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직선제 의미를 오독한 교수 집단의 이기심

‘해방 이화’에 거는 각별한 기대

2017-02-01     안치용
   
이화여대 학생들이 1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관 앞에서 이사회 대응 민주적 총장 선출 촉구 기자회견을 갖고 '총장선출시 학생들 의견 수용 및 참여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2017.1.16

2016~2017년은 이화여대로서는 건학 이래 가장 중요한 시기로 기록될 법하다. “고구마를 캐다가 무령왕릉이 나왔다”는 비유가 동원되는 지난해 이화여대생들의 저항. 교육개혁에서 시작해 사회개혁이 격발됐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저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크게 보면 이대 학생들이 대학의 존재 이유를 물었고, 그 과정에서 역시 학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정유라의 부정입학 의혹을 본격 거론했으며, 결국 ‘우연찮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뇌관을 건드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물꼬를 텄다. 대학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130년 이대 역사에서 처음으로 총장이 임기 중 사퇴했고, 정유라 입학 및 학사 부정과 관련된 교수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중도하차한 최경희 전 이대총장은 구속기소를 모면했지만, 그의 일생 중 가장 치욕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 전 총장이 출석한 국회 청문회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황영철 바른정당 의원(전 새누리당 의원)은 청문회에 출석한 최 전 총장에게 질문하기 전에 영화 <타짜>의 유명한 장면을 보여줬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배우 김혜수 씨의 대사를 들려주면서 “(저 장면 하나가) 이대 나온 여자들에 대한 자존심, 자부심 이런 걸로 표현되기도 하죠. 지금 최경희 증인. 130년 이대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지금 이 자리가?”라고 물었다. 물론,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는 간단히 말해 이대에 관한 긍정적 자부심이라기보다 저속한 허영심으로 통용된다는 측면에서 이대생은 물론 이대 동문에게 매우 모멸감을 주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황 의원의 빈곤한 상상력이 유감스럽지만 증인에게 이중으로 모욕을 주는 데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최 전 총장은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1)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금에서야 “나 이대 나온 여자야”가 진정한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물론 상처를 입었지만, 분명 마찬가지로 혹은 더 심하게 곪아있을 거의 대부분의 한국 대학들 중 처음으로, 그것도 학생의 힘에 의해 환부를 도려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대 나온 여자’는 이대생이었음을 앞으로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겠다. 또한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환의 시작점을 이대생들이 만들어냈다는 견지에서 이대생들은 이 시대의 대학생들 중 누구보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할 자격을 갖췄다. 

그 자부심의 형성은 저항과 마찬가지로 현재진행형이다. 저항정신에 부합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또한 공동체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아 상당한 결실을 맺는다면, 이대의 몇몇 교수들이 저지른 치욕을 씻고도 넉넉하게 남음이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그 첫 단추는 어떤 총장을 누가 어떻게 뽑는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누가 총장이 되느냐의 문제로 환원된다면, 저항의 성가(聲價)는 물론 저항의 의미 자체가 상당히 퇴색되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학개혁의 출발점, ‘좋은’ 총장의 선출

그렇다. 새로운 총장의 선출이 이화여대 변화의 첫 걸음이 된다. 최경희 전 총장이 지난해 10월 자진사퇴함에 따라 총장을 어떻게 선출할지를 두고 이대는 내홍을 겪고 있다. 현재의 핵심 쟁점은 총장을 직선으로 뽑되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와, 법인 이사회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로 인정하느냐로 좁혀진다. 법인 이사회와 교수집단 내 이너서클 중심의 사실상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총장선출 방식을 포기하고, 학교법인이 일단 직선제를 수용했다는 점은 분명 변화의 단초다. 그러나 그 변화라는 게 진정한 개혁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감으로는 1987년 6월 항쟁 시기에 전두환 등 군사독재 집단이 6‧29선언을 발표해 직선제를 수용한 즈음의 양상과 비슷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군사독재세력과 이른 바 민주세력을 대표한다고 주장한 정치 엘리트들은 6‧29 선언 이후 담합해 민중항쟁의 과실을 고스란히 가져간다. 독점이 과점으로 바뀌었을 뿐, 목격했듯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이 모두 권좌에 올랐고 대통령이 되지 못한 김종필은 수십 년에 걸쳐 권력을 분점했다(그렇다고 이대의 기존 주류 집단을 군사독재 집단과 동일시한 것이 아니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형태상의 비교에 불과하다). 

