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치하의 삶

밤의 공포와 낮의 희망

2016-12-02     레베카 고든

선거 다음 날 밤, 이 오랜 평화주의자는 꿈에서 무기를 한 보따리 들고 있는 덩치 큰 백인 남자를 총으로 쐈다. 그 남자는 사람들로 가득 찬 방을 어슬렁거리며 손에 있는 권총을 발사할 듯 휘두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손에 권총을 건네주며 “지금이야, 그가 등을 돌리고 있으니 쏴!”라고 말했고,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등에 난 구멍으로 피가 스며져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선거 결과는 그대로였다.

밤마다 찾아오는 여러 가지 공포

악몽은 며칠간 계속됐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내가 하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일들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내가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꿈들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나의 파트너와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우리의 가장 큰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공포는 사적이고 이기적이다. 새로운 정권에서도 내게 필요한 약들을 계속 지원받을 수 있을까? 의료보험 혜택을 계속 받으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내년에 65세가 되면, 2017 메디케어(미국 정부가 65세 이상의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건강보험-역주) 계획 대신 메디케어를 바우처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폴 라이언의 계획에 따르게 되는 걸까?

어떤 공포는 국가적이다. 백인우월주의자가 대통령의 최고정책전략가로 일하게 된 시대에서도 우리 두 사람, 그리고 우리가 관련돼 있는 조직들이 계속해서 사회취약계층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떤 공포는 세계적이다. 트럼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을 것이며, 역사적인 파리 기후협약에서도 빠지겠다고 선언한 지구에서 이미 섬나라들을 조금씩 침몰시키고 있는 해수면 상승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사적인 공포로 돌아온다. 60대의 중산층 백인 레즈비언 여성 두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 정권에서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왜 우리의 동성애자 리더들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두 가지 권리가 군대에 갈 수 있는 것과 합법적인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의문이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느냐”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두 사람은 이제 트럼프 정권에 영향 받은 미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1)를 뒤집고 주 법원에 다시 낙태에 관한 권리를 이양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1975년에는 그 권리가 절실했던 나는 그 권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 신께 감사했다. 반면, 대법원이 소도미 법(Sodomy laws. 동성 간의 성교를 불법으로 규정한 텍사스 주 법-역주)을 무효화시킨 2003년 로렌스 대 텍사스 판결이 뒤집힐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는 잊기 쉬운 일이지만 1986년까지만 해도 대법원은 바우어 대 하드윅 판결에서 누구도 “동성애 성교에 관여할 수 있는 근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결을 내렸었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강하게 뒤흔든 공포는, 다가올 몇 년간 이 나라에서 법치의 완전한 붕괴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15년 간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자행되는 고문과 다른 전쟁범죄에 관해 저술해왔다. 먼저,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불법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강화 취조 기술”과 법의 영역 밖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만들었다. 뒤이은 오바마 정부도 사법 절차에 의하지 않은 드론 암살 같은 정책을 이어나갔고, 공식적 선언 없이 리비아, 시리아, 예멘에서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일련의 전쟁 사건들 속에서 그들은 국내법과 국제법의 숱한 법규를 왜곡하고 변형시키고 위반했다. 

그래도 적어도 지난 두 정부는 “법치를 지향한다”는 입에 발린 소리라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아예 자신의 길을 막으면 법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지난 3월에 치른 경선 토론에서 군은 자신이 내리는 모든 명령, 즉 수감자를 고문하거나 테러리스트 용의자의 가족들을 ‘제거’하는 등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론 중재자인 브렛 바이어가 군인들은 불법적인 명령을 따르는 것이 금지돼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나를 거부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믿으세요. 나는 리더입니다. 항상 리더였어요. 나는 사람들을 이끄는 데 한 번도 문제를 느꼈던 적이 없습니다. 내가 하라고 하면, 그들은 할 겁니다.”

