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지디족, 영원한 희생양

2017-01-02     비켄 슈테리앙 | 제네바대학 역사학교수

모술을 수복하기 위한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진 듯한 상황에서, 2014년 이라크 서북부 지역으로 도망친 야지디족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머뭇거리고 있다. IS는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이 소수 민족을 이단자로 취급하며 노예로 삼거나 사살하는 식의 박해를 일삼았고, 야지디족은 자신들을 버리고 달아난 쿠르드 정규군을 비난하고 있다. 

 
이라크 서북부에 위치한 신자르는 여전히 인적이 드문 도시다. 2014년 8월 IS가 침공해 8만 명의 인구가 도망쳤고, 2015년 11월 13일 쿠르드 군대가 도시를 수복한 후 겨우 50개 가구만이 되돌아왔던 것. 한낮의 햇빛 아래 소규모의 전투원 무리가 천천히 행진하고 있다.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진 가게들의 셔터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고통 받는 영혼들이 도시에 들러붙은 듯 요란한 소리가 솟아오른다. 학교는 작전 본부로 탈바꿈했고, 무기를 든 남자들이 교문을 드나들거나 그 안에 앉아 명령을 기다린다. 
 
“과거 우리는 집단학살의 피해자였지만, 이번에 일어난 대학살은 첨단기술의 시대에 자행된 일이다. 우리는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점에 너무나 가슴 아프며, 아직도 수천 명의 여성들이 IS의 손아귀에 있다.”
 
신자르의 페슈메르가(쿠르드 정규군) 지휘관이자 쿠르드 민주당(KDP) 측근이며 야지디족 출신인 카심 샤흐소는 이렇게 강조했다. 피로연 전문 요리사였던 아부 마제드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다. 2014년 8월 3일, 그 끔찍한 날 IS 지하디스트들이 마제드의 가족들을 납치해 갔다. 부인과 2남 3녀 중 아들 한 명만 남겨놓고 다 끌고간 것이다. 몇 달 전, 끌려간 세 딸 중 한 명이 시리아의 IS ‘수도’ 라카에 포로로 붙들려 있다고 전해온 것 외에는, 나머지 가족은 생사도 알지 못한 상태다. 마제드는 남아있는 아들과 단둘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마제드가 당한 사건은 이곳 사람 대부분이 겪은 일이다.
 
야지디족의 관점에서 근동의 역사를 다시 쓴다면, 지금 우리의 역사책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책이 탄생할 것이다.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이 부족은 조로아스터교에 뿌리를 두며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 더해진, 구전 전승된 일신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독특한 문화를 보유했다. 야지디족은 주로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에 정착했으며 모술 북부의 랄레시에 주요 사원이 자리해 있다. 또한 남캅카스와 서구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라크에서는 샤박(Shabak)족, 만다야교 추종자들, 동방과 시리아의 칼데아 및 아시리아교회 등과 함께 야지디족의 오랜 종교의식들도 이곳의 풍부한 종교적 풍경에 녹아들어갔다. 야지디족 공동체는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셰이크(지도자) 혹은 종교당국의 지도를 받는다. 공동체 외부 사람과의 결혼은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2015년 여름 동안, IS는 빠른 속도로 공격을 감행했다. 6월에는 수백 명의 지하디스트가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점령하며 전 세계에 놀라움을 안겼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권리를 빼앗긴 수니파 부족과 줄어든 영향력이 불만스러운 지역 명사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던 중에, 병력 3만으로 추정되는 이라크 군은 재빨리 도시를 버리고 퇴각했다. 이는 당시 시아파 총리 누리 알 말리키의 과격한 정책이 초래한 일이기도 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바그다드로 진격한 이후 IS군은 방향을 되돌려 쿠르드족의 세력권을 공격했다. 공격은 야지디족이 거주하는 신자르에서 2014년 8월 3일 새벽에 시작됐다. 공포에 사로잡힌 페슈메르가 사령부는 부대원들에게 퇴각을 명령했고, 민간인들은 그대로 지하디스트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됐다. 총기를 소지한 주민들의 저항은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주민들은 산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수많은 주민들이, 특히 이동수단이 없었던 주민들은 도망치지 못했다.
 
