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물이 된 도시, 바스라

2017-01-02     피터 할링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라크에서 2~3번째 가는 대도시인 바스라는 두바이, 아부다비, 도하, 쿠웨이트 시티보다 훨씬 역동적인 대도시가 될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어쩌면 아라비아-페르시아만을 지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스라에 위치한 움카스르 항구는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이라크를 외부세계의 거대한 시장과 연결하고 있는데, 이 곳은 탄화수소가 풍부하고 원유개발 비용도 대폭 절감되며, 배럴당 가격 변동에 상관없이 폭 넓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스라 사회는 범세계주의와 지적인 지도층, 노동자층의 전통 등으로 잘 알려졌었다. 지역 상거래의 플랫폼이자 제조업의 대국이 됐어야 할 ‘진짜 도시’로서 말이다. 바스라의 배후지는 매우 비옥해서, 과거 유명했던 쌀과 대추야자 농사에 적합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 “바스라, 투자의 천국”이라 쓰인 플래카드와 마주치는 순간, 실망감과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바스라는 흔히 <제 3세계>라 부르는 디스토피아 효과를 아주 정확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주지사 외에 정부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이 주지사는 2013년 이후 예산을 배정받지 못한 것도 불만인데, 매주 시위자들이 퍼붓는 욕설까지 감내해야 한다. 시위자들은 단념하지도, 그렇다고 결집하지도 않는다. 종교적 특색을 지닌 민병대들이 늘어나면서, 미미하게나마 존재했던 공권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외국 석유회사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익 재분배 때문에 일부 부족들 또는 단체가 폭력을 동원할 때, 이 회사들로서는 지방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최선이다. 공공연금(급여가 지불되고, 재정지원 프로젝트가 이뤄졌을 때)과 수입재화(특히 자동차)의 소비처럼 이미 모순적 측면을 지닌 바스라의 끔찍한 경제는 만성적 부패, 탄화수소 밀매매, 마약시장 등 병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바스라는 도시국가와는 상반된다. 도시국가라는 낡은 모델은 국민국가 모델이 해체됨에 따라 재등장하는데, 자원이 풍부한 도시들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결성되며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이곳의 법은 다른 곳에서 결정한다. 주지사는 중앙집권제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모든 결정은 - 지극히 소소한 결정조차 - 바스라와 연결고리가 거의 없는 바그다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에 있는 30여 명의 장관들 중 단 한 명만이 바스라에 관여하며, 바스라에 관여하는 국회의원도 전체의 9%에 불과하다. 그 밖에 바스라에 기생하는 외부 정당 및 민병대들이 현지에서 정치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바스라를 식민지 취급하는 중앙정부

20세기 초 대지주들의 소농민 착취, 1980~1990년대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남부의 대규모 습지를 제거한 사건, 2003년 미국 침공으로 인한 대혼란과 대대적인 이주 현상은 여러 부족들을 바스라에 자리 잡게끔 했다. 특히 가람샤(Garamsha) 부족처럼 거칠고 영향력이 강한 부족들은 도시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습성을 이곳에 가져왔다. 가람샤 부족은 오랜 기간 그들의 은신처였던 습지(1)에서 강한 반항적 전통을 이어온 부족이다. 결국, 바스라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여러 지역을 당국에 빼앗기는 상황에 또 다시 직면한 것이다. 중앙정부는 바스라를 식민지 취급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모로코 남부나 니제르에서 나이지리아에 이르는 삼각주처럼 말이다. 

