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선의 희망과 좌절

2016-12-02     제라르 누아리엘

2016년 5월 3일, ‘좌파와 권력’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1)의 개막연설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인민전선 선거 승리 80주년 기념일에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주최 측에 감사를 표했다. 이어 그는 이 행사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유용한 비교를 하고, 오늘날 적용할 만한 교훈을 얻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1936년 4~5월 총선에 초점을 맞춰 인민전선을 기리는 것에는 당연히 나름의 의도가 있다. 민중투쟁은 뒷전으로 미루고 정당과 지도자, 강령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는 아래가 아닌 위에서 바라본 역사다. 그러나 사회진보는 선거강령이 아니라 민중동원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어, 우리 현대사에서 인민전선만큼 훌륭한 사례가 없다.

1936년 5월 선거에서 좌파가 거둔 승리는 그 자체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3대 주요 정치세력이 인민전선의 기치 하에 결집해 가까스로 선거에서 이겼을 뿐이다(등록유권자 대비 득표율 37.3%. 우파는 35.9%). 이들 세력은 합의점에 이르기 위해 “빵, 평화, 자유”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되는, 극도로 소박한 강령을 채택했다. 이들이 내건 사회적 공약이라는 것은 고작 임금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 국민실업기금 도입 정도였다. 프랑스 공산당이 레옹 블룸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인민전선의 이런 소극적 노선이었다.

인민전선이 현대사에 한 획을 긋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난 집단적 동원에서 조직의 근원과 존재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민중계급이 이처럼 들고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려면 먼저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기나긴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2)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1차 산업혁명이 농경사회와의 급격한 단절을 부르지 않았다. 자기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가족 단위로 일하는 수많은 농민노동자들이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가공하면, 이를 상공업자들이 판매하던 과거 경제모델의 연장선상에서 대형산업이 발전했다. 한편 파리를 위시한 대도시들은 구체제(앙시앵레짐) 하에서 활약하던 길드의 명맥을 잇는 장인노동자들의 활동무대가 됐다. 상퀼로트(프랑스혁명에 동참한 민중세력-역주)의 계승자인 이 장인노동자들은,  1789년 혁명부터 1871년 파리코뮌에 이르기까지 파리를 뒤흔든 모든 혁명운동을 주도했다. 노동계를 구성하는 이 두 요소 간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이 간극 때문에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형성에 어려움이 따랐다. 또한 노동권이 제대로 태동할 수 없었으며, 인력대여 및 ‘청부거래’(3)라는 전통적인 법적 형태가 유지됐다.   

두 번의 자본주의 위기가 가져다 준 것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처음으로 대대적인 위기를 맞는다. 역사가들이 ‘대공황’이라 일컫는 이 사태는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고 대규모 공장의 시대가 열렸다. 이 급격한 변화로 큰 타격을 입은 노동계의 두 주요 집단은 새로운 질서에 저항하며 다양한 형태로 급진적 투쟁을 전개했다.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를 벌였는데 상당수는 유혈 진압됐다. 광산노동자가 공적 공간에서 주역으로 부상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자처하는 노조와 정당들(노동총동맹(CGT), 프랑스노동당(POF) 등)이 탄생했다. 이런 대대적인 움직임에 떠밀린 광산 고용주들은 최초로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사회입법이 시작되고, 주휴무법과 노동자농민퇴직금법이 제정됐다. 결정적으로, 1910년 노동법이 탄생하기에 이른다.(4)

그러나 프랑스 공화정이 1880년대 독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실시한 것과 같은 종합적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자영농과 소규모 경영인이 주축이 된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공화국 지도자들은 상품뿐 아니라 외국인의 노동력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경제보호주의를 택했다. 1893년에 채택된 이 ‘국민노동보호법’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식별 방안에 초점을 맞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보호주의가 이농물결에 제동을 걸면서 대형산업의 인력난은 심화됐다. 비국적자들에 대한 각종 차별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민 노동력의 대대적 도움이 절실해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복구기를 거치면서 노동계 구성 집단들 간에는 또 다른 균열이 일어났다. 높은 수준의 보호를 누리는 부문(철도·우편·공공서비스 등)에서는 전쟁 중 이뤄진 ‘성스러운 결합’ 덕택에 노사정 공동경영이 제도화되고 정착됐다. 개혁성향 노조인 CGT는 바로 이들 부문에 가장 많은 조합원을 두고 있다. 반면 대형산업 부문의 경우, 1919~1920년 반란파업이 격렬히 진압된 이후 노동운동이 붕괴되다시피 했다. 에드워드 쇼터와 찰스 틸리가 보여준 것처럼, 1914년 이전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대규모 기업(노동자 500명 이상)에서의 파업이 1920년대에 들어서는 현저하게 감소했다.(5)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북부와 동부의 중공업공장에서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들, 그리고 황폐해진 마을을 떠난 노동자들을 대체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대거 고용했는데, 이는 수십 년에 걸친 투쟁 전통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한편 가공공장에서는 대도시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신설공장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들 공장으로 유입된 숙련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따라 수시로 이직하는 등의 개별적인 자구책을 선호했다. 이러한 대대적인 불안정성으로 인해, 공산당(PC)과 통일노동총동맹(CGTU)(6)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단행동은 약화됐다.  

