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제국에서 진실된 욕구를 찾는 법

2017-02-01     라즈미그 크쉐양
   
▲ <내게 달을 돌려줘>, 2015 - 정연민

전후 자본주의의 핵심은, 변화에의 의지를 소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 쪽으로 이끄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모델은 현재 천연자원의 고갈이라는 한계에 부딪힌 상태다. 만족스러운 동시에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려면, 소비의 제국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생태학적 변화는 소비과정에서도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선택의 근거는 무엇인가?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충족할 수 있는 합당한 욕구와, 충족하기를 거부해야 하는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인 욕구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에너지전문가들이 공동집필한 도서 <네가와트 선언(Manifeste négaWatt)>은  최근 출간된 정치생태학 전문도서들 중에서 탁월하기로 손꼽힌다. 이 책은 우리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1) ‘네가와트(NégaWatt)’란 절약된 에너지의 단위로, ‘네가(Néga)’는 ‘Négative’에서 따왔다. 이 책에 의하면, 재생 에너지의 개발과 건물의 단열, 경제주기의 단축 덕분에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의 기술수준이라면 우리 사회는 엄청난 양의 ‘네가와트 보고(寶庫)’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소비만능주의는 다량의 원자재와 에너지 소비를 끊임없이 증가시키기 때문에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게다가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네가와트’ 사회는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소비의 가능성을 신중하게 배제하는, 절제와 검소의 사회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으로 유해한 소비의 여부를 판단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네가와트 선언’의 저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충족돼야 할 인간적이고 진실 되고 합당한 욕구들과, 제거해야 할 인공적이고 근거 없는 욕구들을 구분 짓는다. 전자에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필수불가결한”, “유용한”, “적절한” 욕구들이, 후자에는 “부수적인”, “무용한”, “부조리한”, “허용할 수 없는”, “이기적인” 욕구들이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기본적인” 욕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다. “기본적인” 욕구는 “부수적인” 또는 “허용될 수 없는” 욕구와 어떻게 다른가? 두 번째는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 지에 관한 문제다. A라는 욕구보다 B라는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겠다는 선택을 할 때, 과연 어떠한 메커니즘이나 기관이 그 선택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네가와트 선언’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정치생태학의 선구자이자 비판적 사상가였던 두 사람, 앙드레 고르와 아그네스 헬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들은 고차원적 욕구에 관한 이론을 정립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2) 두 사상가는 모두 인간성 상실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이 질문에 접근했다. 인간성 상실의 여부나 정도는 진정한 욕구를 통해 측정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되돌아가기를 원하거나 또는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상태로부터 멀어져 있다. 인간성 상실이란, 자본주의가 인공적인 욕구를 생산해내고 또한 이 인공적인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이상적인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일컫는다. 인공적인 욕구의 대부분은 인간성 상실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진실된 욕구와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

그렇다면 “진실된” 욕구는 과연 무엇일까? 인체의 생존 또는 안위가 달린 요건들, 즉 먹고, 마시고,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 등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들 조차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는 곳들도 많다. 또는 과거에는 충족됐으나 이제는 충족되기 점점 힘들어지는 것들도 있다. 가령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 같은 것들이 그렇다. 오늘날 대도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수면욕구 또한 그렇다. 빛 공해는 수많은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하고, 도시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빛은 멜라토닌(“밤의 호르몬”이라는 별명을 지닌)의 합성을 더디게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빛 공해에 대한 투쟁이 사회운동으로까지 확산돼, “어둠에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공적인 빛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별보기 공원” 조성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3)

소음 공해 역시 많은 시민들에게 고통을 준다. 예전에는 무료로 누릴 수 있었던 조용함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주거지의 소음 차단에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쏟아 붓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지출은 수익률을 낮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음 전문 회사들에게는 수익 창출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진실된’ 욕구에 꼭 생물학적 욕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기 계발의 욕구, 자율성과 신체 및 지적 창의성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 시민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 자연을 바라볼 욕구 등도 있다.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이 욕구들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의 영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욕구를 두고 앙드레 고르는 “정성적 욕구”라고 일컬었고, 아그네스 헬러는 “급진적 욕구”라고 정의했다. 

사실 정성적 또는 급진적 욕구는 모순에 기초한다. 자본주의가 인간 삶의 많은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것은 맞다. 생존을 위해 언제나 고군분투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의무가 사라지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정성적 열망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강렬해질수록 자본주의는 그 열망의 실현을 막는다. 분업은 한 개인을 정해진 업무와 능력 속에 평생 가둬둠으로써, 인간적인 재능이 자유롭게 꽃피우지 못하도록 한다. 게다가 소비만능주의는 진짜 욕구를 가짜 욕구 속에 묻어버린다. 소비가 진정한 결핍을 채워주는 경우는 드물다. 단지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소비가 만들어낸 욕망은 다른 소비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진실된 욕구들은 오늘날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온전하게 충족되기 힘들다. 수많은 해방운동들이 인간의 진실된 욕구에서부터 시작됐던 이유이다. “욕구는 잠재된 상태로도 이미 혁명적이다.” 앙드레 고르는 말했다.(4) 진실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다보면 결국에는 현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정성적(급진적) 욕구

정성적 욕구는 역사와 함께 변화돼 왔다. 예를 들어 여행은 견문을 넓히고 나와 다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기득권층에 한정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이 많이 일반화됐다. 전보다 더 풍부하고, 다채롭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이 가능한 욕구가 나타날 때 우리는 이를 ‘사회 진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단점도 관찰된다. 저가 항공사들이 제공하는 저렴한 항공권 덕분에 이제는 서민들도 보다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온실가스 배출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늘어난 지역의 균형을 깨뜨리기도 한다. 또는 관광객들 때문에 현지 주민들의 삶이 방해를 받기도 한다. 오늘날 여행은 진실된 욕구가 됐다. 그러나 미래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이동 형태를 개발해야 한다.

