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 투사들 다시 일어서다

2010-02-04     안 비냐

온두라스에서는 2009년 6월 28일의 쿠데타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을 몰아내고 탄생한 정부가 초헌법적으로 실시한 지난 11월 29일의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인 포르피리오 로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은 반대파들에 대한 쿠데타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애써 모른 체하면서 서둘러 이 선거가 유효하다고 인정했다.

 시위자들이 공포에 질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검은 십자가를 경찰이 주워모은다. 십자가마다 지난해 6월 28일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살해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통령 선거일인 11월 29일 이른 시간에도 이 나라의 두 번째 도시인 산페드로술라의 중심부까지 시위대가 평화로이 행진했다.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있었지만,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대 해산을 막지는 못했다. 경찰은 곤봉에 맞아 쓰러진 46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하고, 반쿠데타저항전선운동(FRCG)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십자가를 망가뜨렸다.
 선거 전날에도 30명이 사망하고, 4200명이 체포되었으며, 부상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인권단체에 따르면 그날 이후로도 30명 이상의 저항전선 투사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되었을 것이란다.(1) 저항하는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운동 지도자에게 살해 협박을 하고, 일반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공권력의 만행은 수도 없다. “지금 상황으로는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가 위험해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온두라스 비아 캄펜시나’의 대표인 라파엘 알레그리아가 전한다.

    쿠데타 세력의 무더기 ‘선거 살인’
 새로운 방식의 투쟁은 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간주된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서 시작되었다. 국민당의 포르피리오 로보가 당선된 이 선거는 10월 30일 미국 국무부 남아메리카 담당 차관인 토머스 섀넌의 지원 아래, 앞서 축출된 셀라야 전 대통령의 복권이 이뤄지지 않은 채 실시되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시민들이 ‘정치적 성격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미디어가 ‘사회적 무정부상태를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시행되었다. 헌법에 따른 질서가 복원되지 못한 상태에서 반쿠데타저항전선운동은 힘에 의한 시위보다는 선거 거부와 국민소등운동을 제창했다. “우리는 이성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날 무장 순찰하는 3만 명을 앞에 두고 시위를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라고 이 전선 집행부의 후안 바라호나가 말했다.
 저항세력이 일부 국민에 불과하다는 일부 국제 언론의 보도에도 아랑곳 않은 채 ‘저항전선’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한 민주화연구소의 정치분석가인 구스타보 이리아스는 설명한다.(2) “우리는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저항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봅니다. 셀라야는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최저임금을 2배로 올렸다고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쿠데타 정부가 국민을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반쿠데타저항전선운동의 이런 분석은 소속 단체의 수치에 근거해서 추정한 것이다. 노조, 여성운동 단체, 환경단체, 학생, 토착농민 단체 등이 전선을 구성하는 주요 기둥이다. 이 운동은 어떤 면에서는 온두라스에서 ‘미치 효과’라고 부르는 것에 힘입은 바 크다. 1998년 미치라는 폭풍우가 이 나라를 황폐화시킨 뒤 국민 단체들이 당국을 대신해서 재건에 주력했다. 이 단체들은 사회의 진정한 한 축으로서 역할을 다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했다.