9세도 안 된 어린이까지 성노예로 팔려가
 
남자들은 아내와 강제로 떨어져 대부분 현장 사살됐다. 민간인들은 신자르 산 정상의 사르다슈 고원지대까지 도망쳤으나 지하디스트들이 쫓아와 그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삼았다. 마침내 일부 야지디족 전투원들이 페슈메르가가 버리고 달아난 기관총을 들고 나타나 지하디스트들을 몰아냈다. IS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길 거부한 남자들을 사살했다. 성인 여성들과 여자 어린이들(9세도 안 된 어린이도 있었다)을 기관에 집합시켜, 그리 멀지 않은 탈아파르로 보내 ‘칼리프(이슬람 지도자)’ 지하디스트들에게 성노예로 팔았다. 정확한 사망자 및 포로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야지디족 단체들은 사망자 2,240명, 실종자 1,020명(이 중 몇 명이 살해됐을까?), 여성과 어린이가 대다수인 포로는 5,800명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공격 초기 280명 이상이 갈증과 체력고갈로 사망했고, 이 중 대부분이 어린이들이다.
 
야지디족에 대한 IS의 처우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IS는 이들을 겁을 주고 복종시키는 것뿐 아니라,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야지디족이 겪은 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 2014년 사건은 73번째 집단학살이며, 야지디족은 이 사건들을 ‘술탄의 명령’이라는 의미의 ‘파르만(Farman)’이라는 터키어로 지칭한다. ‘파르만’은 19세기 말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야지디족 지역을 왕국의 세력권에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군역과 세금을 강요하고 수니파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자행했던 집단학살 사건들을 가리킨다. (일신교 본연의 계시를 회복시키겠다고 주장하는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일신교를 믿는 기독교도와 유대교도에게는 보호의 혜택이 부여됐던 반면, 야지디족은 그런 혜택을 입지 못했다. 
 
야지디족은 이교도나 ‘악마 숭배자’로 여겨지며 수없이 박해받았다.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 역시 야지디족을 차별 대우했다. 1975년 산악지역에 대한 정부의 장악력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근대화 차원에서, 바트당 정권은 야지디족에게 신자르 산의 마을을 버리고선 산맥 북부와 남부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라고 강요했다. 이 새로운 터전의 대부분에서는 관개용수를 확보할 수 없었기에, 야지디족 주민들은 그들의 땅을 경작하는 부유한 아랍 이웃들에게 의존하며 점차 빈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의 사회‧종교적 위계질서를 대대적으로 뒤흔들었다. 알바즈의 수많은 수니파 아랍인들은 사담 후세인의 친위대가 대다수를 이루는 탈아파르의 투르크계인들과 마찬가지로 본인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데에 불만이 많았다. 대부분 과거 바트당 출신을 기반으로 반미 무장저항군이 조직됐는데, 이로써 국제적인 살라피스트(이슬람 근본주의 집단), 지하디스트라는 새로운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야지디족과 이라크 북부의 다양한 소수부족들은 미국 기지에서 활동하거나 새 이라크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반미 투쟁에 뛰어든 지하디스트들은 새로운 세대에 속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알 카에다 간부들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1) 요르단 투사 아부 무사브 알자카우이에 의해 창립된 단체 자마아트 알타우히드 왈 지하드는 새로운 종교 분쟁에 적응하기 위해 살라피스트 지하디즘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곧이어 이 이념은 대혼란의 씨앗을 퍼뜨리기에 이르렀다. 이 이념에 따라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해석하자면, 야지디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죽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다. 2007년 4월, 일련의 지하디스트들이 모술의 직물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탄 버스를 멈춰 세웠다.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에게는 버스에서 내리라고 명령한 뒤, 야지디족 노동자 23명을 붙잡아 사살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건은 2007년 8월 14일에 일어났다. 폭탄이 설치된 트럭 네 대가 카타니야와 시바셰이크키디르라는 야지디족 마을 두 곳에서 대대적인 자살테러를 감행해 사망자 500명과 부상자 1,500명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의 병력은 이 접경지대를 통제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시리아 국경의 전략적 지대인 이라크 서북부 대부분은 이슬람 무장단체 자원자들을 위한 고속도로가 돼버렸다. 신자르 근처 사막에 위치한 어느 캠프에서, 미국 병사들은 이라크 지하디즘을 수호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를 비롯해 각국에서 온 자원자 약 700명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2)
 
