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현장을 추적한 종군기자들

2016-12-02     안 마티유
   
▲ <성벽 부수기>,1936 - 호세 루이레이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공화국을 상대로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앞서 인민전선 공화국이 들어선 프랑스에선 시민들이 자원해서 전쟁에 나섰고, 언론매체는 현장에 특파원을 급파해 발 빠르게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등으로 이뤄진 시민군에 대한 관찰기를 선보였다. 그들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희망과 근심이 혼재하던 당시의 특별한 정치적 시간 속으로 우리를 안내해준다.

“하늘을 나는 동안에는 어디가 프랑스이고 스페인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있었던 걸까?”
1936년 7월 30일, 마르세유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앙드레 비올리는 이렇게 자문했다. 앙드레 비올리는 양차대전 사이 프랑스 ‘5대 대형 언론사’로 손꼽히던 유력매체 <르 프티 파리지앵>의 특파원이었다.(1) 그는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발발한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전투적인 활동을 보여준 기자였다. 당대 유명기자였던 그는 스페인에 발을 디딘 이후, 8월 말까지 내전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잠시 스페인에는 희망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러나 몇 달 간 줄곧 긴장국면이 지속됐고,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말았다.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것이다.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의 불길은 다음 날인 18일, 본토로 번져갔다. 여러 도시가 ‘반군’의 손에 넘어갔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일부 도시는 항전을 지속했다. 사회주의·공산주의·급진주의·자유주의는 물론, 심지어 보수주의 기자까지 온갖 정파를 초월한 기자들이 피레네 산맥 너머로 급파됐다. 그 가운데 일부는 1939년 4월 공화국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현지 특파원들의 여정을 추적하며 그들이 남긴 글을 읽어보는 것은 스페인 내전 초기 기자들의 눈을 통해 지켜본 스페인 내전의 생생한 현장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령 우리는 그들의 글을 통해, 당시 기자들 모두가 똑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어서 이념적인 입장 차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비록 얼마 뒤 벌어질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감지되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내전 초기 그들이 쓴 기사는 모두 엇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전의 현장에서 본 것은 대체 무엇일까? 무기를 들고 일어난 시민들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무엇이며,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내전 초기의 기사에서 앙드레 비올리는 국경 양편의 비스무리한 풍경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식의 묘사는 또 다른 기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력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군소 기관지에서 파견된 기자였던 그는 앙드레 비올리와는 사뭇 다른 환경을 거쳐 스페인에 발을 디뎠다. 그가 바로 사회주의 계열의 일간지 <르 포퓔레르>의 간판 기자, 장 모리스 에르만이다. 내전 발발 후 곧바로 스페인 반도에 급파된 초대 특파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9월 초까지 줄곧 현장을 지키며 첫 번째 기획기사를 써내려갔다. 7월 23일 나르본 출신의 친구와 함께 페르튀스 고개를 넘어 스페인에 입국한 그는 이런 기사를 타전했다. “국경 건너편에도 똑같은 코르크떡갈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산길과 네모반듯한 가옥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을 초입에 이르자 무장한 노동자들이 나타났다.”

돌연 기자들의 눈앞에 나타난 무장 중인 마을에는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을을 찾았던 기자들 중 두 명은 이미 카탈루냐에서도 혁명의 탄생을 두 눈으로 지켜본 적이 있었다. 훗날 국제여단에도 참여한 바 있는, 번역가이자 기자인 샤를 볼프는 7월 19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는 시민교육과 공화국 활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급진 사회주의 주간지 <라 뤼미에르>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불과 10분 만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 30분이 지나자 도시 전체가 작은 보루로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쳐 보루를 지킬 각오로 무장돼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열띤 분위기를 가장 생생하게 그려낸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전의 현장을 지켰던 공산주의자 조르주 소리아였다. 그는 공산당 계열의 시사화보 주간지 <르가르>에서 급파된 특파원으로, 7월 30일자 기사에서 스페인령 모로코주둔 군대가 일으킨 군사반란 이튿날인 7월 18일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민병대는 우리를 붙들고는, 비극의 날 사람들이 보였던 영웅적인 모습에 대해 몇 시간이고 말하길 원했다. 기관총 사수를 곁에서 도왔던 여인들, 단 한 번의 호소만으로 순식간에 거리로 뛰쳐나온 용맹한 소년들, 그리고 제 형들에게 부지런히 탄알을 나르던 어린이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 생생한 장면 묘사의 힘은 스토리의 힘을 압도했다.”

