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극우와 도나우강의 노래

2016-12-02     에블린 피에예
   
 
 
헝가리의 국민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파로 분류되는 두 정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며 헝가리 국민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다. 두 정당은 록 콘서트에서부터 기마 시범에 이르기까지 ‘저항문화’에서조차 헝가리 민족의 가치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화 <코난 더 바바리안>의 주인공 같은 긴 머리 또는 민머리, 헤비메탈 티셔츠, 탄띠와 큰 해골 반지, 근육질 팔뚝에 그려진 타투와 한 손에는 캔 맥주. 헤비메탈 스타일은 국경이 없다. 2016년 8월 중순 어느 저녁 헝가리 벌러톤 호숫가 작은 마을에 헤비메탈 스타일로 꾸민 사람들이 야외 공연 관람을 위해 넒은 공연장에 모였다. 공연장 한쪽에서 공연 밴드 포스터 등의 기념품과 맥주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는 어느 공연장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보통 헤비메탈 공연장과 달리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았고 낯선 지도와 문자가 그려진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한참 뒤에 그 이상한 문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대 룬 문자였다. 관람객 8백여 명이 ‘애국 록’ 밴드 카르파티아(Kárpátia, 헝가리어 명칭)의 공연을 보러 왔다. 무대 바닥에는 언뜻 독수리처럼 보이는 새의 뼈 그림이 있는데, 이는 다뉴브 평원 정복 시 마자르인들을 이끌었다는 전설의 새 ‘투룰’이었다. 
 
밴드가 등장하고, 이어서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단순하지만 신나는 노래들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민머리에 강렬한 콧수염을 가진 보컬 겸 베이시스트 야노시 페트라시는 유명 록 스타처럼 진지하게 무대를 장악했고, 기타리스트는 자신의 긴 머리로 헤드뱅잉을 했다. 음악에 취한 관중은 헤비메탈의 상징인 검지와 약지를 세운 악마 표시를 했다. 지금까지는 놀라울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축구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깃발들이 펄럭였다. 아이들은 작은 깃발을 흔들었고, 한쪽에선 거대한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깃발 대부분이 헝가리 국기와 다른 모양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일부는 헝가리 국기와 비슷했지만 적색, 녹색, 백색 가로줄 외에도 문장과 양 옆에 두 천사가 있었다. 바로 옛 헝가리 왕국 깃발이다(지도 참고).
 
