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종파전쟁에서 부족전쟁으로?

2010-02-04     피에르 베르냉
예멘은 이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알카에다 대원들의 주무대로 떠올랐다. 1990년대 북쪽과 하나가 된 남예멘 지역에서는 분리주의자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 또 당국은 사다 지역 반란 사태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한 반면,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을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으로 예멘은 더욱 불안정해지고 결국 파산국가로까지 치닫게 될 위기에 직면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예멘 북서부 사다 지역이 2004년 6월 이후 격렬한 전투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 정부군과 후티파 반군의 무력충돌이다. 반군은 전 국회의원 후세인 알후티가 2004년 9월 사살된 이후, 그의 동생 압둘말리크 알후티가 지도자로 있다. 2008년 7월 휴전 선언이 있었지만,(1) 2009년 8월 중순 또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곳 전투가 그토록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도, 수만 명의 희생자와 피난민이 나올 만큼 폭력적인 것도, 반동세력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것도 알지 못한다.

후티파 반군은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자이디 시아파다. 그러나 이란에서 널리 통용되는 시아파 교의와는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다.(2) 예멘 인구의 3분의 1이 믿는 자이디교는 교리나 법해석적인 면에서 ‘온건파’로 분류된다. 이들은 예멘의 고유한 역사를 공유함은 물론, 국민 과반수를 차지하는 샤페이 분파(3) 수니파와 종교해석적인 면에서 상당 부분 일치한다.

공화국 정부의 왕조 후예 탄압

정부가 주장하는 이들 반군의 죄목은 1962년까지 예멘을 통치했던 자이디 이맘 왕조를 부흥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1962년은 예멘에서 공화국 혁명이 일어나 기나긴 내전을 예고한 해였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의 왕정파 편에 섰고,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하에 있던 이집트는 지원군을 파견하며 공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슬람의 지도자, 즉 이맘은 무함마드의 정통 직계로 인정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알후티 형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예멘 당국은 후티 반군이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고, 레바논 헤즈볼라처럼 중동 전역에 걸친 시아파 세력의 확대에 일익을 맡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국의 이런 주장은 이란을 견제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자극해 지원을 받아내기 위한 구실이기도 하다.

후티파 지도자들은 예멘 당국의 주장을 반박한다. 자신들은 공화국에 충성하고 있고, 단지 자이디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이디파가 종종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인 와하브교나 살라피즘과 동일시되면서 그 근본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이디즘의 역사적 요람인 사다 지역은 1960년대 내전 기간에 왕정파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역대 예멘 정부가 추진한 개발정책에서 오랫동안 배제돼왔다. 자이디 부흥운동은 1980년대부터 예멘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다 지역의 교육기관·출판사·예배당뿐 아니라, 예멘의 현 수도인 사나에서도 자이디 부흥운동이 벌어졌다. 후티파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종교 빌미로 정치·사회 투쟁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를 포함한 예멘의 정치계 고위 관료는 대부분 자이디파 출신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이디 부흥운동에 동참하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후티파가 종교적 관습이나 이슬람법으로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제아무리 고집한다고 해도, 예멘 국민 대부분(자이디 출신 포함)은 공화국과 정규교육 시스템에 의한 종교 정체성 교육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 구도는 그 타당성을 잃어버렸고, 오로지 정치적 성향과 궤도를 결정짓는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종교적 정체성이 하나로 모아졌다고는 해도, 당국의 입김에 편승한 살라피파가 자이디파를 점점 더 거세게 몰아세우는 데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사다 지역의 분쟁이 종교 간 대결로 변질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2009년 8월 말, 몇몇 언론은 후티파와 살라피파의 싸움을 보도한 바 있다. 살라피파 일원은 1980년대 초 무크빌 알와디가 세운 살라피학교의 학생들인데, 당시 두 파의 전투로 희생자가 여럿 발생했다.(4) 그러나 후티파는 자신들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를 부인했다. 2007년 3월에도 비슷한 충돌이 벌어져 외국인 학생 두 명이 숨졌는데, 그중 한 명은 프랑스인이었다.

예멘 정부는 이를 두고 공화국과 극단주의 종교단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맞서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티파는 소수 종교집단에 가해지는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서로가 주장하는 비난의 차원을 넘어 여러 정치·사회적 요소와 연관되어 있다.

휴전과 중재에도 불구하고 2004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이 적대관계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이해와 연관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홍해 연안 국가들과의 불법 상거래를 통제하는 일은 예멘 당국의 최우선 과제다. 이 상거래를 통해 디젤연료와 무기가 동아프리카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무기의 일부는 불법 거래 과정에서 이 지역 브로커들에 의해 반군에 넘어가고 있다.

1978년 집권 이후 지금까지 예멘을 이끈 살레 대통령의 후계자 문제도 체제 내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살레 대통령의 아들 아메드 알리 살레(현재 특수부대와 공화국 근위대장이기도 함)와 여러 군 관계자들의 권력다툼이 심하다. 이 때문에 사다 지역은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통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싸움이 점점 커져 전투 지역이 사나에서 북부로 25km 떨어진 바니 후차이치까지 확대되었던 2008년 5월, 예멘 당국은 처음으로 특수부대까지 투입해 승리를 거뒀다. 이에 앞서 사다 지역 주둔 정부군은 전투에서 잇따라 패해왔다.