생생한 장면묘사는 독자들의 머릿속에 파리코뮌의 이미지를 환기시켰다. 그것은 단순히 기자가 경험한 사건에서만 비롯된 이미지는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현장에 투입된 기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혁명의 기억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2) 공산주의에서 급진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파의 매체들은 아스투리아스 혁명을 ‘일종의 아스투리아스판 파리코뮌’으로 이해했다. 언제나 아스투리아스 혁명의 곁에는 ‘영웅적’이란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1936년 여름 모든 기자들 사이에 시민군의 투쟁은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해석됐다.

장 모리스 에르만의 기사 덕분에 <르 포퓔레르>의 독자들은 혁명의 분위기가 감도는 스페인의 거리를 함께 거닐어볼 수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유적 도시 지로나의 거리에는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 앞에 부서진 가구 무더기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의 국제정세 전문기자 폴 니장은 7월 28일 푸이그세르다 지점(프랑스의 라투르드카롤)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8월 중순까지 내전 현장에 머물렀다. 7월 30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그는 이 도시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교차로마다 무장한 민병대, 감속용 장애물, 방어진지가 나타났다. 민중 스스로가 자유를 지키고 있었다.” 8월 초 발렌시아에 도착한 그는 “이 도시는 바리케이트로 뒤덮여 있었다”고 썼다.(3)

기자들이 그려낸 혁명시민군의 모습

대체 시민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혁명적 조합주의(생디칼리즘) 계열의 잡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소속돼 있으며, 엔지니어로도 활동 중인 자유주의자 로베르 루종은 8월 10일 ‘바르셀로나에 관한 노트’라는 제목의 한 코너에서 8월 5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도시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여러분은 그곳의 주인이 노동자임을, 노동자가 유일한 주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인’이란 단어는 또 다른 매체 <플레슈 드 파리>에서도 발견됐다. 주간 <플레슈 드 파리>는 가스통 베르주리가 이끄는 반파시즘공동노선 계열의 기관지였다. 이미 1년째 스페인에 체류 중이던 마르그리트 주브 기자는 10여 일 전 수도로 자리를 옮겼고, 8월 1일 내전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드리드 시민들(그리고 이들과 연대한 반파쇼 지식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한 마디로 시민이 주인이었다.”(4)

모든 현지취재 기사는 ‘시민군’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으로 도배됐다. 자유주의 좌파 일간 <뢰브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당시 이 신문에는 매우 다양한 인사들의 글이 실리곤 했다. 이 신문의 특파원이자 프롤레타리아통일당(PUP) 중앙위원회 일원 제르멘 드카리는 8월 23일 바스크 지방에 투입된 이후 그곳에서 며칠 간 머물렀다.(5) 그는 이룬(Irun) 지역 시민군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상하수직적 위계질서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인상적인 점으로 지적했다. 

