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를 꿈꾸는 마테오 렌치

2017-01-02     라파엘 로다니

로타마토레,(1) 파괴자는 결국 파괴됐다. 국민투표 다음 날, 마테오 렌치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여느 주말처럼 나는 폰타시에베 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면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많은 옷가지와 서류, 책 등의 짐들이 함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난 키지 궁(이탈리의 총리 공관)의 3층에 있던 관저를 닫았다. 나는 진짜로 집에 돌아왔다.” 

65%가 넘는 역대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헌법개혁 국민투표는 60%의 반대로 부결됐다. 마테오 렌치의 추락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피렌체 시장이었던 마테오 렌치를 2014년 총리로 추대했던 이탈리아 정치권이 이번에는 그를 추락시켰다. 이탈리아 정치권은 새로운 구세주를 종종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퍼진 급격한 변화의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세주’의 정치적 업적을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그를 산화시킨다.(2) 마리오 몬티(2011~2013) 전 총리, 엔리코 레타(2013~2014) 전 총리의 등장과 퇴진이 그런 기술적 경향에서 이뤄졌고, 마테오 렌치의 경우 기존정치 비판 위에 기반을 둔 정치적 특성을 지닌다.

렌치는 다소 마키아벨리적이었다. 혁신의 쇠퇴(마키아벨리였다면 이를 ‘부패’라고 말했을 것이다)(3)에 저항했다면, 그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자로서 이탈리아를 30년 전부터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며 자신의 인기를 높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 DNA 속에도, 그를 총리로 이끌어준 사회적인 힘의 DNA 속에도 이러한 성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기독교 민주당의 방식을 더욱 공고히 할 수도 있었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만든 전진이탈리아(Forza Italia)당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자칭 ‘국가의 당’이라는 거대 중도정당을 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만이라는 과오를 범했다. 중도 유권자층을 잡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베를루스코니파 정당들과의 타협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국민투표라는 나폴레옹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투표를 과도하게 개인적으로 처리했다. 정치계도, 노조도, 그가 소속한 민주당내 일부도 이를 반대했다. 그는 모든 것을 걸었고 청년층이 대거 참여한 이번 국민투표에서 패배했다.(4)

허풍스러운 마테오 렌치에게 어울리는 국민투표가 그렇다고 합리성이 결여된 선택지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계급주의 타파 논리를 기반으로 한 개헌안(5)을 통해 개혁자로서의 이미지를 회복할 좋은 기회를 잡고 싶었다. 이 개헌안은 변화라는 주제에 있어 최대 경쟁자인 ‘오성운동(M5S)’을 기득권 질서의 옹호자로 만들어준다. 개헌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면 좌파와 민주당의 관계를 확실히 단절시키며 민주당 내부의 비판적인 소수파를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6) 

그의 실수는 국민들이 가진 불만의 깊이를 과소평가했다는 점, 베를루스코니가 멋들어진 연설, 거짓공약, 언론장악을 통해 통치했듯 자신도 여전히 국민들을 달랠 수 있다고 믿은 점이다. 일간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전 편집장 페루치오 보르톨리에 의하면, “마테오 렌치는 모르고 있었다. 총리에 취임한 지 3년이 된 지금 이탈리아 국민들 눈에 그는 더 이상 변화의 약속을 구현해줄 다크호스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 그 자체였다. 무언가를 변화시킬 권력자임에도, 그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일 파토 쿼티디아노, 2016년 12월 12일)

렌치는 “국민투표에 패배할 경우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 특히 다리오 프란세스치니 문화부 장관이 이끄는 강력한 계파 아레아뎀이 자신의 경쟁자인 피에르 루이지 베르사니와 마시모 달레마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고, 그를 위해 아마 앞으로 몇 달간 당내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개헌에 찬성한 40%의 국민, 즉 유권자 1천2백만 명의 이름으로 그는 의회의 재빠른 해산과 조기총선을 주장했다. 물론, 그는 국가의 선진화를 방해하는 보수주의 동맹의 피해자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선거를 기다리며, 은밀하게 계속 권력의 추를 움직이고 있다.

