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 그대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2017-02-01     프랑수아 드노르&폴 라그노이모네
프랑스 대선 유력 후보자 주위에서 조력자들이 활동을 개시했다. 방송 카메라에 노출된 집단들과 언론이 보도한 조직들은 단순히 권력과 야심, 노하우의 결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층의 각 분파 간 타협안을 내놓고 다양한 선거공약에 자신들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부자들의 대통령”(1)이라 불리는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기업과 권위와 신념의 옹호자로 평가받는 프랑수아 피용이 등장했다. 

정치권력의 산술법에서 모든 부는 동일한 값을 갖지 않는다. 물질적인 부가 다른 모든 부(문화, 학식, 명망)를 앞서는 것은 물론 후자의 상대적 중요도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피용 후보자의 지원군들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방향을 설정하면, 자문이 선거 운동을 기획하고 홍보전문가가 후보자의 이미지를 가꾼다.
세계최대 보험기업 악사(Axa)의 회장이었던 앙리 드 카스트리가 경제 분야를 맡고 있다. 그는 재무부 국장으로서 첫 번째 공기업 민영화정책(1986~1988)에 참여한 이후 악사에 합류했다. 전임 회장 클로드 베베아르가 2000년 설립한 싱크탱크 몽테뉴 연구소를 통해 수년 전부터 자유주의 신조를 꾸준히 주창해 온 이 기업에서 드 카스트리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그는 “분명한 세계관과 미래 대응 전력을 수립하고, 이를 실수하지 않고 단호하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 물론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지만, 그 안에 개인적인 이익이 담겨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설정된 방향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개혁을 이끄는 것은 기품을 유지하며 덕을 행하는 일이다”라고 역설했다.(<르피가로>, 2016년 11월 2일)

피용은 자신의 총리 시절에 자문관을 맡았던 장 드 부아쥐와 현재 연설문을 담당하는 이고르 마트로파노프를 통해 친러시아 성향의 친구들이 있음을 보여줬다. 드 카스트리는 자신의 미국 측 인맥을 그와 연결했다. 2013년 드 카스트리는 피용을 1954년부터 기업가들, 정치인들, 전역 장성들, 그리고 기자들로 구성돼 온 소모임인 빌더버그 그룹 회의에 초대했다. 그는 1차 선거 전반에 걸쳐서 피용의 선거공약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승리한 이후 드 카스트리는 선거 운동 진행 상황을 살피고 장관직에 대한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르몽드>, 2016년 12월 14일).

전술가가 없는 지도자는 없다. 대기업에서는 주로 자문들이 이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프랑스 우파 후보자의 지근거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프랑수아 부바르는 컨설팅 그룹 맥킨지앤드컴퍼니 재직 시절(1989~2013) 다국적기업이나 중앙행정기관의 지도부의 의뢰를 받았을 때처럼 선거공약 작성을 맡고 있다. 2007년 피용 내각이 민간기업의 규칙을 행정기관에 적용하는 공공정책총개편(RGPP)을 추진할 때, 당시 국무조정실장이었던 장폴 포제르는 감사관리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이미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행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맥킨지는 RGPP를 모범 사례로 소개했다.(2)

전술가를 구했으면 다음은 관리자 차례다. 바로 1차 선거 중 선거운동본부 부본부장이었던 피에르 다농이 이 역할에 해당한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케이블사업자 뉘메리카블을 경영한 그는 제4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계기로 피용과 만났다. 그러나 ‘비용 절감’ 전문가로서 행정기관에 각종 자문을 하던 그가 본격적인 정계입문을 선언한 것은 2012년이다. 그는 “프랑스 내 고용을 꾸준히 유지해오던 푸조 그룹에 대한 공격은 끔찍한 일이다. 스페인, 이탈리아와 가까이 지내느라 독일과 거리를 두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로피니옹>, 2016년 9월 21일). 그 후 다농은 피용과 기업총수 간 모임을 주선하고, 경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워킹그룹을 이끌고, 공개토론회에 참석하느라 프랑스 전역을 누볐다. 2016년 어느 가을 저녁, 에손 주의 마시 시 노동조합 사무소에서 그는 “피용은 필요하다면 점거된 정유공장의 문을 열기 위해서 군대라도 출동시킬 수 있다”고 해 청중을 열광시켰다(<뤼마니테>, 2016년 11월 18일). 그는 이제 피용의 공식 대변인으로 꼽힌다. 피용의 측근 조직에서 그는 전임 프랑스경제인연합회(Medef) 회원사업본부장이 이끄는 ‘시민사회’ 분야 소속이다.

