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의 유산

2017-01-02     크리스틴 쇼모

아파트 벽면에는 킨 소 밍이 남편과 함께 라시오(미안야 북부)에서 웃으면서 포즈를 취한 사진과 기념일 사진, 캄보디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사진들은 이들의 행복했던 과거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8년째 감옥에 수감 중인, 제복을 입은 어떤 소령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이 소령은 미얀마 군부로부터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킨 소 밍은 남편이 석방될 날을 기다리면서 과거에 수감생활을 했던 딴 딴 테이를 만나며 위안을 삼는다. 이 두 여성은 서로 만날 일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한 명은 고위급 인사들만 사는 지역에 살았고, 다른 한 명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10년을 보냈다. 군부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이 둘의 관계는 미얀마의 두 세력이 희미하게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가족들이 그를 만나러 가보라고 했어요”라고 탄 탄 테이는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일은 2009년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위치한 인세인 감옥 문 앞에서 시작됐다. 인세인 감옥은 미얀마에서 규모가 가장 큰 감옥이다. 킨 소 밍은 인세인 감옥 면회실에서 동생을 보러 온 탄 탄 테이의 언니를 만났다.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킨 소 밍이 절망하자, 탄 탄 테이의 가족들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 이들은 감옥에 있는 지인을 위로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줬다. 군인의 아내였던 킨 소 밍은 이렇게 자신이 살던 잘 만들어진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발견하게 됐다. “탄 탄 테이 가족들의 도움은 큰 선물이었어요. 그들은 나를 적으로 보지 않았죠”라며 킨 소 밍은 지금도 놀라워하고 있다. 킨 소 밍의 군인 친구들은 그의 남편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멀리했다. “그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두려웠던 거죠. 자신들의 군대 내의 승진에 대해서 걱정을 했을 테고요.”

 2011년 10월 마침내 출소한 후, 탄 탄 테이는 수감 기간 동안 위축됐던 근육을 풀기 위해서 매일 동네를 걸어 다녔다. 킨 소 밍은 주눅이 든 채 멀리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탄 탄 테이는 어색함을 깨고 그를 정치범지원연합(AAPP) 사무실로 초대했다. 이곳에서 탄 탄 테이는 자신처럼 과거 수감생활을 했던 이들을 만나고 있었다. 탄 탄 테이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심리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들을 도왔다. 이들은 탄 탄 테이에게 자신들의 고통과 불안, 오랜 기간 동안 수감생활로 인해 생긴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탄 탄 테이는 자신의 외상성 장해를 계속 다스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잊으려고 TV를 봐요.”

 킨 소 밍은 남편이 투옥됐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일주일에 네 번까지 탄 탄 테이를 찾았다. “킨 소 밍은 많이 울었어요.” 킨 소 밍의 남편은 절망하고 있었다. “킨 소 밍의 남편은 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던 거겠죠.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가 왜 감옥에 간 건지 알고 있었죠. 우리가 투쟁하는 것 때문에 향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죠. 우리는 강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킨 소 밍의 남편은 군대에서 선처를 베풀기만을 기다려야 했어요”라고 탄 탄 테이는 털어놓았다.  

 킨 소 밍은 절대로 탄 탄 테이에게 수감생활이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아마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가 오랜 시간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듣기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다. 1991년 화학과 대학생이었던 탄 탄 테이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위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유죄선고를 받았다. 탄 탄 테이는 그 해 말 석방됐다. 하지만 2000년에 다시 두 번째로 인세인 감옥에 투옥됐다. 그의 죄목은 정치범 가족을 돕고 태국에 사는 미얀마 대학생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7㎡짜리의 작은 감방에서 날마다 겪은 생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진 않았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라고만 말했다. 그의 다리에는 아직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탄 탄 테이는 어떠한 원한도 표현하지 않았다. “현재 정치적 상황을 보면 우리가 기대한 대로예요. 바로 이걸 위해 우리가 고통을 받았던 거죠”라고 간결하게 말할 뿐이었다. 

 탄 탄 테이와 킨 소 밍은 과거 수감생활을 했던 정치범을 돕는 프로그램으로 개설된 영어 수업에 가끔 참석했다. 44세의 탄 탄 테이는 학구열이 대단했다. 이 모임에서 미얀마 젊은이들은 ‘죄’에 따라서 5년에서 20년까지 감옥에서 지낸 옛 수감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영어교사 에이프릴은 과거에 대해 자신이 무지했음을 고백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개강을 했을 때 우린 모두 참석했어요. 그들이 겪은 일을 알고 나서 슬펐어요. 군사 정권이 그토록 잔인한지 그 전에는 알지 못했어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죠”라고 에이프릴은 설명했다. 

 공무원 집안에서 자란 에이프릴은 2000년대 양곤에서 살았다. 킨 소 밍이 그랬던 것처럼 에이프릴은 탄 탄 테이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AAPP 사무실에 올 일도 전혀 없었다. 

 AAPP 사무실 안뜰에는 커다란 널빤지 3개가 온통 사진으로 덮여 있다. 사진마다 이름과 검은 띠가 붙어 있다. 군부 감옥에서 사망한 정치범들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서 만든 비공식 기념비다. 1962년부터 2011년 사이에 고문과 학대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은 200명 가량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88년 민주화운동을 억압했던 시기에 사망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참여했던 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지 못했다. 2015년 11월 8일 NLD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AAPP에 따르면 억압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는 2천 명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수감되기도 했다. 반세기 동안 지속됐던 군사 독재가 끝났지만 과거를 돌아보거나 그 고통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수는 없다. 정권 교체 기간이라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15년간 가택 연금을 당했던 아웅산 수치 자신도 연설에서 “국가적 화합”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과거사 청산 없는 화합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AAPP의 보 기 회장은 말한다. “그 길 위에 남겨진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탄 탄 테이는 덧붙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군부에 변화를 준 것 같다. 태국으로 피신하기 전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보 기 회장은 정치범들의 석방에 대해 협상을 하기 위해 내부무와 군부 인사를 처음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은 우리가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안심을 시켰죠.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는 법을 배웠어요. 개인적으로 그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아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요.” 보 기 회장은 추모비나 기념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킨 소 밍에게 화합이란 “서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킨 소 밍과 탄 탄 테이와의 관계에 대해 의아해한다. 탄 탄 테이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린다. “어떤 택시 기사가 킨 소 밍에게 욕을 했어요. 그 기사는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죠. 입에 담기조차 힘들만큼 심한 욕을 했죠. 상관없어요. 킨 소 밍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에요. 내게 있어서 그는 정치범의 아내나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관계야말로 국가적 화합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요? 어찌됐든 우리의 관계가 국가적 화합의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글·크리스틴 쇼모 Christine Chaumeau

번역·이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