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로스 갈리, 클린턴 행정부의 눈엣가시

2017-02-01     장 지글러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부트로스 갈리는 유엔 사무총장직(1992~1996)을 단임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다. 장 지글러 스위스 외교관은 최근 저서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후임자가 가야 할 ‘좁은 길’을 보여준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안토니오 구테헤스가 공식적인 업무수행을 시작하는 시기는 내년 1월, 새로운 미국 대통령의 취임과 같은 시기다.

1991년 8월 소련 붕괴가 시작됐다. 소련의 늙은 관료들은 부패한 경찰독재를 강요했다. 결국 칼 마르크스가 바랐던,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찬양했던 정부의 모습과는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뉴욕 유엔(UN) 본부 건물 38층에 있었던 한 비범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이하 ‘부트로스 갈리’ 또는 ‘갈리’) 유엔 사무총장이다.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는 지식인, 오랜 기간 정무 경험을 쌓아온 이집트 파샤, 섬세하고 박식한 법학자 등으로 알려진 부트로스 갈리는 당시 세계정세를 즉각 파악했다. 그는 유엔 사무총장(1992~1996)으로서, 유엔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주도적으로 행동했다. 1993년, 부트로스 갈리는 1948년 파리 회의 이후 첫 번째 세계인권회의를 오스트리아 빈에서 소집했다. 약 반세기 간 지속됐던 냉전을 종결 짓고, 새로운 선언문에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포함시키고자 개최한 회의였다. 당시 빈 회의에서 부트로스 갈리는 인권에 대해 멋진 연설을 한다. 

“인권은 인류 공통의 언어입니다. 언어가 있기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들의 역사를 글로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권은 모든 정책의 궁극적 이상이며, 움직이는 권리입니다. 그렇기에, 인권은 불변의 게율이며, 동시에 역사인식을 표현하는 목적을 지닌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인권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권은 모든 국가가 가진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인류 공동체임을 확인해주는 가치의 본질, 타협할 수 없는 권리가 바로 인권입니다.”(1)

헤겔의 표현을 빌자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및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포함하는 인권은 상대적 절대성과 구체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인권은 우리 역사의 지평선이다. 하지만 어떤 힘으로도 타당성을 확인할 수 없는 권리는 빈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 실제로 죄 앞에서 인권은 인권과 관련된 확실한 증거, 인권을 설명할 신뢰성이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말하는 주체의 진정성, 정직성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트로스 갈리는 이러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 순간에 모인 171개국 대표에게 부트로스 갈리가 제출한 ‘비엔나 인권선언문’ 결의안은 1993년 6월 25일 채택된다. 이후 시민적·정치적 권리 및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포함한 모든 인권의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연관성이 선언됐다.(2) 한편, 비엔나 인권선언문 채택 당시 부트로스 갈리와 공개적으로 대립할 것으로 우려했던 미국은 기권을 택한다. 지금까지도 미국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및 특히 식량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부트로스 갈리는 빈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둔다. 그때까지 유엔은 제네바 팔레 윌슬 건물에 있는 인권보호증진센터만 운영 중이었으나, 부트로스 갈리가 ‘인권고등판무관’이라는 명칭의 새로운 인권기관 설립을 투표안건으로 제시한다. 설립제안은 훌륭한 계획이었다. 새로운 기관 설립으로 기능이 약한 제네바 인권센터를 확대하고, 센터의 권위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센터 격상은 허울뿐이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미국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기관을 유엔 사무국 산하 기관으로 설립하자는 제안을 결국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고등판무관은 행정, 정책, 예산에 대한 독립성이 없고 자체적 이사회가 없는 기관인 셈이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2016년 2월 16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나는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이집트는 압델파타 알시시 대통령 정권의 부패와 횡포로 피투성이 국가가 돼버렸다. 이집트 경찰은 매년 남녀 구분 없이 민주주의자, 대학생, 노조원 수천 명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있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알시시 대통령은 반정부자로 의심되는 베두인 마을을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그는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잇는 라파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2006년부터 이스라엘의 경제 봉쇄로 묶여 있는 180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신적·경제적 고통이 심화됐다.

