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싱크탱크의 어설픈 ‘진보’ 흉내

[특집/진보좌파의 길]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본 프랑스 좌파

2010-02-04     알렉산더 제빈

테라노바, “미국식 예비선거 도입해 사회당 개혁하라”
연구역량도 없이 언론 앞세워 정치적 영향력 확대 노려

유럽 내 좌파들이 항로를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확실한 정치 노선도 사회정책도 정립하지 못한 채 모순된 대책을 내세우는가 하면, 허점 많은 논리로 서민의 민심을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좌파의 이런 침체는 진보주의*(용어 설명 참조)가 적극적인 ‘지적 재건운동’을 펼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 ‘사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인 듯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2008년 여름 발간한 첫 보고서에서, ‘진보주의 싱크탱크’인 테라노바는 2012년 프랑스 대선을 위해 좌파 내 예비선거제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1) 당시 미국에서는 예비선거를 통해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떠올랐고, 많은 이론가들은 이러한 선거 방식을 통한 ‘새로운 피 수혈’에 환호했다. 대중매체를 통한 대대적인 홍보와 많은 이들의 열성적인 지지가 뒤따랐지만, 당초 ‘랭스 정당대회에서 선출된 차기 지도부의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 예비선거제 도입은 사회당(PS) 내부와 언론의 소극적인 반응으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 언론은 예비선거제 도입이 프랑스 좌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도 된다는 듯, 일반투표제 방식의 예비선거제 도입을 집중 조명했다. <<원문 보기>>

2009년 8월 라로셸에서 개최된 사회당 여름 계절학교에 맞춰 예비선거제 도입이 다시 쟁점화됐다. 여기에 테라노바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까? 테라노바 회장인 올리비에 페랑은 싱크탱크가 550회 이상 발행한 <시사노트>를 예로 들었다. <시사노트>는 기후변화에서부터 온라인 도박, 정부 재정 적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뤄왔다. 하지만 테라노바가 제시한 구체적 제안의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봐야 옳다. 적어도 이 제안에 대해 정치 지도자들이 보인 호응 수준을 놓고 보면 그렇다. 설문조사에 응한 사회당 의원 중, 사회당 내 당원에 의한 예비선거제 도입과 관련해 테라노바가 마르틴 오브리 사회당 대표나 사회당 지도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의원들의 어이없는 웃음만 자아냈다.

예비선거로 프랑스 좌파 구원?

테라노바는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언론매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봐야겠다. 실제로 테라노바는 <리베라시옹>, <뤼89>(Rue89), <메트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같은 언론 매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리베라시옹>과의 파트너십은 테라노바에 매우 중요하다. <리베라시옹>은 월 1회 테라노바의 분석 칼럼을 2쪽에 걸쳐 싣고 있으며, 테라노바가 실질적으로 일반 대중과 소통하고 좌파 싱크탱크로서 어필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주고 있다. 사회당 여름 계절학교를 불과 몇 주 앞두고 <리베라시옹>은 예비선거제 도입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사회당 지도부나 당원들 사이에서도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하던 때인데도 말이다. <리베라시옹>이 내세우는 민주주의 가치의 압력에 사회당이 굴복했든 저항했든 간에,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혁신의 바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외부 채널 활용 전략으로 무장한 테라노바는 좌파에 지적 혁신을 가져왔다.

2009년 6월 페랑 회장과 테라노바 지지자 중 한 명인 사회당의 아르노 몬테부르그는 오브리 사회당 대표에게 예비선거제 도입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곧 <예비선거제: 사회당의 미래를 위해>(쇠유·파리·2009년 8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페랑은 무수한 인터뷰를 통해 “사회당은 구시대적 모습을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름 계절학교 개최 기간에 <리베라시옹>은 여론조사를 통해 프랑스인의 거의 70%가 “일반투표제 방식의 예비선거제 도입이 사회당 대선 후보 결정을 위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2) 여기에는 일반투표제를 통한 예비선거제 도입이 사회당 당원만이 아닌, 대중매체와 전문가들에게도 대선 후보 선출권을 부여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찬사를 받은 측면도 있다.

