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국의 언론인들을 용서할까

2016-12-02     토머스 프랭크
   
▲ <빨간 박스>, 1977 - 필립 거스턴

올해처럼 언론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대선 후보들을 대놓고, 심지어 신나게 헐뜯으며 편파보도를 한 적은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되, 그 방법으로 한 언론사에 실린 샌더스 관련 논평들을 검토해 볼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언론사라 함은, 미국 정치계급의 양심이자 몇 안 되는 미국 최고 언론기관 중 하나인 <워싱턴 포스트>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탐사 및 심층 보도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5월까지 게재된 사설 및 논평 페이지 기사들을 비롯해 다수의 블로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언론의 예(禮)를 갖출 것을 요구하며, 초당주의와 총의(concensus)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수도권을 대상으로 한 ‘기록의 신문(Paper of record)’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샌더스의 등장

다시 말하면, 워싱턴 DC를 자신들의 직업 활동의 장으로 여기는 엘리트들의 내부 기관지와 같은 신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를 대표하는 언론인 대다수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류층 출신이다(이는 대부분의 주요 일간지도 마찬가지다). 이 신문에 기고하는 전문가들은 고교 풋볼 대회나 시의회 회의 등을 보도하는 일반 기록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모든 의미를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고학력에 화려한 인맥을 갖추고 종종 내부자로서의 이런저런 이력을 과시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만나면 매너 좋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 주위에 정부, 학계, 금융계, 의학계 및 IT 업계에 종사하는, 어울리기 편한 고학력자들을 보며 동료의식을 느낀다.

이제는 민주당의 최근 역사를 생각해보자. 민주당은 1970년대부터 위에 언급한 계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점차 변모해왔다. 오늘날 부유한 화이트칼라 전문직들이야말로 민주당이 가장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투표 블록(Voting bloc)’으로, 민주당원들은 이들이 현 경제체제에서 마땅히 승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이력, 부단한 노력으로 일군 삶, 여기에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자격요건까지 더해진 힐러리 클린턴이야말로 이런 계층의 꿈을 거의 완벽히 대표하는 인물이다. 성공한 변호사인 힐러리는 외교정책관련 특권층과도 가깝게 지내고, 주요 경제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고상한 자본가들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미국의 수도에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를 훤히 알고 있다. 워싱턴의 민주당원들, 그리고 아마 다수의 공화당원들에게도 그녀는 단순히 대선 후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료이자 그들의 전문적 세계관을 그대로 몸소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다.

반면, 이들은 버니 샌더스와 그의 ‘정치혁명’을 보고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는데, 아마 수십 년 전의 ‘저급’했던 민주당 정치로 회귀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샌더스는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칭할지 모르겠지만, 부유한 화이트칼라 계층이 보기에 그는 격세유전의 표상이었다. 즉 샌더스의 정치혁명은 그들에게 있어, 구깃구깃한 재킷을 입은 민중선동가들이 은행, 자본가, 그리고 해외공장 소유주들을 상대로 천박한 대중의 편견에 영합하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로서는 꽤나 역겨웠을 것이다.  

나는 샌더스에 관한, 200개가 넘는 <워싱턴 포스트> 사설과 논평들을 꼼꼼히 읽고 난 후, 매우 기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샌더스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한 <워싱턴 포스트> 기사들 중 부정적인 기사와 긍정적 기사의 비율은 약 5:1이었다(한편, 힐러리 클린턴 관련 논평기사들은 5:5였다). 언론은 아이오와 주 전당대회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샌더스에게 집중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샌더스가 승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정계에서 처음으로 인지한 시기였다.

“샌더스는 진실을 말하라(LEVEL WITH US, MR. SANDERS)”는 제목의 1월 20일자 사설에서는 샌더스를 “정치적 현실주의가 결여된 사람”으로 매도하고, “적자 감축이나 사회보장제도 지출(이 두 가지 사안은 <워싱턴 포스트>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단골 메뉴다)에 관한 계획이 전혀 없다”며 분노를 표했다. 같은 날, 캐서린 램펠은 글래스 스티걸 법(1) 폐지가 “2008년 금융위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옛 은행 규제 시스템을 그리워하는 포퓰리스트들은 무지함의 극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글을 썼다. 이어서 다음 날 오전, “억만장자 계층이 보수적 대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샌더스의 생각을 비웃는 찰스 레인의 글이 실렸다. 레인은 다수의 억만장자들이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서 실제로는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간의 이력을 살펴보면, 억만장자들이 버니 샌더스보다 진보적 대의를 발전시키는데 더 많은 공을 세웠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라며 샌더스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언론들, 샌더스에게 집중사격을 퍼붓다

