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좌파의 출현이 변화의 희망!”

르디플로 100호 발행 기념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2017-01-02     이택광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됐다. 오는 1월 20일, 트럼프는 성경에 손을 얹고 미 대통령 취임선서를 할 예정이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은 미 대선에서 일어난 예상 밖 이변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적인 정치지형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트럼프 당선에 고무된 유럽의 민족주의 우파들이 단단히 집권의 문턱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실제로 마린 르 펜을 비롯한 유럽 극우의 약진도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 좌파적 대안으로 흐르지 않고 극우 포퓰리즘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됐던 자유민주주의 세계체제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지난 해 ‘트럼프 증상’에 대해 도발적인 분석을 내놓아 논쟁을 촉발시켰던 슬라보예 지젝에게 향후 벌어질 정치적 상황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필자는 지난 해 초에도 지젝을 만나 현안에 대해 들어봤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 어떤 시기보다도 활발하게 미디어와 강연에 출연하고 책도 출간한 그가 전망하는 2017년은 어떤 해일까. 더 나아가서 이런 조건에서 좌파적인 대안은 어떤 것이 가능할까. 인터뷰는 화상통화로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이택광 그 동안 잘 지냈나. 먼저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드린다. 먼저 트럼프 당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이미 당신은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트럼프라는 정치인은 파시스트라기보다 중도적 자유주의 정치인이고, 그의 당선은 지금 현재의 상태를 바꿔야한다는 아래로부터 올라온 욕망의 표현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비단 트럼프만이 아니다. 2017년 프랑스 선거에서 마리 르 펜을 비롯한 우파의 집권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슬라보예 지젝 미국과 이곳 유럽에서 트럼프 당선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태도는 자유주의다. 이들은 세상에 종말이라도 닥친 양 굴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채 트럼프를 지지한 평범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유민주주의적 엘리트들의 실패로 인해 출현한 증상일 뿐이다. 이들 엘리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 자유주의적 좌파들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트럼프를 악마로 규정하면서 마치 당장이라도 세상의 종말이 닥쳐올 것처럼 말하는 한편, 이미 미국 자체가 파시스트 국가였기 때문에 이렇게 파시스트가 집권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들과 반대로, 한층 흥미로운 태도는 내가 ‘재정상화(Re-normaliza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민주당 정치인인 낸시 펠로시가 했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번 트럼프 당선은 과거 80년에 레이건이 당선된 것과 같다. 선거절차에 따라 보수 공화당이 집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중에 민주당이 권력을 되찾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민주주의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진실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충격에 빠졌을 때 재빨리 상태를 ‘재정상화’하려는 심리상태인 것이다. 이들의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촘스키가 말하는 것처럼 선거조작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조작이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회는 일종의 표준적인 척도를 가진다. 성문화됐든 그렇지 않았든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선거도 그런 규칙이 작동하는 합의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 트럼프 당선은 이렇게 암묵적으로 작동하던 체제의 원리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그 체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칭하는가.
 
지젝  2차 세계 대전 이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 대부분은 양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중도적인 좌파정당과 중도적인 우파정당이 몇 년에 걸쳐 서로 여야 자리를 바꾸면서 유지되는 것인데, 이에 더해서 주변적인 성격을 가진 급진정당들이 자리를 잡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합의가 붕괴한 것이다. 현재의 정치지형은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도자유주의적인 거대 정당 하나와 포퓰리스트적인 우파 정당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예외적인 곳으로 그리스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이  그 합의가 무너졌기에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지젝  미국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당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실에 대해 눈을 감고 있었다. 상황 판단을 잘못했다. 트럼프를 비판하면 그들에게 더 많은 표가 갈 것이라고 착각했다.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들은 반-기득권적인 성향을 가졌다. 기존 시스템에 반감을 가졌다는 의미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던 사람들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입장을 가졌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이렇게 후보 경선에서 샌더스를 지지하던 민주당의 수백만 표가 트럼프에게 갔다는 정황도 있다. 오히려 힐러리의 선거 전략이 의식 조작처럼 비쳤던 것이다. 이렇게 트럼프라는 개인만을 문제 삼아 조롱하고 그 지지자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병이라는 생각이다. 어딘가 아프면 약이 필요하듯, 자유주의자 자신들의 공포를 이런 식으로 치유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진통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치료제는 될 수 없다. 증상을 잘못 진단할 수 있다. 이 증상의 원인은 간단하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합법성을 더 이상 재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 당선은 버니 샌더스를 제거하기 위해 민주당이 민주주의적 신념을 폐기한 대가로 얻게 된 것이다. 샌더스를 포용하면서 좀 더 왼쪽으로 민주당이 움직였다면 힐러리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의 당선이 새로운 좌파의 깨어남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잠깐 낙관주의자의 제스처를 취해볼 수 있다. 

이  그런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트럼프 이후의 세계정세는 무엇인가. 
 