그의 부인은 엄청난 재력가인 로랑스 다농 아르노로, 2005년에서 2013년까지 Medef의 ‘경제전망’ 위원회를 주재했다. Medef는 피용 후보자의 선거공약에 그들의 사상을 물들였다. 도로테 피노 Medef 부회장은 1차 선거 기간 그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마리안>, 2016년 11월 23일). 컨설팅업체 경영자협회 ‘프랑스 엔지니어링 정보 데이터 컨설팅협회(Syntec)’의 회장인 비비안 셴히베이루도 마찬가지였다. 피에르 가타즈 Medef 회장 후임을 꿈꾸는 셴히베이루도 피용의 공식 대변인이 됐다. 

피용은 홍보를 위해 파리 최고 홍보관으로 꼽히는 안 메오를 영입했다. 시앙스포와 파리2대학 팡테옹아사스 로스쿨을 졸업한 안 메오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1974~1981) 밑에서 엘리제 업무 경험을 쌓고, 프랑스민주연합(UDF)의 하원 원내교섭단체를 위해 일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 최초 독립광고대행사’를 표방하는 ‘이마주7’을 이끌고 있다.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해외 정부, 프랑스 주가지수를 좌지우지하는 40대 기업이 안 메오 회사의 주요 고객이다. 그 중 케링 그룹(피노-프랭탕-르두트의 후신)의 사장인 프랑수아 피노 덕분에 안 메오는 현재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안 메오는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을 받을 때 피노에게 서훈을 부탁했었다(<르피가로>, 2016년 6월 10일). 피노의 자유주의적인 신념은 자유지상주의 미국 소설가 에인 랜드를 동경하는 안 메오가 피용을 따르게끔 만들었다.(3)(<로피니옹>, 2016년 11월 21일)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을 찬양하며 합의를 자유자재로 무시한다. 그러나 우파 대선 후보자인 피용의 측근 사이에서 권세 있는 가문에 속하고 가장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순응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을 통해 내실 있는 인척 관계를 형성하려고 애쓴다. 후원자를 담당하는 아르노 드 몽로르는 킬베스트에서 일한다. 이 금융대기업은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에서 양조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유럽 귀족과 인척 관계를 맺은 벰베르크 가 7대 후손의 소유이다. 드 카스트리 백작은 포부르 생제르맹의 토지 전체를 소유한 친인척을 둔 사촌의 딸과 결혼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정부나 경제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거대 부르주아 집단에 소속된 이들은 (일부는 귀족 출신인) 가계의 권력을 영속적으로 이어가며 공익을 보장하고 국가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피용을 지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국가 고위공무원의 자제이거나 부모로, 손꼽히는 공립학교(에콜폴리테크니크 또는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행정 비책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공이나 민간 부문의 틈새를 활용해 부를 축적했다. 도지사의 아들이자 그 자신도 도지사와 국무보좌관을 지낸 장폴 포제르는 피용 내각을 이끈 후, 공공기업이지만 증권시장에 상장된 CNP보험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2012년 장마르크 에로가 전임 총리 피용이 그에게 “단 한 가지 부탁하는데 국무조정실장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프랑수아 올랑드는 아마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35만 유로나 주라니 미쳤군!”이라고 개탄했을 터다.(4) 2015년 포제르는 그렇게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ENA 입학시험 심사를 총괄할 틈도 낼 수 있었다. 