게다가 극우성향이 아니라면, 대부분 분노할 적·백색 줄무늬로 된 깃발도 보였다. 헝가리 왕국 건립자 아르파드 왕조의 상징색인 적·백색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헝가리인’이라고 주장한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특히 1939년에 창단한 헝가리 나치즘 화살십자당을 상징하는 색이다. 화살십자당은 1944년 10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유대인을 몰살하는 데 매우 열성적으로 동참했으며, 이로 인해 50만 유대인이 죽거나 살해당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 많은 깃발들 중 유독 의미를 알 수 없는 깃발이 화려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청색 바탕에 황색 줄무늬, 태양과 초승달이 그려져 있었다. 결국 콘서트가 끝날 무렵까지 깃발의 의미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공연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기타의 정열적인 솔로 연주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신나는 군가 한 곡만 계속 듣는 느낌이 들었다. 실상 관객들이 후렴구를 큰 소리로 외치며 공연하고 있는 것이었다. 록 밴드 ‘카르파티아’는 하나의 현상이다. 2003년에 결성돼 연간 100회 공연을 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카르파티아는 자신들의 앨범 제목이기도 한 ‘헝가리를 위한 정의’를 주장했다. 또한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 체결로 인해 헝가리 영토 2/3와 인구 3/5를 잃고 결국 헝가리 왕국 분열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트리아농 조약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순수혈통국가’의 환상을 노래하는 카르파티아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된 지 거의 100년이 돼가는 오늘날, 우리는 조금 전 받은 충격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충격이 다가왔다. 야노시 페트라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불러줬던 노래 “위대한 헝가리제국은 지상 낙원이었지”를 무대에서 불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록 밴드의 이름이,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이 과거 헝가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공연 시작 전에 본 관객들 티셔츠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옛 헝가리 지도였다. 그리고 전주 앞부분이 공연장에 울려 퍼지자 엄숙한 분위기로 관객들은 하나가 된 듯 일제히 기립했다. 우리는 밴드가 헝가리 국가를 연주하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 곡은 현재 루마니아 영토가 된 카르파티아 산맥의 중심 지역 트란실바니아를 향한 찬가였다. 물론 대중 오페레타에서 따온 가상 찬가이지만 카르파티아 팬이 아닌 사람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앞서 본 미스터리 청색과 황색 깃발은 과거 헝가리가 잃은 트란실바니아 영토의 국기였던 것이다. 야노시 페트라시는 과거 ‘역사적으로 헝가리 영토’였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자신들의 공연이 금지됐다고 기뻐하며 말했다. 록 공연이 집회가 된 광경은 정말 놀라웠다. 더욱이 30대 청년들이 이런 유형의 애국주의에 몰리고 이를 자유로운 현대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점은 매우 놀라웠으며 마치 ‘프랑스 동성결혼 반대단체(Manif pour tous)’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를 단체 대변인으로 선정했을 때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이어 야노시 페트라시는 ‘공산주의 독재’에 저항한 이들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 1956년 헝가리 민중 봉기 노래를 열정적으로 불렀고, 과거 붉은 군대가 승리하는 바람에 대부분이 반역죄 처형을 당한 화살십자당 지도자들을 찬양했다. 관중들은 모두 감격했다.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유대인들 가운데 3명 중 1명이 헝가리인이어도 상관없다고 허락한 사람들과 합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카르파티아의 공연은 비밀공연이 아니었음에도, 공연장 어디에도 공연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에게 애국의 정의는, “한 번 헝가리인은 영원한 헝가리인”이라는 화살십자당의 국가이념 ‘헝가리인주의자’를 바탕으로 국제주의 공산주의자, 암묵적으로 유대인, 전반적으로 외국 제품과 가치를 ‘헝가리인주의’에 도입하려는 자유주의 주동자를 포함한 외국인 등 모든 ‘비(非)헝가리인’을 향해 신랄한 증오를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야노시 페트라시는 무력으로 쟁취한 땅에서 전사들의 후손이 사는 환상 속 ‘순수혈통’ 국가인 구시대적 헝가리를 찬양했다. 헝가리어로 ‘조국의 점령’을 뜻하는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마자르 부족 연합이 다른 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파노니아 다뉴브 평원에 정착했던 896년을 기억하기 위해, 부다페스트 내 모든 건물의 높이가 96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라고 야노시 페트라시는 주장했다. 또한 ‘선택받은’ 민족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치와 선택받았다는 상징을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선택의 상징은 우크라이나를 지나 루마니아부터 오스트리아까지 헝가리계 소수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동상으로 세워져 있는 전설의 새 ‘투룰’과 고대 룬 문자라고 주장했다. 일부지역에서 1850년까지 사용했던 이 문자는 최근 극우성향의 마을 간판에 쓰이며, 1000년에 왕조를 세웠으며 시성식 이후 수호성인이 된 에티엔 1세와 관련 있는 기독교에서도 사용됐다.
 
카르파티아가 극우성향을 대표하는 유일한 록 밴드는 아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꽤 영향력 있는 라디오 채널 ‘파논(Pannon)’이 밀어주는, 2000년 결성된 또 다른 밴드의 음악에도 민족 정체성이 상당히 섞여있다. 이 록 밴드의 이름은 ‘로만티쿠시 에뢰시트’, 이른바 극우 밴드다. 이들 밴드 음악에도 일부 역사 해석을 담은 가사가 있다. “조국 만세”를 목에 문신으로 새긴 밴드 보컬이 부르는 노래가사는 이렇다. “나의 꿈은 수 세기 전부터 내려온 강인하고 독립적인 헝가리인들이 이끄는 나라,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나라, 그 나라는 바로 헝가리.”(1)
 
