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 대한 갈증
우리는 왜 르디플로를 읽는가?
2017-01-02 최창환
“우리는 왜 <르디플로>를 읽는가?”라는 주제로 한 글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부탁받은 나는, 달력을 앞으로 넘겨 나의 스무 살 시절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어느 을씨년스러운 가을날, 교정의 낙엽을 밟으면서 퍼뜩 입학시절이 떠올랐다. 개강 첫 날, 이제 대학생이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서지 않았던가? 이곳에 들어서기 위해 고등학교 내내 하기 싫은 입시공부를 견뎌오지 않았던가? 힘들 때마다 “대학에 가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었다. 내게 대학은 인생의 목표이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향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니, ‘대학’이라는 나의 이상이 현실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보면, 나는 어지간히도 철이 없는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취업이라는 또 다른 이상이 부드럽게, 그러나 손쓸 틈 없이 파고들어 현실의 대학에서 견뎌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속삭였다. 우리는 왜 대학에 왔는지,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내가 공부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자문해볼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고, 멈춰 서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뒤쳐짐과 같은 의미였다. 다시 고등학생처럼 앞만 보고 뛰는 것만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왜 꼭 경쟁을 해야 할까?”라고 의문을 갖는 내 자신이 한심했고, 대학에 융화되지 못하는 이단아로 느껴졌다. 그렇게 대학생활의 1년은 흘러갔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다시금 교문을 지나 대학 밖으로 나서자, 그제야 ‘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군 생활을 보내면서 나는 누구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허세’ 가득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가 없어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그 질문들은 사회에 대한 의문들로 확장돼 갔다.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사회와의 관계, 사회의 의미 등을 고민하며, 세상이 진실을 알 수 없는 안개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보였다. 그 안개를 헤쳐 나가기 위해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도 그 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 다른 세계로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세계에 더욱 깊이 뿌리내린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낯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아니라 암기의 형태로 글을 읽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이해의 확대로 시작된 바깥으로의 움직임은 순전한 바깥에 의한 움직임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의 삶의 신장이 아니라 우리의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나는 나의 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막고 내 세계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무엇이든 읽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본 적은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은 나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읽기는 내 존재를 세상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게 알리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휴전선에 서있는 한 군인은 르디플로를 읽음으로써 소말리아나 라틴아메리카의 분쟁지역에 있는 세계시민이 됐고, 다시금 나의 뿌리를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으로 돌아왔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전역 후에도 이어져, 복학 후에는 학부 사람들을 모아 소시민(본래의 시민이라는 뜻)을 만들어서 르디플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생각의 범위를 나만의 세계에 가두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 최근의 대학, 나아가 일반 사회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기회가 흔치 않은데 이러한 모임 속에서 기꺼이 ‘진지충’이 됨으로써 서로의 세계를 탐험하고, 동시에 나를 발견하고자 한다.
지난해 한국소통학회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공동주최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저널리즘의 귀환’이라는 세미나에 참석해 왜 르디플로를 읽는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을 대표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읽기모임 ‘소시민’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사회가 대학생을 보는 시각에는 아직 미숙한 사회인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수평적 소통이 아닌 수직적 소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대학생이 아닌 한 시민의 글로 읽혀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나와 같은 또 다른 ‘나’들이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글·최창환
성균관대 3학년, 읽기동아리 <소시민>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