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피사로의 잊혀진 참여예술

펜화 작품집 <파렴치한 사회> 한 세기 뒤에 출간 <BR> 인상파 기법에 리얼리즘 결합, 투쟁하는 민중 그려

2010-02-04     에블린 피에예 |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카미유 피사로(1830~1903). 사람들은 그를 인상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기억한다. 인상주의는 당시에는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와서야 스쳐지나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빛의 오마주로서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별적이다. 정치참여 작가로서 피사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새로 편집되어 나온 그의 작품집 <파렴치한 사회>에서, 피사로는 그의 섬세한 예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투박한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떤 작품들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한 시대의 쟁점과 모순, 갈등의 깊이를 다른 시각으로 조명하게끔 해준다. 이런 작품들은 예술의 모더니티와 정치적 의식이 이항 대립적으로 길항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들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선명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원문 보기>>

피사로는 나중에 인상파라고 불리게 될 화가들의 1874년 전시회에 참여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엘리 포르에 따르면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가장 겸손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던 피사로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전력을 다해 그림을 그렸지만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갱이나 세잔처럼 새로운 미를 창조하기 위해 위대한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동료 화가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간단히 말해, 피사로가 보여준 화가로서의 전형적 면모나 미에 대한 관점은 상당 부분 인상파 화가들의 특징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상파가 일반 대중뿐 아니라 훌륭한 예술작품을 선별하는 일을 맡은 엘리트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 뒤 인상파는 확실한 가치로 자리매김했고 뒤늦게나마 미술상들에게 안정적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매혹적인 빛으로 사물의 외면의 떨림을 탁월하게 표현한 인상파는 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인상파의 그림을 통해 ‘세기말’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고 ‘벨 에포크’(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풍요로운 파리-역주)의 장밋빛 삶을 상상했다.

비난, 찬미 그러나 역시 오해
 

‘아방가르드’에 대한 콤플렉스와 거부는 혁신적 예술가들에 대한 ‘부르주아’의 몰이해를 상징한다. 인상파의 화려한 과거가 그 예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는 보수와 진보, 어리석은 대중과 깨인 엘리트, 사채업자의 매정함과 예술가의 박애심, 정의를 외면하는 대중과 미래에 도래할 정의 등이 대비된다.

이 속에는 고집스러우면서도 우리를 안심시키는 낭만주의가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이상주의를 추구하던 영웅들과 미의 선구자들을 제멋대로 뒤섞어 찬양한다. 이들을 비난했던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조롱거리가 된다. 대중은 어리석고 예술가는 이해받지 못한 혁명가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옳았다. “그들에게 영광을!”이라고 찬탄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 생각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이나 예술가의 분투, 그들이 수행하려던 역할에 잘못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1889년 에펠탑이 높이 솟은 파리는 모더니즘의 승리를 목도하고 있었다. 피사로는 예순을 앞둔 나이였다. 그는 서른 장의 펜화를 책으로 묶었다. 그는 펜화들에 각각 제목과 설명을 단 후 일정한 순서로 종이에 붙였다. 그 그림들을 책으로 묶는 일은  역시 화가였던 피사로의 아들 뤼시앵이 맡았다. 피사로는 이 책을 그림에 대한 코멘트가 적힌 편지와 함께 런던에 살고 있던 조카에게 보냈다. 완전히 주변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당시 자리를 잡아가던 미술시장에 팔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정부적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시작해 곧 진압당하게 될 ‘봉기’에 대한 묘사로 끝을 맺는 이 책, <파렴치한 사회>이 세상에 나왔다면 분명 미술상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매혹적 빛으로 가득한 평소 그의 그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긁힌 상처처럼 거친 선들, 수정선, 펜 끝으로 묘사한 음영을 통해, 피사로는 ‘불쌍한 사람들’(les miserables)을 묘사한다. 이 작품들 속에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 죽음에 대한 삶의 투쟁’이 최대한 감정이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돼 있다.

 

동정심 대신 자유 이상 제시

피사로는 가난한 자들을 걱정하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자선사업에 헌신하는 부인들의 봉사 정신은 그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스스로 쟁취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사로는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악몽을 펼쳐 보여준다. 그 속에서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이 거친 알레고리 속에 형상화되고 있다. 피사로는 그것을 “희비극이 교차하는 영역에 대한 에세이”라고 정의한다. <황금송아지의 궁전> <검은 모자를 쓴 비참> <버림받은 자의 자살> 등의 작품은 자칫 과장된 민중주의, 메시지 전달을 위한 예술, 이미 설득당한 사람들에게만 설득적인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피사로의 작품은 놀라울 만큼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리얼리즘’을 뛰어넘어 끔찍한 현실의 콘트라스트를 탁월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들 속에는 인상파 기법과 사진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가능성이 녹아 있다. 또한 신문 <라레볼트>(La Révolte·‘저항’이라는 뜻-역주)에서 자주 따온 작품 제목과 설명들 속에서 파토스나 설교가 배제된 급진적 정치 참여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하나의 비전으로 끌어올리는 이 표현의 힘은 고야의 몇몇 작품이나 표현주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요구되던 아나키즘적 시각에 충실하면서 예기치 못한 자유를 펼쳐 보이는 이 작품들은 신선한 당혹감을 선사한다.