보통 “부당하다”는 여론이 불거지면, 이탈리아식 민족통일주의나 분리독립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바스라에서는 그 반대다. 불만은 합의에 이르고, 분리독립이라는 위협은 우유부단함을 벗어나지 못하며, 도시를 위해 힘쓰겠다는 결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스라 사람들은 “도시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그들의 환상과, “우리의 도시는 이미 잊혀졌다”는 완전한 체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게,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를 만큼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바스라 사람들이 <동방의 베니스>라 부르며 좋아했던 이 도시의 운하들은 이제 쓰레기로 가득하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합류해 흐르는 장엄한 샤트알아랍 강에는 중유들이 떠다니고 생선 비린내가 진동한다. 곧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타워가 예정대로 건설되면, 바스라는 적어도 수렁에서 벗어나 별들 속에서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바스라는 무장도시다. 대포가 비죽 솟아오른 군대행렬이 끊임없이 거리를 활보한다. ‘순교자’의 초상화도 도처에 걸려있다. 순교자들의 장례는 아주 강렬한 의식으로 거행되고 바스라 사회 전체를 결집시킨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나선 젊은 투쟁가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한층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나서게 된 원인은 사실 먼 곳에 있다. 국토의 또 다른 끝 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국가조직(IS)과의 전투가 그것이다. 하지만 IS는 바스라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아, 시아파 민병대의 사령부들은 바스라를 요새화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곳은 이상한 구국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작 바스라 시에는 어떠한 득도 되지 않는 캠페인 말이다.

전투는 주로 혐오만 일으키는 이슬람교 정당들, 또는 호감보다 비판을 야기하는 성가신 이웃인 이란과 결탁한 군부대에 의해 조직된다. “이란인들은 시아파든 아니든 모든 아랍인들을 하찮게 여긴다. 그들은 1980년대 전쟁에 대해 항상 우리를 원망한다. 그리고 우리를 이용해서 돈을 벌기 위해 마약밀매에도 눈감고 있다.” 이 조직들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예찬하며, 자신들의 인적피해 규모에 대해서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에서 사망자 수를 계속 공개하면 사회 전체에 심각한 사기저하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찬동은 이라크의 어떤 도시에서보다도 열렬하고 만장일치를 이룬다. 바스라 시민들은, 2014년 6월 시아파 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알시스타니가 이라크인들에게 IS확산에 맞서기 위해 만든 안전장치를 지지할 것을 촉구하며 시작한 파트와(이슬람법 저촉 여부를 해석하는 이슬람 판결-역주)에서 자생된 인민 기계화 부대(아랍어로는 알하시드 알샤비)운동의 절반 이상을 자랑스럽게 조직하고 있다. 정확한 수치가 어떻든, 바스라는 알하시드의 리듬 속에 살고 있다. 왜 그토록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가?

스너프 영화를 연상시키는 종말론적 전투
 
답은 언제나 그렇듯 종교적 의무, 이라크 시아파 성직자 중 ‘최고 지도자(마르자)’ 알시스타니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알시스타니의 의견이 정치권의 평범한 이익에 반하거나 시아파의 뿌리 깊고 충만한 대중적 관습에 반할 경우, 또는 다른 지배적인 사회규범에 어긋날 경우 쉽게 무시된다. 각 당파들에게 분명하고 필요한 양보를 권고하고, 성지순례 시의 자발적 고행과 터무니없는 비용이 드는 장례와 부족법 적용을 강력히 금지하기 위해, 알시스타니는 목이 쉴 지경이다. 결집을 촉구하는 높고 분명한 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 모두가 귀머거리처럼 이런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2)

