동요를 또다시 수면 위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란 정부의 위기 대응은 타협과 탄압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세력이 강화된 것은 이란 혁명의 사연 많은 과거를 반영한다.

이란회교공화국이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9년, 이전 왕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군대가 붕괴되고 쿠데타의 불안감에 사로잡힌 시아파 회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제2의 군대를 창설한다. 1979년 4월 22일 신설된 이 군대는 ‘단절의 군대’로 불리다가, 헌법 제150조에 따라 혁명수비대(IRG)라는 이름으로 합법화된다. 혁명수비대의 임무는 ‘국가의 질서와 보안을 지키고 혁명을 수호’하는 일이었다.

1980~81년, 정권의 내부 상황이 악화되어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초대 대통령이 제거되고 반왕정 조직인 무자헤딘(1)이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혁명수비대는 사태를 진압해 호메이니 권력을 확립한다.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혁명수비대는 내부와 전선 모두에서 호메이니 정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조직으로 입지를 굳힌다. 혁명수비대는 전시계획뿐 아니라 배급식량 수입 조절에도 개입했다. 혁명수비대는 정부 책임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혁명수비대 구성원들은 이맘(회교 지도자)을 표방하는 혁명위원회에 참여했다.

호메이니의 혁명 전위로 탄생

급진적인 반대 세력을 소탕하고 이라크전에서 첫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란의 ‘혁명기’는 끝이 난다. 1982년 12월 6일자의 8개조 선언문에서 호메이니는 사유재산과 민간부문의 합법화를 인정하고, 혁명수비대에는 전쟁과 관련한 노력에 집중해줄 것을 요구했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혁명수비대는 알리 하메네이의 최고지도자(2) 선출을 꾀하고, 대통령으로는 알리 악바르 라프산자니를 세우려 했다. 1990년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자 혁명수비대는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한다. 헌법 제147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평시에 정부는 이슬람교의 사법 조치에 완벽히 부합하고 전투 능력에 지장이 가지 않는 한, 지원·교육·생산 활동 및 건설 지하드(이슬람교의 전파와 수호를 위한 종교적 의무) 차원에서 군대의 인력 및 기술적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1990년에 세워져 ‘고르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카탐 알안비아’사(건설 사령부 역할을 하는 복합기업)는 혁명수비대가 관리하는 수많은 회사들의 활동을 총괄했다.

라프산자니의 측근들이 재산을 축적하며 세력을 키우자 하메네이와 보수계는 경계에 나선다. 1996년 3월, 라프산자니의 ‘개혁파’가 5대 이슬람자문회의(이란 국회) 1차 선거에서 쾌거를 거두자, 하메네이는 혁명수비대에 구원을 요청했다. 하메네이는 이렇다 할 위엄도 정치적 후광도 없었고, 호메이니와 같은 종교적 권위도 갖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다만 지원군이 필요했다. 1996년 4월 6일 혁명수비대 총사령관 야흐야 라힘 사파비 장군은 “우리는 이번 2차 선거에서 전면에 개입해야 하며, 조국과 민족을 어지럽힐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표결로써 막아내야 한다”(3)라고 공표했다.

선거에 개입하며 정치활동 일상화

혁명수비대의 이런 개입은 정권 내 힘의 관계를 전복시켜놓았으며, ‘개혁파’의 성장에 제동을 걸었다. 1997년, 보수 진영 후보였던 나테크누리 후보를 누르고 놀랍게도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힘의 균형은 불안정해졌다.

하타미 전 대통령의 두 재임 기간(1997~2005)에 혁명수비대는 그의 개혁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동시에 이 조직은 10여 개 공항 및 걸프 연안에 세워진 60여 개 부두로 들어오는 수입품의 3분의 1을 통제했다. 그 가운데 테헤란 부근에 있는 파얌 공항은 공식적으로는 우편통신부 소속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2007년 카루비 전 의장의 보좌관이었던 무함마드 알리 모카페그가 밝힌 것을 보면, 테헤란 메라바드 국제공항의 25개 통관장도 이들의 감독하에 들어갔다.(4)

장관 가운데는 혁명수비대 사령부 소속이 많았다.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테헤란 시장으로 있던 시절(2003~2005), 카탐 알안비아사가 22억 달러에 이르는 도로와 전철 등 대규모 공공 토목공사 시공권을 따낸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05년, 하타미 지지 세력이 해체되고 국민의 눈에 투기와 부패의 상징이던 라프산자니를 누르며 아마디네자드가 대선에 성공하자, 혁명수비대의 비중은 다시 한번 강화된다.

지난 대선에서 비운의 후보자였던 무사비의 블로그에 따르면, 고르브사는 현재 800개 이상의 회사를 관리하고 있으며, 군대(미사일과 로켓 제조)·개발(도로, 댐, 광산, 관개 인프라 등의 프로젝트)·석유 및 가스(2009년에는 인도 쪽으로 600km의 송유관을 건설하는 22억 달러 사업을 따냄)·통신(2009년 여름, 혁명수비대와 관련된 토세 에트마드 모빈 컨소시엄은 경쟁입찰도 거치지 않고 국영 통신회사 셰르카트 모카베라트 이란의 지분 50% 이상을 장악했고, 당시 거래 비용은 80억 달러)·재무(혁명수비대와 민병대의 두 자선신용금고를 은행화하는 작업이 현재 순조롭게 진행 중임) 등 그 분야도 다양하다.