“취재진은 한 중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직히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계급이 높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민병대 사이에서 격식을 갖춰 그에게 예를 다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 보통의 격식 대신 서로 툭 치거나 가볍게 등을 두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초기 특파원들은 민병대의 옷차림에도 주목했다. 사라고사 전선(아라곤 지방)에 파견된 에르만은 “교사, 노동자, 농민 모두가 수수한 푸른색 작업복 차림”이었다고 묘사했다. 비정예 시민군의 군복으로 통하던 ‘El mono azul(상하의가 붙은 푸른 작업복-역주)’은 반파쇼 세력의 민중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떤 기자들은 지지의 표시로 그들과 같은 작업복 차림으로 다녔다. 대표적인 예가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와 제르다 타로였다. 앙드레 비올리는 <르 프티 파리지앵>의 첫 기사에서 민병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무장한 노동자들은 정말 각양각색의 자유로운 차림이었다. 작업복, 단추 달린 셔츠 차림인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민머리, 어떤 사람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더러는 챙 없는 천모자를 쓰거나 챙이 달린 붉은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도 보였다.” 

샤를르 리델(벨기에 국적)과 샤를르 샤르팡티 역시 무정부주의연합 기관지 <르 리베르테르>에 사진까지 곁들이며 똑같은 모습을 묘사한 글을 기고했다. 7월 29일 푸이그세르다를 거쳐 스페인에 입국한 그들은 둘 다 노동자 출신이었는데, 샤를르 리델은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들은 두루티 부대(6)에 합류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왔다. <르 리베르테르>는 그들의 생생한 ‘증언’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두어 시간 만에 정확하지도 않은 의견을 단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기자의 일이라고 결코 볼 수 없다.” 8월 2일 부하랄로스(아라곤 지방)를 방문한 그들은 이런 기사를 타전했다.

“시민군의 모습은 영화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판초 비야의 군대와 비슷했다. 똑같은 군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푸른색 작업복, 평상복, 짝이 맞지 않는 군복, 군모, 베레모, 큼지막한 멕시칸 모자, 붉고 검은 챙 없는 경찰 모자 등 각양각색의 차림이었다. 유일하게 똑같은 것은 즈크화뿐이었다.”

작업복, 멕시칸 모자, 베레모, 즈크화…. 시민군을 미화한 묘사는 생생한 장면을 머릿속에 환기시켰다. 그러나 매우 특색이 짙은 스페인의 반파쇼 저항운동 속에서도, 우리는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얼룩덜룩 중구난방으로 차려입은 민중에게서 기자들은 종종 혁명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공산주의 계열의 매체에 자주 글을 기고하는 한편, <뢰브르>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번역가 겸 기자 E. 푸테르만은 8월 1일 세르베르(포르트부) 지점을 통해 바르셀로나로 입국한 뒤, 3주 간 스페인에 머물렀다. 월초 사라고사 전선을 찾았던 그는 <르가르>의 독자들에게 시민군 기관총 사수를 목격하고 느꼈던 놀라운 심경을 전했다.

“소대에 여성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과다라마(마드리드) 전선을 찾은 앙드레 비올리는 참전 여성들의 중성적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여성들이 적에 맞서는 순간, 그들에게서 더 이상 로맨틱한 여인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르주 소리아도 여군들에 대해 특별히 주목했다. 그는 여성의 상반된 두 가지 모습에 대해 표현했다. 먼저 “시민군으로 참전했던 자식의 전사 소식을 접하는 순간, 가정을 내버리고 오로지 죽은 자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총대를 메고 전장으로 향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면서, 여성들을 전장으로 이끈 것이 모성애였음을 보여줬다. 한편, 한 여성의 사연을 들려주며 결론을 내렸다. “그 여인은 고통 속에서도 아주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그 여인은 정의감에 불타 결국 전사로 변신했다.” 말하자면 여자들도 이성적, 이념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한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여성의 참전은 여성이 고유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계기를 선사했다.

스페인에 파병된 남편 폴을 따라 함께 현장을 찾았던 앙리에트 니장은 <방드르디>의 칼럼니스트였다. 프랑스 인민전선(1930년대의 반파쇼투쟁의 역사적 과정에서 태어난 여러 계층과 당파의 연합전선-역주)의 등장과 관련이 깊은 ‘문학 시사주간지’, <방드르디>는 인민전선에 속한 여러 계열의 정파(7)를 모두 대표했다. 1931년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된 스페인 제2공화국 치하에서 열린 2월 총선에서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승리하자, 당시 앙리에트 니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여성도 충분히 성 정치가 아닌 계급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여성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해질 것이다.” 실제로, 반파쇼 저항을 위해 무기를 든 스페인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실현됐다.