지젝  낙관주의에 취해 말하자면, 트럼프는 러시아 푸틴과 사이가 좋고 중국도 크게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트럼프가 이런 분위기를 잘 이용해서 성공한다면, 의외로 세계 평화가 손쉽게 달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지젝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나. 물론 이런 주장은 과도한 낙관주의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장과 별도로 나는 트럼프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텔레비전에나 등장하다가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멍청이가 아니다. 자유주의적 언론들은 그를 바보 취급했다. 부를 과시하거나 성적인 경험을 의기양양하게 떠벌리는 천박한 짓을 할 때마다 ‘정치적 자살극’을 벌인다고, 정치인으로서 끝났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런 멍청한 짓 때문에 낙선되지 않았고, 반대로 오히려 그 때문에 당선된 것처럼 보인다.
 
 정작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런 트럼프의 노골성과 어리석음에 감정이입 됐다. 완전한 지도자와 자신들을 동일시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불완전한 트럼프를 보면서 “봐라, 트럼프야말로 우리랑 다를 것이 없는 속물적인 평범한 사람이다”고 감탄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민주당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런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맹목성은 왜 발생했을까. 얼마 전 내가 휘말린 논쟁에 그 단초가 있다. 트랜스젠더와 LGBT 운동가들이 화장실 분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배제했다. 그들은 대의적으로 옳은 주장을 했지만, 전략적으로 이 쟁점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과소평가했다. 정치적 구도를 엘리트 대 평범한 사람으로 잡는 것은 패착이다. 

이  그런 맹목성은 비단 미국에 한정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지젝  물론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마리 르 펜과 프랑수아 피용이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약진 중이다. 피용의 경우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자유주의자지만,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가톨릭 보수주의자이다. 그래도 르 펜은 포퓰리스트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최소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한다. 둘 중에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정말 끔찍한 결선투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르 펜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지지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을 뒤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둘 중 누구도 지지하진 않는다. 이 사태의 본질은 자유주의 좌파를 비롯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다. 위기에 빠진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중간지대가 없는 극단적인 양쪽을 두고 하나만 선택해야한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자유주의는 문화적인 차원에서 낙태와 동성애 문제 같은 정체성 정치를 이야기하지만, 경제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했다. 이제 이런 이중성의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됐다. 사회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이런 교착상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지젝  반복해서 말하지만, 버니 샌더스 같은 정치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해결책이다. 지금 당장 공산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움직여야한다. 궁극적으로 혁명적인 상황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에서 나는 비관주의자다. 트럼프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가 아니라 자유주의 좌파가 그의 당선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내 미국친구들은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파시스트가 민주적으로 선출됐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이 사실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초래한다. 흑인과 히스패닉을 비롯한 소수인종 대다수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주요 언론들도 힐러리의 편이었다. 심지어 거대자본들도 힐러리 당선을 원했다. 얼마 전에 월가점거운동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정말 괴로운 질문이다. 물론 좌파가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비관주의자다. 자유주의 좌파가 확고하게 왼쪽으로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 전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좌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좌파 후쿠야마주의자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 좌파들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의 종언에 도달한 최후의 형식이라는 후쿠야마의 진단을 수용하고 있으면서 왼쪽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의료보장제도와 문화적 관용, 더 많은 공교육 등을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프레임 내에서 이런 주장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보는가. 
 
지젝  한 마디로 유럽의 종언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유럽이 이 세계에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멍청한 백인우월적인 문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라는 기본적인 이념이야말로 유럽이 가져다준 유산이다. 이 복지국가를 통해 유럽의 개인들은 여가를 즐기고, 건강을 지키고,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 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유럽의 가치들이 오늘날 위험에 빠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유럽은 붕괴한다. 이미 붕괴는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작년에 당신도 와서 봤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류블라냐는 이제 관광을 위한 도시가 됐다. 예전에 말했지만, 마치 로마 제국 시절의 그리스 명소처럼 돼버린 것이다. 유럽을 와서 보기만 하지 유럽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모두 무관심하다. 