‘낭만적 폭력’을 의미하는 밴드 이름에서 극우성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현재 질서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수단으로 폭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면, 낭만을 폭력과 연관 짓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열광적이고 춤추고 싶게 만드는 민족주의는 어떤 이상향을 담고 있는 듯하다. 현대 언어로 부르지만 구시대를 향한 노스탤지어 밑바탕에는, 이데올로기나 다른 형태의 투쟁 준비를 통해 형제 공동체를 결속하면서 남성적 가치로 돌아가는 영웅주의를 향한 동경이 담겨져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주장에 사회 문제가 빠졌다. 오스만 제국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두 시대를 모두 제쳐 두더라도, 헝가리 인민 공화국 시절은 ‘점령’으로 보지만 1944년 나치 점령을 ‘점령’으로 보지 않는 역사적 관점도 되짚어 봐야 한다. 모호한 내용이 많아 ‘트리아농 조약’에 대한 극우의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헝가리 섭정으로 있던 해군 제독 미클로스 호르티는 1918년 루마니아로 귀속된 영토 일부를 1940년 헝가리로 ‘재통합’하기 위해 추축국과 동맹을 맺고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트리아농 조약을 재협상하면서 모호한 내용이 많아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영토는 재분배됐고, 공산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트리아농 조약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극우성향이 아닌 사람들도 대헝가리제국(1867~1918)이 쓰인 스티커를 자동차 뒷 유리에 붙이고 다닌다.
 
대헝가리제국이 쓰인 스티커를 붙이는 행동은 가장 최근에 일어난, 또 다른 점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자본주의의 점령이다. ‘대헝가리제국’은 (비록 환상이긴 해도) 강력한 환상을 품게 만드는 국가와 민중의 주권 시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자국시장을 서방국가에 ‘개방’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1990년대 사회당 및 자유민주연합 간 연립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불만 없이 따르고 혹독한 긴축 재정 정책을 실행했다. 실업률은 급증했고 유럽연합에 가입한 2004년에 헝가리 내 대기업의 80%, 은행의 80%가 외국 소유였다. 게다가 온 나라가 들썩일 규모의 부패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좌파 진영 엘리트들은 분노와 불신을 선동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장의 자유화와 관련된 행복한 약속만 내뱉고 있는듯 했다.
 
   
▲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이전 헝가리 지도를 보고 있는 민족주의자 남성. 부다페스트>, 2014년 - 피터 보자
 
 
‘아틸라의 후손들’은 미래를 멈출 수 없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청년민주동맹 피데스(Fidesz)당과 록 밴드 카르파티아 이미지가 합쳐질 때(2) 자본주의 점령에 대한 거부가 나타난다. 2010년, 8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트리아농 조약 체결일인 6월 4일을 ‘국민단결의 날’로 제정했고 해당 기념일의 지정 목적이 ‘국민 정체성’강화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긍정적인 측면은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과거 대헝가리제국에 속한 지역에 거주하는 2~3백만 명의 헝가리계 소수민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승인한 점이다. 또한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민족통일주의를 선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권의 민족적 성향을 강조하면서 과거 화살십자당의 꿈이었던 ‘헝가리의 통일된 영토’가 연상되는 ‘헝가리 유로리전(Euroregion)’ 조직을 거론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헝가리인주의’ 열망에 외국(유럽연합)의 규범 거부가 더해지면서 ‘경제 애국심’과 ‘반자유주의’(3)을 공언했다. 결국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1956년 부다페스트 민중 봉기 ‘희생자’를 떠올리게 하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르반 집권 정부가 야노시 페트라시에게 훈장을 수여한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야노시 페트라시가 헝가리 호위대(Magyar Garda) 찬양가를 작곡했던 이력을 제외하면 말이다. 헝가리 호위대는 2007년 창설돼 2009년 법원의 해체 명령으로 해산되기 전까지 활동이 용인됐던 단체다. 극우정당인 ‘요빅(Jobbik)’당 대표 가보르 보나가 이끌었던 헝가리 호위대는 전통과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국민을 보호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요빅당 당규에 “물리적, 정신적, 지성적 저항 없이 헝가리를 보호하는 것이 당의 목표”라고 명시돼 있다.
 