1월 27일, 아이오와 주 전당대회를 단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가장 영민한 칼럼니스트 중 한 명인 데이나 밀뱅크는 “샌더스를 민주당 후보로 지명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라는 제목의 글로 못을 박았다. 버몬트 주 상원의원을 존경한다며 운을 뗀 그는, “그러나 미국에서 사회주의자가 대선에서 승리한 적은 없었다”며 독자들에게 경고했다. 다음 날,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이 ‘허구로 가득한 캠페인’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이에 동조했다. 이 사설은 샌더스를 일종의 사기꾼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샌더스 상원의원은 진실을 말하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소설을 간절히 원하는 일부 국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정치인일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언급하는 샌더스의 단점은 점점 늘어나고 복잡해졌다. 샌더스가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은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단순하게 들리는 솔루션들을 제안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지도자들”이라며 싸잡아 비판했다. 샌더스는 금권주의를 ‘편리한 희생양’으로 사용하고, 원자력에 적대적이며, 대형 은행을 쪼개는 데 있어 구체적 계획도 없고, “경제학자들의 압도적 합의에 반하는 가짜 수치들로 무역 협정들을 공격하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그 다음으로는 샌더스가 인종문제에 무감각하다는 주장의 글들이 뒤를 따랐다. 조나단 케이프하트(블로거이자 논평 칼럼 기고자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의 일원)는 샌더스에 대해 흑인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계급과 빈곤의 틀에서 벗어나서 인종 문제를” 논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후보자이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의 뒤를 이을 재목이 아니라고 묘사했다. 케이프하트는 또 다른 글을 통해 샌더스가 “마술지팡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며 그의 투표개혁 제안은 결코 실행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철부지 시절에 민권 운동에 참여했던 샌더스의 감동적인 이야기조차 케이프하트가 윤색하면서 얼룩졌다. 2월, 케이프하트는 1962년의 유명한 시위 사진을 분석하고는 그 사진 속 인물이 샌더스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 사진을 직접 찍은 사진사가 샌더스가 맞다고 밝혔을 때조차 이 유명한 <워싱턴 포스트>의 저널리스트는 사과를 거부한 채, “이는 기억과 역사적 사실이 충돌한 데서 비롯된 이야기”라는 말로 문제를 얼버무려버렸다. 분명 샌더스는 평소 언론이 차리는 예(禮)가 적용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 데이나 밀뱅크가 다양한 각도로 샌더스를 공격하며 지원 사격을 가했다. 선거가 본격화한 2월, 그는 샌더스를 사회주의 악플러들을 일컫는 버니 브로스(Bernie Bros)에 비유하면서 댓글 테러리스트의 일원이라고 깎아내렸다. 3월, 밀뱅크는 “민주당원들이 현재 상당히 만족스러운 상태라서 샌더스 같은 반항아에게 투표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독자들에게 호언장담했다. 4월에는 무역에 대한 샌더스의 입장이 트럼프의 견해와 유사하다며 이는 가난한 국가들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한탄했다. 5월, 밀뱅크는 네바다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이 욕하며 “의자를 집어던진” 사건에 대해 그저 끔찍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후에도 샌더스가 이들을 질책하지 않자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묘사했다. 밀뱅크는 “거의 민주당의 후보 지명이 확실시 되는 힐러리를 상대로 샌더스가 반대운동를 벌인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사건에 대해 다음과 경고했다. “버몬트 출신 사회주의자가 이제는 민주당을 상대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도널드 J. 트럼프에게 기쁘지 않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언급한 내용에는 예외적인 사항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예를 들면 <워싱턴 포스트>의 블로그에는 카트리나 밴든 휴블과 만화가 톰 톨스와 같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클린턴을 싫어하는 몇몇 이들의 글도 게재됐었다). 그러나 사설 페이지 독자들은 5월 26일이 되고 나서야 샌더스의 입법안을 강력히 지지하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제프리 삭스가 쓴 이 기고문은 해당 주제에 관한 거의 모든 기존 논의들이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표준 경제학 모형들이 샌더스가 옹호하는 대규모 개혁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언론인들이 정치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글이 공화당 후보를 돕게 되지는 않을지 항상 검토해야만 한다. 이미 앞서 밝혔듯이 나는 진보주의자이고, 민주당을 지지하며,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냥 지금 당장 노트북을 꺼버려야겠다. 이는 상황을 고려하는 정치적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오히려 반(反)정치적이고, 정치사상에 매우 적대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2월에 편집국이 두 개의 사설에서 설명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본 철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중 ‘샌더스 의원의 현실 공격’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편집 위원들은 샌더스의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그가 특정분야에서 더 나은 정책들을 주창함으로써 암암리에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류층의 관점에 충실한 언론인들의 환상