사회 진보가 피치 못하게 해로운 결과들을 초래했다면, 원래는 해로웠던 욕구들이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오늘날 스마트폰의 소유는 이기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주원료인 텅스텐, 탄탈, 주석, 금 등은 채취 과정에서 유혈 충돌을 일으키고 심각한 오염을 발생시켜 ‘피의 광물’이라 불린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기 자체만이 아니다. ‘공정’ 스마트폰이 출시되기만 한다면(페어폰의 등장이 그 전조로 보인다).(5) 미래 사회에서 스마트폰이 금지돼야 할 이유는 없다.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지속적인 접속을 통해서든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 기능을 통해서든, 스마트폰이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나 스마트폰 중독 등도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에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성적 욕구로 변모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앙드레 고르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다른 이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가질 때 당신은 비로소 존경받을 것이다.”(6) 이에 우리는 생태학적 표어로 대응하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어야 당신에게도 가치가 있다. 어느 누구도 특혜를 받지 않고 어느 누구도 비굴하게 만들지 않는 것만이 생산될 가치가 있다.” 고르의 시각에서 보면 정성적 욕구만이 좋고 나쁨의 ‘구별’의 대상이 되지 않는 특별한 것이다.

“욕구에 대한 독재”를 예방하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비는 과시적 차원에 해당한다. 자동차 최신 모델을 구입하는 것은 (실제든 아니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자동차 모델도 유행이 지날 것이고 그것이 지닌 특별한 힘도 사라져 버려, 또 다른 구매에 대한 욕구가 생겨날 것이다. 시장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러한 수순 때문에, 기업들은 서로 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품 구매를 통한 차별화 논리에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제품의 수명을 늘이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구의 친구들(Amis de la Terre)’이라는 환경단체는 제품의 보증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하자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7) 현재 유럽법이 정한 의무 보증기간은 2년이다. 제품의 80% 이상이 보증기간 내에 수리를 받는다. 그러나 보증기간이 지나면 이 수치는 40% 이하로 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보증기간이 길어질수록 제품을 더 오래 사용하게 되고 따라서 판매되고 생산되는 제품의 양도 줄어들게 돼, 신제품 구매와 직결돼 있는 차별화 논리를 깨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보증기간은 제품 수명에 적용되는 계급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욕구가 합당한지 아닌지의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아그네스 헬러가 말했던 “욕구에 대한 독재”의 위험이 여기에서 나타날 수 있다.(8) 과거 구소련이 그러했다. 자칭 전문가인 관료들이 ‘진실된’ 욕구가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나아가 생산과 소비의 선택까지 결정한다면, 이 결정이 타당하고 정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중들이 생태학적 변화를 감수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생태학적 변화의 인식에 기반한 결정들이 참여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진실된 욕구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지속적이고 공동체적인 고민이 가장 우선적으로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인 형태로 이성적인 욕구들을 확인해나가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메커니즘이 정립돼야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어떠한 형태일지 상상해 보기란 쉽지 않다.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이 메커니즘의 윤곽을 잡고 그려보는 일은 현재 우리 시대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이다. 공권력이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무용한 욕구들에 세금을 매김으로써 진실된 욕구를 확산시키는 것, 소비자의 선택을 규제하는 것 등이 있다. 그러나 우선, 수많은 욕구들의 무용함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 가장 가까이에 어떤 장치를 두어야 한다. 제품에만 시선이 고정돼 있는 소비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소비 리비도’의 방향을 다른 욕구 쪽으로 바꾸어주는 장치이다.

생태학적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대표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토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는 직접 민주주의를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를 환경 위기에 적응시키려면 대중들의 삶을 하나서부터 열까지 재편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들의 참여 없이는, 대중들의 지혜와 노하우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소비만능주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결국에는 공동체의 합의가 바탕이 된 비판, ‘일상생활에 대한 새로운 비판’에 도달해야 한다.  


글·라즈미그 크쉐양 Razmig Keucheyan
사회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자연은 전쟁터다>(Zones, 파리, 2014)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네가와트 협회, Manifeste NégaWatt. En route pour la transition énergétique!(네가와트 선언. 에너지 변화를 위해 출발!), Actes Sud, <Babel Essai> 컬렉션, 아를, 2015, (초판 : 2012)
(2) 앙드레 고르, Stratégie ouvrière et néocapitalisme(노동 전략과 신자본주의), Seuil, 파리, 1964 & 아그네스 헬러, La Théorie des besoins chez Marx(마르크스의 욕구 이론), 10/18, 파리, 1978
(3) Cf. 마크 레토, <Face à la pollution lumineuse en Suisse, les adeptes de l’obscurité réagissent(스위스의 빛 공해에 맞서 어둠의 추종자들이 저항하다)>, Revue suisse, 베른, 2016년 10월
(4) 앙드레 고르, La Morale de l'histoire(역사의 교훈), Seuil, 파리, 1959
(5) 에마뉘엘 라울, “공정한 휴대폰은 만들 수 없는 걸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3월
(6) 앙드레 고르, “그들의 생태론과 우리의 생태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0년 5월
(7) <Signez la pétition “Garantie 10 ans maintenant”(“보증기간 10년” 청원서에 서명해 주십시오)>, 2016년 10월 24일, www.amisdelaterre.org
(8) 페레츠 파히르, 아그네스 헬러, 기요르기 마르쿠스, <Dictatorship over Needs>, St. Martin's Press, 뉴욕,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