야노시 페트라시에게 수여한 훈장은 피데스당과 요빅당이 갖고 있는 정치성향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두 당이 정의하고 있는 헝가리 정체성을 보면 약간 차이가 있다. ‘훈족 아틸라의 후손들’은 201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20.5%의 표를 얻은 가보르 보나 당 대표가 유권자를 대상으로 선거유세를 할 때 즐겨 썼던 표현이다. 2010년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열린 쿠룰타이 축제는 훈족(4) 후손들의 모임이다. 터키어원인 쿠룰타이는 ‘부족모임’이라는 의미로, 이제 매년 8월 부다페스트에서 120km 떨어진 부작(Bugac) 근처 넓은 평원(Puszta, 푸스타)에서 열리며 ‘유럽최대의 전통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3일간 12개국, 27개 민족, 25만 명 관람객이 모인다.(5) 부총리가 이 축제에 후원하면서 훈족에 속한 투르크-몽골계 민족 간 우애를 다지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축제장에 가기 위해, 숲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을 한참 걸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할리 데이비슨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고이 모토로소크 협회, 달리 말해 ‘모타드 고이’협회 회원들도 축제에 참여하는 듯했다. 그런데 왜 ‘고이(Goy)’일까?(6) 협회 창립자는 단순한 농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헝가리제국이 새겨진 펜던트를 착용하고 에티엔 1세의 ‘왕관’으로 장식된 점퍼를 입고 있었다. 협회는 오토바이 여행을 제안했고 특히 이들은 트리아농 조약을 기념할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협회 회원들은 종종 유명 정치인들을 데려오라고 요구받는 듯했다. 
 
광장을 제압하며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아틸라의 대형 초상화에 담긴 매서운 눈을 지나 야외 축제장에 무료로 입장했다. 뿌연 먼지와 40℃에 육박하는 한여름 더위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수를 놓아 장식한 조끼, 러시아풍 옷깃의 튜닉 셔츠, 흰색 통바지, 긴 가죽 망토, 보석이 박힌 챙 없는 모자, 모피 또는 갑옷, 상반신을 드러낸 채 짐승가죽 등을 입고 목걸이, 팔찌, 부적을 휘감은 남자들이, 형형색색 천으로 장식된 반쯤 열린 유목민 천막 유르트와 몽골 기념품과 옛날 화살을 판매하는 진열대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긴 머리에 귀걸이를 하고 타투와 묵직한 콧수염이 있었다. ‘평범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은 드물었고, 온통 유목민 정복자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여자들은 전통 치마를 입거나 17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트란실바니아 군주의 이름에서 따온 ‘보츠카이’ 스타일로 옷을 입고 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반복적인 소리에 흠칫 놀랐다. 총성처럼 들리는 그 소리는 채찍질 소리였다. 엄청 긴 채찍은 도구라기보다 무기에 가까워 보였고 다루기 힘들어 보였는데도 리듬감 있게 채찍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타악기 소리, 특히 북소리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타튀르크의 대형 사진이 걸린 유르트는 닫혀 있는 듯했다. 다른 유르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견종인 아일랜드 개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유르트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관람객을 받는 듯한 여러 유르트 중 한 곳에 들어가 우리가 누구인지 소개하자, 입구 가림막이 내려졌고 입장승인 담당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러 온 것인지 질문했다. 우리는 성의껏 대답했다. 정확히 말해선 우리도 왜 들어가고 싶어 했는지 몰랐기 때문에 열심히 설명했다. 담당자는 우리에게 그러한 이유라면 입장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했고, 우리는 결국 입장을 포기한 채 돌아와야만 했다.
 
축제장 안에는 경찰과 검정색 옷을 입은 남자 여럿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웃옷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적색, 흰색, 녹색이 검은 옷에 유일하게 보였다. 헝가리 호위대를 상기시키는 복장이었다. 깃발들이 사방에서 조금씩 휘날리고 있었다. 이번 축제에는 위구르, 투르크멘, 추바시, 터키, 키르키즈, 야쿠트 등 다양한 민족이 참여했다. 공연장에 많은 관람객들이 모였는데 이들도 ‘전쟁터’ 같은 축제장 중앙에서 진행되는 샤머니즘 북 연주, 헝가리 민속 백파이프 공연, 칼싸움, 기마 시범 등과 같은 여러 축제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프로그램 일부로 유라시아 유목 사회에 관한 국제회의도 열렸다. 
 
