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국경에 도전하는 유럽연합의 ‘유럽’

2016-12-02     미셀 푸세

유럽은 내적 정치적 대립과 외적 도전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럽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한 토론은 필수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있다면 말이다.

‘유럽’은 가변적인 명칭이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처럼 특정 공간을 지시하는 명칭이 아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 속에는 이전에 명백히 존재했던 경계들이 없다. 즉 ‘유럽’에 대한 정의는 확정돼 있지 않다. 이런 불확실성은 “유럽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유발하는 한편,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불확실성은 역동성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지리를 형성하는 것은 ‘정치’

유럽인들이 만들어내는 전체 지리(地理)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다. 유럽인들이 어떤 정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적합한 경계가 선택될 것이다. 유로존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브렉시트 이후 유럽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민 통제는 어디서 할 것인가? 어떤 경계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예를 들어 국가들과 국민들의 유럽연합을 선택하는지 또는 민족국가들의 연방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형상을 갖추게 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지리적’ 유럽은 동쪽으로 우랄산맥과 우랄 강, 남동쪽으로 아라스 강(아르메니아, 터키, 아제르바이잔, 이란을 관통하는 강), 남쪽으로 해협들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이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런 모든 경계들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취해진 결정들의 산물이다. 트라키아(Trace; 발칸반도 에게 해 북동 해안지방)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터키의 국부)의 저항이 없었다면, 보스포르해협이 지리적 경계가 됐을 것이다. 역으로 만약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왕이 소위 말하는 ‘3왕’의 전투에서(1578년) 승리했다면, 유럽의 경계는 지브롤터가 아니라 리프(Rif; 모로코 북부 지중해 연안 산맥) 남부와 라바트(모로코 수도) 사이 어디엔가에 위치할 것이다.

우랄은 국제적 경계선이 된 적도 없었고, 앞으로 될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유럽대륙에 대한 이런 관습적 경계는, 모스크바 지역을 아시아에서 떼어내고 터키인과 타타르인을 군사적 경계인 볼가 강 너머로 밀어내기 위해, 지리학자 바실리 타티시체프(Vassilii Tatichtchev, 1686~1750)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우랄 산맥은, 수많은 낮은 구릉을 가로질러(시베리아 횡단열차는 411m의 구릉을 이용하고 있다), 마치 마시프 상트랄(Massif central, 프랑스 남쪽중앙의 산맥)이 확대돼 2천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듯한 형상으로, 자연적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아시아 대륙은 바이칼 호수 동쪽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이칼 호수 동쪽에는 러시아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랄 산맥은 지도제작 전문가의 관습적인 경계다. 우랄 산맥을 경계선으로 선택한 것은, 유라시아 전체 대륙에 걸쳐 있는 러시아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드골 장군이 1962년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유럽의 연대감을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것은 프랑스와 독일이 가까워지는 것이, 공동시장 밖에 위치한 나라들을 배제하는 냉전행위가 아님을 러시아에 보여주려 함이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언급된 드골 장군의 말에 의하면, “이런 유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큰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러시아가 돼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리 교과서의 고전적 경계가 지정학적 고려사항을 명확히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라스 강의 경우를 보자. 수 세기 동안 페르시아와 터키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었던 캅카스 남부지역들에서, 쇠퇴한 페르시아 제국을 희생시켜(1813년 고레스탄 평화조약) 러시아가 캅카스 산맥 남부에 개입한 후에야, 캅카스 산맥 능선 대신 그리고 이후 쿠라(Koura)강 계곡 대신에 아라스 강이 유럽대륙의 남쪽 ‘국경’이 됐다. 그곳은 러시아와 페르시아 간의 정치적 국경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지리학자들에 의해 ‘유럽의 경계’로 간주된 것이다. 즉, 경계선들은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줄기로 인해 형성된 지형적 경계선이라면, 눈으로 확인하기가 한층 수월하겠지만 말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유럽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로마법과 기독교를 바탕으로 건설된 천 년의 문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중의 관계망 속에서 세워졌다. 철학자 마크 크레퐁은 “하나는 아마도 유럽 민족들이 타 민족들과 유지했던 관계망(교환, 상호 수입품, 번역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이타성(異他性)으로 꿈과 상상, 허구 속에서 빚어낸 요소들로 세운 관계망이다”라고 지적한다.(1) 이런 독특한 인식체계 속에서, 뚜렷한 자연경계가 없는 상황은 유럽으로 하여금 인접한 아랍-베르베르 이슬람 왕국들이나 그들이 정복한 비잔틴 제국, 그 후계자인 오스만제국과는 달리, 계속 스스로를 결정하게 만들었다.(2)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교황 비오 2세는 오스만터키를 물리치기 위해, 호전적인 기독교인 왕자들에게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한 최초의 인물이다.