다양한 혁명 영웅들은 특히 두 가지 상황 속에서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첫 번째는 합창의 순간이었다. 가령 “갑자기 노래 소리가 울려퍼졌다”고 사라고사 전선을 찾았던 에르만은 기술했다. 이 문장은 간결성도 잘 드러내지만, 동시에 ‘갑작스러움’의 정서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이런 식의 묘사는 마드리드 인근 전장을 찾았던 비올리에게서도 발견됐다. “수백만 명이 가슴으로 부르는 저 합창소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승리자들, 수많은 정예군의 노랫소리였다.” 특파원들이 느꼈던 경이로움은 <인권수첩>에 실린 한 목격자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났다. “군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노동자와 프티 부르주아들. 그들이 바르셀로나에서 파시스트 반군을 물리치고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사라고사로 향하는 동안 합창하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연출했다.” 스페인인들은 파소 도블레춤을 추거나 손뼉을 치거나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며 전쟁터로 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문화적 상투성으로 치장된 이러한 묘사는 흡사 선전용으로 각색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제 현실을 잘 반영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진실임은 특파원은 물론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또 다른 혁명 영웅의 이미지는 ‘불끈 쥔 주먹’이었다. 가령 에르만은 이렇게 묘사했다. “취재진은 5~6km마다 미소 띤 청년들과 마주치곤 했다. 그들은 매번 불끈 쥔 주먹을 내밀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썼다. 그런가하면 니장은 “전장을 지키는 시민군이 지나갈 때마다 밀밭을 지키던 농부들은 불끈 쥔 주먹을 올려다보였다”고 묘사했다. 소리아 기자도 <방드르디>에서 바르셀로나와 시에라 데 과다마라 사이에 펼쳐진 들판을 지나는 동안 심지어 “어린 아이들마저 불끈 쥔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고 전해줬다. 그것이 기자들을 의식한 행동인지, 자연스러운 행동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끈 쥔 주먹이 혁명의 열기와 반파쇼의 정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보도 속에서 익명의 존재는 불끈 쥔 주먹을 통해 온전한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주먹 쥔 손 그림자는 스페인의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그들은 우파나 극우파 등 야권 매체의 비방과 모략에 직면해야 했다.

비방전은 주로 아나키스트들이 일으킨 교회 방화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파원들 중 교회 방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기자가 문제를 해명하는 데 주력했다. 가령 “물론 바르셀로나의 거의 모든 교회가 불에 탄 것은 맞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스페인의 성직자들도 공공연히 저항군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라고 <뢰브르>의 푸테르만 기자는 설명했다. 한편 <르 프티 파리지앵>의 비올리도 방화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그것은 종교를 겨냥한 증오였을 뿐, 결코 성직자를 겨냥한 증오가 아니었다.” 이러한 분석은 극우 계열의 기자 레옹 도데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락시옹 프랑세즈>에서 비올리가 “최근 정부군이 바르셀로나에서 자행한 만행을 너무 ‘인민전선’에 유리한 쪽으로 미화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일찍이 앙드레 비올리 여사가 ‘빨갱이(Rouge)’인 줄은 잘 알았지만, 자비로운 성직자와 수녀마저 가리지 않고 신선한 피를 탐할 정도로 그렇게 ‘붉게 달아올라 있는지(Rouge)’는 전혀 몰랐다.”

