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민주공화국, 예정된 반란

2016-12-02     사빈 세수

가혹하게 진압당한 수개월의 시위 끝에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몇몇 야권인사 간 협약이 체결됐다. 야당출신 총리를 임명하되 대선일정을 2018년 4월로 연기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국민은 올해 12월 임기가 끝나는 즉시 카빌라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은 유임한다.” 집권 재건민주국민당(PPRD) 당사 앞에 조셉 카빌라 대통령을 옹호하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반정부 시위대가 주창하는 “카빌라, 물러나라!”라는 슬로건을 겨냥한 것이다. 집권당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카빌라 대통령(2001년 취임)은 물러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헌법은 대통령 연임 횟수를 2회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카빌라 대통령은 올해 12월 19일부로 사임해야만 한다. 

PPRD는 기본법 제 70조를 근거로 선거준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임기 말 대통령은 신임 대통령이 실제 취임할 때까지 유임한다”는 내용의 조항이다. 헌법재판소도 지난 5월 카빌라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야당은 정부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다. 집권연장을 위해 수개월째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모양새를 보인 탓이다. 연임 횟수 제한이라는 헌법적 장애물에 부딪힌 정부는 급기야 2015년 1월에 선거법 개정을 시도한다. 유권자(약 8백만 명) 등록 이전에 인구조사를 시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총 인구가 8천만 명에 이르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인구조사를 하려면 몇 년이 걸린다.(1) 결국 대선은 기약 없이 연기될 것이고, 이에 따라 카빌라 대통령의 임기도 무기한 연장될 것을 노린 수였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선박에 물이 새기 시작했다. 2015년 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에 걸쳐 폭동이 일어나자, 국회의석의 3/4을 차지한 PPRD라 할지라도 발표한 입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 가을, 카빌라 대통령 임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원래대로라면 늦어도 11월에는 선거를 치러야 하지만, 준비는 전혀 돼있지 않았다. 선거인명부는 여전히 검토 전이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CENI)는 예상자금을 17%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국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정대로라면 대선이 열려야했을 9월 19일, 수천 명이 집결한 시위가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다. 수도에서는 허가받은 시위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발포로 최소 32명이 사망했다. 그날 밤, 경찰은 수많은 야권 당사에 불을 질렀다. 다음날이 되자 시위대는 전날의 죽음을 보복하고,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국민은 명석하고, 자신의 힘을 안다”고 믿는 작가, 인 콜리 진 보판(In Koli Jean Bofane)은 이렇게 전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같은 날, 화가이자 화학자인 장-마리 역시 킨샤사의 트리옹팔 대로에서 이마에 흘린 땀을 훔쳤다. 드넓은 대로를 가득 매운 채 전진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익명을 요구한 이 40대 남성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학비로만 매해 725달러가 들기 때문에 네 명의 아이들 중 두 명만 학교에 보낸다. 아이들 모두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최대 야당 콩고민주사회진보연합(UDPS)을 지지하는 장-마리는 카빌라 대통령 퇴진을 위해 12월 19일 자정 시위에도 꼭 참가할 생각이다. 옆 가르마와 레이밴 안경, 흰 셔츠에 어두운 정장차림. 1961년  처형당한 콩고민주공화국 독립의 아버지 파트리스 루뭄바를 완벽하게 재현해낸 한 젊은 청년도 시위에 나설 계획이다. 그는 이 날을 ‘역사와 약속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12월 20일 투쟁에 참가할 준비가 돼있다. 어차피 우리에게 미래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팜유를 찔금 넣은 밥으로 연명하고 있다. 대부분 국민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땅에서 꾸역꾸역 좀비처럼 사느니, 젊어서 죽어도 제대로 살다 가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시내의 한 고층건물 5층 사무실 앞에 기자들과 시위대가 몰려있다. 야당 ‘ENVOL’ 당수이자 카빌라 집권연장 반대파인 델리 세상가(Delly Sesanga)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에 찬 태도로 방문객을 한 명씩 맞이하며 말했다. “야당의 역할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열기가 폭발하기 전에 식혀주는 데 있다. 국민의 들끓는 분노로 국가 전체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카빌라는 물러나야 한다!” 그는 전통 야권 지도자 에티엔느 치세케디(83세)를 떠올리게 했다. 지난 7월 26일, 추방된 지 2년 만에 돌아온 전통야당 UDPS 수장인 그를 보려고 1백만 이상의 환영인파가 몰려들었고, 덕분에 치세케디는 공항에서 10㎞거리의 자택까지 6시간만에 도착했다.
 