쿠룰타이는 ‘범투란주의’의 집합체로 처음에는 우랄-알타이 어족(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을 의미하는 용어였지만 중앙아시아 민족 간 친분을 다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의미하게 됐다. 이와 같은 흐름은 두 번의 전쟁 사이에 무르익었고 화살십자당의 헝가리인주의에도 힘을 실어 줬다.(7) 현재 그 흐름을 대표하는 요빅당 지도부 간부 중 2명이 고어(古語)로 디자인된 옷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요빅당 당원들이 쿠룰타이 축제에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5세기 중앙 유럽에서의 중앙아시아 제국 건설과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아틸라의 후손’이라는 것은 확실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피데스당이 이전에 공언한 정체성과는 약간 다르다. 물론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요구로 개정된 2011년의 신헌법에서도 문화적 측면에서 국가를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헝가리 왕들이 써온 ‘성스러운’ 왕관이 헝가리 단일성의 근거이며, 기독교와 가족의 가치가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요빅당(더 나은 헝가리를 위한 운동) 지도자 죠르지 실라지의 말에 의하면, 정당보다는 ‘공동체’라고 자칭하는 요빅당도 기독교를 따르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와 당의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면 자연의 영혼에서 발생하는 신비스럽고, 선지적인 힘과 관련된 영성에 민감한 신(新)이교도로 보인다. 게다가 요빅당은 민족 뿌리가 가깝다고 추정되는 아시아 민족들과 ‘순수 혈통’ 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 트리아농 조약 체결로 헝가리를 배신한 ‘서방’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심지어 요빅당 소속 유럽연합 국회의원 3명 중 1명은 헝가리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간의 ‘거대 우랄-알타이계 연맹’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요빅당은 2014년 터키 대통령 선거 1차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현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의 초대를 받은 적도 있다. 요빅당은 당 공식 사이트에 올린 설명처럼, 집시 존재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집시가 공동체를 훼손하면서 사회적·문화적 악조건의 희생자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집시에 적대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가보르 보나 요빅당 대표가 “이슬람교는 세계화와 자유주의의 어둠 속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할 정도다.(8) 또한 ‘서구적’ 현대화를 반대하는 성향이 강하며, 구성원들 간 유대감 및 남성성, 영웅주의, 자연의 근본 힘 관계를 강조하는 구시대적 환상이 스며든 (어느 정도 상상이 섞여 다시 만들어진)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고의 헝가리’로 향해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쿠룰타이 충격에서 벗어나, 잠시 노천 레스토랑에서 쉬고 있던 차에, 식탁 주위에서 문신을 한 헝가리인 두 명이 로빈 후드와 약간 비슷한 전설의 베차르(Betyár, 노상강도)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그들은 부잣집만 털고 여자를 유혹해 말에 태워 납치한 전설의 강도를 ‘영웅’이라고 했다.
 
요빅당의 슬로건 “100% 헝가리인”은 헝가리인이면서도 강한 유대적, 정신적 유라시아니즘에 뿌리내린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명분 하에 유럽연합에 의한 구속, 서방사회, 자유주의를 거부한다. 요빅당은 이 슬로건에 도덕성과 진정성을 가진 낭만적 이상을 만들어 냈다. 대학생의 33%가 지지자이거나 당에 호의적일 정도로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요빅당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 “우리는 미래를 멈출 수 없다.” 이들이 말하는 미래는 공익사업 복원과 공공복지 개념 그리고 국가 자원 확대를 통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여기서 국가 자원은 “민족의 물질적, 정신적 조건과 애국심, 연대감, 식수 공급, 교통 인프라를 포함한다.”(9)
 
‘중세화’는 국가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보다는 개인과 공동체 번영 추구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안정적이지만 ‘우월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사유재산과 무관해 보이는 중세식 삶의 추구가 비디오 게임, 판타지 소설 또는 방데(Vendée) 지역 필릭 드 빌리에가 만든 ‘퓌 뒤 푸(Puy du fou)’같은 테마파크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기독교 소속이 과거 다른 소속보다 우선시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듯이 쿠룰타이와 범투란주의는 공동체를 국경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장 넓은 집합에 ‘조국’을 끼워 넣는 것이다.
 