어쩌면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신문은 다음과 논리를 전개했다. 

“시스템은(여기서 시스템이란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 구조를 의미한다) 정책입안자들이 점진적 변화에 만족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에서는 양측 이론가들이 무차별하게 비난을 가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몇 가지 야심차지만 불완전한 개혁들을 추진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왔다.”

여기서 신문은, 미국의 시스템에서는 본래 대통령이 ‘점진적 변화’ 이상의 그 어떤 것도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는 현 시스템 여건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던 것이고, 정말로 그가 추진했던 방식 이외에 ‘다른 옵션’은 없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편집국은 ‘양극단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사설에서 신문의 철학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신문은 테드 크루즈와 마찬가지로 샌더스도 “진보로 가는 길은 타협이 아니라 순수성이다”라는 유해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샌더스가 실패한 이유가, 명백한 게임의 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요령 있는 정치 저널리스트들의 지혜를 다음과 같이 들어보자. “진보는 원칙은 지키되 적극적으로 타협안을 만들고, 지혜를 독점하지 않으려는 점을 인정하며 점진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정치인들에 의해 달성될 것이다. 이 메시지로는 당 경선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어렵지만, 11월 대선에서 승리하고 더 나아가 향후 4년간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후보자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훨씬 높다.” 

즉, 전면적 변화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런 변화자체가 정치 후보자들에 의해 주창돼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국 전체가 적용하고 있는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가장 실용적 노선의 리더들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식으로든 총기 규제를 법률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일도 없고, 의회에서 통과되더라도 대법원 및 수정헌법 제 2조와의 공방이 남아있다는 점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온갖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중국의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데, 중국에 가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정치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버니 샌더스는 이러한 유명 시사평론가들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개혁들을 제안함으로써 대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들은 샌더스의 생각 자체를 논하지 않았다.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자면, 다짜고짜 호각을 불어 선수를 퇴장시켜 버린 셈이다. 의회를 절대 통과하지 못할 비현실적인 계획과 제안들은 논의에서 제외시키고 밀어낸다. 이런 뉴스기관들이 다루는 주제는 현실주의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직접 그들을 찾아야 한다. 정통성은 거의 문자 그대로 그들의 재산이니, 그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씩 나눠줄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샌더스 깎아내리기를 떠받치는 모든 원대한 사상들을 보라. 거기에는 합의와 공감에 대한 예찬, 실용주의와 초당주의 숭배, 포퓰리스트적 반응에 대한 경멸, 반대의견을 당에 대한 불충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적 실수들을 생각해보라. 이를 테면,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2)에 대한 열렬한 지지, 은행규제 조롱, 그리고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묵살해버렸던 사례가 이에 포함된다. 물론 이는 전문가 계층의 사상으로, 다시 말하자면 MIT대학의 경제학자, 크레딧 스위스의 애널리스트, 또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정치학자들과 같이 기타 직업군에 있는 동료들을 ‘권위자’라고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프린스턴이나 하버드를 갓 졸업한 정신 멀쩡한 미 동부 노력파들의 이데올로기다. 무엇보다도 이는 내부자의 이데올로기, 즉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이들의 생각으로, 명백히 일반적인 상류층의 관점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점은, 한 집단으로 볼 때 언론인들이 경제적으로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언론인이라는 직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는 끝난 지 이미 오래다. 버니 샌더스의 뉴딜 정책이 그렇듯, 신문도 박물관으로 가야할 법한 아이템이다. 보도국의 직원 해고는 계속되고 있다. 2014년 한 해만 3,800명의 정규직 편집직원들이 해고됐고, 이런 추세가 지속돼 <가넷(Gannett)>은 지난 9월 뉴저지 신문사 직원 중 200명을 감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평란 편집자들은 희귀하다 못해 곧 멸종될 직업군이 돼버렸고, 한때 경찰서와 시 정부를 취재하던 기자들도 비슷한 사정이다. 일부 신문사의 경우 논평 칼럼니스트들이 다른 본업을 가질 것을 권장하고, 교열담당자 대다수는 덩치 큰 ‘바다오리’(3)와 같은 운명이다.