집권당 당사가 위치한 부유촌 곰베지역에서 몇 블럭 떨어진 곳에서는 아프리카연합이 4월에 중재자로 임명한 에당 코조가 콩고민주공화국의 문제해결에 힘쓰고 있다. 그는 토고 총리직과 아프리카단결기구 총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강가에 위치한 5성급 풀만-그랜드 호텔에 짐을 풀었는데, 강가에는 정치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9월 1일, 그는 집권당이 추진한 ‘대담’이 힘겹게 진행되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음모가 있다고 의심한 주요 야권인사들이 대거 보이콧한 것이다. 10월 17일, 정부와 몇몇 야권 지도자가 모여 대선을 2018년 4월로 연기하고 야권출신 총리를 임명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대담’을 보이콧한 야권인사들은 카빌라 대통령의 즉각 사임을 고집하고 있다. 

사상자가 속출하는 시위에도 계속되는 대통령의 침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합동참모 본부장이던 카빌라 대통령은 불과 30세의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통치하기 힘들다는 국가의 수장으로 발탁됐다. 때는 2001년, 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아버지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살해당한 직후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하운동가 출신으로 1997년에 조셉 모부투 정권을 축출하고 권력을 찬탄했다. 비난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인 이 침묵자는 ‘제2차 콩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1994년 르완다의 투치족 학살과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르완다 지지세력을 멀리하면서 터진 전쟁으로, 1998~2002년 아프리카 9개국이 참전해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사망자를 낳았다.(2) 조셉 카빌라는 평화안정을 위해 2002년 남아공에서 격렬한 논의 끝에 협정을 체결, 참전국 수장들과 권력을 공유하기로 합의한다.(3) 그로부터 4년 후인 2006년 카빌라는 58%의 득표로 당선되지만, 당시 선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4) 2007년, 카빌라 대통령은 라이벌인 장-피에르 벰바의 사병들이 정규군 전환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저택에 군사를 보내 공격한다. 2011년에는 사기로 점철된 선거에서 49%의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 유엔안보리, 미국, 프랑스, 벨기에,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는 헌법에 따라 권력이양을 권고했지만, 카빌라 대통령은 타국의 ‘명령’일 뿐이라며 이를 묵살했다(박스기사 참조). 그러나 현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 대부분은 국제사회의 외교책이 다소 비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한 외교관은 “주변국 대부분이 권력의 영속화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조셉 카빌라에게 이러한 외부압력은 상당히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5)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콩고민주공화국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미국에게 이는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고, 인내심을 잃은 수많은 아프리카 청년을 고립시키지 않기 위한 문제다(15~24세의 아프리카 청년은 약 3억 2천7백만 명으로 전체 아프리카 인구의 32%를 차지한다). 워싱턴에서 미-아프리카정상회담이 열린 2014년 8월, 존 케리 장관은 카빌라 대통령과 기타 아프리카 3개국 정상을 따로 만나, 대통령 연임횟수 제한법을 따를 것을 재차 강조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부르키나파소에서는 27년간 집권한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이 실각했다. 반면, 부룬디에서는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2015년 7월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헌법 개정 없이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서 말이다. 콩고에서는 드니 사수-은게소 대통령이 2015년 10월에 국민투표를 실시, 이듬해 3월 대선에서 60% 득표로 3선에 성공했다. 개표결과를 두고 야권은 반발했고, 대대적인 억압이 뒤따랐다. 

