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중심에 선 르디플로

우리는 왜 르디플로를 읽는가?

2017-01-02     조은기

소시민 모임이 처음 시작되던 날이 기억난다. 저마다 돌아가면서 모임에 지원한 동기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냥 할 게 없어서 지원했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에서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사라졌다는 점에 공감해 모임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소통 그 자체이지 소통의 매개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소통학회에서의 발표가 좋은 기회일 것 같아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우리는 왜 르디플로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임의 구성원들도 뚜렷한 이유를 내놓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모임에서 나온 의견 중 하나는, 르디플로를 발행하는 <르몽드>의 전통이 발걸음을 이곳으로 오게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내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비판을 수용하고 자기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 곳이다. 이러한 <르몽드>의 전통 덕분에, 프랑스 국민들이 언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워서 모임에 들어왔다는 의견도 있었다. 내가 짐작하건데 르디플로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유는, 르디플로가 양질의 기사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대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서 비롯된 수용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답을 찾아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라는 등의 내용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해서 비판적인 읽기에 익숙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만 발제를 준비할 때마다 “왜 르디플로 한국어판에 국내 기사가 이렇게 적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기사 속에서 우리나라 입장에서 생각해봄직한 내용들을 찾느라 애쓰곤 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지적 욕구를 충족해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 뜻밖의 소득이 아니었나 싶다. 아쉽게도, 르디플로를 읽는 데 있어 뜻밖의 소득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르디플로의 기사를 단순히 ‘수준 높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모임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기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제가 생소한 기사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당연한 현상이고, 우리네 지식의 부족함을 탓해도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려움은 기사 내 지엽적인 부분에서 찾아왔다. 해외의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추가적인 학습을 통해서도 찾기 어려운 정보들이 기사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지면의 한계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풀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독자가 미디어로부터 무분별하게 정보를 수용하지 않도록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한 지적 소양을 지닌 이들만을 위해 기사를 쓴다는 것은 엘리트주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프랑스의 우파주간지 렉스프레스는 르몽드에 대해 “르몽드는 가르친다. 르몽드는 남이 따라오기를 원한다. 르몽드는 정보를 주는 만큼이나 가르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엘리트만을 독자층으로 설정해 까다로운 내용에 불편함이라는 무기를 쥔 채, 자신들만의 ‘성’ 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면, 나는 ‘성에 사는 사람’이라는 부르주아(Bourgeois)의 어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르디플로는 계몽군주가 아니며,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나아가, 앞선 글에도 언급했지만 르디플로 혹은 기성사회가 대학생을 바라보는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대학생을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대학생으로서의 특별한 역할을 기대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 물론 대학생 친구를 두지 못함을 항상 안타까워하던 고(故)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처럼, 과거 대학생이 지식인 계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통용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이든 우리 주변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있기 마련인 것이다.

 논의를 대학이 아닌 일반 사회로까지 확장한다면, 결국 대학생이냐 아니냐, 르디플로를 읽느냐 읽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읽든, 본인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들을 타인과 소통하느냐의 여부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소시민 모임의 1주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임은 나름대로 잘 소통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르디플로가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이제 “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르디플로를 읽고 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르디플로와 우리가 좀 더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많은 ‘우리’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미디어가 르디플로가 되기를, 독자로서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조은기
성균관대학생, 읽기동아리 <소시민>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