아마 대중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 그에게 조언한 듯하다. 그 다음날 그는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며 “미합중국은 법과 조약을 준수해야 하며 나는 우리의 군대나 다른 공직자들에게 그러한 법률을 위반하도록 명령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법의 구속력에 대해서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꽤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정권에 관해 걱정해야 할 것은 너무도 많다. 그런데 왜 많은 우려 중에서도 유독 법치에 대한 경멸이 나에게 크게 다가올까? 그 중 한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함께 살고자 하는 욕구를 인지하고 충족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을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반포된 공공의 선을 위한 이성의 조례”라고 정의했다. 이는 아직도 꽤 유효한 정의다. 어느 한 특정그룹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일원을 위한 이성적 규칙이 그 공동선이 보장되도록 책임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대중들에게 알려 모두가 그 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아는 것. 비밀의 법도, 비밀의 법원도 없는 것. 시대를 앞서 간 중세 민주주의자 아퀴나스는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사실 선거에 의해 뽑힌 대표자들의 조직일 수도 혹은 공동체 전체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견했던 것이다. 

법은 섹시하지 않다. 법은 인터넷의 광고성 링크가 아니다. 그러나 법은 인간 이하로 지정된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 간에 보호막이 돼줄 수 있다(물론, 트럼프가 생각하는 유용한 벽은 아니겠지만). 그렇지만 이는 법이 엄격히 집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국제법도 15년 간 전 세계를 커다란 발로 쿵쿵거리고 미사일과 흉기를 휘두르는 두 살짜리 화난 거인 같았던 나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벽이 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임기 시작에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시 정부의 잘못에 관해서 “뒤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보고 가겠다”고 약속하지만 않았던들, 국제법은 벌써 그러한 보호벽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법을 존중하는 것에 실패한 결과로 21세기 미국에서 몇몇 사람은 법으로부터 면제됐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오바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일의 한 가지는 예를 들어 미 중앙정보국의 아주 재능이 뛰어난 직원들이 국민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갑자기 어깨 너머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불안해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어깨 너머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어깨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국제형사재판소가 미 중앙정보국의 어깨 너머를 들여다본 듯하다. 이달 초 발표된 연례 보고서에서, 최고 검사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미군부대와 미 중앙정보국에 의해 운영되는 비밀 수용시설에서의 고문 및 가혹 행위 등의 전쟁범죄를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러한 범죄혐의는 몇몇 개인의 학대 행위가 아니라, 수감자들로부터 ‘핵심 정보’를 캐내기 위해 사용되는 공인된 취조 기법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처음으로 미국의 전쟁범죄를 조사해 미국을 국제법상의 기준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다. 이 노력이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은 실로 불투명하다. 미국은 이 조약을 만든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색인종과 무슬림, 여성을 엄습한 공포

나는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친다. 선거 다음 수요일 오전 나는 그날의 강의 계획(제도화된 국가 고문)을 버려버렸다. 그 대신 선거에 관해 고찰했다. 우리는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승복 연설, 트럼프의 승리 연설, CNN 중계 아나운서 밴 존스의 선거에 대한 걸러지지 않은 반응(“이것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반란입니다”) 등 몇 개의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학생들에게 트럼프의 뜻밖의 승리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다. 