이  어떤 변화가 있어야한다는 말인데, 트럼프 당선이 이런 현실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을까. 당신은 시종일관 지금 현재의 상황을 바꾸는 것이라면 혼란을 감수해야한다고 말해왔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트럼프 당선의 의미는 당신이 지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지젝  조금 전 잠깐 언급했던 낙관주의적 관점에서 상상해보자. 트럼프가 푸틴과 협력해서 각자 평화롭게 핵무기 개발을 하자고 제안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푸틴도 일국 자본주의의 보호주의를 지지한다. 이렇게 둘이서 단합해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의 냉전’을 주창한다면 정말 황당할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도 팽창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최근 보이는 행보는 중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일리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긴장관계에서 남중국해의 영토분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은 지금 미국의 로켓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사드도 그렇고 파키스탄, 필리핀, 일본 등에 미국의 로켓기지가 있다. 문제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경찰 노릇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팽창주의를 다시 봐야한다. 나름대로 방어 전략인 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미국이다. 지금 우리가 다극적인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미국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직 자신들만 전 세계에 무기를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미국의 생각은 과연 중국의 팽창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폭력적인 중국의 모습은 요술거울에 비친 미국의 왜상이 아닐까. 미국의 자본주의에 야만성과 노골적인 계급차별이 더해진 모습이 바로 현재의 중국인 것이다. 예전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은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중국은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두려워할까. 중국이 무시무시한 공산주의 제국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이 공산주의적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미국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아이러니지 않은가. 전쟁의 위험은 과거처럼 정치적 차별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차별성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경제적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더 보편적인 문제도 유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중국이 미국만큼 경제발전이 된다면 지구환경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물론, 이런 지적들이 단편적이고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대로 가면 결과적으로 환경변화로 인한 재앙은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지젝  여기 유럽에 있는 나보다 아시아에 있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최근 중국 도시를 뒤덮은 스모그 문제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나는 보도사진을 보고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가리는 작은 의료마스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물론 이런 재난의 상황에서 우리를 웃게 만드는 해프닝도 없지 않다. 중국 여행사들이 도시 거주민에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여행상품을 개발했다는 소식은 재미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재정상화’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개발과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재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은 방독면을 구매하고 여행상품을 선택해서 도시 바깥으로 나가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말한다. 분주한 중국 도시의 거리를 보고 있으면 마치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퇴폐적인 어떤 행성의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누군가 말하기도 했다. 도시는 자욱하게 스모그에 잠겨 있고 거리의 인파들은 방독면을 쓰고 배회하는 영화의 한 장면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에도 아랑곳없이 현실은 아무런 문제없다는 듯 잘 돌아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재빨리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고 위기를 ‘재정상화’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적응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한다. 자유주의 좌파들은 이런 적응력을 너무 사소하게 생각한다. 

이  이런 사실을 자유주의 좌파들이라고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반복적으로 잘못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인가. 
 
지젝  그들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상층 엘리트의 이해관계에 평범한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실패 아래에 감춰져 있는 것은 더 왼쪽에 있는 좌파의 패배다. 한 마디로 더 왼쪽에 있는 좌파가 대의를 상실했다는 의미다. 기껏 해봐야 이들은 좌파 후쿠야마주의자일 뿐이다. 계급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나 낙태 문제 같은 정체성 정치에 매몰돼 있다.
 
오늘날 진정으로 좌파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의가 있는가. 좌파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궁극적인 실패의 원인이다. 그리스의 시리자를 보라. 집권은 했지만, 진정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고, 쿠바 역시 별 수 없었다. 지금 좌파들은 현재의 시스템이 무너지는 때를 맥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상황은 분명히 좌파의 해답을 요청하고 있다. 
 
그럼에도 좌파들은 내놓을 해답이 없다. 지금 우리는 난민문제나 환경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지금 체제를 변혁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내 생각에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바로 이런 좌파의 무능이다. 장기적으로 언젠가 이 체제는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좌파들이 대의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비극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  좌파가 대의를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혁명을 하자는 주장을 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나. 
 
지젝  체제의 변화는 소리 없이 이루어지지만, 준비 없이 오지 않는다. 가령 이번에 미국에서 샌더스가 당선됐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샌더스처럼 급진좌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회민주주의적인 좌파가 미국에서 집권한다면 유럽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일국에서 좌파가 집권을 해봤자 글로벌 자본주의에 저항하긴 어렵다. 규제를 강화하면 자본은 국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좌파적 전략들이 실천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정반대다. 좌파들마저 글로벌 자본주의, 달리 말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민족국가로 복귀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족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유혹이다. 너도 나도 민족주의자로 전향하고 있는 파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또는 자본의 국제주의에 반대해서 본능적으로 민족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좌파의 국제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해야한다. 

이  좌파 못지않게 자본도 민족국가로 복귀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트럼프 당선이 말해주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백인 중간계급이 과거의 복지국가모델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이런 열망에 좌파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가 지지를 얻고 있다. 
 
지젝  오늘날 자본주의는 재정적으로 국제적이지만 성장모델에서 과거로 복귀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 이 과정에서 우파 포퓰리즘이 약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들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트럼프만 하더라도 당장 말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트럼프를 지지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실망을 느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가 또 다른 기회다. 내가 트럼프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고 내 친구들은 비판하지만, 트럼프는 히틀러 같은 인물이 아니다. 
 
 트럼프라는 ‘증상’은 분명, 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아쇠다. 이런 까닭에 나는 반복해서 주장한다. 우리가 진정 주의 깊게 봐야할 지점은 트럼프라는 증상이 아니라 샌더스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출현이다. 여기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이  이만 마치겠다. 흥미로운 인터뷰였다. 감사드린다.   



인터뷰이·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세계적인 철학자인 그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학자로 꼽힌다.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줄곧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19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지난 7월 경희대 석좌교수로 임용된 지젝이 9월 24일~10월 2일까지 열린 ‘멈춰라, 생각하라-공산주의의 이념 2013 서울’ 컨퍼런스에서 한국 자본주의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글·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저서로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