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의 꿈은 왜 박제가 됐나

[특집/진보좌파의 길] 미국 좌파의 흥망성쇠

2010-02-04     알렉산더 콕번

매카시즘 이겨낸 질긴 투쟁력, 80년대 이후 급속 쇠락
정치 세력화 실패 뒤 민주당·신자유주의 세력에 흡수

과격하고 진보주의 성향을 띠는 미국의 좌파는 1950년대 매카시즘에 의해 갖가지 박해를 당한 뒤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는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렸지만, 다시 한번 눈부시게 부활한다.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 농업기술학교에 다니는 학생 4명이 흑인은 일어서서 먹어야 한다고 명시한 내부 규정을 어기고 그린즈버러에 있는 울워스 백화점 간이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튿날 같은 행동을 하는 학생 수가 25명으로 늘어났다. 이틀 뒤에는 백인 여학생 4명이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얼마 뒤 그 운동은 미국 남부 9개 주 15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7월 25일, 그 백화점(전국에 체인점을 가진 업체의 분점)은 20만 달러의 손실을 입은 뒤 공식적으로 인종차별 규정을 철회했다. 실로 미국을 뒤흔들 만한 큰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 심층부가 대대적으로 손질되었다.  <<원문 보기>>

백화점 식당서 시작된 투쟁

1960년 4월,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가 그린즈버러에서 1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롤리시에서 탄생했다. 그 운동을 확대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활동을 이끈 밥 모지스는 ‘침울한 표정에 결연한 태도로 화를 내는’ 사람들의 항의 모습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모습과 달리, 남부 여러 주의 시위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잔뜩 움츠린’ 표정이 역력했다. 그해 봄,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DC) 소속 학생들이 미시간주 앤아버시에 모여 첫 회의를 열었다. 이 단체는 이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조직적 반대 활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같은 해 5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 학생들이 샌프란시스코 시청 계단 발치에 모여 당국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에 야유를 보냈다. 공권력이 과도한 수단을 사용해 이 집회를 해산시키면서 여론이 크게 동요했고, 그 결과 공산주의 박해가 종지부를 찍게 된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시민 평등권 운동의 압력을 받은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 헌법을 수정하고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일련의 법에 서명한다. 1965년부터 워싱턴의 여러 거리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로 떠들썩했다. 전환기를 맞은 1960년대 전체 미국 사회가 격변을 겪은 것이다. 미국 역사를 세심하고 냉철하게 재해석함으로써 제국적 속성과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의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의 각종 비밀과 파렴치한 짓들이 공개되었고, 여러 대학에서 발전시킨 지식이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된 것에 비난이 쏟아졌다.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 사이에서 폭동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변호사 랠프 네이더와 그가 창설한 단체 ‘공공시민’(Public Citizen)은 소비자보호·반공해 운동을 주도했다. 1974년 닉슨 대통령이 강압을 받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게이와 레즈비언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이 뚜렷하게 그 힘을 드러내 보였으며, 좌파는 향후 4반세기 동안 정치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을 급진적으로 바꾸다

그만큼 급진적인 변화는 무에서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1958년 이미 오클라호마시에서 (흑인 차별을 하는) 간이식당에 대한 보이콧이 일어났다. 그 보이콧을 선도한 클라라 루퍼는 로자 파크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로자 파크스는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자신이 버스 안에서 차지한 자리를 백인 남자에게 양보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이러한 행동에서 영향을 받아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파크스와 킹은 공산당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좌파 기독교인이 창설한 하이랜더포크스쿨의 세미나에 여러 차례 참석한 바 있었다.    

그렇게 1960년대 미국 좌파는 사회정의를 옹호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기세등등하게 펼친 투쟁을 통치 세력으로 변화시킬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결국 타격을 입게 된다. 다양한 조류로 나뉘는 진보주의 좌파 진영은 한동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평화옹호론자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을 둘러싸고 서로 연합했다. 조지 맥거번은 1972년 민주당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민주당의 보수 급선회

하지만 그 선거전에 주로 자금을 댄 여러 협회장와 민주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후보자를 단념했으며, 그렇게 해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민주당은 급진적으로 이뤄지는 일체의 움직임에 맞서게 되었다. 1977년 백악관에 입성한 제임스 카터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견해를 포용하고 반전운동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메리카에서 미국을 ‘신냉전’ 속으로 끌어들였다. 반전운동 단체들이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에 크게 기뻐한 지 불과 몇 년 뒤의 일이다.