로랑 조프랭은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당원의 지지만으로는 대선 후보의 정당성을 확립하기에 부족하다”고 설명하며, 새로운 방식을 통한 더욱 직접적인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중도파 대연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리베라시옹>은 테라노바가 주최한 ‘사회당 내 일반투표제를 통한 예비선거제 도입을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이라는 행사를 신문에 게재했고 정치인, 사회학자, 금융인 및 올림픽 카누 대표선수의 서명을 받았다.

테라노바는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최소 56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당초 목표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사회당이 겪고 있는 ‘지도부의 위기’라는 내부 원인으로 인해 오브리 사회당 대표가 최근에 급기야는 예비선거제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고 발표했다. 사회당의 이같은 발표는 대중매체의 집중적인 관심을 유발하면서, 저널리스트건 정치인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사실 일반투표제 방식의 예비선거제 도입은 정치권을 비롯해, 프랑스 내에서도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왜 테라노바가 예비선거제를 조직의 핵심안으로 삼아  계속 내세우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대중매체를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제한된 수단과 자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정치권에 테라노바가 가져다주려는 변화와 실제 목표가 숨어 있다.

사회당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핵심이다’는 라디오·TV·신문을 가릴 것 없이 여기저기서 매일 듣는 말이다. 사회당에서도 일개 당원이건 중앙지도부건 할 것 없이 아이디어를 외쳐댄다. 그러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는 것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아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싱크탱크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충분히 훌륭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싱크탱크는 연구재단에 대한 면세제도 등 국가의 지원과 현대 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의 부상에 힘입어 오랜 기간 발전해왔다. 종종 그래왔듯, 프랑스의 용기 있는 ‘혁신주의자들’은 이 싱크탱크로 관심을 돌렸다.

‘학생 없는 대학’이라 부를 수 있는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1980년대부터 미국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파 개혁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도 헤리티지재단을 비롯한 10여 개 신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이 레이건 행정부에 지적·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덕이다.(3) 민주당 정책전략가들이 우파의 이러한 전략을 차용하면서 싱크탱크의 성공은 극에 달했다. 클린턴 정부 시절 수석보좌관직을 지낸 존 포데스타가 설립했고, 2003년 민주당의 정치적 침체기 동안 유명해진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가 좋은 예이다. 미국진보센터는 대선 기간에 오바마에게 갖가지 보고서를 제공했고, 기자들에게는 공화당의 존 매케인에게 던질 질문거리를 제공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정권 인수를 감독했을 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을 위한 정치적 조언을 담은 서적을 준비하고 있다. 헤리티지재단이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을 위해 <리더십을 위한 지침>이라는 책을 발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4)

테라노바가 설립된 배경에 대해 페랑은 프랑스 제도의 급진적 개혁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프랑스 사회의 지적 활동은 결함을 갖고 있는데, 바로 ‘문제 진단과 정치적 해결책이 서로 분리돼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전문가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문제에 대해 활발히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도(페랑은 테라노바의 주요 협력체인 피에르 로장발롱의 ‘사상의 공화국’(La Republique des idees)과 ‘정신’(Esprit)을 예로 들었다), 한쪽에서는 사회당을 위시한 다른 정당들이 즉시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 문제의 해결책으로, 페낭은 ‘미국식 싱크탱크 모델’ 채택을 주장한다. 페낭이 늘 예로 들며 본보기로 삼는 사례가 바로 미국진보센터이다. 테라노바가 (다른 단체들과 함께) 2008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연구조사차 미국 방문을 추진한 것도 미국진보센터와의 협력을 통해서였다. 방문 후, 테라노바는 2009년 1월 ‘프랑스의 정치 현대화를 위해: 미국식 혁신을 통해 본 교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미국 싱크탱크와 근본적 차이

그런데 테라노바가 미국 싱크탱크와 실질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급격한 지적 변화를 예견하는 테라노바 회장의 주장이 실제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일단 가장 먼저 차이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예산이다. 미국진보센터의 예산이 3천만 달러인 반면, 테라노바의 예산은 100만 유로에도 못 미친다.(5) 미국진보센터에서 급여를 받는 인력은 100여 명에 이르지만, 테라노바는 단 3명뿐이다. 연구원 1명, 출판 및 보도총괄팀원 1명과 기관대표 1명이다. 이 3명을 돕기 위해 프랑스 공립 경영대학원인 HEC나 파리고등정치학교인 시앙스포 출신 인턴 10여 명이 무상으로 일하고 있다.

