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대량학살, 동물 겨냥한 전쟁의 광기

2017-02-01     전채은

역대 최악의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보상금만 2천 3백억 원, ‘살처분’된 닭과 오리는 3천 만을 넘어섰다. 2003년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조류독감은 2~3년 주기로 발생하다가 2014년 이후 매년 발생하고 있으며, 도살되는 동물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잔혹한 살상이 계속되는가? 10년 째 계속되고 있는 조류독감 살처분 논쟁을 근본부터 되짚어보고자 한다. 


(장면#1.) 하얀 방역복 차림의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포대를 농장 밖에 쌓기 시작했다. 굴착기는 땅을 파고 사람들은 구덩이 안에 포대를 던져 넣었다. 산처럼 쌓인 포대는 꿈틀대기도 했고 조금 열린 입구 사이로 짐승의 날개가 삐져나오기도 했다. 포대가 열리고 그 중 몇 마리의 짐승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발버둥 쳤다. 그것도 잠시, 몸부림은 흙으로 뒤덮혔다. 

(장면#2.) 가슴에 독특한 문양을 단 수용복 차림의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자는 그들 모두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철문이 닫히고 불이 꺼졌다. 가스실. 그들은 살아서 그곳을 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전쟁포로, 그리고 성소수자들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이작 싱어는 이렇게 말했다.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나치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는 사람들이 도살장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곳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작가 찰스 패터슨은 <동물 홀로코스트>라는 책에서 동물을 도살하는 시스템을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했다. 이와 같이 나치의 대학살과 동물의 도살 현장을 같은 선상에 놓는 이유는, 결과의 잔인성이 사실상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현대 사회의 축산업을 ‘차가운 악’으로 규정했다. 동물을 학대하는 잔혹한 제도가 합리성에 기초한 제도와 법을 근거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대량학살과 예방실패, 그 진짜 이유

우리는 한 마리의 반려동물에 대한 잔혹한 학대사건을 보면 공분한다. 그러나 3천만 마리의 죽음을 놓고 ‘학대’라고 보는 사람은 그에 비해 적다. 2016년 말에 발생한 조류독감은 2017년 해가 바뀌며 3천만 마리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 규모도 역대 최대다.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정부는 반경 3km 내의 모든 닭과 오리를 ‘살처분’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시행되는, 이른바 ‘예방적 살처분’이다. 조류독감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내놓는 나라는 현재로선 없다. 병에 걸리지 않은 동물을 얼마나 죽이느냐로 대응책의 적극성을 평가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비교적 ‘적극적 살처분’ 국가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적극적 살처분’은 조류독감의 예방과 해결을 가져오지 못했다. 바이러스가 확인되면 다른 지역에의 확산을 막는 것이 최선이라는 ‘차단방역’은 사실상 현장에서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아무리 열심히 ‘살처분’해도 확산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백신정책을 써야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백신을 쓰면 조류독감 상재국이 돼버려 축산물 무역에 어려움이 생긴다. 이 때문에 아무도 선뜻 이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살처분’의 진짜 이유에는 축산기업의 경제적 이윤이 도사리고 있다. 조류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역사상 가장 젊은 편에 속한다. 즉, 역사가 짧은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고 변이가 많다. 따라서 백신을 개발해도 그것이 실효성이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차단방역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축산농장은 ‘효율성’을 앞세워 대부분 밀집돼 있으며, 닭과 오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그러니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질병에 순식간에 감염될 수밖에 없다. 

질병이 발생하면 방역과 ‘살처분’을 위해 만든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 표준관리절차)는 현장에서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반나절 안에 수십만 마리의 닭을 죽이라는 명령은 현장인력의 부족과 훈련부족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페이퍼 위의 원칙은 막상 현실 속에서 무너지게 된다. 한정된 시간 안에 수십만 마리의 닭을 자루에 담으면, 채 죽음에 이르지 못한 닭들이 발버둥 친다. 그러면서 닭털이 날리고 잔털과 분변, 먼지 등이 여기저기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과다한 ‘살처분’과 방역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소독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약간의 먼지와 분변가루, 깃털에도 바이러스는 여기저기 전달된다. SOP에는 ‘인도적 살처분’에 대한 지침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동물들이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허다하다. 살아있는 채로 생매장하는 그 잔혹성도 날짜가 갈수록 무뎌진다. 

끊임없이 희생자를 찾는 전쟁의 광기

조류독감에 대처하는 방식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한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광기다. 합리성과 논리, 이성은 사라지고 명분과 이미지, 합법적 폭력이 자리한다. 하얀 방역복은 전투복이 되고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은 끔찍한 살생에 부역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가해자의 폭력은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폭력의 대상과 주체, 어느 쪽도 보호하지 못한다. 언론은 잔혹한 살상에 우려를 표명하는 동시에, 축산업의 위축을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의 닭고기 시식회도 빠짐없이 다룬다. 너무나 많은 닭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키우고 죽이고 먹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데, 그에 대한 대책이 소비촉진이라니 모순도 엄청난 모순 아닌가. 정부와 생산업자는 ‘조류독감’이라는 용어가 부정적 이미지라는 이유로 ‘조류인플루엔자(AI)’로 대체하게끔 했다. 철저히 이미지를 통한 미화와 은폐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3천만 마리가 땅에 묻혔다. 

