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경찰은 무엇을 하나?

2017-02-01     앙토니 카이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어둠이 내렸다. 국가비상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이 거리로 나와 교통은 혼잡했다. 두건을 쓴 사람도 있는데, 점퍼가 불룩한 것을 보면 옷 속에 무기를 감춘 듯하다. 시위대가 향한 곳은 프랑스 대통령과 내무장관 관저가 있는 보보광장이다. 국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어느 누구도 시위를 해서는 안 되는 ‘금지구역’이다. 발을 들이는 즉시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 고무총 세례가 쏟아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달랐다. 시위대가 다름 아닌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집회와 시위는 2016년 10월 17일부터 계속됐다. 10월 8일, 파리남부 에손느 지역의 비리샤티옹 지구에서 화염병 공격을 받은 경찰관 4명 중 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후, 스스로를 ‘사회의 청소부’라 여기는 ‘성난’ 경찰들이 ‘염증’과 ‘분노’를 표출하고 나선 것이다. 

비정치적, 비노조적 성격을 표방하는 경찰 시위대는 ‘성난경찰운동’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집단시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낙후된 경찰서’, ‘부실한 차량과 보호장비’, ‘초과근무 수백만 시간 누적.’ 이들이 초기에 내건 슬로건은 물질적 요구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중도에 여러 노조가 편승하면서 정치적 색채가 짙어졌다. 용의자 도주 또는 경찰 저지선이 뚫린 경우, 정당방위를 적용한다는 내용의 ‘무기사용 관련법 개정’, ‘경찰모욕죄 처벌수위를 법정모독죄와 동일한 수준이 되도록 두 배 강화’, ‘기동대 및 구조대 공격에 대한 의무적 양형제도 도입’ 등이 그 예다. 참고로 의무적 양형제도는 ‘형량의 개별화’라는 헌법적 가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2014년 10월 1일에 폐지됐다. 
10월 26일, 시위대를 맞이한 내무장관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해했다”고 발언했다. 참고로 프랑스 공무원 노조가입률은 11%인데 반해 경찰 노조가입률은 49%에 달한다. 12월 21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경찰의 무기사용 요건을 헌병과 동일한 수준으로 강화하는 법안’을 검토했다. 또한, 시위대는 노동조건 개선, 장비 개선, 수사관 익명보장제도, 행정절차 및 형사소송절차 간소화 등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2억 5천만 유로가 지급됐다. 이 밖에도 경찰이 사건을 넘긴 이후에도 형사소송상 후속조치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법제도를 위협하는 권리”라는 해석도 있다. 

경찰 및 군인 유권자의 50%를 차지하는 국민전선당의 지원에 힘입어, 경찰들은 헌병, 소방관, 의료진 등 다른 안전부문 종사자들도 시위에 끌어들이고 있으며, ‘시민들’ 역시 참여하길 촉구하고 있다.(1) 과연 이것을 폭동의 조짐으로 봐야할까?

1958년과 1983년, 두 건의 역사적 선례

이 같은 거리시위가 21세기 들어 처음 보는 일 같겠지만, 사실 두 건의 역사적 선례가 있었다. 각각 1958년 3월 13일, 1983년 6월 3일에 발생한 사건들로, 지금보다 정치적 색채가 더 짙었다. 먼저, 1958년 사건은 정치학자 엠마뉘엘 블랑샤르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서술했다.(2) 프랑스 제4공화국 말기,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던 펠리스 가이야르 정권은 알제리 독립전쟁이 프랑스에 입힌 피해를 구실로 경찰이 요구한 특별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경찰노조(SGP)를 선두로 경찰관 5~6천 명이 경찰청 앞뜰에서 집회를 열 었다. 소란스럽지 않은, 허가된 집회였다. 

그러나 극우파들이 가세하면서 조용하던 집회는 팔레 거리를 점령하는 시위로 확대됐다. 경찰들은 호루라기로 박자를 맞추며 “수당! 수당!”을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몇몇 극우파들이 SGP 대표들을 앞지르더니, “의회로! 의회로!”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관 1,500~2,000명이 의회 앞으로 몰려갔다. 여기저기에서  “배신자!”, “개자식!”, “의원들을 처형하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무허가 시위였지만, 의회를 경호하는 기동헌병대도 시위를 해산시키려들지 않았다. 당시 젊은 의원이던 푸자드주의(반의회주의적 극우운동) 장-마리 르펜은 의회 안으로 진입하자고 시위대를 부추겼을 것이다. 마침내 대표단은 의회로 진입해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시위대는 더 이상의 사고 없이 초저녁에 해산했다. 앙드레 라일론느 파리경찰청장은 사임했고, 모리스 파퐁이라는 인물로 대체됐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드골 장군이 권력을 잡는다. 