한 젊은 백인 여학생이 “트럼프를 뽑은, 교육 받지 못한 백인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말하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나는 학생들에게 미국 국민의 몇 퍼센트가 학사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답은 약 1/3이었다). “그렇다면 2/3의 국민이 대학을 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뜻이네요. 그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그들 자신의 선택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돈과 금액으로 환산하는 이 사회에서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거나, 자신의 가치와 위치를 규정하는 일자리를 잃었을 때의 엄청난 고통에 관해서 들려줬다. 우리가 유색인종, 여성, 이슬람교도, 장애인, 그리고 법치에 대한 경멸과 차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후보자를 지지하는 정치적 선택을 끔찍해하는 이 순간에도 그 고통과, 그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인간성은 존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한 아시아계 미국인 여학생은 울먹거리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있는 흑인과 남미계 친구들에게 닥친 공포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 공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선거일로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 사이에 남부빈곤법률센터는 437건의 혐오 사건을 접수했다. 그 중에 상당수는 “트럼프 선거 캠페인과 선거 문구 등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과 관련돼 있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고함을 치고, 경멸조로 남자를 부를 때 쓰는 “선생님(Sir)”이란 호칭으로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거리에서 나를 뒤쫓아 오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일 년 간 사람들에게 “그들의 증오는 좋은 것이고 물리적 폭력과 함께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라”고 말해왔다. 그러니, 우리들 가운데 겁을 먹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며칠이 지난 후 다른 수업에서, 한 인도계 미국인 학생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나는 그의 친구 중 캘리포니아 버클리 주립대학에 다니는 흑인 여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여성은 선거 후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트럼프 반대시위에서 멀찍이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그 여성을 둘러싸고 조롱했고, 트럼프가 자신의 유명세로 할 수 있다고 자랑한 ‘그 일’을 했다. 그 여성의 성기를 움켜쥔 것이다. 그 여성은 도망쳤고, 다행히 그들은 ‘재미’를 봤기에 쫓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이야기는 그 학생 자신의 이야기였다. “주말에 바트(샌프란시스코 지하철)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이었어요.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18세 가량의 히잡을 쓴 여성을 둘러싸고 있었죠. 그들은 그 여성을 놀리며 욕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여성의 옆에 앉아, 그들을 무시하라고 했죠. 그 여성이 내릴 때가 됐을 때, 그 여성은 혼자 내리길 무서워했어요. 저는 다섯 정류장 더 가야 했지만 그 여성을 위해 함께 내렸습니다. 그 남자애들도 내리더군요. 역 밖에까지 우리를 쫓아오더니 그 여성이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가까이 서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그들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고, 마중 나올 사람이 오지 않길래, 제가 스마트폰 앱으로 택시를 불러 그 여성의 집까지 함께 타고 갔어요.”

그 학생의 용기에 나는 숙연해졌다. 

우리를 다시 램프 속에 가둘 수는 없다

우리 대학의 정교수 중 한 명이 계약서 없이 몇 달간 일했다. 학교 경영진이 바뀌면서 바뀐 행정부는 아주 온건한 연봉인상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을 표현하기 위해 동료 교수들은 빨간 동그라미 안에 ‘새로운 기준’이라는 글귀를 적고 그 위에 빨간 사선표시를 한 배지를 만들었다. 나도 동료 정교수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배지를 착용하고 다녔다.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긴 후, 나는 그 배지를 학교 밖에서도 착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준이 아주 낡은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는 아주 적합한 구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배지를 하면 왠지 내가 조금 더 용감해진 것처럼, 그리고 조금 더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희망이 필요한 때다. 무기력, 절망, 우리 학생들의 눈물이 새로운 기준이 될 수도 있는 시대를 마주할 수 있도록 말이다. 희망은 명백히 현실에 위험이 있는데 없는 척 덮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훌륭한 좌파 수사법을 찾고 있다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서 <감옥에서의 편지>에서 제안했듯, 우리는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결합시켜야 한다.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그는 “진짜 산다는 것은 시민이 되고, 참여한다는 뜻이다”라고 썼다. 

이는 내가 학생들과 같이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 나온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참여하며 살 때 가장 잘 살 수 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질은 우리가 연습해서 얻은 습관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진다”라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희망은 우리가 희망적인 일들을 함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쌓아가는 습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전혀 들어맞을 것 같지 않은 모난 돌멩이들을 모아 벽을 만들 듯이 말이다. 희망은 돌을 한 개씩 쌓아올려 만드는, 트럼프식 독재 정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이다. 

내가 쌓아올리는 희망의 벽에 들어가는 돌 몇 개는 이렇다.
1984년 니카라과에서 15명의 사람들과 조그만 픽업트럭 뒷자리에 끼여 앉아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위험한 지역을 지날 때였다. 미국이 지지한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자가 축출된 직후, 레이건 정부가 불법적으로 자금을 대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를 탄압하는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우리가 가고 있던 길은 미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콘트라 반군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지나 산 후안 델 보카이라는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넓고 평평한 땅이 펼쳐지며 들판 한 가운데에 외양간이 하나 서 있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읽고 쓰기를 배운 듯 한 누군가가 외양간 건물 바깥에 큰 글씨의 페인트로 정성껏 어떤 문구를 적어놓았다.