1929년 10월 미국 월스트리트 증시가 폭락하면서 자본주의는 다시 한 번 위기를 겪는다. 이 위기가 프랑스에 미친 영향을 두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933년까지 프랑스에서는 그 여파가 다른 나라에 비해 덜 두드러졌는데, 주로 산업사회의 주변부에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십만 명의 이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송환됐고, (프랑스에 여전히 많았던) 농민노동자들은 실업수당의 혜택을 보는 대신 농촌지역에서 생계수단을 찾았다.  

하지만 1933년 이후 경제공황은 전보다 더 프랑스적이고, 더 남성적이고, 더 도시적이고, 더 숙련된 노동계층의 핵심부를 강타했다. 실업이 엄청난 규모로 증가한 반면, 실업수당제도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많은 숙련노동자들은 이동상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과거 이민자들이 종사하던 일자리로 들어갔다. 고용주들은 본격적인 기계화에 필요한 재원이 바닥나자, ‘작업의 합리화’에 눈을 돌렸다. 이에 따라 성과보상제와 조립라인작업이 자동차 제조업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인민전선의 특징인 파업운동이 시작된 시점은, 흔히 말하듯 1936년 5월 3일 좌파의 선거 승리 이후가 아니다. 파업운동의 실질적 시발점은 대규모 기계제조공장의 숙련노동자들이 경제위기로 직접적 타격을 입은 1933년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기업 내 행동을 우선시하는 전략으로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결정적 계기를 한 가지 더 지목하자면, 1933년 2월 5일 르노자동차 비양쿠르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들 수 있다. 보일러 폭발로 8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희생자 장례식장에서 루이 르노 사장과 사회당 소속 시장은 유가족들과 마주한다. 이 자리에서 유가족 편에 선 공산당 소속 의원, 투쟁가, 그리고 2천 명의 노동자들은 “살인자! 살인자!”라고 외쳤다. <뤼마니테>(장 조레스가 창간해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인수된 일간지)의 보도로 전국에 알려진 이 비극적 사건은 ‘우리, 노동자’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노동자들을 식별하는 프로세스를 등장시켰다. 이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확산됐다.  

인민전선은 어떤 교훈을 선사하는가

사회적 투쟁의 확산에는 정치 상황도 한몫했다. 1934년 2월 6일 극우주의 연대가 벌인 시위가 폭동으로 비화됐다. 쿠데타 발발 우려 속에 노동운동이 통합을 이루고 좌파세력이 동맹을 맺으면서 반파시스트 전선이 구축됐으며, 이는 인민전선의 활로를 열었다. 이처럼 반사적인 통합모색 차원에서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을 실시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파업이 잇따랐다. 특히, 파업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파업운동에서 여성들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935년 5월 파리 지역의 여러 소규모 제조공장 여성노동자 2천여 명이 임금감축에 반발해 파업에 돌입했으며, 결국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인민전선의 역사에서 이 초기단계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행동양식을 만들고, 1936년 5~6월 확산된 각종 요구사항을 정비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 생샤몽 오메쿠르 제철소(프랑스해군 납품공장)에서 일어난 분규는 이런 관점에서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작업 합리화’ 조치에 반발해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이 (최초로) 공장을 점거했고, 이는 5주 동안 지속됐다. 그 결과 파업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관철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제를 도입했으며 노동자를 업무능력에 따라 3개 범주로 분류하는 제도까지 마련했다.  