페낭은 초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재정이 풍부한 싱크탱크도 있고, 취약한 싱크탱크도 있기 마련입니다.” 재정적으로 풍요로운 싱크탱크는 기관 소속의 연구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구원들은 연구실과 주차장, 월급을 보장받는다. 반면 그렇지 못한 연구소들은 연구를 ‘외부 전문가’에게 위탁해야 하고, 그마저 무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페낭은 이런 것들이 단지 외관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한 돈 문제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두 사회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일단, 프랑스에서는 기부문화 확산이 더디다. 미국 민주당과 프랑스 사회당의 구조와 변천사, 현황도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상이하다. 민주당은 전투적 정치운동 문화와 지적 전통에서 아직 역사가 짧다. 반면 프랑스 사회당은 의원과 정치운동 참여가 활발한 지지자들로 구성된 정당이며, 신뢰할 수 있는 간행물과 긴 전당대회를 통해 정치 노선을 결정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여건 차이를 고려할 때, 미국 민주당이 채택한 문제 해결 방식은 내부보다는 외부 기관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이를 대중매체에 홍보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주당 방식이 미국진보센터가 민주당의 문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초기부터 인간주의·민중주의·단결 등 사회당 이념을 어느 정도 지지하면서도 자체 논리로 무장한 언론기관들(사회당 간행물인 <라누벨>이 단적인 예이다)을 두고 있었다. 또한 사회당 정책은 당 내부 계파들에 의해 늘 연구·분석되고 변천돼왔다. 지금도 사회당은 사회당 주간지인 <에브도>와 계간지인 <라흐뷔>를 발행하고 있으며, 내부 싱크탱크인 장조레스재단을 두고 있다.

테라노바가 동급의 비교 대상을 미국에서 찾는 것은 힘들지만, 프랑스의 생시몽재단은 좋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생시몽재단은 1982년 기업가와 지식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치인들이 모여 프랑스 사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설립했다.(6) 1999년 생시몽재단의 해체는 다양한 혁신주의자 클럽과 모임을 양산했다. 이들은 정부 정책 수립에 방향을 제시하려 했고, 언론에 적극적으로 모임 지도자들의 이름을 알리려 했다. ‘실제 시간’(En Temps reel·2000), ‘사상의 공화국’(La Republique des idees·2002), ‘유럽의 좌파’(A Gauche en Europe·2003), ‘텔로’(Telos·2005), ‘테라노바’(Terra Nova·2008)가 대표적이다.

피에르 모스코비치 사회당 의원은 “짧은 역사를 가진 테라노바 같은 단체들이 짧은 보고서나 시사 내용, 간단한 의견 제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좌파 싱크탱크인 장조레스재단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시되는 모스코비치 의원은 페랑이 싱크탱크 ‘유럽의 좌파’(A Gauche en Europe)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시절 그의 상관이기도 했다. 덧붙여, 모스코비치 의원은 사회당의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지식인이 사회당에 입당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지식인층에 대한 입당 권고는 이미 오브리 의원이 사회당 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적이 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테라노바는 이념성을 떠나 실제로 사회당의 구조적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당과 경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당 혁신을 위해 테라노바가 수행하려는 역할이 무엇인지는 정관에 나타난 조직 목표를 봐도 뚜렷하지 않다. 조직 목표가 담긴 정관이 조직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 제시도 없이 이것저것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공식 문서를 보면 조직 목표로 ‘사회민주주의의 지적 혁신’에 대해 일부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정관 소개는 페랑이 참여한 TV 방송 프로그램 리스트에 밀려 이러한 가벼운 언급조차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페랑은 <에코넷>(인터넷 기업들이 주로 시청하는 방송)의 <의사결정자 초대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해 “신사회민주주의의 지적 혁신이란 (독일 사민당이 마르크스주의 대신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채택한) 1957년의 바트고데스베르크 강령을 가리킨다”(7)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프랑스 진보주의의 모호성