“Nosotro vencimo Somo libre Nunca volveremo a cer esclavo.”
철자법도 엉망이고 구두점도 없었다. 모든 니카라과인들이 그렇듯 그 글씨를 쓴 사람도 단어 끝에 붙이는 “s”를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뜻하는 “nosotros” 철자에 그 글자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의미가 명백히 전달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자유다.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살기로 결심하면, 그들은 램프 속에 다시 갇힐 수 없는 요정 지니가 된다. 지난 50년 간, 이 나라 국민들 중 일부는 각각 자신들의 인간성을 요구하고 회복하기 위해 싸웠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들과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 서류상 지위를 막론한 이민자들이 그들이다. 트럼프국가가 우리의 인간성을 아직 인정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금 램프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2016 대선 다음 목요일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출근하는데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발렌시아 거리를 따라 촘촘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나서 인도를 걸어 내려오는 주중 낮 시간대 시위대를 보게 됐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들은 피켓을 들고 나온 중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피켓에는 “트럼프를 버려라(Dump Trump)”,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Love Trumps Hate)!”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잠시 길을 멈추고 그들에게 큰 소리로 “나 같은 사람들이 시작한 일을 너희들이 완성하겠구나”라고 외쳤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놀라운 용기를 응원하는 함성을 질렀다. 젊음도 램프 속에 다시 밀어 넣을 수 없다. 포크 가수 홀리 니어가 수십 년 전 “내 친구여, 젊음은 죽일 수 없다네, 젊음은 세상 모든 곳에서 자라고 있다네”라고 노래했듯이. 대선 다음 금요일 오전 7시 45분, 나는 8시 수업에 가기 위해 학교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건물 문 앞에 누군가가 소박한 흑백 공지문을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최근 선거 결과로 상처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슬퍼하고 그리고 나서 함께 조직합시다.” 

그 글 밑에는 “어디에 모여 이 무시무시한 선거 결과를 피할 방법을 함께 토론할지”에 대해 나와 있었다. 공지에 의하면, 그 모임은 오후 1시부터 시작해서 결론을 내릴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공지는 다음과 같은 고찰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원하는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쉼표와 따옴표 등 문장부호는 좀 잘못 썼지만 의미는 역시나 명백했다. 이 젊은이들은 나와 내 동료들이 인생의 그 많은 시간 동안 노력해왔던 일들의 계승자였다.

선거 다음 날, 나는 평소 글을 잘 올리지 않는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올렸다. “8년이나 세상에 조지 부시를 내준 것도 모자라 이제 이것인가. 이 나라의 절망과 분노의 깊이를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털고 일어나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내 사전에 이민이란 없다.”

나는 세월의 풍파에 여기저기 닳은, 그리고 가끔 밤에 악몽을 꾸는, 나이 든 레즈비언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끝이 어떻게 되나 보려고 모든 것을 공중분해 시켜버리려는 혐오와 허무주의적 욕구의 힘에 조국을 양보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고 고집이 세다. 나는 투쟁했고, 조직했고, 이제 와서 포기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리고 트럼프와 트럼프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나나 우리 중 그 누구도 다시 램프 속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글·레베카 고든 Rebecca Gordon
<톰디스패치>의 고정기고가로,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저서로는 <미국의 뉘렌베르크: 9/11사후 전쟁 범죄로 재판에 서야 할 미국 공직자들>, <고문의 부활: 9/11 사후의 미국의 윤리적 접근>, <니카라과에서 보낸 편지> 등이 있다.  

번역·이유민
연세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1) Roe vs. Wade decision: 1973년 미 대법원이 미국 수정헌법 14조에 의거해 여성은 임신중절을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고 판결, 낙태를 금지 및 제한하는 주와 연방 법률이 모두 폐지됐다. 이는 역사 상 가장 논쟁적인 판결 중 하나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대립하는 중요쟁점이 됐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