이대 직선제 도입 논의에서 과거 불편한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과민한 반응일까. 언론보도에 의하면, 법인이 제안한 총장선거의 집단별 투표권 비율은 ‘교수:직원:학부생:동창’이 ‘100:12:6:3’이다. 반면 학생들은 동창을 제외하고 ‘1:1:1’의 비율을 요구하고 있으며, 직원들도 대체로 학생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교수집단은 법인과 비슷한 속내일 테지만, 당장 학생들과 대립각을 세우면 전술적으로 좋지 않을 것이기에 아마도 최대한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며 법인의 뒤에 숨어 있을 공산이 크다.

총장선거의 집단별 투표권 비율에 이은 또 하나의 쟁점은, 현재 논의 중인 소위 총장직선제에서 득표수가 많은 2명의 후보자를 ‘무순위’로 법인에 추천하게 한 조항이다. 학생들은 타 대학들을 예로 들며 ‘무순위’ 추천을 수용하면 대학구성원의 선택에서 밀려난 2순위 후보자가 총장으로 최종 임명될 개연성이 상존한다고 우려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학교 구성원을 진정으로 대표할 사람이 총장이 돼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의 실현요구인 셈이다. 교수의 투표권을 과다책정하고 법인의 선택권을 일부 보장함으로써 기존 이너서클의 기득권과 교수집단의 이익을 동시에 보호하는 제도설계라는 게 학생들의 반발의 요지로 풀이된다.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작금의 논의에서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화여대의 새로운 시대를 열 첫 개혁이 단지 학내 권력투쟁 혹은 정치화의 외양을 띤다는 점이다. 물론 논의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투쟁은 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권리보호만 존재하고, 신자유주의적이고 시장주의적인 대학의 개혁과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방향설정이라는 ‘철학’이 부재한 지금의 논의 틀은 탈피돼야 한다. 대학개혁이 기업의 구조조정과 다르며, 대학총장 선출 또한 정치지도자의 선출과는 달라야 한다. 대학에서 ‘철학’이 사라지고 정치만 난무하는 살풍경을 보고 싶지는 않다.

기득권 보호와 배제, 
짬짜미 없는 철학의 원점에서 시작하자

학생과 교직원 집단이 총장 직선을 위한 선거인단 구성에서 동창을 뺀 것 또한 논란거리다. 물론 동창이 전체 동창을 대표한다기보다 법인 등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른 바 목소리 큰 세력을 대표하고 대체로 구시대 정신을 표방하리라는 우려는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학의 구성원을 또는 대학의 이해관계자 집단을 협소하게 정의하는 태도는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우려는 배제가 아니라 개방과 확장을 통해 극복함이 옳다.

대학 등에서 책임경영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첫 시간에 학생들의 머릿속 개념 중에서 가장 먼저 정정하는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관 혹은 조직”이란 기업의 정의다. 올바른 기업의 정의는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학의 구성원이 학생‧교수‧교직원의 3대 집단이라는 오랜 생각이 맞는지 의문이다. 대학 또한 특정한 목적을 지닌 사회적 기관으로서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이해관계자를 폭넓게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창 뿐 아니라 지역사회, 접근가능하고 참여 가능한 사회 전반의 여러 이해관계자를 새롭게 정의하고(Stakeholder mapping) 대학운영과 발전에 개입케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대학 운영과 발전에 새로운 시각과 영감이 될 수 있다.

총장선출 논의와 관련해, 2016년 하반기 100일의 투쟁을 통해 130년 이대 역사에 새 장을 연 이대생과 이대 동문이 현재 만연한 배제의 문법을 격파할 가능성에 나는 기대를 걸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교수 및 교직원 집단과 달리 밥그릇 이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배제문법의 격파로서 먼저, 논의 중인 총장직선 제도와 관련해 교수집단의 과다대표를 걱정한다면, 그 교수집단 내의 배제부터 걱정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총장직선제의 확정과 함께 불가불 선거인단이 결정돼야 할 텐데, 교수집단이 응당 전임교원으로 등치되는 고정관념은 깨져야 한다. 이대에서 다양한 형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전임교원의 투표권이 왜 원천적으로 봉쇄돼야 하는지 합당한 설명이 제시돼야 한다. “다른 대학이 그러니, 이대도 그렇다”는 얘기는 틀렸다. 

만약 교수집단의 투표권을 전임교원에게만 주기로 (전임교원들이)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사실 이 문제에 관한 한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게 비전임교원의 투표권이 애초에 안중에 없다), 많은 비정규직 교원의 투표권 배제 결정에 전임교원의 기득권 보호 외에 다른 납득할 만한 타당한 논리가 존재하는지를 결론 이전에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교원 외에 교직원의 범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의 검토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차제에 (만약 정말로 공동체이길 원한다면) 학교 공동체에서 배제를 줄일 수 있는 가능한 방안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발굴해야 한다.  