인민전선의 1936년 5월 선거 승리는 대형산업의 소수 핵심 숙련노동자들이 구축한 발화점에서 불길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된 셈이다. 공장점거를 동반한 파업운동이 1936년 6월 초 처음으로 절정에 달했다(150개 공장 점거). 결국 경영진은 협상에 응했고, 6월 8일 마티뇽 협정이 체결됐다(임금인상, 주 40시간 근무, 유급휴가, 단체협약 체결 확대 등).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파업운동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투쟁을 하면 대가를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노동·정치운동과 동떨어져있던 분파들까지 바통을 넘겨받은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경제 분야에서 파업운동이 전개됐다. 단지, 보호막이 견고하던 분야(서비스·공공부문)는 개혁주의 성향의 CGT가 주장하던 계급협력을 충실히 이행했다. 결국 인민전선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전문가, 지도자, 고용주들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자멸적’이라고 평가하는 사회적 요구일지라도, 피지배층이 유리한 권력관계 구축에 성공한다면 얼마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1936년 6월부로 투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 마티뇽 협약은 이후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고용주들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프랑스 법에 편입돼 영구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노동법의 해체는 이런 기나긴 계급투쟁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지도 모른다.

아울러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이 자기 목소리를 내면, 사회의 집단적 표상도 변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벨에포크(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평화로운 번영기-역주)’에는 사회운동의 결과로 프랑스 북부 광산노동자의 모습이 공적 공간에 등장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비양쿠르의 금속노동자’가 그 뒤를 이었다. 배우 장 가뱅이 스크린에서 연기한 이 새로운 인물로 인해 당시 거대한 민중운동에서 여성, 이민자, 식민지 노동자들이 수행한 역할이 덮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비양쿠르의 금속노동자가, 투쟁하는 민중의 일부만 보여줄지라도 그 존재는 모든 민중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우파와 극우파는 “모스크바의 볼셰비키들이 배후에서 파업을 주도했다”며 이 운동을 폄하하려 했다. 그러나 레옹 블룸은 그러한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후, 프랑스 사회에 다시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대형 공장의 보루가 무너졌다. 1981년 5월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중계급은 희망을 품었다. 자동차공장에는 ‘노조의 봄’이 찾아왔다. 이를 주도한 것은 단순작업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노동 분야의 참여까지 유발하지는 못했다. 공적 공간의 노동운동이 정당성을 확보할 만큼의 권력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언론은 작업장에서 기도하는 무슬림의 모습을 담은 보도자료를 쏟아냈고, 그 영향을 받은 사회당 소속 피에르 모루아 총리는 1983년 1월 이렇게 말했다. “남아있는 주된 어려움의 원인은 이민 노동자들로, 이들은 프랑스 사회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입장을 취한다.”(7)

파업노동자들을 외세에 매수된 선동자로 표현하며 사회투쟁을 폄하하는 전형적인 우파의 주장에, 다름 아닌 1936년 레옹 블룸과 같은 당에 있었고, 같은 직책을 맡았던 이가 동조한 것이다.
그 날, 인민전선은 확실히 죽어버렸다.  


글·제라르 누아리엘 Gérard Noiriel
역사학자. 파리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 교수. 최신 저서 <초콜릿, 어느 이름 없는 사람의 진짜 이야기>, Bayard, Paris, 2016.

번역·최서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장조레스재단, 유럽진보주의연구재단, 싱크탱크 ‘테라노바’가 주최한 세미나.
(2)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은 Gérard Noiriel, <Les Ouvriers dans la société française, XIXe-XXe siècles (19-20세기 프랑스 사회의 노동자들)>, Seuil, Paris, 1986 참고.
(3) 여기서 ‘청부거래(Marchandage)’란 중개업자나 하청업자를 통해 노동력을 다른 고용주에게 되파는 관행을 뜻한다.
(4) Claude Didry, <L’Institution du travail. Droit et salariat dans l’histoire (노동제도. 역사 속의 법과 노동자)>, La Dispute, Paris, 2016.
(5) Edward Shorter and Charles Tilly, <Strikes in France, 1830-19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6) CGT에서 분리된 노조로 1921년부터 1936년까지 활동. 
(7) Nicolas Hatzfeld and Jean-Louis Loubet, ‘Les conflits Talbot, du printemps syndical au tournant de la rigueur (탈보자동차 분규. 노조의 봄에서 긴축의 전환까지) (1982-84)’, <Vingtième Siècle>, n° 84, Paris, 2004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