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에 확산되는 지하디스트의 위협

2016-12-02     장뤽 라신

1971년 독립 전쟁에서 적과 내통한 탓에 정계 변방으로 밀려났던 방글라데시 이슬람주의자들이 점차 영향력을 회복했고, 과격 활동까지 펼치는 무리도 있다. 지난 몇 년간 증가한 무신론자와 진보주의자 인사들 암살에 이어 올 여름 다카에서 발생한 테러는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책무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슬람주의를 앞세운 폭력은 표적암살에 국한됐었다. 그러나 2016년 7월 1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한 레스토랑에서 20명 이상이 총에 맞아 사망한 테러사건을 계기로, 방글라데시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촉발됐다. 이 테러에서 교육을 받은 중산층 출신인 괴한들과 신속하게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이슬람국가(IS) 조직 간의 연관성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평균 연령 25세의 인구 1억 6천9백만 명 중 89%가 이슬람교도인 방글라데시는 불가분의 관계인 정체성의 위기와 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정체성의 위기는 이슬람과 정부의 관계와 1971년 독립전쟁으로 인한 분열에서 기인됐다. 정치적 위기는 방글라데시민족당(BNP)과 ‘자맛-에-이슬라미’ 이슬람정당을 한 축으로 하고, 야권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이슬람주의와의 투쟁을 활용하는 현 총리의 출신당인 아와미 연맹을 다른 한 축으로 한 끈질긴 대립과 마찰에서 비롯된다. 

현재 위기상황을 이해하려면, 짧지만 우여곡절이 많고 과격한 방글라데시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47년, 옛 인도 식민제국의 분할로 인도와 이두정치체제의 파키스탄이 등장했는데 동파키스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파키스탄에 수립된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파키스탄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서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게 애썼다. 서파키스탄군은 무지부르 라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을 억압하려고 동파키스탄 민병대인 라자카르의 지원을 받았다. 라자카르는 자맛-에-이슬라미 이슬람정당과 가까운 집단들에서 많은 대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라자카르와 그들의 하수인들이 자행하는 군사작전, 대량학살, 지식인 제거, 무차별적 강간 등으로 인한 피해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고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1) 인도군의 개입으로 분리주의자들이 승리했고, 1971년 12월 서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71년 독립 전쟁의 불꽃을 기억하라

세속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인 ‘건국의 아버지’ 무지부르 라만 총리가 1975년 군사쿠데타에서 암살되고 지아우르 라만 장군이 권력을 잡았다. BNP 설립자인 라만 장군은 민족주의와 국가의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패를 썼다. 그 또한 1981년 장교들이 선동한 쿠데타에서 살해당했다. 

민간인과 군인이 정권을 뺏고 빼앗기는 곡절이 거듭되는 가운데, 반세기가 흐르고 현재 방글라데시 정국에는 여러 정당이 있음에도, 1990년대부터 ‘철의 여인들’이 이끄는 두 개의 거대 정당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BNP의 수장인 칼레다 지아는 지아우르 라만 장군의 부인으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다.

(1991~1996, 2001~2006). 아와미 연맹을 이끄는 셰이크 하시나는 무지부르 라만의 딸로, 1996~2001년 총리를 지냈고 2009년 재임에 성공했다. 자맛-에-이슬라미는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독립 이후 불법단체로 분류돼 활동이 금지됐다. 그러나 군 덕분에 조금씩 입지를 회복했다. 그리고 자맛-에-이슬라미와 여러 차례 선거연합을 함께 구성했었고, 정권 행사를 위해 손을 잡았던 BNP도 그들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1972년 방글라데시 헌법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네 가지 원칙으로 삼았다. ‘세속주의’라는 용어는 1977년 사라지고, 1988년 이슬람이 국교가 됐다. 2011년 대법원은 세속주의를 다시 채택했지만 하시나 총리는 이슬람과 국가 간 관계를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양대 정당 간의 지속적인 긴장관계와 총파업을 촉구한 반대파 탄압을 이유로, BNP는 2014년 총선을 보이콧했다. 150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선거 캠페인이 끝났을 때, 아와미 연맹의 승리는 예정된 일이었다. 

극심한 정쟁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 정부는 언제나 ‘온건하고 민주적인 무슬림 국가’라는 이미지를 관리해왔다. 국제사회의 원조를 구하고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독립한 직후 최하위 수준이던 각종 사회지표들은 개선됐다. 예를 들어 영아사망률의 경우, 1990년 10% 이상이었으나 2012년 3.3%로 낮아졌으며, 기대수명도 인도보다 4년 길다(인도 68세, 방글라데시 72세).(2) 여전히 인구의 1/4이 빈곤에 허덕이고는 있지만, 빈곤율도 많이 감소했다. 여러 지역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 일자리 부족과 저조한 교육률, 지나치게 낮은 여성 임금 등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있다.(3)