우리는 피사로를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피사로는 순간을 영혼 속에 포착하는 걸 목표로 하는 건전하고 조화로운 회화의 언어와, 잔혹한 사회질서를 묘사하기 위해 고통과 극단으로 가득 찬 정치 상황을 피해갈 수 없었던 펜화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한 화가였다. 이러한 예는 피사로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도미에 같은 화가들도 일반적인 회화와 풍자화를 동시에 그렸다. 그러나 당시 인상파가 회화의 혁명으로 여겨지던 만큼 두 장르의 이런 대조는 인상적이었다. 피사로는 펜화를 통해 당시의 지배적인 코드와 단절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혁명적 여론에 동조감을 표현함으로써 그 지배적 코드의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피사로가 <파렴치한 사회>를 왜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진다. 1972년이 되어서야 스위스의 위대한 미술 편집자 알베르 스키라에 의해 이 책의 복제판이 출간된다. 999부가 발행된 초판은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피사로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피사로의 ‘신선한 감각’과 풍경화가로서의 탁월함만을 열성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태도에는 단순한 무관심 이상의 것이 있다.

피사로가 <파렴치한 사회>를 그리던 당시는 파리코뮌에 가해진 탄압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던 시대였다. 나중에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 영감을 주게 되는 1880년 앙쟁시 사건이나 광부들에게 책임자가 살해된 후 군대가 주둔하게 된 드카즈빌시 사건 이후, 곳곳에서 벌어지는 파업은 여론을 불편하게 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쥘 게드나 루이즈 미셸 같은 이들이 중심에 선 광부 지지 시위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프루동, 마르크스, 바쿠닌의 이론에 대해 토론했다. ‘사회적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정신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수많은 스캔들에 휩싸여 있던 당시 제3공화정은 불랑제주의자(파시스트인 조르주 에르네스트 불랑제 장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역주)들과 맞서야 했다. 불랑제주의(Boulangisme)는 장 조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민족주의와 ‘타락한’ 사회주의의 애매한 결합에서 탄생했다. 1889년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정치적 탐구가 모든 유럽 국가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던 해였다. 이런 경향은 특히 당시 급격하게 확산되던 무정부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운동은 직접적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의회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분열되었다.

피사로는 단 한 번도 상아탑 속에 웅크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분명히 했다. 피사로는 장 그라브가 편집장으로 있던 <라레볼트> 같은 무정부주의 신문들과 함께 일했다. 그 후론 조 다크사가 이끌던 신문 <랑드오르>(L’En-Dehors·‘밖으로’라는 뜻-역주)에 참여하게 된다. 피사로는 그곳에서 옥타브 미르보, 에밀 베르하렌, <도둑>의 저자 조르주 다리앙, 펠릭스 페네옹 등과 교류했다.  이곳은 지식인들의 열정적 토론의 장이었다. 그 열정은 곧 테러리즘적 선동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예로 1894년 무정부주의자 산토 카세리오의 사디 카르노 대통령 암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세기말의 정치성을 복원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대한 ‘세기말’적 동경은 이런 사회적 혼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에밀 졸라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한 사람만으로는 당시의 투쟁과 염원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정신적인 풍경 속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 피사로가 말한 ‘현재적 미의 탐구’,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앙리 미테랑의 머리말이 돋보이는 <파렴치한 사회>(1)의 출간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인상파를 비정치적 운동으로 못박고, 당대에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예술가를 사회적 현실에서 유리된 존재로 간주하는 식의 자만심 어린 시각을 이 책이 바로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시각은 은연중에 예술가를 자신의 영역 속에서만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본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해 순수한 미학적 관점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집 속에 갇힌 이러한 몰이해는 작가 옥타브 미르보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아나키즘적 면모는 작품의 리얼리즘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복잡한 시대를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읽는 태도는 변혁에 대한 탐구의 중요성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문학적·예술적 아방가르드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간과하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유감스럽게도 현재 취향과 사고, 심지어 희망까지 점령해버린 새로운 아카데미즘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각주>
(1)  Camille Pissaro, <파렴치한 사회>(Turpitudes sociales),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