한편 이라크 정규군이 어째서 IS의 공격에 무너졌는지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점 말고도 한 가지 의혹이 더 있는데, 어째서 IS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와 권력중추를 공격하는 대신 쿠르드 정규군이 통제하는 신자르의 야지디족 지역을 공격했던 것일까? 바그다드의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보복론자 간의 영향력 다툼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선택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IS의 신자르 공격은 이 이슬람 무장단체가 지닌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망명한 다수의 야지디인들은 최초 공격이 주로 지헤이슈, 압두 음테메, 카투니 같은 이웃 아랍부족들에 의해 시행됐다고 증언했다. 새로운 칼리프에 대한 이 부족들의 충성서약이 신자르 공격과 동시에 맞물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라비아 지역의 샤마르 부족을 제외한 역내 아랍부족들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단지 야지디족을 공격하려고 IS에 자원입대했던 것이다.(3) 이 점은 IS 부대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라크 정권을 되찾으려는 과거 바트당 출신 친위대원, 시리아 정권에 대항하는 종교전쟁 전투원, 서구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체첸과 터키 등의 국제 지하디스트 등 열거하기 힘들 만큼 각양각색이다. 각 집단은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새로운 적도 가져온다. 결국 IS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싸우게 됐다. 자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IS는 신자르를 공격하며 아랍 부족들에게서 신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쿠르드족과 모술의 시아파 핵심세력과 수니파 유력인사들과의 사이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는 땅’인 니니베와 키르쿠크에서 새로운 전장을 열기도 했다. 
 
아랍에 학살당하고, 
쿠르드족에 배반당하다
 
2003년부터 신자르 지대는 니니베 지방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정규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IS 공격 당시, 3천에서 7천 정도의 병력으로 수적 우세에 있던 쿠르드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심지어 민간인을 대피시키지도 않고서 철수해버렸다. 다후크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야즈다’의 사무총장 자밀 샤와마르는 “야지디족은 쿠르디스탄 자치지역 지도자들의 해명을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쿠르드 당국은 IS의 공격에 놀란 듯했고, 야지디족 지역을 무방비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정체성 문제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야지디족은 쿠르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IS 공격 일주일 후, 시리아 출신의 쿠르드 전투원들이 신자르 산에 길을 뚫어 그곳 정상에 갇혀있던 야지디족 수천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2015년 11월~12월에 이뤄진 쿠르드군의 반격 이후, 야지디족 민간인 30만 명 중 신자르로 되돌아온 인원은 불과 5만 명이었다. 도시와 마을 대부분은 전투 중, 또는 지하디스트들의 철수 중에 파괴당해 폐허가 됐다. 일부 주민들은 정치적 해명이 끝난 후에야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신자르는 쿠르드민주당(KDP)의 영향 아래 있는 동부와, 터키에서 창설된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시리아 동맹군의 영향 아래 있는 서부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이 두 세력은 서로 적대되는 역내 동맹 세력에 각기 속해 있다. 마수드 바르자니의 KDP는 터키와 손을 잡은 반면, PKK는 터키와 전쟁 중이다. 심지어 PKK는 비용을 이라크 정권이 대지만 통솔은 직접 하는, 야지디족으로 구성된 지역 민병대까지 창설했다.
 
1892년 오스만 제국의 야지디족 집단학살 후 강력한 반발이 일었고, 신자르 산에서 야지디족의 정체성과 문화가 부활하기에 이르렀다.(4)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절멸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야지디족은 미어터지는 보잘것없는 난민캠프에서 살아가며, 그중 다수가 유럽으로 망명길을 택했다. 시아파 민병대가 모술과 시리아 간의 보급로 차단작전을 어느 정도 진척시켰지만, 신자르 남부의 야지디족 마을은 여전히 IS의 통제를 받으며 IS는 이 기지들에서 쿠르드족 및 야지디족 진지에 정기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중이다. 약 2천 명의 여성이 풀려났지만 3,200명은 여전히 포로 신세다. 그 중 대부분이 시리아의 라카에 모여 있다. 야지디족으로서는 배신감을 지울 수 없다. 과거 이웃인 아랍부족에게 학살당했고, 인종적 형제라 할 수 있는 쿠르드족에게 배반당했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잊혀졌다. 고향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전에, 그들은 이 73번째 ‘파르만’이 제발 마지막이기를 기도한다.  
 
 
글·비켄 슈테리앙 Vicken Cheterian
제네바 대학 및 제네바 웹스터 대학의 역사학 및 국제관계학 교수. <Open Wounds: Armenians, Turks, and a Century of Genocide>(Hurst & Company, 런던, 2015년)의 저자.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사, 국문학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1) 비켄 슈테리앙, <만일 이라크가 새로운 세대의 지하디스트들을 품고 있다면(Et l’Irak accouche d’une nouvelle génération de djihadist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8년 12월호.
(2) Brian Fishman, Joseph Felter, <Al-Qaeda’s Foreign Fighters in Iraq. A First Look at the Sinjar Records>, Combating Terrorism Centre, West Point, 2007년 1월 2일.
(3) 모든 아랍 부족이 IS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라비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가장 강력한 부족인 샤마르 부족은 IS의 주적 중 하나다.
(4) Nelida Fuccaro, <The Other Kurds. Yazidis in Colonial Iraq>, I. B. Tauris, 런던,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