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꾼 탐미주의자 윌리엄 모리스
2017-01-02 마리옹 르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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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작업기초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1862-윌리엄 모리스 |
교육과 경제적 여유, 그리고 재능 덕분에 예술가와 작가로서 훌륭한 경력을 쌓아온 19세기 영국인 윌리엄 모리스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수공업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마르크스 사상을 대중화시키고자 하면서 점차 그에게 내재됐던 급진성이 확고해졌다.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서사시 <지상낙원 The Earthly Paradise>(1868)의 서문에서 멜랑콜리하고 체념한 음유시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예술이 세상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없고 그저 일상의 암울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읊조렸다. “시대를 초월해 태어난 꿈꾸는 몽상가인 나는 왜 세상이 일그러뜨린 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인가? 나의 시가 속삭이듯 가벼운 날갯짓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인 그를 혁명적 사회주의로 이끌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구체적인 저항을 시도하게 만든 것은 예술이었다.
모리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업으로 증권 중개업을 하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광산업주식을 물려받은 그는 연간 주식 수익도 넉넉했다. 그러던 중 옥스퍼드에서 만난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는 그를 건축의 길로 이끌었다. 고딕 건축을 봉건 사회의 유기적인 산물로 묘사하고, 건축 장인들의 자유로운 작업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예술 이론가 존 러스킨의 저서 <베네치아의 돌>(1)은 이미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번존스 덕분에 모리스는 러스킨의 영향을 많이 받은 ‘라파엘 전파’에 속한 화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를 중심으로 한 이 영국화가집단은 라파엘 이전 화가들을 모방함으로써 노동 분업은 물론 순수예술과 ‘장식예술’로 불리는, 장인예술의 구분이 이루어지기 이전 중세 예술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1861년 모리스는 로세티, 번존스, 다른 화가들과 함께 장식가구회사인 ‘모리스, 마셜, 포크너 앤 컴퍼니’를 세웠다. 벽지, 스테인드글라스, 카펫, 태피스트리, 가구 등을 판매하는 이 회사는 장인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전적으로 총괄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장식예술과 여러 사람이 모여 수공으로 제작하는 방식을 복원시켜 빅토리아 시대 추한 실내장식을 밀어내려고 했다.
모리스는 자료 조사를 통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악한 상품’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생생한 색감을 얻어낼 수 있는 수기(竪機, 날실을 수직으로 팽팽하게 쳐서 짜는 직기)직조법과 식물성 염료 등 산업화 이전의 제작기술을 부활시켰다.(2) 그는 1875년 단독 경영을 맡으면서 회사를 키웠고, 통상 임금보다 높은 급여를 받는 직원들은 작업의 흐름을 직접 조절할 수 있도록 손으로 작동하는 구식 기계를 계속 사용했다. 모리스는 이처럼 ‘산업기술의 숭배’라는 사조와 정반대되는, 생산 조건과 결부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그가 부르주아들이 몰려드는 강의를 통해 1870~80년대에 걸쳐 확산시키려고 했던 사상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곧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이라고 이름 붙게 될 이 사상에 매료됐고 이들의 첫 번째 전시회는 1888년에 열려 모리스 앤 컴퍼니의 제품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비난하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리스 앤 컴퍼니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브랜드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진정한 장인이 되기보다는 모리스나 그의 딸이나 번존스가 고안한 모티프를 만들어내는 단순노동자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저 비용 대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은 높은 판매가로 이어진 반면, 모리스가 유행을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저렴한 모조품이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영국과 (큰 인기몰이를 한) 미국의 언론들이 르포르타주나 사진으로 보도하며 기꺼이 열광하던 모범적인 소규모 공방의 사랑받는 사장으로서 생산방식을 개선했다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매매된 브랜드는 오늘까지도 남아있지만 그가 살았던 켈름스콧이나 월섬스토의 집을 개조한 박물관의 아트샵에서 판매되는 베갯잇, 비누, 우산에 모리스 모티프를 입혀 기계로 대량생산하는데 그치고 있다.