2016년 12월 12일 외무부 장관 파올로 젠틸로니가 이름뿐인 새 총리로 임명됐다. 파올로 젠틸로니는 2013년 로마 시장 선거를 위한 중도좌파 경선에서 14%의 득표를 기록했었다. 그는 마테오 렌치와 같은 여당 소속으로 거의 변화 없는 동일한 내각을 이끌고 있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변화는 교육부 장관 스테파니아 지아니니를 사임시키고, 마리아 엘레나 보스키를 승진시킨 것이다. 지아니니는 많은 반발을 낳은 학교 개혁의 주동자로서 개혁 실패의 책임자로 지목됐다. 마테오 렌치의 충신 중의 충신인 마리아 보스키는 전직 헌법개혁장관으로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다루는 요직인 정무차관으로 임명됐다.  

“시민 존엄성의 수호자”로 변신한 오성운동

마테오 렌치가 총선에서 자신의 책임은 면하고, 밖에서 정부를 조종하며 젠틸로니 총리의 활동과 임기에 간섭하려 한다면, 민주당은 어려워질 것이다. 민주당은 선거기간 동안 한 번 더 정부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마시모 달레마는 “마테오 렌치는 베페 그릴로와 오성운동을 위한 무대가 될 향후 선거의 물결 속에서 수장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라 레푸블리카>, 2016년 12월 12일). 그릴로와 오성운동은, 이미 “국민주권을 무시하는 정부와 정당에 대항하는 시민 존엄성의 수호자”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7)

오성운동은 유권자들에게 개헌의 진정한 반대자 행세를 했다. 오성운동은 몇 달 동안 정치권과 언론을 장악했다. 특히 떠오르는 스타 정치인 알레산드로 디 바티스타의 공이 컸다. 젊은 하원의원인 그는 여름 내내 이목을 끄는 운동을 펼쳤다. 다른 의원들과 정치계가 휴가를 즐기는 사이에 그는 약자로 #iodicono(‘나는 아니라고 말한다’는 뜻)라는 이름의 경오토바이를 타고 이탈리아 전역과 해변을 누볐다. 따라서 후에 순차적으로 “개헌 반대”를 표한 다른 정당들은 오성운동의 보조자가 돼버렸다. 오성운동은 향후 선거를 위해 국민투표의 결과를 토양으로 삼으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 대사기극”이라며 그릴로가 맹비난하며 반대했던 2015년 5월 선거법(8)에 의해 오성운동은 차기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반정치 운동에 대한 우려도 컸지만, 국민투표가 부결된 다음날 은행과 금융시장은 재앙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우려는 이탈리아 지도자와 EU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 것이다.

오로지 오성운동만이, 같은 표를 던지도록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95%의 오성운동 지지자들은 12월 4일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9) 그릴로의 정당은 정치하는 법을 배웠다. 융통성을 가진 그릴로는 법의 책임자, 헌법적 가치의 수호자, 개혁자, 환경주의자, 반이민, 반유럽, 가장 취약한 권리의 보호자라는 다양한 형태의 대중의 의견을 선보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탈리아 국민들, 특히 청년들에게 다른 정당과의 차별성을 보이며 선거구에 따라 선동적인 측면을 내세우거나 제도적인 면을 성공적으로 강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오성운동 의원들은 일이 터지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로마 시장의 경우가 그랬다. 2016년 6월 로마 시장으로 당선된 오성운동의 비르지니아 라지는 끊임없는 사퇴와 내부 전쟁을 치르며 시정 마비를 겪었고, 12월 15일에는 압수수색을 받았다.

되살아난 베를루스코니는 국민투표의 또 다른 승리자다. 한동안 묻혀 지내던 그는 유권자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마지막 순간 자기 정당의 개헌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지역에 따라 20~40%(Istituto Cattaneo 조사)의 베를루스코니 지지자들이 개헌에 찬성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나라를 다스릴 의사도 없지만, 향후 균형을 위한 비중 있는 정치적인 역할을 되찾았다. 무엇보다 그가 원했던 대로 독일식 거대 연맹이 선거 후 해결책처럼 인정됐다.  