‘유럽’, ‘유럽성’ 그리고 ‘유럽주의’

‘유럽’이라는 명칭은 기독교세계가 분열에 직면한 종교개혁 이후 외교언어에 도입됐다. 유럽 사회가 분열하기 시작했을 때, 유럽이란 명칭은 하나의 마법이 됐다. 그리고 1918년 이후에는 정치적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 한 측면인 ‘유럽성(Europeanité)’이라는 인식은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문명적 통합체에 대한 귀속감을 의미한다. 나머지 한 측면인 ‘유럽주의(Européisme)’라는 인식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리고 1930년대부터 생긴 쇠락의 강박관념을 몰아내기 위해, “유럽을 만들자”는 급박한 사고(思考)였다. 다시 말해 유럽을 구성하는 국가들을 구하려는 필사적인 구제책이었던 것이다.

1945년 이후 분단된 대륙의 서부 일부 국가들에서 초기 공동체들이 만들어졌다.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1957년의 유럽경제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지정학적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해 창설된 유럽은 동구 쪽으로 확장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선한 점은, 철저히 무장한 민족들의 전쟁터였던 대륙에서 경쟁국들 간의 균형을 바탕으로 성립된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률 공동체’가 설립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것으로, 힘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정과 제도에 의해 유럽의 조화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2016년, 평화와 타협의 우월성을 내보이기 위해 형성된 유럽연합이 국제무대의 실존적 위협과 순수한 지배력 다툼의 세계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국은 나름의 이유로 인해 유럽연합에 가입했거나 또는 가입하려고 한다. 중부유럽 국가들로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가 확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확대가 경계를 이동시키는 마당에, 어떻게 유럽연합을 하나의 일관된 단위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럽연합에 인접한 국가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려는 판국에 어떻게 대외정책을 만들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솅겐(Schengen) 공간의 외부 경계들이 여덟 번이나 바뀐 마당에, 어떻게 그 경계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유럽’이라는 단어는, ‘유럽’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정의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트리히트 조약(1992)이 다시 채택한 로마 협정(1957) 237조에 의해, 유럽연합 가입의 기준이 됐다. 유럽연합 확대에 대한 논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1991년 이후 시기에, 브뤼셀 위원회(유럽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이라는 용어는 유럽의 정체성에 기여하는 지리적·역사적·문화적 요소들을 결합한다. 근접성·사고·가치·역사적 상호작용을 공유한 유럽의 경험은 하나의 간단한 표현으로 응축될 수 없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수정될 수 있다. 그 윤곽이 시간과 더불어 형성되는 유럽연합의 국경을 지금 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유럽프로젝트는 그 내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공간적 차원은 유럽연합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총합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이 접근책은 전직 스페인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Felipe Gonzalez)가 이끄는 2030년의 유럽에 대한 성찰그룹에 의해 2010년 확인됐다. 이 그룹은 유럽연합의 경계선에 대해 단 한 문단만을 할애하고 있다.(3)

우크라이나 전쟁, 쟁점이 된 솅겐 조약, 테러리스트의 도전 등 심각한 위기가 돌발하기 전까지 유럽연합은 위에서 언급한 노선을 따라 왔다. 경계선에 대한 토론이 부재한 것은 유럽인들의 분열 탓이다. 유럽인들은 불일치가 공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경문제가 논란을 일으키는 주제임을 알기 때문에, 터키의 유럽연합가입 지지자들은 위의 성찰그룹이 국경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궁극적으로 경계를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 것, 다시 말해 경계를 정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공동체 유럽을 유럽위원회와 일치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위원회에는 유럽 인권협약에 서명한 47개국이 포함돼 있는데, 유럽 인권협약에 터키는 1950년부터, 러시아는 1998년부터 가입돼 있으나 벨로루시는 가입돼 있지 않다.(4) 프랑스 상원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런 잠재적인 정치대립 때문에 ‘유럽의 국경’ 문제제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채 대중언론 속에 불만이 지속되게 방치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유럽건설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5)

지리적 유럽의 개념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실상 유럽국경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1951년 6개국에서 출발해 2016년 28개국이 됐다가, 영국의 탈퇴로 곧 27개국이 될 것이다. 터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알바니아 같은 유럽연합 가입후보국들이나 보스니아, 코소보, 몰도바,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후보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은 초조해하고 있다. 영토가 정해져 있지도, 보이지도, 읽히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가 정당하게 상기시킨 것처럼, 우리는 유로 화폐에서 공유된 지시대상을 구현하는 상징을 찾을 수 없다. 유로 화폐에서 다리나 창문은 볼 수 있지만, 유럽의 저명인사를 볼 수 없다.