많은 좌파 기자들은 그들이 교회에 대한 뼛속 깊은 증오에도 불구하고 문화유산 보존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운 의지를 보여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비올라가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당시 ‘인민연합위원회’로부터 파견된 두 명의 작가가 그와 함께 동행했다. 먼저 그 중 한 명인 장 카수는 장 제이 국민교육예술부장관 비서실 소속 역사 기념물 조사관으로, 유력 매체 <유럽>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장 리샤르 블로크였는데, 같은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다. 장 리샤르 블로크는 훗날 이 때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스페인, 스페인!>이란 책을 펴내기도 한다. 아무튼 당시 두 작가는 프랑스공산당(PCF) 소속으로 함께 여행에 동행했다. 그런데 이 장 카수란 필자는 <방드르디>에서 바르셀로나의 ‘화염에 싸인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 예술가와 고고학자들은 중요한 유물들을 화염에서 구조해내거나, 시민들과 합의 하에 귀중한 물건을 따로 선별하고, 나머지 덜 중요한 물건들만 분노한 시민들에게 건넸다.” 사실상 그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단 한 명, 바로 <뤼마니테>에서 외교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가브리엘 페리였다. 그는 프랑스공산당(PCF) 중앙위원회 일원이자 국회의원으로도 활동 중인 인물이었다. 8월 5일 바르셀로나에 입국해 2주 간 스페인에 머물렀던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공산당 강령에는 교회에 불을 지르라는 조항은 없다. 그 어떤 프랑스의 공산당 당원도 교회에 불을 지르라고 권고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이 말 속에 암묵적 비난이 담겨 있음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비난조의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전이 발발한 초기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대부분의 매체는 주로 ‘결속’이란 개념에 의해 지배됐다. <뤼마니테>가 파견한 특파원 피에르 막스는 7월 25일경 푸이그세르다를 통해 스페인 땅을 밟은 최초의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특이하게도 북동부 지역과 북서부 지역을 모두 방문했고, 심지어 ‘반군’지역에까지 들어갔다. 8월 초 바스크 지방을 찾은 그는 현지 신문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읽는 민병대원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녘 참호 밖을 나와 트럭에 앉은 군복 차림의 대원, 오야르순을 지키는 대원, 빌라프란카 전투에 참전 중인 대원, 그들은 모두가 <인민전선>을 읽고 있었다. 바스크국민당을 상징하는 초록색·흰색·붉은색의 완장을 찬 대원, 검은색·빨간색 완장을 찬 무정부주의자 대원, 어깨에 붉은 약장을 단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자 대원, 누구나가 모두 열정적으로 <인민전선>을 탐독했다.”  

기자들은 모든 정파를 초월해 결속한 민병대의 모습에서 아스투리스 혁명을 떠올렸다. 바르셀로나의 경우와 달리, 아스투리스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노동자총연맹(UGT)과 무정부 생디칼리즘을 표방하는 전국노동연합(CNT)이 단단히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7월 27일 이후 에르만은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다. “가령 바르셀로나에서는 시민군의 투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 무장을 하고 다니고, 거의 모든 바리케이드마다 검은색·붉은색이 섞인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결속의 의지가 지속될 수 있을까?” 같은 시기 같은 장소를 찾은 니장은 이런 보도를 내놓았다. “지나가는 자동차 중에 뜨거운 결속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을 달지 않은 자동차는 단 한 대도 찾아볼 수 없다. 오랫동안 반목한 끝에 마침내 서로 손을 맞잡은 CNT와 UGT의 상징물을 달지 않은 자동차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어제 아나키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그들이 흘린 피의 이름으로 결속한 것이고, 그 누구도 그런 결속관계를 깨뜨릴 생각은 없다.”

그 어느 때보다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프랑스 언론은 아나키스트들의 비중이 높아진 현실에 대해 놀라움과 우려를 동시에 드러냈다. 유력 시사화보 주간지 <뷔>의 특파원도 뤼시앵 보젤 대표가 내준 전세기를 타고 7월 말 스페인 땅에 발을 디뎠다. 사진작가 게오르그 라이스너의 사진이 1면 표지를 장식한 8월 29일자 특별호에는 로버트 카파, 게르다 타로, 침 등 유명 사진작가들의 사진이 줄줄이 실렸고, 당대의 유명 필진과 기자들의 글이 도배됐다. 마치 통합의 상징을 자처하듯, 이 잡지에는 공산주의자(니장), 사회주의자(루이 파로트), 공화주의 좌파(파로트), 아나키스트(알렉상드르 크루아)에 관한 기사들이 각각 한 편씩 사이좋게 실렸다.

