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안보전략엔 유럽이 없다
미국 싱크탱크의 자의적 프레임 무비판적 추종
위기 자체 평가·대응 능력 없는 지적 반신불수
최근 프랑스 국방부의 후원으로 설립된 육군사관학교 전략연구소는 프랑스의 전략 분야 논의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할당된 자원도 보잘것없을뿐더러 독자적 학설보다 국제적 협력을 지향하는 것이 목표인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유럽은 전략 분야에서 부진을 면치 못할 것이며 계속해서 미국의 싱크탱크들이 서구의 분석틀을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러분께 최악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적을 없애드리는 겁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소련 외교관 알렉산드르 아르바토프는 이렇게 예고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들라메종뇌브 장군 역시 2002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련이라는 적은 ‘좋은’ 적으로서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견고하며 변함없고 일관됐기 때문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순수한 ‘클라우제비츠적’ 모델을 기반으로 구축된 이 적의 모습은 우리와 닮아 있었다. 따라서 비록 우려스럽긴 해도 정체가 알려졌고 예측이 가능했다.”(1)
그런 소련이 사라지자 서구 민주주의국가의 전략 전문가들은 깊은 당혹감에 빠졌다. 이들은 한동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평화의 열매를 너무 빨리 챙겨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전략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자 러시아는 ‘심각한 위협’으로 다시금 규정됐다.
이러한 마당에 러시아의 조직범죄보다 이탈리아의 조직범죄가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우려되는 것은 어쨌거나 전자였다. 같은 맥락에서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일개 중령이던 블라디미르 푸틴의 과거가 오히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역임한 조지 부시의 대통령 재임(1989~93)보다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적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전략 논의 기구들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이는 이들 기구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의 존재 이유는 위협적인 ‘타자’를 식별하고, 위험의 위계를 설정해 방위 시스템의 근거를 마련하며,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작가 폴 딕슨은 1971년에 이미 냉전체제 유산인 이러한 거대한 조직을 설명하면서 ‘군사적·지적 콤플렉스’를 논한 바 있다.(2) 미국에는 500~1500개에 달하는 싱크탱크가 있다. 그중 가장 저명한 랜드(RAND)연구소는 국내 5곳, 국외 1곳의 사무실에 약 1500명의 인력을 두고 있으며 예산은 1억3천만 달러에 달한다.(3)
이라크에 점령됐던 쿠웨이트가 1991년 해방된 후, 사람들은 ‘동구의 위협’을 대신해 ‘남반구의 위협’을 믿었다. 이것이 단순한 방향 재설정이었다면 동일한 전략틀과 수단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반구는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이러한 일반화를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결국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 이론을 담은 저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4)
아울러 ‘회색지대’들과 법치를 벗어난 ‘실패한 국가들’(failed states)도 우려의 대상이 됐다. 제임스 카터 미국 대통령의 자문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은 미국 지도자들의 일방적 비전을 보여주는 필독서가 되었다.(5)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이제는 패권 유지가 관건이다. “미국의 전례 없는 세력도 언젠가는 쇠퇴한다. 고로 새로운 세계 세력들의 등장을 관리함으로써 이들이 미국의 패권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6)
신보수주의자들이 전략논의기구를 재점령하면서 국면은 새로워진다. 이들은 1997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발족했다. 교육기관으로 규정된 이 조직은 ‘미국의 리더십은 미국에 좋은 동시에 세계에도 좋다’는 명제를 21세기 기본 원칙으로 설정했다. 이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전에 작성한 ‘미국 방위 재건’ 보고서는 예방적 전쟁은 정당하며 소형 핵폭탄을 포함한 핵무기 사용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전략가들은 어느 정도 투명성을 지키며 공식적 또는 준공식적 공공 담론을 펼칠 의무가 있다. 1994년과 2008년 발표된 프랑스의 ‘국방백서’, 영국의 ‘전략 방위 리뷰’(1998) 및 ‘전략 방위 리뷰, 새로운 장’(2002), 미국의 ‘불확실한 세계를 위한 대전략을 향해, 대서양 협력관계 쇄신’(2007) 등은 그 일환이다. 이 문건들은 모두 더 이상 주적은 없으나 다양한 전략의미론과 정당화 기법들을 통해 방위 노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적’, ‘위협’, ‘지구 파괴’ 등의 표현은 ‘위협’, ‘불확실성’, ‘위기’, ‘위험’, ‘변동’, ‘이익’ 등으로 대체됐다.