경계 합의에 대한 불가능성은, 대립되는 여러 개념들이 공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연방주의적 유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럽의 확대를 통합에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연방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끝없는 확장에 대한 가이드레일을 연방주의에 대립시킨다. 한편에는 연방주의에 찬성하는 독일의 기독민주연합(CDU)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통합유럽을 의심하는 영국인들이 있다.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프랑스는 동쪽에서의 독일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쪽으로 유럽을 확대하려 한다. 발레리 지스카르 대통령 임기(1974~1981)에는 그리스까지, 자크 시라크 대통령 임기(1995~2007)에는 키프로스와 몰타까지 확대한다.

유럽건설에 대한 비전들 중에서 두 가지 정치노선이 바로 검토됐다. 장 모네(Jean Monet; 1888~1979)는, 탄생하게 될 공동체를 정치권력을 잉태할 수 있는 하나의 시장(市場)으로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이 공동체는 대륙 전체에 열려있는 것이었다. 알사스-모젤(Alsace-Moselle) 지역의 독일합병로 평판이 나빴던 기독민주당원인 로베르 쉬망(Robert Schumman; 1886~1963)의 비전은, “확대된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내에서 서로 닮은 사람들만 우리가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전은 1994년 독일의 민주기독당원들인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와 칼 라머스(Karl Lamers)에 의해 ‘견고한 핵심’이라는 형태로 다시 채택됐다.(6) 그리고 2016년 6월 25일 비공식 정상회담에 모인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6개국 유럽연합 설립자들에 의해서도 채택됐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지지한 모네의 비전이 승리했다. 적어도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가 결정될 때까지는 그랬다. 모네의 비전은 같은 경쟁규칙을 지키는 단일시장을 만들어낸다는 경제적 목표와 끝없는 영토 확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정학적 상황이 연속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영토적 역동성은 강력한 여러 요인들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과거와는 달리, 만약 이웃국가들이 같은 클럽에 가입한다면, 안전이 더 잘 보장될 것으로 여겼다. 국익이 폴란드를 설립된 유럽에 통합시키라고 독일에 명령한다. 그 역도 성립한다. 폴란드의 국익이 폴란드로 하여금 설립된 유럽에 통합돼야 한다고 명령한다. 중부유럽과 발트 해에서는 유럽연합이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더불어 되찾은 주권을 보장해준다. 유럽연합에 가입하려는 의지는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바에 따라 달리 설명된다. 포르투갈에서 유럽연합은 민주주의와 식민지 전쟁의 종결과 동의어다. 스페인에서는 유럽연합이 프랑코주의의 종말을 의미하고, 그리스에서는 독재의 종말을 의미한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가입 역시 그들 간의 강박관념적 대결을 깨뜨리는데 기여했고, 두 나라 사이에 더 누그러진 환경을 조성했다. ‘유럽적 시각’은 발칸반도 국가들이 서로 대화하게끔 한다.

