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텔리겐차의 오판

2016-12-02     세르주 알리미
 본래 의미의 ‘인텔리겐차(지식인)’가 멸종돼가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지식인은 본래 자신이 축적한 무사무욕, 전문적 능력, 보편주의 등의 권위를 가지고 불의에 저항하는 존재이건만, 오늘날 ‘지식인’의 의미는 크게 변질됐다. 광장의 촛불들이 권력의 비리를 밝히는 가운데, 인텔리겐차들의 추악한 민낯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인텔리겐차들이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권력층이나 자본가의 탐욕을 채우는 데 선뜻 제공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금전과 자리 등을 얻은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인텔리겐차의 탈선은 있었지만, 요즘처럼 파렴치함이 극에 달한 적은 없었다. 박근혜의 역사왜곡과 국정농단, 그에 앞선 이명박의 4대강 훼손 등에도 탐욕에 눈먼 인텔리겐차들이 공범행위를 해왔음이 명백하건만, 그들 중 책임지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최근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 또한, 미국 인텔리겐차들의 탐욕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인들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 대통령을 선출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대다수 기자들과 예술가들,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했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선택은 상당 부분 유권자들의 교육수준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상당수 민주당원들은 그들의 동료시민들이 교양을 충분히 쌓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선거의 영향을 신속히 받는 국가들이 존재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멕시코의 페소화가 폭락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주택 융자비용이 증가하고 있고, 유럽위원회는 재정 압박을 풀고 있다. 그리고 여론 조사 기관들과 선거의 미시목표설정이론 신봉자들은 애써 자신들을 숨기고 있고, 기자들에 대한 신뢰는 거의 소멸해가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재무장을 독려 받고 있고, 이스라엘은 텔아비브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기대하고 있으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은 소멸위기에 처했다. 사건과 추측의 소용돌이가 근심스런 환상을 자아낸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무능력하고 저속하다고 묘사된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기치 않은 선거 결과가, 외교전문가들은 물론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미국 선거의 영향은 더욱 커질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이런 종류의 놀라운 선거결과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비난받은 지도자들이 3일 간 회개한 후 철회했던 정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재개하는, 그런 일이 거의 항상 벌어진다. 이런 오해의 지속성(또는 시늉의 반복)은, 이의를 제기하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흔히 경제, 금융 뿐만 아니라 예술, 미디어, 대학의 거대 중심부에서 동떨어진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압도적 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고, 지난 6월 런던 시민의 대다수는 ‘브렉시트’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2년 전 파리는 우파에 대항해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좌파의 시정을 다시 펼쳤다. 
 
“무식한 유권자들 때문에 트럼프가 이겼다”
 
말하자면 선거에서 원하는 바를 이룬 행복한 이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언론과 유럽위원회의 권고사항들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한편, 반대자들의 분노를 무시해버리는 정서적·문화적 무능력을 투표함의 반대자들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리고는 끼리끼리 어울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투표함의 반대자들은 ‘대중 선동가들에 의해 조정당한 우둔한 이들’로 취급될 뿐이다.
 
이런 식의 현상 인지방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특히, ‘교양 있는 사람들’의 소모임 속에서 지속돼 왔다. 몇 달 전부터 시행된 트럼프라는 인기인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한 분석은, 지적 질서의 수호자들이 냉전 시기에 좌파나 우파의 ‘체제 전복자들’에 대해 작성했던 심리적 초상화와 유사하다. 1960년 미국의 정치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은 이런 체제 전복자들이 중산층보다 노동자층에 더 많다는 사실을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었다.
 
“요컨대, 체제 전복자들은 성장과정에서부터 처벌, 애정결핍 등 긴장과 공격성을 높이는 환경에 전반적으로 노출돼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환경은 깊은 적대감을 낳는 경향이 있고, 이 깊은 적대감은 민족적 편견, 정치적 권위주의, 천년지복설의 종교적 신념 형태로 표출된다.”(1)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의 유권자 6천2백만 명 대부분을 “쓰레기통의 한탄스런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기 8년 전인 2008년 4월, 버락 오바마는 서민계층이 묘하게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해 오히려 공화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좌절을 표현하기 위해, 총이나 종교,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 혹은 이민자들이나 국제무역에 대한 반감에 집착한다.” 좌절과 이성이 충돌한다. 흔히 자신이 선호하는 것들이 합리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는 속물들 때문에 당황스러워 한다.
 