좌파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일으킨 전쟁들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면서 재기한다. 또한 좌파는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제시 잭슨을 지지했다. 그는 침례교 목사이자 적극적으로 시민 평등권을 옹호한 인물로서, 1968년 멤피스에서 마틴 루서 킹이 암살당할 당시 킹 목사 옆에 있었다. ‘무지개’ 동맹을 이끌던 잭슨은 1984년과 1988년에 실시한 민주당 1차 선거에서, 1960년대 초부터 여러 조류의 좌파가 구상해왔던 진보주의 성향의 모든 개념이 결집된 계획을 내놓았다.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결집했다.

기업 후원으로 연명하는 단체들

1990년대부터 권력을 장악한 비영리단체들과 각종 사설 재단(진보주의적 대의에 자금을 지원하는 포드재단, 소로스재단 등)의 활동도 좌파가 와해되는 데 일조했다. 부유한 투자자들이 만들고 조세 부담금이 면제된 이러한 조직과 재단은 그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보조금을 주거나 다시 거둬들였다. 그렇게 해서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는’ 집단과 학계는 매년 표결에 부쳐지는 보조금으로 재정 지원을 받아 연명하고, 임금을 받고, 터를 잡은 곳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1993년 여러 협회 본부와 환경보호단체들이 연대해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을 저지하려고 하자, 이 거대 자선재단들이 이에 개입해 들어간다. 당시 석유업계 후원 재단들은 환경단체들에 4천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그중 절반 정도인 약 2천만 달러를 ‘퓨 자선 트러스트’(Pew Charitable Trusts)가 내고 있었다. 미국의 환경단체 중 약 90%는 이런 유의 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자금 출자자들의 ‘압력’에 직면해, NAFTA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반대는 무산되었다. 1990년대 말쯤에는 시민 속에 깊이 자리잡은 소규모 몇몇 단체를 제외하고 환경단체들은 전적으로 민주당과 신자유주의 세력에 흡수되다시피 했다.

여성운동 역시 점차 사회정의 문제에서 비켜나 낙태에 대한 권리에만 초점을 맞추다시피 했는데, 이마저 우파로부터 부단히 공격을 받았다. 여성운동은 빌 클린턴 대통령을 예찬하고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할리우드로부터 주로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가 빈곤층 미혼모에 대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폐지했음에도 여성운동단체는 거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발했던 동성애 운동단체는 최근 들어 보수적 단체의 묵인 아래 동성 간 결혼 허용을 주창한다. 물론 일부 동성애자는 가정의 보수적 가치에 동조해 그러한 결혼을 비난하기도 한다.

좌파의 지적 역량 상실

젊은이에게 경제의 기초와 조직의 규율을 일깨운 레닌과 트로츠키의 여러 조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퇴조했다. 이렇게 좌파 문화가 쇠락해가는 추세는 이념 논쟁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역사의 여러 교훈을 모르며, 온갖 편집적 증세에 호의적인 세대가 출현하는 데도 한몫했다.

조지 부시 집권기 동안, 현실에 부합하게 정치를 분석할 수 있는 좌파는 자취를 감추었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오른팔 리처드 체니가 수행한 여러 정책에 반대하는 과도한 집단 히스테리는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현실적 대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환상, 특히 2008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라면 누구라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199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들(이를테면 은행규제 완화)에 찬성한 힐러리 클린턴이 됐든, 월스트리트에서 선거 자금을 지원받은 버락 오바마가 됐든 상관이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 성향을 보이는 선거구는 대개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그곳은 서로 결집해 오바마에 찬성했고, 앞으로도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그를 따를 것이다. 오바마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슨 일을 기도하든지, 혹은 사회보장 문제나 금융개혁 문제와 관련해 그 어떤 일을 포기하든지, 좌파가 그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오바마의 집권 첫해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그가 50년 전 그린즈버러 사건이 남긴 유산을 이어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유산을 망각했기 때문이리라.

글•알렉산더 콕번 Alexander Cockburn
격월간지 <카운터펀치>(CounterPunch) 공동편집장이며, 동일한 이름의 사이트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번역•안수연 nohere71@hanmail.net
서울대 불문학과·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적>(2008),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