알시시 독재 정권과 인권이사회의 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 완고한 태도를 취하는 프레즈 페니쉬 인권고등판무관 ‘북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 사무국장은 이집트 정부와 최소한의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교묘한 전략을 쓰고 있다. 알시시 대통령은 우둔하고 잔인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파렴치한이지만 서구 국가에 유용한 군사독재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서구 국가들, 특히 프랑스의 위선은 참으로 놀랍다. 2016년 4월 17일 이집트를 방문한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특별한 관계’를 치켜세웠다.(3) 올랑드 대통령의 방문으로 프랑스와 이집트는 18건의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 대부분이 군사무기 주문에 관한 것이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일생을 바쳐 자랑스럽고 관용 있으며, 발전된 모습의 이집트를 구현해낸 인물이다. 그의 아내 레이아 마리아 부트로스 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역시 이집트 콥트 기독교인이다. 그의 조부 부트로스 파샤 네루스 갈리는 완고한 민족주의자로, 오스만 제국 지배시절 이집트 총리를 지냈는데 1910년 영국 첩보원에게 암살당했다. 소르본 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은 부트로스 갈리는 프랑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갈리는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서 첫 유엔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던 시절, 제네바로 종종 출장 왔던 때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유엔 소속 경호원과 중무장한 제네바주 경찰요원이 제네바 국제공항에서 부트로스 갈리를 마중 나갔다. 검은 리무진 차량 행렬은, 팔레 데 나시옹의 본관 문을 피해 쓰레기장 앞을 지나 본관 1층 주방 입구로 향했다.

카나 학살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다

“본부 건물 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당신은 운이 좋군요.”

부트로스 갈리는 가끔 나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이집트 외무부 장관 시절이던 1977년 안와르 알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했을 때 대통령을 수행했다. 풍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국회 크네세트에서 이집트 대통령이 낭독한 화해의 연설문을 갈리가 썼다고 한다. 그런데 1981년 10월 6일 카이로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안와르 알사다트 대통령은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부트로스 갈리 역시 극단주의자의 암살 대상이었다.

제네바에는 부트로스 갈리의 절친한 친구인 조르쥬 아비 사압 국제법 교수가 살고 있었다. 아비 사압 교수와 그의 아내 로즈마리는 몽트뢰에 위치한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매일 저녁 그 저택에서 열정적인 토론의 장이 열리곤 했다. 나는 아내 에리카와 함께,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모임에 참석했다. 부트로스 갈리의 박식함, 그리고 유머감각과 반어법은 대단했다. 게다가, 그는 대화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갈리는 마른 체형에 무척 큰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 안경으로도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은 덮이지 않았다. 그가 친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지식의 향연이었다. 

한편 1996년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 남부 지역을 공격한다. 성경에 나온 지역인 카나(4)에 레바논국제연합잠정군 부대가 주둔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여러 마을을 폭격했고, 수백 명의 농민가족이 카나로 피신했다. 이스라엘 포병대가 작은 마을을 포격해 남성, 여성, 어린아이들 백여 명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부트로스 갈리는 즉시 네덜란드 장군 책임 하에 국제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매드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부 장관은 위원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트로스 갈리는 이를 거부한다.

유엔 사무총장은 5년 임기를 두 번 연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996년 말 부트로스 갈리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자,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는 말을 듣지 않는 갈리 유엔 사무총장의 연임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글·장 지글러 Jean Ziegler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이 글은 그의 저서 <Chemins d’espérance. Ces combats gagnés, parfois perdus mais que nous remporterons ensemble> (Seuil, Paris, 2016)에서 발췌한 것이다. 국내에 잘 알려진 저서로는 2007년 출간 이후 30만 부 이상 판매된 장기 베스트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ée a mon fils> 등이 있다.

번역·윤여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엠마누엘 드코, 세르쥬 수가 공동집필한 글을 모은 <Mélanges offerts à Hubert Thierry. L’évolution du droit international> (Pedone, Paris, 1998) 내용 중 에르베 카산의 “La Vie quotidienne à l’ONU du temps du Boutros Boutros-Ghali”에서  인용.
(2) ‘비엔나 인권선언 및 행동계획(Déclaration et le programme d’action de Vienne)’, www.ohchr.org
(3) Hélène Sallon, “En Égypte, Hollande et Sissi soignent leur relation spéciale”, <르몽드>, 2016년 4월 19일자 기사 참고. 
(4) 성경에는 ‘갈릴리의 가나(Cana)’로 기록됨. 예수가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첫 기적의 장소(요한복음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