콩고민주공화국 소요사태에서는 주로 중국인 상점이 약탈대상이었다. 중국이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 최대 무역대상국인 중국은 ‘친구’의 나라에 일절 내정간섭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5년 1월, 킨샤사에서 전례 없이 큰 규모의 카빌라 반대시위가 열렸다. 이번에는 야권이 주도한 시위가 아니었다. 청년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입소문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정부는 재빨리 인터넷 연결을 중단했다. 가봉이 2016년 8월 대선논란을 막기 위해 했듯이 말이다. 이날 이후, 카빌라 대통령의 주요동맹들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들 중 그리스계 유대인 기업가와 콩고민주공화국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이세 카툼비(51세)가 있었다.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전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이나, 목화산업 거물 출신으로 2015년에 베냉 대통령에 선출된 파트리스 탈론처럼 카툼비도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운수업과 물류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TP마젬베 축구팀을 이용해 인기를 얻었다. 2006년 대선에서 카빌라 후보의 캠페인을 금전적으로 지원한 덕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가장 부유한 카탕가 광산지역의 주지사에 임명된다. 2015년 10월, 여당의 정치공작을 목격한 카툼비는 “내가 투자한 사업은 곧 헌법”이라는 말과 함께 주목받던 주지사 자리를 사임하고 야당으로 돌아선다. 카툼비는 카탕가주 재정운영을 엄격히 관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학교 및 병원 설립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그는 치세케디와 맺은 동맹을 발판삼아 야권을 통합한 뒤 대선에 입후보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을 감지한 정부는 그가 킨샤사 대중시위에 일조하는 것을 막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2016년 7월 31일 야권시위나 가수 파파 웸바의 죽음이 계기가 됐던 2016년 3월 시위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카툼비는 수차례 탈세 및 용병모집 혐의를 받았다. 2016년 6월, 토지독점을 이유로 3년 형을 선고받는데, 이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항소했다.  

카빌라 대통령은 이제 45세로 앞날이 창창하지만, 어떤 차선책도 없다. 화려한 은퇴도, 마련된 명예직도 없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탄생한 대통령이 10주년을 맞이해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모부투주의자들이 계속해서 모부투를 숭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람베르트 멘데 오말랑가 통신·언론부 장관, 트리폰 킨-키예 무룸바 국회교류담당부 장관이자 카빌라데지르(카빌라 옹호단체) 협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서구 외교관은 카빌라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언젠가 아버지처럼 살해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항상 방탄복을 챙겨 입고 지하운동가의 소프트웨어를 지니고 다니며, 권좌를 벗어난 삶은 단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한다.” 카빌라 대통령은 자신이 ‘므즈(현자라는 의미로 로랑 카빌라의 호)’의 아들로서 역사적 적통성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권력의 승계자로서 콩고민주공화국 재건이라는 임무를 임명받았다고 믿고 있다. 

카빌라 대통령은 이 막대한 임무를 어거스틴 마타타 포뇨 총리에게 맡겼다. 테크노크라트이자 전 재정부 장관을 지낸 마타타 포뇨 총리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고위 관직자 중에서 상당히 솔직한 편에 속한다. 지난 8월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세계 최대 빈곤국이면서 나라의 가능성과 자원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막대한 천연자원 보유국이지만, 정작 국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게 살아가는 냉혹한 모순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유엔인간개발지수 176위다. 마타타 포뇨 총리는 카빌라 대통령이 2014년에 임명한 정부조직의 부패와 정치공작을 거북해하는 듯했다. 자신의 노력이 정치위기로 헛수고가 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그들은 돈을 벌러 온 것이지, 학교를 지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대놓고 말한다.” 그리고는 “경제가 원하는 것은 총도, 군화소리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2010년,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제는 회복기에 접어든다. 평균 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외채과다빈곤국 외채경감전략(HIPC)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시켜 1백억 달러의 채무를 탕감 받았다. 물가상승률은 2010년 이래 평균 2%를 유지해, 하이퍼 인플레이션 위기도 무사히 넘겼다. 환율도 1달러 당 923콩고프랑을 유지했다. 2013~2015년 해외투자규모는 20억 달러였는데, 2014년에 사하라이남 아프리카가 총 425억 달러를 유치한 것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규모이긴 하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최대 자금줄은 중국이다. 세계은행은 광산개발에 투입된 중국자금이 2015년 콩고민주공화국 경제성장에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주목할 만한 사업으로는 도로건설, 식수관 건설, 철도 재개발, 잉가(INGA) 수력발전소 용량증대 등이 있다. 또한, 반둔두 지역의 부캉가-론조 농공단지사업 일환으로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남아프리카 민간기업들이 8만 헥타르를 개발한 상태다. IMF에 따르면, 1인당 GDP는 2005~2012년 두 배로 증가해 485달러에 달했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에 속한다. 