피용 후보자는 앙투안 고세그랭빌의 지원도 받고 있다. ENA 출신 고급관료의 아들이자 자신도 ENA를 졸업한 그는 국가회계감사원으로 일하다가 2000년대 초 관직을 버리고 변호사가 됐다. 피용 내각의 국무조정실 차장과 국가예탁원 부원장을 지낸 후 굴지의 대기업 여러 곳에서 이사직을 수행했고 인수합병 전문 로펌 BDGS 아소시에를 세웠다. 국가가 생산 분야에서 손을 떼고 규제를 완화하며 시장을 개방해 국제적인 경쟁 대열에 합류하는 시국에는, 짭짤한 수입을 벌어들이는 자리로 이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고위공직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그는 “예외적인 동물”(<로피니옹>, 2016년 1월 15일)임을 자칭해 마지않았다. 

그래도 순수한 ‘국가 귀족’의 후예인 그는 국가를 위해 일하기는 했었다. 마르크 라드레 드 라샤리에르는 1968년 ENA를 졸업하자마자 관직을 떠나 수에즈운하회사와 로레알 그룹 재무팀에서 일했다. 백만장자가 된 그는 피말락 지주회사를 운영 중이며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라 르뷔 데 두 몽드(la Revue des deux mondes)>가 있다. 그는 페넬로페 피용에게 잡지사 내 한 자리를 마련해줬고, 칼럼니스트 프란츠 올리비에 기베르트의 배우자이고 <엘르> 잡지 편집장을 지낸 발레리 토라니앙을 편집장으로 임명했다. 또 기베르트는, 전직 장관 제라르 롱게의 딸이자 피말락의 홍보팀장인 엘리즈 롱게와 함께 편집위원을 맡았다. 피말락 웹사이트에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스탕달의 사설을 실었던 유서 깊은 정기간행물 <라 르뷔 데 두 몽드>가 이제 “프랑수아 피용, 에디트 드 라 에로니에르, 조르주 샤르파크 등 현대 사상가와 행동가의 글을 펴내고 있다”고 소개됐다.

자유주의 성향의 정기간행물 중 최장기간 발행되고 있는 <라 르뷔 데 두 몽드>는 “중용과 신중함을 추구하고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실용적인 정신을 간직”하고 있음을 표방한다. 이는 피용의 특별자문 제롬 샤르티에가 염원하는 지식의 절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유로디즈니 감독이사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비르지니 칼멜의 반려자이자 발두아즈 하원의원인 그는 루아요몽 수도원에서 매년 열리는 ‘대담’의 기획자다. 루아요몽 대담이라고 불리는 이 포럼에는 경제계 인사, 고위공무원, 각계 대표자 등이 모여든다. 2016년 포럼의 주제는 ‘신자와 시민’으로 대선 후보자 피용의 마음에 쏙 들만 한 것이었다. 프랑스은행 총재인 프랑수아 빌루아 드 갈로는 이 자리에서 “경영자로서 예수의 경험”과 “갈릴리 출신 제자 12명으로 구성된 소박한 집단을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온 국제기업으로 거듭나게 한 그의 놀라운 조직운영 방식”을 언급했다.
프랑수아 피용의 충실한 지원자들도 분명 그를 추종하는 신자이다. 피용의 선거운동조직을 이끄는 파트릭 스테파니니는 과거 알랭 쥐페의 오른팔이었고 ‘상스 코묑(상식)’ 단체가 파리 하원의원인 피용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마니프 푸르 투스(만인을 위한 시위)’에 기원을 둔 이 단체의 대변인인 마들렌 드 제세도 선거운동조직에서 한 자리 차지했다. 선거운동을 조율하는 역할은 고지식한 가톨릭교도이자 방데의 상원의원이고 필립 드빌리에의 자문인 브뤼노 르타이요에게 주어졌다. 개신교로 개종한 제라르 라르셰 상원의장은 아마 모든 종파와의 대화에 찬성할 것이다. 그는 피용과 노동조합 집행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샤트리에는 “프랑수아 피용은 극우파와 어떤 관계도 맺은 적이 없었다”라고 확언했다(BFM TV, 2016년 11월 23일). 그렇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전직 정무차관 에르베 노벨리와 전직 장관 롱게는 메오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극우에서 지스카르주의로 넘어온 급진적 반공산주의 운동가를 의미하는 ‘옥시당 세대’에 속한다.(5) 전직 국방부장관 샤를 미용과 부인인 철학자 프랑수아즈 델솔은 오푸스데이회와 가까운 전통주의 리용 우파의 지지자이다. 1970~80년대 뒤죽박죽인 경제자유주의의 선봉장이었던 그들에게, 피용은 “경제를 자유화”할 수 있는 후보자로 비친 듯하다. 알랭 마들랭의 측근인 노벨리는 프랑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경제자유와 사회진보를 위한 단체(Aleps)’와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6) 1973년 국민전선(FN)의 초자유주의 공약을 작성한 롱게는 오랫동안 극우 성향 ‘오를로주 클럽’의 명예회원이었다. 이민과 동성애에 관한 그의 입장은 극우파에 가깝다.