미국진보센터만 하더라도 간략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 실현이라든지 균형적인 사회발전, 청정에너지 개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박애정신 실현 등이다. 또한 미국진보센터가 ‘진보주의’ 단체를 표방했을 때, 이 진보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정치운동, 계파, 명분을 포괄하는 일련의 정치 원리를 지칭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에서 ‘진보주의’라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에 테라노바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미셸 로카르가 의장을 지낸 ‘학술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찾아보아도 프랑스의 진보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술위원회에는 지식인, 기업가, 단체 대표들, 고위 공무원 등 세계적인 명사 150명의 이름이 뒤섞여 있으나,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유명세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샹젤리제에 위치한 테라노바의 사무실은 로카르의 측근 중 한 명인 앙리 에르망이 임대료와 시설비를 부담했다. 사무실 안은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고, 장식용 화분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듯했다. 각자 매우 분주한 듯했다. 테라노바의 한 전직 인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랑은 테라노바의 핵심사업인 연구도 관리하지 않거니와, 싱크탱크의 일간 간행물 발행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업무는 (이 인턴의 말에 따르면) “친절하기는 하나 경험이 별로 없는” 보조 인력이 담당하고 있다.

테라노바가 발행한 550건의 <시사노트>는 그 내용이나 이념적 일관성보다는 양적인 면에서 놀랍다. <시사노트>는 21개 카테고리(국가재정, 교육, 유럽, 국방, 농수산업 등)로 나뉘어 있는데, 예비선거제를 제외하고 가장 내용이 풍부한 주제는 경제위기이다. 확대된 유럽연합 내 프랑스의 지위 문제 또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전문적인 논조가 눈에 띄는 글도 분명 있겠지만, <시사노트>의 상당수가 난해하거나 혼란스러운 논조를 보인다. 사르코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역시 정중하고 신중한 어조이기는 하나 “좋은 기회를 놓쳤다”, “명쾌하지 못한 결과”, “동의할 수 없는 방식” 등의 표현을 남발하면서, 심층적 부분보다는 피상적 부분에 치중해 있다. 우파 정책에 대해선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근심을 자아내고 있다”, “조급한 감이 있다”, “더욱 심층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했다”는 식의 모호한 문장으로 묘사하면서도, 어찌됐든 “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이 필요하다”고 표현한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프랑수아 피용, 에리크 베송은 책잡히지 않도록 처신만 잘하면 될 듯하다.

프랑스 우정국의 법적 지위 변동에 관해 2009년 9월 발행한 <시사노트>는 미사여구를 남발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우정국의 전투는 지위 변동에서 끝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저자가 다음과 같이 서술한 부분을 보는 순간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전투는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서비스를 담당하는 기관에는 공기업이냐 민간기업이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공공서비스 본연의 목적인 수요 확인과 만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시사노트>들에서는 테라노바의 논리가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아도피(Hadopi)법에 대해 2008년 6월 “현실과 동떨어진 법”이라며 비판적인 글을 내놓고도 2009년 3월에는 “꼭 필요한 법”이라는 지지 글을 실은 것이 한 예이다. ‘좌파의 발전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노조를 지지하는 글을 냈는가 하면, 과달루페의 노조 파업에 대해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와 사유재산권 부정이라는 황당한 태도”라며 비난한 것도 마찬가지이다.(8)
 
앞뒤 안 맞고 수사만 가득 찬 보고서

<시사노트> 중에서 그나마 명쾌하게 이해가 가는 주제는 미국과 오바마에 대한 감탄과 예찬일 것이다. 실제로, 국제정치를 주제로 삼은 <시사노트>의 절반 이상이 오바마 대통령을 다루고 있다. 그중 하나는 영부인인 미셸의 ‘신페미니즘’을 단독 주제로 삼았다. 이는 이민, 사회통합, 주택, 최소임금제 등 사회문제들에 대한 미 민주당의 과감한 정책에 테라노바가 보내는 존경의 표시인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미국의 현행 예비선거제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