반면, 치세케디 소속야당 UDPS의 사미 바디방가 위원장이 그리는 전망은 다소 어둡다. “현재 우리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겪는 3중 위기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국민은 아프리카 최악의 생활고를 겪고 있다. IMF에 따르면, 빈곤율은 82%이며(정부 발표 수치: 64%), 실업률은 88%에 달했고(정부: 43%), 대학은 실업자 양성소가 됐다.” 평균수명은 51세, 영아사망률은 아프리카 평균 8.9%와 비슷한 수치인 8.8%에 머물러 있다. 바디방가 위원장은 문제점으로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취약한 경제구조를 꼽는다. 원자재 가격이 2014년 이래 하락세에 접어든 가운데 콩고민주공화국 중앙은행은 2016년 성장률이 5.1%를 하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더 최악인 것은, 야당과 민간언론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 뒤에 은밀한 압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콩고민주공화국 경비대의 폭력행사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유명하다. 이에 미국은 2016년 6월에 셀레스틴 카냐마 경찰장의 자산을 동결시키고, 9월에는 다른 두 명의 책임자 자산을 동결시키는 등의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상징적인 제스처에 그쳤을 뿐, 콩고민주공화국 내부의 알력관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킨샤사의 밤을 밝히는, ‘바통제’라는 유명한 지역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 카페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근처 테이블에 앉은 국가정보국(ANR) 직원들을 대놓고 조롱한다. 정작 필요한 대상은 조사하지 않고, 프레디 침바 같은 유명 조각가나 뒤쫓고 다니기 때문이다. 프레디 침바가 나사소켓, 쥐덫 등으로 만드는 작품들은 정치적 의미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바통제 지역을 비롯해 ‘시테’라 불리는 킨샤사의 중심지는 정기적으로 암흑에 잠긴다. 수력발전 가능성이 중국,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3위 국가임에도, 잊을 만하면 온 국가가 정전된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력발전산업은 2.5%밖에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반항의 도시 킨샤사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 언제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로 변할지 모르는 맥주와 룸바에 취한 채 말이다. 

이 모든 상황이 카빌라 대통령을 타협의 길로 내몰았을 것이다. 모부투가 1965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군부의 부활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만 5천 명의 대통령 경호대는 대부분 남·북부 키부와 카탕가 지역 출신으로 충성심이 높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불가피한 상황이 닥치면, 과연 이들이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강경파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2016년 신학기에는 자녀들을 해외학교에 입학시키는 바람에 프랑스 학교 등록률이 낮아질 정도였다. 불안정한 중부 아프리카(부룬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강대국 콩고민주공화국은 이 지역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짓는 신호탄을 쏠 준비가 돼있다. 2016년 말, 콩고민주공화국은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를 희망한다. 10월 17일에 체결한 정치협약은 소위 ‘급진적’ 야당에 대해, 강한 불신만 남겼다. 모이세 카툼비는 이렇게 반문한다.
“헌법조차 지키지 않는 대통령이, 어떻게 간단한 협약을 지키겠는가?”  


글·사빈 세수 Sabine Cessou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Cf. 세계은행 보고서, www.banquemondiale.org/fr/country/drc
(2) 미셸 갈리Michel Galy, ‘Polémique sur les massacr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월
(3) Cf. 다비드 반 레이브룩David Van Reybrouck, ‘Congo. Une histoire’, <Actes Sud>, 아를, 2012년
(4) 콜레트 브래크만Colette Braeckman, ‘Le Congo transformé en libre-service mini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7월
(5) 에르노 모네넴보Tierno Monénembo, ‘En Afrique, le retour des présidents à vi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