사실 알하시드는 징병의 반대 개념이다. 상상과 시아파 사회의 구조적 관습들에 닻을 내린 진정한 사회운동이다. 시아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새로운 지표를 찾으려 이런 사회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IS와의 전쟁은, 전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은유적 측면이 강하다. 시아파가 창시되던 순간과 680년 카르발라 전투 기간 이뤄진, 알리의 아들 후사인, 선지자의 사촌과 사위,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 학살 간에 공명하고 있는 전쟁이다.(3) 카르발라의 비극을 토대로 시아파의 대중적 종교심과 혼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카르발라 전투의 비극은 매해, 음력 1월인 모하람 동안, 구체적으로는 연극작품(타지예)과 상징적 자상(自傷)등 다른 형태의 기념방식으로 재현된다. 연극 작품들은 후사인의 희생을 강렬하게 재현해낸다. 희생주의 문화를 보여주는 주요작품은 공격과 탄압에 맞서 때로는 영예롭게, 때로는 자멸하는 시아파의 순환적 저항을 나타낸다. 오늘날 IS와의 전쟁에서도 이런 장면은 매일 재현되고 있다. 전쟁 중에는 수니파, 적수를 이용하는 오만한 서방국가들과 모든 음모론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등 시아파가 적대시하는 모든 대상에 집중한다. 시아파를 살리기 위해 쓰러진 순교자들은 후사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초상화로 그려진다. 종말론적 전투는 이제 배우들이 죽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게 되는, 마치 스너프 영화(Snuff film: 사람이 실제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하는 장면 등을 담은 영상-역주)처럼 한층 자의적이고 작위적이다.

결집에 있어 사회적 측면도 빼놓을 수 없다. 취업과 결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전투를 자아실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영웅적 행위는 동료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며, 부모에게는 자랑거리가 된다. 이들에게는 약간의 돈도 주어진다. 바스라 지방 당국은 이라크에서 유일하게 보상금을 주는 지역이다. 소정의 금액(약 750유로)이지만 말이다. 이 돈은 허무주의로 가득찬 세상에서 인생여정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게 해준다. 장례식은 다른 어떤 행사보다도 지역사회를 강력히 결합하는 계기가 된다. 각종 전통들이 재연되며 의미와 관계를 만든다. 부족들이 행진하고, 마을끼리 연대하고, 결혼식처럼 공중사격을 하고, 순교자들의 업적이 영웅담처럼 찬양된다. 

이런 병적인 활기는 정치적인 힘이 있다. 하지만 이라크 시아파 대표라는 이들은 사담 후세인이 전복되며 주어진 기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 세기에 걸친 통치 동안 기다리고 꿈꿔왔던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불발이었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미래를 믿지 않는다. 이는 자연히, 벗어날 수 없는 과거가 반복되는 퇴보적 상황을 부추긴다. 

역설적이게도, 해묵은 복종에서 비롯된 희생자의 열등감은 오늘날 완전한 자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무엇도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자유가 모두를 압도하고 공공장소, 사회 조직을 차지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규정한다. 모든 ‘시아파 리더’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열등감에서 벗어난 시아파의 발현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물론 가장 조직적인 이념, 엘리트들의 파렴치한 계산과는 모순되지만 말이다. 바로 이것은 알시스타니가 희생을 치르고 깨우친 것이기도 하다. “나라를 지켜라”는 그의 호소는 종교적 논리가 아닌 국가적 논리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알시스타니는 모든 이라크인들에게 군대를 지지하기 위해 하나 될 것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감정이 담긴 공명 상자에서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이것이 바스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보편적인 교훈이다. 눈앞에 해결이 시급한 문제들이 가득한데도, 번영의 가능성을 지닌 이 도시는 자신을 넘어서는 목표에 이끌려갈 것이다. 스스로 빚어내는 실패의 악순환 속에서 시아파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목표다. 아마도, 미래로 향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바스라는 평화를 찾을 것이다.   


글·피터 할링 Peter Harling
국제위기감시기구(ICG)에서 아랍국가 전문가로 일했고,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항한 시아파 반란군들은 습지를 은신처로 삼았다. 이 습지들은 1990년대 중반 완전히 사라졌다. 2003년 이후 이라크 당국은 UN의 지원을 받아, 과거 정권이 만들어 놓은 둑들을 제거하며 이 수상영역을 복구하려 하고 있다. 
(2) 이런 현실 때문에 관계자는 지난 봄 이후 정치판에서 자신의 공적 개입을 제한한다는 결정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3) 선지자 마호메트의 죽음 뒤에 이어진 기나긴 후계자 전쟁에서, 카발라 전투는 후세인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야지드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이 패배는 시아파를 지배하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순교론의 출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