그럼에도 연간 경제성장률은 10년 전부터 6%를 웃돌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중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의복수출국이 됐다. 그러나 2013년 다카 근교에서 의류공장 ‘라나 플라자’가 붕괴해 1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은 방글라데시가 세계적인 명성의 브랜드와 그들의 협력업체를 유치하기 위해 ‘섬유 노역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보여줬다.(4) 외국인투자에 대한 절박한 구애를 보면, 왜 집권 정부마다 199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과격 이슬람주의의 부상을 연신 부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맛-에-이슬라미와 소속 학생연대 지도부는 ‘조용한 혁명’, 즉 위에서 내려오는 사회개혁을 위해 정부기관에 들어가 그곳을 이슬람화 하는 방안을 택했다. 그러나 예전에 자맛-에-이슬라미에 속했던 이들 상당수는 지식인, 정치인, 비정부기구, 신앙인, 대중예술가를 목표로 하는 좀 더 과격한 단체에 합류했다.(5)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전투원들은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1998년 방글라데시의 이슬람 국가 전환에 힘쓰는 2세대 운동, ‘자맛 울 무자헤딘 방글라데시(JMB)’가 탄생했다. 반면 JMB의 지부 중 하나인 자그라타 무슬림 자나타 방글라데시(JMJB)는 탈레반의 자경주의(6)에서 영감을 얻었다. JMJB의 수장인 방글라 바이는 북서부 지역에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지만 숨어 있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BNP는 이들을 묵인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8월 17일, JMJB가 전국의 64개 군 중 63개 군에서 폭발 테러를 일으키자, BNP의 입장도 바뀌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이 높아졌고, 당시 총리였던 칼레다 지아는 JMB와 JMJB의 수장을 체포해야 했다. 2006년 사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2007년 과도정부 하에서 처형됐다. 그러나 국제적인 연계망을 갖춘 다른 조직, 한 대학교수가 2001년 설립한 히즈브-웃-타리르 방글라데시, 2007년 알카에다와 연관된 웹사이트에 등장한 안사룰라 방글라 팀(ABT) 등이 나타났다.

국가의 다사다난한 역사와 데오반디즘(남아시아의 엄격한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학교의 전통주의자에서부터 지하디즘에 투신한 중산층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집단의 형성으로 인해 과격단체가 급속하게 확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아와미 연맹이 2009년 재집권해 이듬해 추진한 1971년 전범재판으로 긴장은 한층 고조됐다. 물론 독립전쟁 중에 벌어진 “전쟁범죄, 집단학살, 반인도주의적 범죄”에 대한 재판을 위한 법원이 1973년 설치됐으나, 1년 후 전쟁 유산을 청산하는 내용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삼자협의가 체결됐고 무지부르 라만 초대 대통령은 파키스탄군에 협력한 방글라데시인들을 사실상 사면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그의 딸은 전범재판을 재개해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였다. 국제사면위원회와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와치는 2009년 설립된 ‘전범재판소’에서 피고인에게 주어진 변호권이 미흡하다고 비판했는데, 실제로 모든 판사가 방글라데시인이었다. 첫 번째 재판은 1971년 대학살에 연루된 자맛-에-이슬라미의 지도자들을 겨냥했다. 그 결과, 당 부대표 압둘 콰데르 몰라는 2013년 12월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대표 알리 아산 모하마드 무자히드는 2015년 11월에 BNP의 지도자 살라후딘 콰데르 초두리와 함께 처형됐다. 
몰라의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3년 2월 ‘미르푸르(수도의 한 지구)의 학살자’라 불리는 그에게 언도된 첫 번째 판결은 무기징역이었다. 그런데 이는 거센 반발을 일으켜, 다카 중심부의 샤박 광장에서 그의 처형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민족주의와 반이슬람주의의 조합을 기반으로 청년들이 SNS를 통해 결집한 이 놀라운 시위는 필연적으로 ‘아랍의 봄’ 운동을 연상시켰고, 자맛-에-이슬라미의 활동을 금지하게끔 했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이 집회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반격을 초래하며, 과격하게 진압됐다. 샤박 광장 시위는 정파적 대립, 전제, 부패로 얼룩진 정치체제에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6년 9월, 자본가이자 자맛-에-이슬라미의 지도자이자 1971년 라자카르와 파키스탄군에 협력한 바 있는, 민병대 알 바드르의 대장이었던 미르 콰셈 알리가 처형되자 파키스탄이 항의했다.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이 국내 문제에 개입하면서 전범을 비호한다고 반격했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이를 계기로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정상회담을 보이콧하며 카슈미르 지역 군사기지 테러와 카불의 연쇄 테러 이후 파키스탄 지하디스트가 자국의 영토에서 활동한다고 비난하며 회담 불참을 선언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뒤를 따랐다. 파키스탄은 주재국을 맡았던 2016년 회담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상황이 수 년 간 이어진 가운데, 방글라데시에 반이슬람주의 성향으로 평가되는 유력인사들에 대한 표적암살이 시작됐다. 소설가 타슬리마 나스린이 강제추방된 지 20년이 지난 2013년,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선언한 블로거 아흐메드 라집 하이데르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암살자들이 체포됐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과 2015년 표적 암살은 급증했으며 암살대상자의 목록은 계속 길어졌다. 블로거, 발행인, 자유주의 지식인, 동성애 또는 성전환 운동가들에 이어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을 고발한 모든 이들이 표적이 됐다. 그래서 시아파 사원의 신자, 기독교 신자, 힌두교 성직자는 물론 외국인 주재원 두 명(이탈리아인과 일본인)까지 모두 50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암살자들은 방글라데시인이었지만 알카에다와 IS조직이 사후 그들의 배후를 자처했다. 