구시대, 행복한 미래의 근원
 
즉, 국가를 초월해 하나가 되기로 한 민족에게서는 애국심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러한 ‘초국가적 민족구성’이라는 선택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화를 없애면서 정신성, 서민 보호, 사적 이익 달성 등과 같은 최고의 가치 실현이라는 명목 아래 소위 ‘미래’라고 소개하는 구시대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구시대로 향하는 선택 중 일부는 우파, 반동, 보수에 국한돼 있지 않고, 진보주의자라 스스로 정의하는 상상 속에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집단, 어느 정도의 위협 속에 보호가 우선시된 문화적 특수성을 보유한 집단, 예술적 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된 ‘나르시시즘’ 반대 운동에 동조하는 집단 등이 그들이다. 헝가리에서 경쟁 구도에 놓인 두 정당이 서로 앞 다퉈 행복의 원천으로 과거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두 정당이 내세우는 주장의 공통점이 어쩌면 차이보다 더 중요한 듯 보인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1956년 민중봉기 희생자’ 추모곡 작곡을 어떤 로커에게 요청했는데, 그 로커는 작곡자 겸 프로듀서인 데스몬드 차일드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최근 헝가리 국적을 취득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리 영웅들의 발자취를 손에 손잡고 따라가 보자”(10)라는 선동적 노래가 아닌, 로커 앨리스 쿠퍼와 록 밴드 키스의 노래를 작곡하던 시절을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남성과 여성 커플을 가족 구성으로 인정하는 피데스당이 섭외한 작곡가가 남자와 결혼한 동성애자라는 점이다.
 
한편 쿠룰타이 축제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가장 큰 록 페스티벌인 시게트(Sziget) 페스티벌이 펩시의 후원으로 열리고 있었다. 입장료가 매우 비싸기로 유명한데, 정작 헝가리 사람들 중 시게트 페스티벌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특파원
 
번역·윤여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살로메 르그랑, ‘‘Violence romantique’, le rock hongrois qui aide ‘à résister contre Bruxelles’’, 블로그 <Trans’Europe Extrême>, 2014년 5월 18일, blog.francetvinfo.fr 참고. 
(2) 지.엠. 티마스, ‘Hongrie, laboratoire d’une nouvelle droite (헝가리 신우파의 실험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프랑스어판, 2012년 2월호.
(3) ‘Victor Orbán pourfend le libéralisme occidental’ <Courrier international>, 파리, 2014년 8월 1일자.
(4) 훈족은 우랄산맥에서 내려온 마자르족 보다 몇 세기 앞서 존재했다. ‘야만적’ 의식을 종교로 삼는 위험한 정복자인 훈족과 마자르족은 가상의 공동체 속에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5) Kurultaj.hu 사이트 참고.
(6) ‘Goy’는 ‘친절한, 유대인이 아닌’을 의미하는 이디시어.
(7) 터키에서 회색 늑대들 정신을 계승하는 초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범터키주의는 화살십자당을 표방하고 있다. 과거 청년투르크당 범투란주의 지도자들은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만난 적도 있었다.
(8)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코렝탕 레오타르의 ‘Une extrême droite qui n’exècre pas l’islam’ 2014년 4월호와 장-이브 카뮈의 ‘Extrêmes droites mutantes en Europe(포퓰리즘적 우파로 돌연변이한 전통 극우파)’ 2014년 3월호 참고.
(9) 요빅당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
(10) 조엘 르 파부, ‘L’hymne à la liberté commnadé par Orbán se fait descendre en Hongrie’, <Rue 89>, 2016년 8월 24일자 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