권위 있는 잡지 <포린 폴리시>의 사이트에 게재된 미국 선거에 대한 한 논평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성의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렀던 이러한 현상(2)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정말로 무식하기 때문에 트럼프가 이겼다”라는 제목이 이 논평의 의도를 단번에 드러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과 같이 요약된 두 줄의 글이 그 의심을 걷어내 준다. “민주주의의 소명은 대중의 의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중이 자신의 의도를 모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3)
 
예상했던 대로 일련의 수치들과 강력한 성찰들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철학교수이며 이 논평의 저자인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은 아주 혹독하게 공격했다.
 
“자, 일은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항상 교육과 정보의 혜택을 제대로 못 받은 백인들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받아왔다. ‘블룸버그 폴리틱스(Bloomberg Politics)’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8월에 힐러리 클린턴은 대학교육의 혜택을 받은 유권자들에게 25%이상 앞서가고 있었다. 반면 이 유권자들은 2012년 선거에서 미트 롬니(Mitt Romney)보다 버락 오바마를 조금 더 지지했다. 지난 밤 우리는 ‘멍청이들의 춤’이라는 역사적인 사태를 경험했다. 기존에는 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만장일치로 한 후보를 거부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교육의 혜택을 덜 받은 이들이 만장일치로 또 다른 후보를 지지한 적 또한 없었다.”
 
제이슨 브레넌은 자신의 반민주주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확인된 사실에 의해 넋이 빠졌다기보다 오히려 열광하는 듯하다. 브레넌은 정치학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된 ‘65년 이상’의 연구에 힘입어 실상 유권자 대부분의 ‘끔찍한’ 지식 부재가 자신들의 선택가치를 떨어뜨린다는 확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인지는 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모른다. 경제가 더 나아지든 나빠지든 간에, 그들은 하원을 어떤 당이 장악하고 있는지, 하원이 최근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

힐러리를 찍지 않으면 성차별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황에 특히 관심이 많은 이들이 있는데, 어느 당의 지지자이든 교육의 혜택을 특히 많이 누린 이들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들 엘리트들은 브레넌처럼 자유무역 및 이민,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증세, 동성애자의 권리, 형벌시스템의 진보주의적 개혁,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주의적 개혁에 대해 우호적이다. 정보, 교육, 지성 때문에 대선일인 11월 8일 그가 휩쓸려 날아갈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처럼 저속하고 교육에 무관심한 이들은, 국제무역과 이민에 적대적인 자신의 프로그램이 좌파, 우파, 중도파 경제학자들의 의견과 대치된다는 이유로 뉴욕에 있는 자신의 호화아파트를 떠나 백악관 집무실로 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억만장자는 자신이 이끄는 모임에서, “나는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반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예를 들어 시카고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던 오바마가 교육의 혜택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않은 수백만 명의 투표 덕택에 대통령에 선출되고 또 재선됐다는 사실을 지적해봤자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버드·스탠포드·예일 대학 출신의 빛나는 인재들이 베트남 전쟁을 구상했고, 연이어 이라크 침략을 준비했으며, 세기의 금융위기 조건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지적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4) 기본적으로 대중의 판단의식 결여를 경계해야 한다는 미국 선거를 분석하는 것은, 시대의 기질을 반영한다는 그리고 이 분석을 읽게 될 교양있는 이들의 우월감을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 분명 유익하긴 하다. 그러나, 이 분석은 정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위기의 시기에 능력주의, 고학력, 전문가들의 통치를 중시하는 ‘지성의 인종차별주의’는 교육보다 편짜기에 관심이 많은 강압적인 인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대부분의 해설자들은 투표의 인종차별적 차원, 성차별적 차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자 했다. 사실 대부분의 해설자들에게는 여성 대선 후보자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 투표의 간극이 조금 벌어졌고, 백인과 흑인 유권자들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 약간이나마 감소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트럼프의 승리를 예견했었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11월 11일 <MSNBC>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에게 투표를 했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번에는 의견을 바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이런 분석에, 흑인이며 진보주의자이고 무슬림인 케이트 엘리슨 미네소타 주 의원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라틴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즉, 모든 원인을 백인 노동자들에게 돌리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5) 민주당 지도부에 입성하려는 엘리슨은 “우리 당은 동일한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 생각은 바로 버니 샌더스의 의지이기도 하다. 엘리슨은 예비선거 때 샌더스를 지지한 매우 드문 의원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학생 지지자들에게 연설할 때, 좌파 민주당의 선구자는 “나는 여성이니, 나에게 표를 달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당연히 불충분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여성은 월스트리트, 보험회사, 화석 에너지 산업에 맞설 용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대학은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평등에 대한 관심보다 우세한 곳이지만, 외의로 문화적 편견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 날 버니 샌더스는 확신에 찬 학생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각자가 특이한 하나의 그룹에 가입하지만, 그 그룹이 결코 경제관련 그룹은 아니다. 만일 흑인들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여성혐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고, 만일 백인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흑인들이 공화당 후보자의 보호무역주의 담화에 민감한 철강업자들이 될 수 있고, 또 백인들이 감세약속에 주의를 기울이는 부유한 납세자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당원들의 사고체계에서 빠져있는 듯하다.
 