언론의 내부자와 외부자, 뜨는 자와 지는 자 간에 결속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 워싱턴 DC에서는 전문가들과 예비 전문가들 모두 위를 향해, 항상 위를 향해 신분상승을 좇는다. 우리는 자신의 학력에 집착하고 전문직 계층에 관한 환상에 사로잡혀 상원의원이나 주지사들과 어울리고, 친숙한 내각 관리들과 재담을 주고받으며, 샴페인과 랍스터 요리를 즐긴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 의견을 궁금해 하고 내 생일을 축하해주길 원하며, 내가 어젯밤 퇴근 후 어디서 칵테일을 마셨는지 궁금해 한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이야기]

내가 쓴 이야기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버니 샌더스의 시도로 끝나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샌더스를 공격한 이유 중 하나는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선출될 수 없고, 도널드 트럼프(항상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괴물로 그려짐)와 맞붙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가장 강력한 도전자를 내놓아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리고 버몬트 주지사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블로거인 폴 크루그먼은, “선출가능성”을 보고 샌더스에 투표하기로 결정했다면 “역사가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당시 실시한 여론조사는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반대의 양상을 보여줬다. 샌더스와 트럼프가 붙었다고 가정했을 때, 샌더스가 줄곧 트럼프보다 우세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힐러리는 허풍쟁이 억만장자와 항상 막상막하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트럼프의 지지기반은 백인 노동자 계층이었는데, 이들은 트럼프를 좋아하긴 하지만 샌더스가 제시한 공약들을 훨씬 선호했던 것이다. 반면,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계급문제에 침묵하며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미미했던 힐러리의 인기는 바닥이었고, 실제로도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는 언론이 샌더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결과다.

그러나 힐러리가 패배하기 전까지, 언론은 그 어떤 대선 후보자들에게도 그렇게 열광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며 응원했던 적은 없었다.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힐러리가 자신들과 같은 계층이라는 인식이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경기를 일으킬 만큼 도널드 트럼프를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인들은 대중이 자신들과 같은 의견을 갖게끔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지난 8월, <뉴욕타임스>는 “만약 언론인들이 트럼프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믿는다면, 지금까지 사용했던 미국 저널리즘 교과서를 버리고 공공연히 편을 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담은 1면 기사를 실었다. 물론, 힐러리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거의 모든 미국의 신문사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힐러리를 지지하는 언론인들의 운동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샌더스와의 전쟁은 민주당 경선 투표자들에게서는 효과를 봤지만, 일반 대중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미국인들에게 공통적인 국민적 성향이 있다면 아마도 오만함에 대한 경멸, 그리고 언론인들처럼 자칭 권위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 등일 것이다. 미국 신문사들의 잔소리와 과열된 당파주의가 전 세계가 앞으로 4년 간 감내해야 할 어마어마한 역풍을 불러온 것 같다.
과연 역사는 미국의 언론인들을 용서할 것인가? 그건 두고 봐야 알게 될 것이다.  


글·토머스 프랭크 Thoma Frank
언론인, 역사학자.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한 <하늘 아래 유일한 시장(One Market under God)>, 보수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분석한 <난파선의 선원들(The Wrecking Crew)>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저술가. 그의 저서 <왜 가난한 자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2004년 출판되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지난 8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선거에 관한 참고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됐나>를 통해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변화무쌍한 집권전략을 폭로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흉임에도 책임을 지기는커녕 버젓이 재기하는 보수 우파의 모습, 또 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민주당의 무능을 그려내기도 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이 기사는 <하퍼스(Harper’s)> 11월호에 게재된 글이다. 

(1) Glass Steagall Act: 대공황 당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엄격히 분리하기 위해 제정된 법. 1991년 그램-리치-블라일리 법이 통과되면서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 법의 폐지는 2008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거론된다.
(2)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2008년 금융 위기 시 대형은행의 몰락을 막기 위해 이들의 부실자산을 매입한 정부 프로그램
(3) 멸종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