이슬람을 믿는 터키는 유럽에 속할까

이런 유럽연합의 확장은 유럽적 실체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전략적 비전과 딱 맞는다. 또 이런 유럽적 실체는 궁극적으로 러시아가 제외된 유럽위원회의 영역과 일치한다. 그래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세프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은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된 유럽의 지협(地峽) 속에 위생격리구역을 재창조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당국을 지지한다. 미국은 유럽의 궁극적 경계에 대해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회원국들은 각자의 국익에 따라 다양한 태도를 보인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변호하고, 스웨덴은 발트 해 국가들을, 루마니아는 몰도바와 조지아를, 그리스는 세르비아를 변호한다. 이런 태도들은 적법하다. 이런 국가들의 추가적인 합류는 유럽의 지속적 확장에 기여한다. 요컨대, 대서양 동맹과 연동된 유럽프로젝트의 지리-전략적 범위를 주장하는 국가들과 정치세력들은, 유럽연합에 궁극적으로 터키를 포함시킬 것이지만 러시아는 제외시킬 것이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같은 남부 캅카스 지역 국가들과 관련된 불확실성만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중부 및 발트 해 지역 유럽국가들, 북부 유럽국가들, 북서부 유럽국가들이 유럽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전이다. 정체성이 가입의 근거가 되고, 정체성이 우선적으로 문화와 가치들에 근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이슬람을 믿는 터키는 유럽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유럽연합을 유로 사용지역으로 축소시키자”는 의견은, 이런 도식에 우호적이며,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유럽 대중당(PPE)’의 지지를 받고 있다. 쇼이블레(Schäuble), 조제프 돌, 니콜라 사르코지, 그리고 알렝 쥐페가 이 의견을 지지한다. 반면 ‘유럽 사회당(PSE)’은 유럽의 확대에 대해 더 열린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유럽의 확대를 유럽적 가치들(세속성, 이슬람 민주주의에 대한 탐구)을 전파할 기회로 생각한다. 유럽위원회는 연방주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대다수 국가들의 암묵적 지지를 얻어, 거대시장·경쟁·통합이라는 탈(脫)정치화된 거버넌스를 신봉하는 집행부의 유럽에 대한 논리를 따라, 끊임없이 확장정책을 추구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회원국들을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을 모든 새로운 확장의 최우선 사항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이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유럽연합가입을 중단시키고, 우호적인 이웃관계와 특권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정책을 표명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프랑스(프랑수와 올랑드 포함), 독일, 이탈리아에서 만날 수 있다. 훨씬 더 분화된 유럽연합의 유럽에 대한 시나리오가 5~6단계로 그려진다. 32개국이 참여하는 경제공간(2019년 이후에는 영국도 참여할 것이다), 27개국이 참여하는 현재의 유럽연합(공동시장, 구조결정정책, 공동가치들), 재정과 예산에서 한층 통합된 유로 사용지역의 유럽, 더 좁은 보안통제 공간을 규정할 것을 감당하면서 내적 이동성을 창조해내고 외적 국경을 통제하는 솅겐조약의 유럽, 다시 말해, ‘솅겐조약 플러스’의 유럽 등이 이런 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관련 서류의 내용에 의하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및 다른 나라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 창시자들의 유럽이 남아 있다. 2016년 6월 25일, 유럽연합 설립 6개국 외무장관들이 말했다. “우리는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대해, 27개국 회원국들 간에 각기 다른 야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발언은 유럽인들이 감수해야 하고, 오직 몇몇 국가들(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만이 대응할 수 있는 방위, 통치, 안보 등의 주권문제와 관련돼있다. 또한 대륙 측면, 남부와 동부의 이웃관계 측면, 방대한 세계적 측면에서 회원국들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적절한 단계별로 합의하면서 유럽프로젝트를 재고해야만 한다.

그것은 어떤 국가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드높이기 위해 효율적인 대외정책을 시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유통(원자재에 대한 접근, 해상과 육상 무역로의 안전)과 보유자산(중요한 네트워크와 인프라)의 안전 확보를 통한 전략적 자율성, 다가온 위기들에 대한 정치·외교적 조율, 신흥국가들과의 전략적 대화, 미국-중국이라는 이중 축의 형성을 막기 위한 다자간 울타리에서의 ‘제 3자 주선’ 전략, 개발원조(유럽연합은 세계 제 1의 출자자) 등의 대외정책에 해당된다.(7)

만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 유럽의 창시국들이 냉전의 시대와 탈식민지 시대에 했던 것처럼, 다가올 세상에서 공동정책을 명확하게 세울 수 없다면? 이 국가들이 공유된 진단, 명확한 토론과 명확한 선택으로 중심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대체 어떤 국가가 그 역할을 할 것인가? 러시아, 중국 그도 아니면 미국이 할까?  


글·미셀 푸세 Michel Foucher
지리학자, 전직 대사, 인문과학재단(FMSH) 산하 세계연구대학 응용지정학과(應用地政學科) 교수. 최근 저서로 <국경의 회귀>(CNRS출판사, 2016년, 6월)가 있다.

번역·고광식
파리 8대학 언어학박사로 대학에서 프랑스 언어를 가르치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 3> 등의 역서가 있다.

(1) 마크 크레퐁(Marc Crépon), <유럽의 이타성>, 갈릴레, 파리, 2006년.
(2) 레미 브라크(Rémi Braque). <유럽, 로마의 도로>, 갈리마르, ‘폴리오 에세’ 컬렉션, 파리, 1999년.
(3) “유럽 2030년 프로젝트. 대응해야 할 도전과 포착해야 할 기회. 2030년 즈음의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한 성찰 그룹의 보고서”, 유럽위원회, 브뤼셀, 2010년 3월.
(4)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는 57개국이 가입돼 있는데, 여기에는 중앙아시아 5개국, 몽고, 캐나다, 미국이 포함돼 있다.
(5) 피에르 포숑(Pierre Fauchon), 유럽업무위원회 정보보고서 528호(2009-2010년), 파리, 2010년 6월 8일.
(6) 칼 라머스(Karl Lamers),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 “유럽정책에 대한 성찰”, CDU/CSU 분파, 베를린, 1994년 9월.
(7) 미셀 푸세(Michel Foucher), “유럽인들의 전략적 이익: 선택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것인가?”, <유럽 문제>, 294호, 스트라스부르그, 2008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