모리스는 소유주와 노동자 사이의 노동 분업에 분개하는 만큼 자신의 인생을 “추잡하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진 부자들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3)며 통탄했다. 그는 사회주의동맹의 기관지 <코먼웰>에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속도와 뜻대로 일을 하는 체제는, 이 체제를 대체해 등장한 노동분업체제보다 노동자 개인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생산된 노동의 측면에서도 한결 낫다. 예술의 존재와 인간의 안녕을 위해서 노동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자재와 도구와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단지 이 통제력은 더 이상 중세시대처럼 개별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가 공동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점이 달라졌다.”(4) 요컨대 생산 수단의 사유화를 폐지해야만 장인의 행복을 낳고 보장하는 진정한 예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83년 모리스는 영국 최초의 사회당인 사회민주연맹에 가입했고 1885년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조언을 바탕으로 엘리너 마르크스, 에드워드 에이블링과 사회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90년 무정부주의자들이 다수가 되자 모리스는 지도부에서 물러나 그가 살던 런던 교외의 해머스미스 지부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개인 자산은 물론 작가와 강사로서의 자질을 사회주의라는 대의에 바쳤다. 이를 통해 그는 빅토리아 시대 산업자본주의를 비난한 부르주아들 중 극소수만이 용기를 냈던 그 한 발을 내딛으면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세계와 이상향을 가로지르는 불의 강”을 건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프슨도 윌리엄 모리스 전기에서 여기에 방점을 찍었다.(5)
1883년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톰프슨은 겨우 2백 명 남짓이었다고 추정했다. 1887년이 돼서야 <자본론>이 영국에 번역, 출간됐고, 모리스는 이 책의 프랑스어판과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를 읽으며 정치경제를 익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런던 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다른 지역에서 강연회를 열어 노동자계급과 중산층(그에게는 이들도 정치 교육이 필요했다)에게 혁명적 사회주의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민주연맹의 기관지 <정의>와 사회주의동맹의 기관지 <코먼웰>에 기고하면서 우화와 대화를 활용해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중화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글은 아마도 1381년 영국 농민 반란을 다룬 <존 볼의 꿈>(1887)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후, 화폐와 상거래가 사라지면서 주민의 물리적 건강과 의복, 집, 공공건물, 일상생활품의 아름다움이 중요하고 여성 해방과 자유연애가 가능한 영국의 모습을 꿈꾼 유토피아를 그린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1890)일 것이다.(6) 이곳에서는 도구, 기계, 자재를 공동의 작업실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쓸 수 있다. 정부도 사법제도도 없지만 주민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논의하는 지역의회가 있다. 학교도 없어서 각자 자신의 리듬대로 학습한다. 유랑 가인은 이 모든 것에 놀랐고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믿기지는 않지만 자신이 꿈꾸는 영국을 알아보고 이곳을 떠날 때 되돌아갈 시대의 빈곤과 단조로움에 맞설 용기를 얻어갔다. “돌아서세요.” 안내자 중 한 명이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를 봤고 그대의 투쟁에 약간의 희망을 더해줬다는 점에서 좀 더 행복하시길. 그대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어떠한 괴로움과 아픔이 있더라도 동지애와 휴식과 행운의 새로운 시대를 조금씩 세우도록 노력하세요.”
그렇지만 대중들에게 익숙한 모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결의에 찬 선동가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예술을 예찬한 확고한 심미주의자(7)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자 리버테어리언 성향의 정치적 몽상가 또는 용어가 탄생하기 이전의 반성장주의자(8)로 소개한다. 영국에서 그를 기린 가장 최근 전시인 ‘무정부 상태와 아름다움’이 2014년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그의 사회주의적인 정치 참여라는 특성은 다소 모호한 급진주의에 녹아들었다.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는 스튜어트 샘 휴스의 벽화가 있었다. 그 벽화에서 과두정치가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요트를 두 손으로 들어 석호로 내던지려고 하는, 거대 자본에 맞서 예술을 지키는 슈퍼히어로 모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좀 더 정치적인 모리스의 부활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의 모습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참여와 왕성했던 전투적 태도를 희석시키려는 것은 아쉽다. 공장의 노예와 ‘조악한 상품’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존재하는 오늘날, 그를 되새기는 일이 적절하고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가 소외에서 벗어난 노동자의 해방과 예술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특권층의 사치품이 아닌 다른 예술을 생각하고, 모리스의 염료인 매더 레드, 미요네트 옐로우, 인디고 블루라는 색채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꿈꾸게 해줬다.
글·마리옹 르클레르 Marion Leclair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저서 <존 볼의 꿈>(Aux Forges de Vulcain, Paris, 2011)의 번역가이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John Ruskin, <베니스의 돌 Les Pierres de Venise>, Hermann, coll. <Savoir>, Paris, 2005 (1st ed.:1853).
(2) William Morris, <문명과 노동 La Civilisation et le Travail>(Le Passager clandestin, Neuvy-en-Champagne, 2013),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Comment nous vivons, comment nous pourrions vivre>(Payot & Rivages, Paris, 2013), <모조품의 시대 및 반근대문명에 관한 잡문 L’Âge de l’ersatz et autres textes contre la civilisation moderne>(L’Encyclopédie des nuisances, Paris, 1996) 참조.
(3) Edward P. Thompson, <William Morris: Romantic to Revolutionary>, PM Press, Oakland, 2011 (1st ed.:1955).
(4) William Morris, <Political Writings: Contributions to Justice and Commonweal>, 1883-1890, Thoemmes, Bristol, 1994.
(5) Edward P. Thompson, op. cit.
(6) William Morris, <존 볼의 꿈Un rêve de John Ball>, Aux Forges de Vulcain, Paris, 2011, 및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또는 휴식의 시절Nouvelles de Nulle Part ou Une ère de repos>, L’Altiplano, Montreuil-sous-Bois, 2009.
(7) 예를 들어 ‘오스카 와일드의 영국에서 아름다움, 도덕, 관능 Beauté, morale et volupté dans l’Angleterre d’Oscar Wilde’(Musée d’Orsay, Paris, 2011-2012) 전시회 등.
(8) Serge Latouche가 Williams Morris에게 보낸 서문,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Comment nous pourrions vivre>(Le Passager clandestin, 2010) 및 Serge Latouche, <반성장주의의 선구자: 선집 Les Précurseurs de la décroissance: une anthologie>(Le Passager clandestin, 2016) 등 참조. 더불어 Paul Meier,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사상 La Pensée utopique de William Morris>(Éditions Sociales, Paris, 1972) 및 Miguel Abensour ‘윌리엄 모리스, 유토피아와 로맨스 William Morris, utopie et romance’, <Europe>(n° 900, Paris) 2004년 4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