    먼지와 티끌로 조직한 저항
 쿠데타가 이 운동의 뇌관을 자극한 셈이었다. 사회학자인 마리아 엘레나 멘데즈에 따르면 “가장 놀라운 것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방랑 노무자, 소상인, 주부 등 최빈곤층의 참여율이 높은 것”이라고 한다. “운동은 겨우 6월 28일 시작됐지만, 일련의 먼지와 티끌들이 모여 차기 정부에 반대할 진정한 힘이 되었다”고 여성권익연구소 소장인 마담 질다 리베라도 분석한다.
 실질적인 정치 프로그램은 없지만, 반쿠데타저항전선운동은 지금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 우선, 저항전선의 목표는 대통령 선거 반대다. 특히 투표율 발표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중앙선거위원회는 선거 당일 저녁 투표율을 61%로 발표했으며, 당국은 이 수치를 근거로 국민 대다수가 참여했다고 간주하고 로보를 새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감독관을 파견한 적이 없는 국제사회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 2006년 대통령 선거 때보다 10% 상회하는 결과를 선거 후에도 추인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미국과 인접 우호국인 콜롬비아, 페루, 파나마는 이를 서둘러 인정했다. 개표 결과는 여러모로 미심쩍었다. 미국 <리얼뉴스>의 제시 프린스턴 기자가 개표 현장에서 카메라로 잡은 중앙선관위의 기록판에는 49%라고 쓰여 있었다. 그 순간 선관위 위원장의 발표는 61%였다. 국제민주화기금(NED)을 통해 워싱턴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은 ‘아가모스 데모크라티아’는 투표율이 47%라고 신속하게 집계해 발표했다. 선거 열흘 후, 중앙선관위도 49%라는 걸 인정했다. 셀라야 지지자들은 1400개 투표소의 출구조사를 통한 집계 결과로는 투표율이 25%라고 추정했다. 국제정책연구소 미주정책 프로그램 책임자인 로라 칼슨은 “결과가 당국의 손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중대하게 인권을 침해한 이 선거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3)
 이 권력남용 사건을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 가져가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는 것이 반쿠데타저항전선운동의 두 번째 목표다. 이와 관련해 셀라야 전 대통령은 지역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온두라스는 로마조약에 서명했기에 군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사법 당국의 소환에 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4) 특히 국제인권감시위원회는 1980년대에 이미 수백 명이 실종된 사건과 관련해 발리 호야를 주모자로 지목했다.(5) 호야는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온두라스에서 16명의 투사 실종사건의 책임자로 재판을 받은 후, 로베르토 미첼레티 임시정부의 ‘안보담당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국제 언론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저항운동은 온두라스 톱뉴스에서도 벗어나 있다. 인터넷 접근도 용이한 편이 아니고, 미디어는 쿠데타에 우호적인 기업들이 점유하고 있다. 정부는 16개 채널만 막아버리면 정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날 아침, 군인들이 언론사 본사 몇 곳을 습격해 시청각 장비, 전화, 컴퓨터를 압수하고 통신을 잘라버렸다. 유선방송인 베네수엘라의 <텔레수르>, 쿠바의 <큐바비지온>, 과테말라의 <과테비지온>, 코스타리카의 <텔레티카>, 미국 <CNN>의 스페인어 방송 등은 폐쇄되었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채널36>이 방송권을 상실했다. 당국은 어이없게도 가톨릭의 지지를 받아, 정규 뉴스 대신 에로영화를 방영했다.
    검열 기준도 임의적이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국제사면위원회(AI) 임무에 대한 르포르타주거나 시청자 반응에 대한 생중계거나 혹은 기자가 전하는 시위 집회 예고가 잘릴 때도 있다. 언론운동 단체의 집계를 보면, 8개 미디어가 폐쇄되고 20개 언론사가 운영이 중지되었다. 또 기자 30명이 부상당하고 14명이 체포되었으며 1명은 사망했다.(6)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로페즈도 자신이 직접 받은 살해 협박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그 전날 복면을 한 일당이 그의 어머니 집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고 방송을 통해 이야기했다.

 폭력적 언론통제에도…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군인들의 존재를 느끼면서 투사들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기조차 어렵다. 노조원인 카를로스 레이에스는 “이 나라에서 투쟁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쿠데타가 민주화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앗아가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쿠데타의 구실은 군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 셀라야 대통령이 1982년 수아즈 코르도바 재임 때 개정된 헌법을 재개정하기 위해 국민 의사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저항전선의 깃발이 되었다.즉,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헌법 개정이 하나의 요구에 불과했다면 이제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필요성이다. 이 위기가 권력 분산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치 시스템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고 전 테구시갈파대 총장인 후안 알멘다레스가 얘기한다.
 만일 이 시점에서 국민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저항운동이 지향하는 방식으로는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 저항운동 단체들은 정치 정당으로 탈바꿈해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좌파에 속하는 민주연합(DU)은 이런 선택을 선호한다. 이 당의 마르빈 폰체 의원은 “우리 정당이 분명 존속하고 있지만, 저항운동 단체들과 손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연합은 앞서 선거에 참여해 그 선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하면서 일부 지지층을 잃어버렸다. 셀라야 대통령의 당을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셀라야 정부의 전 경제고문인 넬슨 아빌라는 “그 당은 미첼레티의 당이었다. 우리는 여기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언급한다.

    헌법 개정의 당위성 확인
 저항운동 내부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어떻게 온두라스의 정치 풍토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치를 부패와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운동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난제를 갖고 있다”고 알레그리아 대표가 덧붙인다. 지난 마지막 집회에서 요구 조건들이 벌써 언급되었다. 하청공장인 마키야도라스의 여성연맹과 노동총연맹이 나란히 앉았다. 이 둘은 셀라야 정부 때 시도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대립했었다. 여성들은 건강과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 조치를 요구한 반면, 노동총연맹은 임금 인상에 집착했다. 지금은 여성들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헌법 개정에서 노조의 편을 들겠다고 하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했다. “민주화 과정의 실습은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것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헌법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글•안 비냐 Anne Vigna
중남미 전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 진보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저서로 <자살><여행 이야기> 등이 있다. 

<각주>
(1) <Le Courrier>, 제네바, 2009년 12월 16일.
(2) www.enlaceacademico.org.
(3) www.americaspolicy.org.
(4) 국제형사재판소는 인종학살, 반인간적 범죄, 전쟁범죄와 같은 심각한 범죄를 국제적으로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조사가 실제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5) Mision internacional de observacion sobre la situacion de los derechos humanos en Honduras, <Gobierno de facto viola derechos humanos en Honduras>, Washington, 7 aout 2009.
(6) <Primer informe: Estado de la situacion de la libertad de expresion en Honduras en el contexto de la ruptura del orden constitucional>, Comite por la libre expresion et Fundacion Democracia sin Fronteras, Tegucigalpa, novembre,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