테라노바가 미국 싱크탱크와 전혀 비슷한 점이 없고, 정치권에 대한 지적 기여도 모호한 이유는 아마도 테라노바가 진짜 소명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테라노바가 조직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내세우는 이념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개인적 야망과 사회당 내 세대 간 갈등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페랑은 사회당 지도층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자신의 경력에 치명적이었던 생년월일을 제외하고 말이다(그가 사회당 지도층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는 의미-역자). 사회당의 현 고위 간부들이 흔히 그렇듯, 정치 입문 전 페랑도 파리고등정치학교(Sciences Po), 파리국립행정학교(ENA), HEC 같은 일류 대학을 나왔다. 이 덕분에 그도 조직경영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고위층을 통해 정당 지도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 문제의 원인이 바로 현 고위층이다. 정당 내 신세대의 진입을 막는 장해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9)

실제로, 1970년대 말 집권층으로 떠오른 사회당 정치인들은 아직도 현직에 남아 있다. 이들은 파리국립행정학교 출신으로, 미테랑 정부 시절 장관이나 각료로 참여했다. 로랑 파비위스, 프랑수아 올랑드, 마르틴 오브리, 세골렌 루아얄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회당의 집권층에 속해 있고, 노총과 지자체 시장들 사이에 지지층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체력이 좋고 야망이 높을 따름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정치를 단순히 직업으로 삼은 정치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당 의원들은 점차 고령화되었다. 2006년 프랑스의 상원과 국회의원, 유럽연합의회 사회당 의원의 약 70%가 47살이 넘어서야 첫 임기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10) 세대교체의 지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정치학자 레미 르페브르는 “1981년 이후에 사회당에 입당한 사람들은 사회당 집권층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지적했다.

페랑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도 게임의 규칙에 맞춰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고, 심지어는 경력을 어느 정도 윤색하기까지 했다.(11) 행정관료로서 페랑은 리오넬 조스팽의 유럽부문 자문이었고, 도미니크 스트로스칸과 함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회장이었던 로마노 프로디의 자문도 담당했다. 이러한 자문직을 거쳐 페랑은 피레네 오리앙탈 지역구에 ‘세대교체’를 내세우며 출마한다. 물론 당 중앙지도부와 옛 상관들의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 지역당원 1차 투표에서 아르젤르쉬르메르의 시장이었던 피에르 아일라가가 1위를 했는데도, 페랑이 후보자로 낙점되었다.(12)

사회당 중앙지도부의 만류에도 아일라가는 후보 사퇴를 거부하고, 좌파의 다른 계파를 통해 출마했다. 이미 예비선거에서 한 번 패했던 페랑은 1차 투표에서 아일라가에게 또 한 번 패했다. 하지만 아일라가도 대중운동연합(UMP)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고 말았다. 현재 예비선거제 도입을 부르짖고 있는 이 파리 출신의 ‘거만하고 가식적인’ 테크노크라트에게 당시 집중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갓 38살이던 페랑이 자신의 전문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의원직을 노리려면 10년은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실패로 그는 새로운 계획을 품게 된다.