IS조직이 힘을 얻자,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으로 이미 세력이 약해진 알카에다는 변방으로 밀리게 됐다. 그래서 새로이 알카에다의 수장이 된 아이만 알 자와히리는 2014년 9월 “인도아대륙의 성전을 위한 알카에다(AQIS)”의 창설을 선포했다. 그때부터 방글라데시는 요주의 대상이 됐다. 알 자와히리는 “인도아대륙의 움마(이슬람교 신앙공동체)의 약화”가 진정한 목표였던 독립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비난하면서 방글라데시 ‘형제들’에게 침략자들과 그들의 하수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선동했다.(7)

AQIS(알카에다와 연계한 방글라데시 지부 안사르 알 이슬람도 포함)는 블로거와 자유주의자들의 암살을 자행했다고 주장했고, IS조직은 과거는 물론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변절자들’에 대한 투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변절자들이란 아와미 연맹은 물론 BNP, 심지어 자맛-에-이슬라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슬람주의 운동 간 격렬한 대립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 1일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테러는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와미 연맹과 BNP는 서로 상대방 탓을 하기 바빴고, 정치평론가들은 IS조직과 알카에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권의 부인 정책을 비난했다. 정권을 서슴지 않고 비난하는 일간지 <더 데일리 스타>의 주필은 BNP가 “국가의 정치, 문화적 에토스”를 농락했고 아와미 연맹은 “이슬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해 꾸준히 애쓴다”는 이유로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다.(8) 이번 위기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 것인가가 관건이다. 지금처럼 인명피해와 사회적 혼란을 낳는 테러 행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적대관계로 손상돼 백해무익해진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것인가?  


글·장뤽 라신 Jean-Luc Racine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과 국립과학연구원(CNRS) 산하의 인도남아시아연구소(CEIAS)의 명예소장, 파리 소재 아시아센터의 수석연구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사망자 수는 출처에 따라 30만 명에서 300만 명까지 차이가 있다. David Bergman, ‘The Politics of Bangladesh’s Genocide Debate’, <The New York Times>, 2016년 4월 4일자 기사 참조. 
(2) 세계은행, Washington, DC, 2014.
(3)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Bangladesh Progress Report 2015’, 방글라데시 정부, 계획위원회, 다카, 2015년 9월.
(4) 올리비에 시랑, ‘세계의 재봉틀 방글라데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6월호.
(5) 제레미 코드롱, ‘방글라데시의 이슬람주의 민병대는 취약한 국가의 상징인가?’, 로랑 가이예 & 크리스토프 자프르로 (dir.), <남아시아의 무장민병대>, 시앙스포 출판부, Paris, 2008.
(6) 모든 사법적 절차와는 별개로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규정한 정의.
(7) ‘Full text of Al-Qaida chief Ayman al-Zawahiri audio’s message’, <The Daily Star>, Dhaka, 2014년 9월 4일.
(8) Syed Badrul Ahsan, ‘In denial in Dhaka’, <The Indian Express>, New Delhi, 2016년 7월 4일.


박스기사

짧지만 거듭된 부침의 역사

1947년
영국은 인도 제국을 신앙에 따라 분할, 독립시켰다. 8월 14일에 1,600km 떨어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 파키스탄이 수립됐다.

1949년
무지부르 라만이 아와미 연맹을 창설해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한다.

1970년
아와미 연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
 
1971년
3월, 무지부르 라만이 체포되고 서파키스탄은 군사공격을 개시한다.
12월, 인도군의 지원을 받은 독립주의자들이 서파키스탄 군대를 무너뜨린다. 방글라데시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1975~1990년
군사 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다.

1991년
3월, 칼레다 지아가 방글라데시국민당(BNP)을 총선 승리로 이끌다. 

1996년
아와미 연맹이 선거에서 이겨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가 총리로서 권력을 잡는다.

2001년
BNP가 선거에서 승리한다.

2009년
2008년 12월 29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299석 중 230석(득표율 48.06 %)을 얻어 압승을 거둔 아와미 연맹이, 이듬해인 2009년 1월 6일 재집권한다.

2013년
4월 22일, 방글라데시인민공화국 대통령 선거의 단일 후보였던 압둘 하미드(아와미 연맹)가 선출된다.
4월 24일, 다카 인근 섬유공장 라나 플라자의 붕괴로 1천 명 이상이 사망한다.

2014년
1월 5일,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아와미 연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

2016년
1월, 2013년 발생한 무신론자 블로거 아흐메드 라집 하이데르의 살해죄로 학생 두 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다. 
7월 1일, IS조직이 배후를 자처한 테러로 다카에서 24명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