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전략 논의는 상당 부분 ‘기술 숭배’에 집중됐다. 앤드루 마셜이 책임자로 있는 미국 국방부 총괄평가국이 출범시킨 ‘군사업무 혁명’ 활동은 이른바 ‘정밀무기’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덕분에 부수적 피해를 억제하고 희생자 수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수용하도록 한다. 이와 더불어 사이버전쟁(‘밀레니엄 버그’는 공공적 성격의 사례), 미사일 방어, C2I, C3I, C4I, 그리고 오늘날의 C5I 접근법(7), 전장의 투명성, 시스템 아키텍처 등의 주제도 등장했다.
한편 인간이 알아낸 정보 대신 기술적 근원의 정보를 선호하는 현상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했다. 인간의 정보는 2001년의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 당시 한계를 드러냈다. 모든 기술적 진보는 전통적 전쟁을 수행하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찾아낸 적은 하나, 바로 이라크 전쟁 전반기(2003년 3월 20일~5월 1일)의 사담 후세인이었다. 그 이후로는 교전국들이 전면전을 거부했다.
미국 세계무역센터 및 국방부 청사 공격은 두려움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에 발맞춰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개념이 있는 전쟁’을 선포했다. ‘테러리즘’과 ‘확산’에 맞선 글로벌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부시는 자의적으로 적을 규정했다. 이란·이라크·북한이 여기에 포함된 반면, 정작 확산에 가담하는 동맹국(이스라엘·파키스탄·인도)이나 테러리즘과 가까운 정부조직을 지닌 국가(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는 명단에서 빠졌다. 하지만 위험을 지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이를 위협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전략가들은 위협의 팽창, 적의 비이성성 그리고 야만성, 이렇게 3가지를 내세우는 고전적 방법을 다시금 사용했다.
여기에 비밀과 음모(‘비밀전쟁’, ‘비밀문서’), 그리고 악마화(‘망령’, ‘정체불명의 이슬람주의 조직’, ‘좀비’, ‘광신’, ‘보이지 않는 적’)라는 주제가 가세했으며 냉전체제하에서 사용되던 어휘가 부분적으로 재활용되기도 했다(‘이슬람주의 인터내셔널’, ‘제3전체주의’, ‘악의 축’…). 그러나 9·11 테러가 발생하기 1년 전만 해도 이슬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테러리즘도 중요 화두가 아니었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테러리즘 전문가 브루스 호프만은 연구 인력이 줄어든다고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프랑수아 드로즈에 따르면 광신자에 대한 강자의 전략은 핵확산을 중심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데 있다.(8) ‘우방국’(이스라엘·파키스탄)의 경우와는 달리 일부 핵무기 보유 희망국(이란·북한)은 ‘미치광이’로 묘사돼 위협 설명에 동원되는 허수아비 노릇을 한다. 심지어 이라크처럼 희생양이 되는 나라도 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영국과 미국의 허위 보고서 2건은 이라크 공격의 구실로 이용됐다.
두 강대국이 책임지던 지구의 안정은 10년 만에 지역적 차원의 각종 위기 사태들(유고슬라비아·소말리아·티모르·아이티)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위기와 위험의 위계를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1993년 소말리아에서 벌어진 상황을 누가 위기로 규정했는가?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별안간 긴박한 위협이 되었음을 알아차린 이는 누구인가? 이처럼 의제를 설정한다는 것은 곧 토론의 용어를 정립하는 것이다.