전쟁에는 예외 없이 희생자가 필요하다. 대규모의 폭력을 합리화하려면, 폭력에 가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폭력을 생산하는 집단의 비윤리성을 문제 삼지 않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폭력의 주체는 끊임없이 희생자를 찾아다닌다. 유대인, 성소수자, 장애인, 공산주의자 등은 나치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희생됐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공모자다. 자의든 타의든. 조류독감의 발생 원인을 따지는 데 철새 탓을 하는 것도 고전적인 방법이다. 최근에는 고양이까지 등장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고양이가 감염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당국은 재빨리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낮다’고 발표했다. 당장은 안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놀라운 변이능력이다. 

비좁고 비위생적인 축사에서 살아가는 닭들과 오리들 간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이는 더욱 촉진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조류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장벽을 뚫고 진입한다면 사람에 대한 피해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변이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업에 대해 말하는 축산업자, 예산과 인력에 대해 말하는 정부, 산업의 위축을 염려하는 사람들. 그러나 땅에 묻힌 3천만 마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무려 3천만의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명확한 가해자는 없는 상태. 과연 이 모순은 해결 불가능한가?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잔혹한 동물실험을 막 끝낸 사람이 집에 와서 반려견을 끌어안고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는 모순에 집중했다. 실험실 안의 동물과 반려견, 그리고 스테이크의 재료가 된 소는 모두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다. 그 고통이 과학적 근거와 인간의 합리적 추정에 의해 인정된다면, 이 고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동물과 흑인의 상황을 비교했다. 동물학대방지를 위한 법안을 만든 리차드 마틴과 함께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단체를 건립한 인물이 흑인해방운동가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사실은, 19세기에는 흑인에 대한 착취와 동물에 대한 착취가 동일선상에서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반드시 인간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인류역사의 발전방향은 약자의 권리 확대”라고 지적한다. 지금은 21세기다. 우리는 2000년대 이후 조류독감의 창궐이 아시아를 중심으로 반복돼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야생 조류는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쉽게 죽지 않는다. 그들이 다니는 길목에 밀집돼있는 동물공장속의 동물들이 문제다. 일찍이 환경오염과 동물복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던 서구에서는 육식의 소비가 꾸준히 감소돼왔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지난 반세기 간 닭과 오리 소비가 폭증했다.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립된 대량소비 대량생산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쌀밥과 채소 위주의 아시아 사람들의 식습관까지 바꿔 놓았다. 이런 시스템 상에서는 단시간에 동물을 대량생산해야만 한다. 그러니 동물 고유의 습성을 고려할 여지가 있을 리 없다. 가축은 고기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내고, 알을 많이 낳고, 젖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는 방향으로 개량됐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성은, 그를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닭장에 갇힌 암탉들은 부리로 먹이를 찾는 본성이 충족되지 않으면, 옆의 동료를 쪼아대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이에 대한 산업시스템의 해결방식이라는 것은, 암탉의 본성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쪼지 못하게 부리를 자르는 것이다. 비용절감을 위해 좁은 닭장에 가둔 닭에게, 부리를 자르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의사를 부르거나 마취를 하는 식의 자비를 베풀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니, 부리에 신경이 모여 있는 닭들에게는 처참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인공증식을 통해 번식된 닭들은 유전적 단일화로 질병에 취약하다. 뿐만 아니라, 대량축산업은 기후변화, 토양오염 등 환경에 엄청난 부담을 안기고 있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는 다양한 동물의 생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닭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 닭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우리의 식탁메뉴까지 전환시킨 것이다. 그러나 30억 년 지구 생물의 진화를 몇 가지의 개량기술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 속도보다 바이러스의 전이 속도가 빠르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인간은 지구 생물체 중 가장 늦게 출현한 막내다. 그런데 왜 이토록 오만한가!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소비를 줄이고 생산 시스템을 동물의 생태에 맞게 바꿔 닭들이 스스로 면역력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부의 축적을 넘어 나눔의 사회로 진화해야 하는 시점이다. 빈곤과 폭력, 착취와 차별, 생명학살. 이를 해소하려면, “정의실현의 대상을 모든 생명에게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자연이 이 참혹한 학살을 반드시 인간에게 되돌려 줄 것임을 믿는다.   


글·전채은(전경옥)
성균관대학교에서 중국철학과 한국고대사를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개 한 마리를 구조한 것이 계기가 돼 본격적인 동물보호운동을 시작했다. ‘동물을 위한 행동(Action for Animals)’의 설립자이며, 현재 전북대학교 수의예과에서 학생들에게 동물복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동물의 행복할 권리> (네잎클로바) 가 있다. 


동물을 위한 행동(Action for Animals)
2012년 설립된 동물보호단체로, 상업적 동물원, 동물체험전, 동물쇼에 반대하며 ‘갇힌 동물(Captive animals)’의 복지향상을 위해 전문적으로 정책·입법·조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actionforanimal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