정치적 재기 노리는 싱크탱크 대표

2008년 페랑은 테라노바를 설립하고, 예비선거제 도입을 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장된 전투를 시작한다. ‘좌파의 지적 매트릭스’의 쇄신을 소명으로 삼은 싱크탱크의 주제로는 우선순위에서  멀 것 같은 예비선거제가 테라노바의 핵심 의제로 자리잡았다. 사실 예비선거제를 들고 나온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당 내 엘리트층 선출을 담당해온 기존 규칙을 바꾸려는 데 있었다. 다행히 사회당 내 지지 세력과 영향력의 약세로 기회를 얻지 못한 야심가는 페랑 혼자만이 아니었다. 곧 페랑과 같은 난관에 부딪힌 다른 당원들이 페랑의 계획에 동참했다. 테라노바는 첫 보고서에서 ‘마누엘 발스, 뱅상 패이옹, 아르노 몬테부르그 같은 아웃사이더나 충분히 대선에 출마할 역량을 갖춘 신세대 국가 지도자들이 대선에 참여할 수 있게끔’ 예비선거제 도입을 주장했다.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은 최소한 어떤 이념이나 지적 사상을 앞세워 궁극적 목적을 감추려 하지는 않는다. 즉, 아웃사이더에 머물러 있는 신세대를 통합하려 함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싸움에서 테라노바는 대중매체가 가진 영향력을 적절히 활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신문과 같은 언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페랑도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테라노바에 대중매체의 관심 끌기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듯하다. 미국진보센터가 각종 대중매체 앞에서 ‘친우파적 성향의 자제’라는 일관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면, 테라노바는 정보매체와의 파트너십 확장에 혈안이 돼 있다. 이에 대해 전직 인턴은 이렇게 말했다. “<스카이라크>나 <엘르>처럼 테라노바와는 전혀 무관한 매체와도 파트너십을 맺으려 했습니다. 이미 지나치게 많은 언론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할 따름이었죠.” 이것저것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시사노트>, 에세이, 보도성명을 배포한 것도 언론의 관심 끌기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테라노바의 직원들이 첫 6개월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업무에 시달렸는데,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였다. 굳이 말하자면, 그가 정치에서 얻지 못한 날개를 대신 주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페랑의 이번 전략이 성공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정치권에서 잊혀질 위험에 처한 낙하산 출신이 아닌, ‘정치와는 무관한’ 언론 전문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상과 이념이 특권층의 수단이든, 소수 그룹의 도구로 쓰이든 간에,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념과 사상은 사회의 근간에서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것저것이 혼합돼 생겨난다는 점이다. 즉 일련의 다양한 사건에 의해 이념과 사상이 생겨나고, 이를 발전시킨 사람들의 주장에 의해 성립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상과 이념은 사람들의 불만을 정책과 정치력으로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인물’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지식인들이 기존에 존재하지 않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또 다른 지식인들은 반대로 기존에 존재하는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는 기존 세력에 대한 비판이 최악의 환경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궁극적 표적으로 삼고 있는 대상과 눈앞에서 맞서 싸워야 할 적을 구별하는 데 혼선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야 한다.

글•알렉산더 제빈 Alexander Zevin
프랑스의 에콜노르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혁명의 유령>(2007) 등이 있다.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올리비에 뒤하멜과 올리비에 페랑, ‘프랑스식 예비선거제 도입을 위해’, 테라노바 <Projet Primaire>, 파리, 2008년 8월.
(2) <리베라시옹>, 2009년 8월 26일자. 다음의 두 인용문도 출처가 동일하다.
(3) 세르주 알리미, ‘미국 우파의 싱크탱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5년 5월.
(4)  www.time.com/time/politics/article / 0,8599, 1861 305,00.html.
(5) 비교해보자면, 독일 사민당과 연계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재단의 2008년 직원 수는 612명이었고, 연간 예산은 1억2천만 유로에 달했다(주로 국가 지원금 덕분이었다).
(6) 뱅상 로랑, ‘사회자유주의의 창시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9월.
(7) 바트고데스베르크 전당대회는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정치학 전공 1학년이라면 누구나 날짜를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 전당대회를 통해 독일 사민당(SPD)은 1959년 마르크스주의 대신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강령을 채택했다.
(8) 알렉스 셀레스트, ‘과달루페의 노총 파업이 5주째에 접어들었다’, <시사노트>, 2009년 2월 19일.
(9) 레미 르페브르와 프레데리크 사위키, <사회당의 세계>, Editions du Croquant, Bellecombe-en-Bauges, 2006, pp.79~84.
(10) 레미 르페브르, ‘선거 기계로 전락한 좌파 정치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11) <르 카나르 앙셰네> 2009년 9월 30일자에 따르면 페랑의 경력 중 일부 직위는 그 스스로 만들었다고 한다.
(12) 제라르 앙드리외, ‘올리비에 페랑은 영향력은 있지만, 기억력은 짧은 듯하다’, www.marianne2.fr, 2009년 10월 6일. 


용어설명

<진보주의>

프랑스 학계에서는 ‘좌파=진보’나 ‘사회주의=진보주의’의 등식 관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마르크시즘에 철저한 좌파 학계에서는 혁신과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주의가 사회주의보다는 오히려 미국식 자유주의의 변형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문명비평가로 많이 소개된 프랑스의 우파 정치학자인 기 소르망은 <진보와 그의 적들>(2003)에서 진보를 자유주의적 우파의 가치로 규정짓고, 좌파를 진보의 적으로 지목했다. 남북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 상황에서 ‘좌파=진보’ 또는 ‘사회주의=진보주의’의 등식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알렉산더 제빈의 글이 다소 혼돈스럽게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