민주당 소수계파는 오랫동안 망설인 후 뒤늦게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표의 약30%를 잃었지만 이러한 손실은 중도 우파 유권자들의 찬성표로 만회됐다. 베르사니와 달레마의 개헌 반대는 총리의 패배에 공헌했지만 베를루스코니와 마테오 렌치보다 더한 체제순응자의 화신과도 같은 기회주의적인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강력한 이들 계파는 지금 생존에 대해 고심 중이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당 좌파에게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개헌에 강력하게 반대한 자유환경좌파당(SEL)은 국민투표의 승리자 중 하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정당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SEL의 개헌반대 운동이 전부 오성운동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4%에 불과한 여론조사 지지도에, 수많은 계파와 분파로 나뉘는 이 정당은 확실한 정치적 역할을 차지하기 힘들다. 사회적 항거라는 분야는 거의 모두 그릴로가 이끄는 오성운동이 점유하고 있고, 반자유주의 방식에 대한 항거를 재등장시키기도 어렵다. 오성운동은, 프랑스 국민전선의 이탈리아 사촌 정당인 북부동맹당을 압도했고, 이미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외국인 혐오를 확산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탈리아의 좌파들은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하다. 좌파는 80년대 이후 같은 방책만 재생산하고 있다. 국민투표 다음 날 SEL의 선봉부대와 줄리아노 피사피아 밀라노 전시장은 민주당이 중도 세력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민주당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중도파 덕분에 의회 과반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진보주의 틀 안에서 민주당을 제외한 좌파들이 동맹했다면 그는 후원자 역할을 맡았을 거라고 밝혔다(<라 레푸블리카>, 2016년 12월 7일).

SEL의 니콜라 프라토이아니 의원은 이 계획을 ‘국민 없는 민주주의’라며 실제 국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부적절하다고 평가했다(<허핑턴 포스트>, 2016년 12월 3일). 그는 이를 버니 샌더스, 제레미 코빈, 파블로 이글레아스, 알렉시스 치프라스 등 전 세계의 모든 좌파들과 같은 신자유주의와 민주당에 반대하는 좌파동맹이라고 불렀다(<일 마니페스토>, 2016년 12월 3일). 그러나 프라토이아니는 미국, 영국, 스페인, 그리스에서의 진보주의자들의 경험이 사회적인 결집 속에서 성숙해졌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정치적 겉치레는 운동을 촉발시키지 못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감정적 연결’ 없이는 모든 좌파의 대안은 ‘국민 없는 계획’에 그칠 수 있다.  


글·라파엘 로다니 Raffaele Laudani
볼로냐 대학 정치사상사 교수


번역·김영란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공역서로 <‘22세기 세계>가 있다.

(1) Rottamatore: 파괴자라는 뜻으로 마테오 렌치가 스스로 붙인 별명
(2) ‘마테오 렌치, 파괴에 대한 취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4년 7월.
(3) 니콜라 마키아벨리, ‘왕자’, 1532년
(4) 일보 디아만티, ‘La solitudine dei giovani elettori: ecco preché gabbi vitati No al referendum costituzionale’, La Repubblica, 로마, 2016년 12월 12일
(5) 이 개혁은 상원의 권한을 줄이고, 정부와 지방자치의 권한을 높이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6) 프란체스카 란치니, ‘이탈리아의 전투적인 운동의 얼굴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11월
(7) 주세페 그릴로, ‘Gentiloni scioglie la riserva' 인용, www.corriere.it, 2016년 12월 12일
(8) 마테오 렌치가 옹호한 이 법은 총선에서 선두를 차지한 정당에게 55%에 가까운 과반석을 주는 내용이다.
(9) ‘2016년 12월 4일 개헌- Gli elettori del PD e del PDL si sfaldano, quello del M5sè sempre più compatto’, Istituto Cattaneo, 볼로냐, 2016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