계속되는 전투는 현지 부족들의 세력과도 연관이 있다. 민병대, 정부군 혹은 후티파 군에서부터 사다 지역 부족들을 동원한 2008년 6월의 인민군 창설 정부 프로젝트까지, 전투는 부족 연대성을 근간으로 한 ‘보복의 폭력’ 속으로 말려들었다. 2009년 초, 예멘 당국이 도시 재건 예산을 투입했을 때, 몇 달 전만 해도 정부군과 결탁했던 몇몇 부족이 도로를 차단하거나 인질극을 벌이면서 정부를 상대로 협박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같은 전쟁의 ‘부족화’는 후티파의 정치 프로젝트나, 정권 관계자들에 의해 조장된 수니-시아파 간 대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이웃나라 내전 즐기는 사우디

사다 지역의 분쟁은 이제 두 주요 부족연맹 간의 오랜 경쟁관계와도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하시드족 연맹이 정부군 편에 섰다면, 바킬부족 연맹은 반군을 지지하고 나섰다.(5) 이는 전투 지역이 사다를 넘어 알우사이마트족 영토에서 멀지 않은 남쪽의 하르프 수피안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알우사이마트족은 하시드 부족의 우호 세력들 가운데 하나다. 전투 지역이 확대돼가는 데는 부족의 연대성이 깊이 작용하고 있어서 예멘의 북부, 특히 알자우프, 암란 그리고 하자 지역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됐다.

주변 국가의 비협조적 태도도 이 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07~2008년, 카타르의 중재로 휴전에 합의해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으나 결국 전투가 재발했다. 이로 인해 카타르는 한발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사다 지역의 개발과 재건사업에 재정적 원조를 하겠다는 약속도 취소됐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데는 예멘의 이웃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연루되어 있는 듯하다. 혹자는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다 지역에 대한 카타르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도하 휴전합의를 좌절시켰다고 비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사우드 왕가는 사다 지역 전쟁을 예멘 내전이라고 공식적으로 결론지었으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몇몇 관계자는 이 전쟁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알카에다 테러로 불안 가중

한편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반테러 작전에만 지나치게 몰입하느라 중동 평화에 무관심했던 것이 결국 예멘에 전쟁을 위한 백지증서를 간접적으로 제공하는 구실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테러와의 세계전쟁’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을 때에도, 예멘 정부는 반군단체를 테러리스트 그룹과 동일시하며 유리한 위치에 섰다. 때로는 반군이 알카에다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후티파 반군이 자이디 시아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살라피교의 교리에 비판적 자세를 보이는 점으로 미뤄볼 때, 예멘 정부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사회 균형을 깨는 이 난폭한 전쟁의 결과, 예멘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장악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전쟁, 만성적 불안감, 그리고 탄압은 일부 알카에다 측근을 포함한 여러 폭력조직이 세력을 키우도록 방치하고 있는 듯하다. 2009년 6월 비정부기구 회원으로 사다 지역 병원에서 근무하던 외국인들이 납치되어 그중 세 명이 사망한 일은 사다의 타락한 정세를 잘 보여준다. 예멘 정부는 초기에 이 사건을 두고 후티파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이는 사실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들의 범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오사마 빈라덴의 옛 비서였던 예멘인 나세르 알와하이시는 2009년 초, 아라비아 반도에 사우디아라비아-예멘 연합 알카에다 조직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2007년 이후 알카에다 소속 단체들의 활동으로 추정되는 습격 사건이 예멘의 수도 사나와 옛 남예멘의 남쪽 지역에서 속출했다. 특히 2008년 9월에는 미 대사관을 겨냥한 공격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옛 남예멘 국민은 1990년대 예멘 통일 이후 차별의 희생양이 되었다며 2007년 이래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들의 분리주의적 성향도 강해지고 있다.(7)

살레 정부가 이끄는 예멘 정치체제는 일정 수준의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오랜 기간 수많은 부정적 예측을 비켜왔다. 그러나 곳곳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자, 약하게나마 유지되던 이 균형(8)이 깨질 위험에 처했다. 사태가 계속된다면 예멘 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 정권을 쇠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글•피에르 베르냉 Pierre Bernin
아랍 전문가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번역•이보경 leebk3611@ilemonde.com
파리8대학 언어학 박사. 역서로 <카인> <방법서설> <성의 역사> 등이 있다.

<각주>
(1) International Crisis Group, Yemen: Defusing the Saada Time Bomb, 브뤼셀, 2009년 5월 제86호.
(2) 이란의 시아파는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수니파 교리와는 달리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와 그의 자손들을 중요시한다. 반면 자이디파는 시아파 전통과 연관이 있긴 하나, 오로지 7명의 이맘만을 인정하는 온건 세력이다.
(3) 역사적으로 수니파 교리는 크게 네 가지 종파, 즉 말레키(주로 북아프리카에 분포), 샤페이(중동·예멘·동남아시아), 한바리(아라비아반도), 하나피(중앙아시아·남부아시아)파로 구분된다.
(4) <Al-Quds al-Arabi>(범아랍 일간지), 2009년 8월 27일, 런던.
(5) <Al-Sharea>(예멘 독립 주간지), 2007년 6월 2일, 사나.
(6) 후티파 반군은 정부의 이런 주장에 대해 외국인 납치 반대운동까지 전개하며 반박했다.
(7) Franck Mermier, ‘예멘: 분리주의 길을 걷는 남부?’, Echogeo, 2008년 6월, http://echogeo.revues.org/index5603.html.
(8) Laurent Bonnefoy, ‘대내외 압박 사이, 예멘의 불안한 균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0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