대형 국책사업 따내 이권 챙겨

2009년 11월 혁명수비대가 공개한 프로젝트는 동남부 크아~바하르의 25억 달러 규모 철로 건설 사업이다. 자파리 장군은 “우리는 평시에 불필요한 전쟁 기계가 아니다”(5)라면서도 의회와 언론이 혁명수비대의 활동을 마피아에 견주는 것에 대해 “혁명수비대는 여러 국가, 특히 일부 이웃 국가에서 보이는 군사 마피아와 절대로 비교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2009년 6월 부정선거(6)로 반대 시위가 불거진 뒤, 혁명수비대는 시위대 진압과 하메네이 지지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12만5천 혁명수비대원들은 여러 군대로 나뉘었고, 아울러 바시지 민병대(혁명수비대 육군의 산하 조직으로 호메이니가 창설-역자)의 저항조직도 관리한다.

권력 내부에서도 비판

10월에 혁명수비대의 ‘라술올라’(Rasoul-ol-lah) 부대 사령관 압돌라 아라기 장군은 자신의 부대가 투표 이후 두 달간 치안 책임을 맡게 되었다고 밝힌다.(7) 그로부터 몇 주 후 혁명수비대의 정치 사무국장 야돌라 자바니는 카루비와 무사비를 포함한 개혁 성향의 야당 수뇌부를 체포한 뒤 실형을 선고했다.(8) 12월 29일 혁명수비대는 반대파를 외국의 첩자라고 비난하며 국민에게 최고 지도자에 대한 지지 표명을 호소했다.(9) 홈페이지에 게재된 시위 현장 사진에는 ‘무슬림 국민’에게 시위 가담자를 색출해달라는 호소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경제·정치 분야에서 영역을 확대해가는 혁명수비대에 대해 친정부적인 곳에서조차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혁명수비대 자체도 내부 분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혁명수비대의 기반을 이루는 일부는 빈곤계층 출신인데, 이들은 조직의 강제적이고 투기성 짙은 방향을 더는 용인하지 않고 있다. 이런 분열 양상은 타협 추구와 진압 시도 사이에서 국가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글•베루즈 아레프 Behrouz Aref
     베루즈 파라하니 Behrouz Farahany

각각 번역가 및 이란 인터넷신문 논설위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졸업.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각주>
(1) 1965년에 세워진 이 조직은 왕정 축출에 가담하고, 1979년 체제 전복에 참여했다. 이후 1981년 호메이니와 단절한 뒤 무장 반대파에 가담한다. 가혹한 탄압을 받은 조직 간부 다수는 해외에 망명해 있는 상태다. 1986년(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이라크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사담 후세인 정부와 동맹을 맺었다.
(2) 지도자운영회의가 임명하는 최고지도자는 가장 높은 정치·종교 직위이며, 이란회교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3) <Kayhan>, Teheran, 1996년 4월 17일.
(4) www.aei.org/outlook/27433.
(5) www.sepahnews.com.
(6) 아마드 살라마티안(Ahmed Salamatian), ‘종교지도자의 탐욕이 빚어낸 이란의 비극’ (Dans le chaudron du pouvoir irani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7월호.
(7) BBC in farsi, 2009년 10월 4일.
(8) <Sobh Sadegh>, Teheran, 2009년 11월 21일.
(9) www.khabaronline.ir.

 


 

혁명에서 혁명으로

이란의 일부 대중운동은 1979년 혁명 당시 대중운동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양쪽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이란의 모습은 무척 다르다. 그동안 도시화가 가속화돼, 이란 국민 대다수는 현재 도시에 살고 있다. 1979년에 50%가 안 되던 도시 인구 비율이 2002년에는 65%를 넘어섰고, 지금은 70% 이상이다. 눈여겨볼 것은 이농 현상만이 아니다. 혁명 초기 농촌 지역에 물과 전기가 공급되고 도로망이 발달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거리를 줄이고 생활양식을 근접하게 만들었다. 의료 서비스, 교육 접근 기회 등 그때까지 도시인의 전유물이던 것이 농촌 주민에게도 문호가 열린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문화 경계선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는 보건 수준 향상, 문맹률 저하, 대졸 학력자 증가 등에 기여했다. 혁명 초기 이란 국민 절반 이상은 문맹이었으나, 지금은 15% 미만이다. 읽고 쓸 줄 아는 여성의 비율도 36%에서 74% 이상으로, 도시 지역에서는 82%로 2배 이상 늘었다. 혁명 완수 30년 후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 수는 16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7.5배 늘어났다. 다만, 여학생의 비중은 38%에서 65%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인구 혁명도 일어났다. 1979년에는 3천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은 7천만 명으로 늘었고, 그 가운데 25살 미만의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대부분의 이란 국민이 혁명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구 변천기도 완료됐다. 1979년에는 여성 1명당 6명의 자녀가 있던 반면 이제는 2명을 넘지 않아 인구의 세대교체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도시 생활의 발달로 새로운 요구 사항이 생겨났지만, 정부는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2005년 25살 미만 청년 실업 비율이 29%로 증가했고, 여성 실업자 비율은 39%였다.

게다가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재임 시절 이후 시작된 신자유주의 혁명은 이제 사회정의를 위한 혁명 슬로건 대신 상업 제일주의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따라 상업과 무역 부문의 비중이 커지고 수입품 시장이 발달했으며, 젊은이들의 소비 경향이 심화되었다. 종종 비합리적 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지역 산업은 대개 ‘보호막’에 둘러싸인 투기꾼들이 들여온 수입품과의 경쟁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혁명 이후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정권이 이 사회에 제시한 틀은 너무나 협소하고 애초의 기세와도 거리가 멀다. 국민의 사회·문화적 수준과도 괴리감이 있고, 젊은 층의 바람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현재의 반발은 자기 앞에 제시된 경계석을 더 밀어내려는 염원으로 해석되지만, 그 정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글•셰르빈 아마디 Shervin Ahmad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페르시아어판 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