소외된 드골주의적 가치의 상징인 피용은 자유주의 진영의 주요인사 두 명, 니콜라 바베레즈와 마티외 렌의 지지를 받았다. 니콜라 바베레즈는 감사원 자문을 거쳐 변호사가 됐고 <르푸앵>과 <르피가로>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자유주의 공약이 바로 진짜”(BFM 비즈니스, 2016년 11월 28일)라고 옹호했다. 에세이스트이자 컨설팅업체를 이끄는 마티외 렌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정치인 피용의 사상적 탈바꿈을 환영했다. 그는 “이제 피용이 최근 취약해진 주권 정부에 힘을 실어주며 큰 정부의 거품을 빼서 (중략) 국가 경제 자유화를 이뤄야 하는 시급성을 인지했다”며 기뻐했다.(<르몽드>, 2016년 11월 22일)

은행-보험과 경영과 홍보의 연합은 가톨릭 부르주아에 뿌리를 둔 피용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다른 대선 후보자들, 특히 엠마뉘엘 마크롱의 참모진에서도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는 40년 전부터 프랑스 권력 구조에 영향을 미친 신자유주의화 과정의 산물이며 경제 질서에 대한 최소한의 정치적 통제와 민간금융‧상업‧산업계 권력의 대거 귀환을 의미한다.  


글·프랑수아 드노르 François Denord 
& 폴 라그노이모네 Paul Lagneau-Ymonet
사회학자, 공저로 <권력자들의 협업>(레종다지르 출판사, 파리, 2016년)이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미셸 팽송 & 모니크 팽송샤를로, <부자들의 대통령,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의 과두정치를 살펴보다 Le Président des riches. Enquête sur l’oligarchie dans la France de Nicolas Sarkozy>, Zones, Paris, 2011.
(2) 프랑수아 부바르 & 에릭 라바예 & 카림 타제딘, ‘Case study: Undertaking reform in France’, <McKinsey Quarterly>, Paris, 2009년 6월. 
(3) 프랑수아 플라오, ‘신도, 주인도, 세금도 없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8년 8월호.
(4) 제라르 다베 & 파르리스 롬, <대통령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말들: 대통령 임기의 비밀 Un président ne devrait pas dire ça: Les secrets d’un quinquennat>, Stock, Paris, 2016.
(5) 프레데릭 샤르피에, <옥시당 세대 Génération Occident>, Seuil, Paris, 2005.
(6) <프랑스식 신자유주의, 정치 이념의 역사 Le Néolibéralisme à la française. Histoire d’une idéologie politique>(Agone, Marseill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