이미지 전쟁이 시작되다

그러나 8월 중순 결속 분위기는 돌연 공산주의 계열의 언론보도로 인해 금이 갔다. 20일 전후로 두 편의 기사가 암묵적인 논쟁을 초래했다. 그 중 한 편이 가브리엘 페리의 기사였다. 8월 중순 마드리드에서 그는 돌로레스 이바루리 공산당 의원이 참석한 한 회의에 참관했다. 이바루리 의원은 7월 19일 마드리드의 내무부 건물 발코니에 올라가 “노 파사란(못 지나가)”(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반란군의 마드리드 포위 때 공화파가 내건 슬로건으로 그들이 지나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뜻이다-역주)을 외친 인물로 유명했다. 가브리엘 페리는 이런 기사를 타전했다.

“파시오나리아(돌로레스 이바루리의 별명. 수난의 꽃, 정열의 꽃이란 뜻-역주)는 오늘날 단순히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동자 출신의 투사에 그치지 않는다. 파시오나리아의 권위는 공화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가 곧 스페인인 것이다.” 공산주의 계열의 특파원들이 이처럼 스페인 공산당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기사를 싣자, 서서히 태풍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8월 6일 사진작가 침 덕분에 이바루리의 얼굴이 <르가르>의 1면을 장식했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스페인 공화국을 둘러싼 이미지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내전 초기 대부분의 특파원들은 이런 이미지 전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에 체류하는 동안, 기자들은 논쟁보다는 근심어린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각각 며칠 차이로 7월 페르튀스와 푸이그세르다를 찾은 에르만과 니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전 중인 국가에서, 그것도 반군을 격퇴한 지역에서 나온 이런 논조의 전쟁 기사는 ‘고요함’ 앞에 느꼈던 기자의 놀라움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공화파가 상황을 잘 제어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반군이 패퇴한 지역에서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에 대해 기자가 느낀 놀라움에서는 어떤 진심이 느껴졌다. 에르만은 바르셀로나의 “명랑한 분위기”에 대해, 푸테르만은 사라고사 전선의 “식탁 위를 점령한 가장 순수한 기쁨”에 대해, 폴 바이양 쿠튀리에(<뤼마니테> 편집장이자 공산당 국회의원 겸 시장을 역임한 그는 7월 말 부터 며칠 간 바스크 지방에 머물렀다)는 산세바스티안의 “인파가 가득 메운 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에르만은 이런 말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고요함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3일 후 바르셀로나를 찾은 그는 그 이유를 좀 더 정확히 설명했다. “왜냐하면 진짜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주간지 <마리안느>(갈리마르 출판사 발행, 작가 에마뉘엘 베를르 운영)에서 일하는 미셸 카롱 기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점점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멀리서 총알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앙드레 비올리는 운율 반복으로 대립적인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 한 간명한 문장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젯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발렌시아는 축제 분위기에 젖은 도시였다. 그러나 나는 잘못 봤다. 발렌시아는 축제 분위기에 들뜬 것(En fê̂te)이 아니라 열병에 들뜬(En fièvre) 것이었다. 과연 스페인은 파시즘의 열병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은 결국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말았다. 바이양 쿠튀리에는 7월 말 산세바스티안 로욜라 병영의 전투현장에 함께 했다. 그는 민병대와 함께 총알 세례를 받았고, 눈앞에서 백기를 흔들고 투항하는 자들마저 전사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살인자들!” 그는 외쳤다. 소리아는 <르가르>의 지면을 빌려 7월 18일 “시신으로 가득한 넓은 카탈루냐 광장”을 묘사했다. 7월 말 그는 <방드르디>에서 “사방에 가실 줄 모르고 진동하는 썩은 시신 냄새”에 대해 묘사했다. <르가르>의 특파원 장폴 부그네크는 8월 우에스카(아라곤 지방) 인근 ‘반군 점령 지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는 처형이 소소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된 듯하다. 그들은 그저 총을 쏘기 위해 총을 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현지 특파원들은 공화파가 저지른 처형 현장에 대해서도 똑같이 보도했을까? 앙드레 비올리는 한 동안 발렌시아에 머물며 병영에 갇힌 ‘반군’ 기갑연대를 상대로 벌인 공화파의 전투를 지켜봤다. “전투가 끝나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극의 면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 총살된 장교가 100~150명에 이르렀을까? (…) 죽음은 결코 행·불행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보도는 반파쇼 진영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선전전에 동원된 기자들은 입을 다물고, 전투를 도와야 했다. 어느새 사망자 관련 보도가 하나 둘 언론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1월 마드리드 폭격 이후, 사망자 관련 보도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내전 초기만 해도 죽음보다는 삶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투쟁에 대한 열기가 언론보도를 가득 메웠다. 프랑스 본토에서 쓰인 기사와 칼럼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모조리 ‘승리의 확신’에 경도돼 있었다. 물론 현지 특파원이 쓴 기사 가운데도 더러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었지만, 현지 기자들 사이에서는 조금씩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당시 종군기자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속에 담긴 희망과 근심, 열광과 실상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내전 초기 <뷔>의 특별호 제작에 참여했던 유명기자 마들렌 자콥의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쿠데타 발발 며칠 후 스페인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그녀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에 한 번 앉아보자. 그리고 1936년 여름의 긴장 분위기를 느껴보자. 훗날 이 전쟁을 둘러싼 신화가 전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그 분위기를 말이다.