유럽은 스스로의 전략 정체성을 성숙시키기보다 미국을 추종하기에 급급했다. 유럽집행위원회는 각종 위기 사태 관리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며, 경찰이나 정보기관도 전혀 두고 있지 않으며, 자체적 정보를 전하는 외무부도 없다. 따라서 국제 정세 분석에서 집행위원회는 공개된 외부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집행위원회가 갖춘 조직은 무엇일까? 유럽연합안보연구원(EUISS)은 2002년 창설된 기관으로 상임연구원 수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연구의 접근 방식은 유럽적 비전을 기반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수행 임무에서 강력한 미국 지향성이 확인된다. 창립헌장에 따르면 연구원의 사명은 “유럽연합 회원국, 기타 유럽 국가, 미국, 캐나다의 대학교수, 공무원, 전문가, 정책 결정자들을 규합해 방위 문제의 전망을 분석하는 한편 각종 안보 문제에 관해 유럽 국가들과 미국·캐나다 간 대서양을 넘나드는 대화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세계 두 부분의 관계를 개선하고 대서양 양쪽의 안보 문제 접근 폭을 확대”하는 것이다.(9)
유럽의 군사적·지적 세계는 범대서양주의적 존재론이라는 병에 걸렸다. 미국을 중심에 놓고,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주변부를 설정한 가운데 유럽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으로 세계화를 고찰하는 방법밖에는 모른다. 이러한 가운데 유럽이 마치 중국에서 그렇듯, 하늘로부터 유익한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되도록 중심에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10)
사실 유럽의 전략 전망은 4개의 핵심 질문을 위주로 집중돼야 한다. 첫째 금융·전략·문명 위기에 책임이 있는 미국이 과연 미래에도 동일한 정당성을 가지고 세계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가? 부시 재임기에 행해진 과도한 처사들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때로는 극단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과거에 정통 공산주의자들이 흐루쇼프 보고서(스탈린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는 내용)에 동조함으로써 소련 당국은 언제나 옳음을 증명하려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독재정권들만이 전쟁을 즐긴다고 줄기차게 외치는 것만으로는 국제안보를 위해 좀 부족한 감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등지의 사태를 보건대 말이다.
둘째, 제도적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는 유럽이 강대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돼야 마땅한가? 그렇다면 조건은 무엇일까? 유럽의 제도들이 합의와 협상의 기틀에서 구축됐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국제관계를 전적으로 미국 전략가들처럼 고찰한다면 이는 지적 반신불수 상태와 다름없다.
유럽은 위기를 평가할 수 있는 자체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 유럽을 위협하는 위기는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보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세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위협을 파괴하기보다 이를 무력화하는 고유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 마지막 질문이다. 유럽의 많은 전략가들은 어떤 사안을 두고 유럽이 생각해야 하는 바를 자문하기보다 미국의 생각을 먼저 궁금해한다. 가령 중국의 급부상이나 러시아와의 관계를 두고 이런 면을 보인다. 지난 2009년 6월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은 유럽의 비전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다.
글•피에르 코네사 Pierre Conesa
주요 저서로 <혼돈의 역학, 부시즘, 확산 그리고 테러리즘>(로브·파리·2007)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들라메종뇌브 장군, <아지르>, 11~12호, 파리, 2002년 10월.
(2) 폴 딕슨, <싱크탱크>, 뉴욕, 아테니움, 1971, 133쪽.
(3) 자료 출처는 2008년 발표된 파리1대학 장루 사만의 논문 ‘군사 전문성의 사회학에 대한 기여: 1989년 이래 미국 전략연구 분야의 랜드연구소’이다. 랜드연구소의 예산도 군 또는 방위기구의 산하기관인 에어로스페이스(60억 달러), 방위분석연구소(IDA·80억 달러), 마이터(MITRE·2조40억 달러)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4)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오딜 자코브, 파리, 1997.
(5)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미국 그리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 아셰트, 파리, 1997.
(6) 올리비에 자예크, <지정학의 비밀과 그 이해를 위한 열쇠>, 탕포라, 파리, 2009 중 인용.
(7) C5I은 ‘지휘’(Command), ‘통제’(Control), ‘통신’(Communications), ‘컴퓨터’(Computers), ‘협력’(Collabora tion), ‘정보’(Intelligence)의 머리글자를 딴 표현.
(8) 프랑수아 드로즈,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제력을 위해’, <국제전략관계>, 12호,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파리, 1993, 101쪽.
(9) 2001년 7월 20일 이사회 공동활동, 관보 2001년 7월 25일 L200.
(10) 프랑스 전직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저서 <유럽과 미국 간의 서구 통합을 위하여>(파야르·파리·2007)는 ‘민주주의 진영’을 끊임없이 언급하면서도 인도·일본 등 비서구 국가는 전혀 거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