‘촌뜨기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공화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학력과 소득이 선거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 이들 요소가 성별이나 피부색보다 선거결과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학위가 없는 백인 그룹에서 공화당의 어드밴티지가 4년 전에는 25%였는데, 올해 39%로 상승했다.(6) 최근까지 민주당원은 이 백인 그룹이 없었다면 선출될 수 없었다. 미국 국민 중에 이들의 비율이 감소하고 있고,(7) 이들이 가입한 노조의 바탕이 해체되고 있으며, 이들이 점점 ‘부적절한’ 투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성이란 주제를 강조하는 전략을 택하는 상당수 민주당원들이 이들의 지지 없이 선출돼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정치적 도전이 단지 미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서양 양안의 자기 학생들을 거론하면서 이태리 역사가 엔조 트라베르소(Enzo Traverso)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무도, 결코 자신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아마 똑같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교양 있고 지적이며, 존경받을 만하고, 뷰유하며, 자신들이 맞서는 이들은 촌뜨기들이라고 할 것이다. 유명한 이태리 영화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끔찍하고, 더럽고 고약한 촌뜨기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예전에 민족주의자들이 서민대중을 가리켜 했던 말이다.”(8)
 
그러나 ‘촌뜨기들’을 효과적으로 꾸짖으려면, 비판자들이 그 촌뜨기들은 조금은 신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비판자들이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담화 속에 갇히면 갇힐수록, 그리고 비판자들이 그럴싸한 급진적 언어 표현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미국의 작은 마을이나 황폐한 지역에서 더 작아질 것이다. 작은 마을이나 황폐해진 지역에서는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고, 주민들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조건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파는 반지성주의를 그들에게 효과적인 정치적 무기로,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둔갑시켜 버렸다.(9)  2002년 폭넓게 배포된 책자에서 ‘붉은 색을 보는(선거 지도에 표시된 공화당의 붉은 색과 민주당의 파란색 중)’ 공화당원들은 ‘촌뜨기들’의 자국을 자신들의 어드밴티지로 변화시킨다. “붉은 색 지역의 주민 대다수는 포스트모던 문학을 해체할 줄도, 가정부에게 꼭 필요한 지침을 내릴지도, 감초 맛 나는 포도묘목을 고를 줄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법을, 집에 전기배선을 설치하는 방법을, 쉽고 간단하게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모터를 수리하는 방법을, 아스파라거스를 재배하는 방법을, 보안시스템이나 정신분석가 없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10)
붉은 색 지역 주민 대다수는, 트럼프가 ‘뒤틀리고’, ‘부패하고’, ‘부정직하다’고 판결해 자신들의 모임에서 매도했던, 출판물조차 읽을 줄 모른다. 선거기간 내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에 공화당 후보는 기자들의 반박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진실이 미국 언론의 가장 보편적인 생산품도 아니며, 가장 수익성 있는 생산품도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에 호의적인 미디어들의 선거참여와 트럼프 유권자들에 대한 미디어들의 몰이해도 역시 사회적·문화적 유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편집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는 11월 17일 <폭스뉴스>에서 이런 점에 대해 설명했다. “저널리즘의 문제는 경제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다른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두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계급과 농촌 공동체 출신의 사람들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고 있다. 4반세기 전부터 미국에서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고 논평된 이런 사회학적 관점은 이런 점에서 변화가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 밖’의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미디어에 대해 부추긴 증오를 서슴지 않고 이용하고 있다. 이태리에서 기우세페 그릴로(Giuseppe Grillo)는 미국선거에서 자신과 자신의 당을 위해 위안이 되는 교훈을 끌어냈다. “미디어들은 우리가 성차별주의자, 동성애혐오자들, 대중선동가들, 포퓰리스트들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신문도 읽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11)
 