“모든 연령대의 남자들이 총을 둘러메고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프랑스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일요일이면 한가로운 경비원들이 이웃들과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언제나 총이 있었다. 한 남자는 왼손으로 딸을 쓰다듬으면서, 오른손에는 총을 꼭 그러쥐고 있었다. 그는 카탈루냐 광장 모래 위에다 총대를 쥐고 여기저기 알파벳을 써넣었다. 이곳 바르셀로나에서는 더 이상 시민들은 전투를 하지 않는다. 다만 바짝 경계할 뿐이다.”   


글·안 마티유 Anne Mathieu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학과 부교수, 잡지 <아덴. 폴 니장과 30년대>의 발행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앵트랑지장>, <르 프티 주르날>, <르 프티 파리지앵>, <르 마탱>, <르 주르날>. <르 프티 주르날>은 특이하게도 좌·우파 기사를 가리지 않고 실었다. 가령 앙드레 비올리의 기사는 프랑코 진영의 입장을 옹호한 앙드레 살몽의 기사와 나란히 실렸다.
(2) 1934년 10월 파업 사태가 속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스투리아스 혁명이었다. 광부들이 주축이 돼 모든 좌파 세력을 규합해 일으킨 봉기로, 당대 스페인 역사상 가장 대규모 사회 투쟁 사건으로 기록됐다. 당시 발레아레스 제도의 총사령관이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무어인 부대와 외인부대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3) 니장이 쓴 모든 스페인 내전 관련 기사는 안 마티유가 엮은 폴 니장 기사 비평집 제3권에 실릴 예정이다. 2017년 셰르슈미디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
(4) <스페인에서 본 것>, 1937년, 플라마리옹 출판사.
(5) 프롤레타리아통일당(PUP)는 노동자농민당(POP)과 사회주의공산당(PSC)이 통합해 탄생했다. 
(6)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이끄는 부대(1896~1936)
(7) 공산주의, 사회주의, 급진주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