그로부터 25년 후,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로베르 바댕테르가 경찰들의 새 표적이 됐다. 1983년 6월 3일, 경찰들은 법무부 앞에 모여 “바댕테르는 살인자다!”, “바댕테르는 강도다!”, “바댕테르는 사임하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경찰청 앞뜰에서는 트뤼덴 거리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동료경찰 두 명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이 날은 ‘안보 및 자유’에 관한 법이 최종적으로 폐지된 날이기도 했다. 잠시 후 장례행렬이 경찰청 앞을 떠나 방동광장에 이르자, 안전선 확보를 위해 길게 늘어선 경찰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었다. 법무장관이 비판받는 이유는 1981년 10월 통과된 사형제도 폐지안과 법무부의 ‘지나친 관용주의’ 때문이다. 경찰들의 말마따나, “우리가 체포하면 판사가 놓아주는 식”이었던 것이다. 같은 날 오후, 엘리제궁과 내무부 앞에서는 극우파 경찰노조가 벌인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장 페리에 파리경찰청장은 사임했고, 폴 쿠세랑 경찰청장은 해임됐다. 그리고 ‘폭동’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수호하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현재는 어떠한가? 일부 경찰들이 ‘거친’ 시위를 불사하고 있다. 마치, 지난 2016년 봄에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진압했던 노동법 반대 시위대와 상당히 흡사한 모습이다. 이는 아마도 경찰기관이 사회국가에서 형벌국가로의 변혁에 대한 대가를 두 배로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 여파가 사회적으로는 긴장을 고조시켰고, 경찰 내부적으로는 사명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과거, 민경협력을 중시했던 ‘지역사회 경찰활동 제도’는 경찰과의 연락, 범죄 방지, 정보 확보를 원활히 만들었다. 그러나 니콜라 사르코지에 의해 2003년에 폐지됐고, 대신에 억압적인 경찰제도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세바스티앙 로쉐 연구원을 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경찰이 국민에 대해 갖는 불신은 국민이 경찰에 대해 갖는 불신보다 더 심하다. 경찰들은 시민과 가까워지겠다는 의욕이 없다.”(3)

우리는 대립적 논리에 놓여있다. 즉, 경찰들은 스스로가 성채 안에 포위당한 상태라고 느낀다. 모든 시민은 용의자처럼 보인다. 극단적으로 가면, 이들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무력화시키는 것이 옳다는 논리에 이르게 된다.

확실히 초반에 경찰들이 비판한 것은 결과중심적 정책이었다. 또한, 경력이 많은 경찰은 사무실에 ‘후퇴’해 있고, 경험이 가장 부족한 경찰이 가장 민감한 지역에 파견되는 세태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을 비판했다. 민감한 지역에서 경찰이 심하게 배척당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공정치 못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경찰들은 인종과 사회출신에 따라 사람을 차별대우했고, 이민자 출신 청년들만 반복적으로 검문하는 등의 행태를 부렸던 것이다. 게다가 검문 중에 경찰의 손에 죽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2016년 7월 보몽-쉬르-우아즈 지역에서 일어난 ‘아다마 트라오레 사건’처럼 말이다. 이때도 정부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던 ‘검문증 발급제도 도입’을 포기하는 등 타협적인 모습만을 보였다. 

경찰이 바라는 것은, ‘사회수호’라는 이름으로 치러야만 하는 전쟁에서, 보다 넓은 운신의 폭을 보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라 함은, 과연 어떤 사회를 말하는 것인가? 물론,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필요하다.”(프랑스 인권선언문 제12조) 하지만 거리의 범죄에 치중하기보다는, 더 심각한 범죄 해결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사이자 대학교수인 벵상 시제르는 이렇게 설명했다.
“심각한 범죄형태란, 사회의 민주주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범죄를 말한다. 그것은 조직범죄와 금융범죄인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실상 이런 범죄형태는 거대한 경제·금융범죄의 상부구조와 활발한 돈세탁 구조에서 파생된다. 이 범죄들은 서민지역의 ‘지하경제’에 연루된 각종 불법거래는 물론, 여기서 파생된 폭력보다 더 가시적이다.”(4)

경찰시위가 이런 동기에서 시작됐다면, 시민과 경찰의 관계는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앙토니 카이에Anthony Caillé 
& 장-자크 간디니Jean-Jacques Gandini
파리 경찰 노동총동맹 노조위원장 & 프랑스변호사협회 소속 명예변호사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뤽 루방Luc Rouban, ‘Les fonctionnaires et le Front national’, ‘L’enquête électorale française : comprendre 2017’, <Cevipof, Sciences Po Paris>, 2015년 12월
(2) 엠마뉘엘 블랑샤르Emmanuel Blanchard, ‘Quand les forces de l’ordre défient le palais Bourbon(13 mars 1958). Les policiers manifestants, l’arène parlementaire et la transition de régime’, <Genèses> n° 83, 파리, 2011년
(3) <L’Obs> 발췌, 파리, 2016년 10월 27일
(4) 벵상 시제르Vincent Sizaire, ‘Sortir de l’impasse sécuritaire’, <La Dispute>, 파리,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