몇몇 사람들은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 전직 카피라이터이자, 작가이며 기자인 프레데릭 베그베데(Frédéric Beigbeder)가 <프랑스 엥테르(France Inter)>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영향력 상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난 주, 나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패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승리를 방해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시스템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다. 그러나 실상 내가 대중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파리에 살고 있으며, 지금은 제네바에 있다. 그리고 나는 작가들, 기자들, 영화감독들과 종종 만난다. 즉, 대중의 고통과는 완전히 분리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비판이 아니라, 명백한 사회학적 사실이다. 나는 이 나라 곳곳을 누비고 다니지만, 곳곳에서 나가 만나는 사람들은 문화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는 이들이다. 이 나라의 강렬한 분노를 대변할 수 없는 소수 지식인들하고만 교류하고 있는 셈이다.”
 
캘리포니아는 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표를 줬고, 힐러리 클린턴은 가장 번성한 백인 거주지역의 엘리트 대중들로부터 놀랄 만큼 많은 표를 얻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럼프는 유효표의 고작 9.7%만 획득했다. 국가 전체의 선거결과 때문에 속이 뒤집힌 상당수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국가에서의 분리, 즉 ‘캘렉시트(Calexit, 캘리포니아 주의 독립)’를 요구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부지사이자 전직 샌프란시스코 시장인 가빈 뉴섬(Gavin Newsom)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서구의 ‘양식 있는 지도자들’과 친교를 쌓으면서, 새 대통령의 정책들을 쳐부술 작정이다. 그에게는 그런 지도자들을 찾는 일만 남아있다.  
 
 
글·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고광식
파리8대학 언어학박사.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3> 등이 있다.
 
(1) 시모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 <정치적 인간: 정치의 사회적 기반>, 더블데이(Doubleday), 뉴욕, 1960년.
(2)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의 질문들>, 미뉴 출판사, 파리 1981년.
(3) 제이슨 브레넌, “트럼프는 유권자들이 말 그대로 무식하기 때문에 이겼다”, <포린 폴리시>, 워싱턴, DC, 2016년 11월 10일.
(4) 램버트 스트레처(Lambert Strether), 2016년 선거에서 드러난 클린턴 패배에 대한 3가지 신화, <벌거벗은 자본주의>, 2016년 11월 14일, www.nakedcapitalism.com
(5) “비행 뉴스(Vice News)”, <HBO>, 2016년 11월 16일.
(6) 토머스 에드솔(Thomas Edsall), “별로 침묵하지 않는 다수의 백인들”, <뉴욕타임스>, 2016년 11월 18일. 반면에 공화당에 유리한 격차가 교육받은 백인들에게서는 14%에서 4%로 감소했다.
(7) 이들의 비율은 1960년 83%에서 2016년 34%로 감소했다.
(8) <폴리티스(Politis)>, 2016년 11월 17일.
(9) “미국 우파의 책략: 지식인들에 대항해 민중을 결집시켜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5월.
(10) 블레이크 허스트(Blake Hurst), “붉은 색 보기”, <미국 기업>, 워싱턴 DC, 2002년 3월. 책 내용은 “광적으로 단순한 우파”에 부분적으로 번역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5월.
(11) <인터내셔널 뉴욕 타임스>, 2016년 1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