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가 된 미국 공교육 불평등이 낳은 제도적 야만

[서평] <야만적 불평등-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1만5천원

2010-02-04     이충신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더 ‘능률적인’ 게토(ghetto·빈민고립지역) 학교거나 게토 학부모의 더 넓은 ‘참여’나 게토 아이들을 위한 더 많은 ‘선택권’인 듯했다. 게토 교육은 영구적인 미국의 현실로 받아들여진 듯 보였다.”
 교육학자인 조너선 코졸은 미국 공교육 제도의 ‘야만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2년여 동안 일리노이에서 워싱턴, 뉴욕에서 샌안토니오까지 30여 구역을 돌며 학생을 가르쳤다. <야만적 불평등>은 그가 열악한 미국 공교육 현실에 보내는 ‘경고’다. 그는 미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인 빈부의 양극화, 인종 갈등, 이와 맞물린 교육 불평등의 참혹상을 폭로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처한 불공평한 교육 현실은 충격적이다. 미국의 공교육 제도 속에서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어떻게 ‘분리’되고 ‘배제’돼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평등한 미국 공교육의 결정적 원인은 교육 구별 재산세에 기초한 교육 재정에 있다. 교육세를 폐지하고 교육 재정을 지방정부에 맡기려는 정부의 교육정책 방향이 지역별 교육 격차를 심화한다. 미국은 지방분권적 교육 재정 탓에 인종·계층별 거주지가 분리돼 있다. 이들의 경제력 차이가 각 지역 교육 재정의 차이로 이어져 학군별 교육 시설이나 교사진, 교사 대 학생의 비율 등 교육 여건이 심각할 정도로 불평등하다. 부유한 지역의 아이들은 교육에서도 많은 혜택을 받는다.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은 그 부모가 어느 곳보다 높은 세율의 교육세를 내도 부유한 지역 아이들에 비하면 돌아오는 혜택이 너무 적다.
 미국이 공교육 평등을 위해 1920년대 초 처음으로 도입한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은 거의 실패로 끝났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 당국이 그 지역 학교를 지원하고 관장할 권리와, 주 당국이 지역 간 교육 제공의 양극화를 줄여야 하는 의무 사이에 조화를 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자는 지역 당국이 그 지역의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지역 학교의 성공 여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이들이 스스로 학교를 관리할 때 더 효율적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후자는 학부모의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줘야 한다는 평등에 대한 존중이다.
 
 가난할수록 높은 교육세율
 이런 취지가 실효성을 띤다면 ‘세입 평등’이라는 목표에는 도달할 수 있겠지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한 지역의 필요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그나마 평등해지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지역일 뿐인데, 현실은 이런 정도의 평등한 재정조차 달성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구나 가난한 지역에 대한 주 정부의 지원 준거는 부유한 지역이 아니다. ‘낮은 파운데이션’. 주 정부의 적용 기준인 ‘낮은 파운데이션’은 지역 학교들이 ‘최소한의’ 또는 ‘기본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말해 생존 가능한 정도로만 지역에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문제는 그 ‘최소한’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 분리주의
 놀랍게도 미국의 거의 모든 곳에 여전히 인종 분리가 남아 있다.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1937년 연방대법원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조너선 코졸이 다닌 도심 지역 대부분의 학교는 95~99%가 유색인종이었다. 미국의 어느 지역, 어느 학교에서도 유색인종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과 진정으로 뒤섞여 지내는 곳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종 분리를 이미 충분히 다룬 ‘부당한 과거’쯤으로 치부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어떤 국정 보고서도 불평등이나 인종 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낮은 읽기 점수, 높은 퇴학률, 저조한 학습 의욕 등 표면적인 문제가 논의를 지배했다. 볼티모어, 밀워키, 디트로이트에서는 인종 분리 학교 또는 흑인 남학생 분리 학급이 제안됐다.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도 같은 조처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종을 나누려는 ‘2층위 사회’가 공립학교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1987년 뉴욕시 당국이 학생 1인당 지출하는 평균 교육비는 약 5500달러였다. 하지만 뉴욕의 교외 지구는 1만1천달러를 웃돈다. 가장 높은 교육비를 지출하는 지역구는 1만5천달러를 넘었다. 학교 구성원의 대부분이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이뤄진 학교의 시설이나 교사진, 교사 대 학생 비율 등 교육 여건은 심각할 정도로 불평등하다. 도심 빈민 거주지의 경우 중도 탈락률이 50%가 넘는 학교가 부지기수다. 주위 환경도 열악하다. 고학년이 될수록 남학생은 범죄나 마약에 빠지고 여학생의 3분의 1은 임신을 한다.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바랄 수 있는 희망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학교를 다니는 나라를 만들자던 마틴 루서 킹의 ‘꿈’은 공교육 현실에서 박제가 됐다.
 
 화장실에서 수업받는 아이들
 돈 많은 부모는 아이들을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에 보내고, 아니면 공립학교 중에서도 ‘매그넷 스쿨’(뛰어난 아이들을 골라 받는 선발제 학교)에 보내려고 애쓴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유년시절부터 차별적으로 받아온 교육 때문에 선발제 학교에 갈 수도 없다. 그들의 학교는 지붕에서 비가 새고, 하수구에서 오수가 역류하고, 교실이 모자라 체육관을 네다섯 학급이 나누어 쓴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수업을 하는 야만적 환경을 지닌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다.
 더 좋은 교사와 더 우수한 학생이 매그넷 스쿨이나 선발제 학교를 선택하는 시스템에서는 그 주위 학교들이 나머지 학생과 교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시카고에서 가장 열악한 학교가 아닌데도 가우디 초등학교 건물은 보는 이를 낙담시킨다. 교사들은 오래전에 폐기 처분된 수업 기자재를 사용한다. 8학년 역사 수업을 받고 있는 열반 학급에서는 학생들이 리처드 닉슨이 현직 대통령으로 나와 있는 교과서로 배우고 있다. 이 학교에는 과학 실험실도 없고, 미술이나 음악 교사도 없다. 운동장도 없고, 그네도 없고, 정글짐도 없다. 700여 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이 학교에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고작 두 개뿐이다. 뉴욕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은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폭력으로든 경제적 비용에서든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1988년 다시 공립학교에 돌아온 코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학교들은 외국의 ‘주둔군’이나 ‘전초 부대’를 상기시켰다. 대개 마약 금지 구역을 표시하는 표지판에 둘러싸여 있었고, 학교 창문은 대부분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감옥 같은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공정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부유한 미국 사회가 왜 교육에서만은 이런 불평등을 보고만 있는가?”
 빈익빈 부익부 구조가 그대로 교육에 투영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으면 아이를 학원에 안 보내면 된다”고 믿는 한국의 대통령은 연일 ‘경쟁 교육’을 강조하지만, 부유층 자녀들은 더 나은 조건으로 외고·과학고·국제고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반고에 간다. 불평등한 중등교육 이후는 철저한 우승열패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붕괴된 미국 공교육은 한국 공교육의 미래일지 모른다. 우리는 왜 보고만 있는가?

글•이충신 기획위원 editor4@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