1월 6일 전체 교수회의가 열려 참석인원의 83%인 217명 교수의 찬성으로 직선제안이 통과된 이후 법인 이사회가 1월 16일 승인한 ‘총장 후보 추천에 관한 규정’을 보면 이대 총장 후보는 “만 65세 정년에 이르지 않은 이화여대 교원에 한해서”이다. 이대생들은 앞서 살펴본 대로 총장 직접선거인단의 학생할당 비율확대와 함께 총장 후보 연령제한 폐지를 위해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을 벌였다. 연령제한 규정이 “국회 청문회에서 최경희 전 총장의 반대편 증인으로 출석한 김혜숙 교수의 총장선출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 때문이다.(2) 

총장 후보의 연령제한 여부는 특정인의 총장 당선 가능성과 별도의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광장의 촛불이 문재인을 비롯한 다른 정치인을 빨리 대통령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켜진 것이 아니듯, 지금 이대에서 특정인이 총장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연령제한 여부는 그 자체의 타당성 기준에서 논의돼야 한다.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해 후보자의 연령을 제한하면 안 되겠지만, 특정인을 포함시키기 위해 연령제한을 제한해서도 안 된다. 

같은 관점에서 “이화여대 교원에 한한” 후보자격 규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 대학의 기존 관행이 어떠했든 새롭게 대학 공동체의 거버넌스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이대에서 후보자의 범위를 학교 밖으로까지 확장하는 조금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을까. 또한 총장 후보 자격을 꼭 ‘교원’으로 못 박아야 했을까. 교원은 되고 교직원이 안 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나. 혹은 다른 직업 종사자는?

이대 총장의 자격요건 중 ‘비혼’이 있기라도 한 듯, 역대 이대 총장 중 기혼자는 드물었다. 남성 총장 또한 아예 없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교육의 산실인 명문 이화여대의 총장이 갖추어야 할 비공식적 자격은 이밖에도 많을 것이다. 과거 이너서클에서 공식적으로 요구되는 능력 외에 희생과 헌신 등 개인적 자질을 암암리에 검증했다면, 총장 직선제 도입을 운위하는 마당에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그리고 시대정신과 부합하는지 등을 검토하고 토론하는 공론의 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총장 선출보다 대학의 재구축이 먼저

총장을 포함한 대학조직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흔히 “혼돈형(Chaotic)→권위형(Authoritarian)→베버형(Weberian)→전문형(Professional)”(그림 1)(3)의 유형론을 제시하는데 통상 앞에서 뒤로 진화한다고 간주된다. 전문성은 높고 관료성이 떨어지는 ‘전문형’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의견에 원칙적으로 반론이 없다. 국내 대학은 현재 베버형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보이는데,(4) 전문성, 관료성 모두 높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설명으로 보인다. 김창수 교수 등(2012)은 이에 조응해 총장 선출 방식은 대체로 임명제→교수직선제→간선제(공모제) 및 임명제의 변화 패턴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대의 현 상황과 관련성이 더 커 보이는 모형은 에드윈 브리지의 집단의사결정론 모형(그림2)(5)이다. 의사결정에서 핵심적인 두 요소, ‘수용성’(또는 관련성)과 ‘질’(또는 전문성)을 X축과 Y축으로 놓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학생이나 동문은 관련성은 높으나 학교운영에 관한 전문지식이 떨어지고, 등록금 책정에 관여하는 회계전문가 등은 꼭 필요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으나 학교에 대한 애착이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구간에 속한다. 대학교수는 관련성과 전문성이 모두 높아 ‘완전 참여’ 구간으로 가정된다. 

현재의 논의에서 이 모델들은 단지 참고사항이다. 예컨대 이대 학교법인에서 총장 직선에 참여하는 선거인단을 구성할 때 전임교수집단에 과도하게 높은 가중치를 부여한 근거는 굳이 찾자면 ‘그림2’에서 발견된다. 비전임교수는 전문성은 인정되지만 관련성이 떨어져 ‘부분 참여’에 그치는 집단이라고 (아예 판단 자체가 없었지만) 판단한 듯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이대에서만 강의하지만 주업이 학교밖에 있을 때 관련성이 낮아 수용성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 모델을 받아들여 그 논리를 일부 수용한다고 해도, 특히 비전임 교원의 전면적 투표권 박탈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교육조직 유형론 모델 또한 당연히 절대적인 적합성을 갖지는 않는다. 자율성과 전문성을 모두 갖춰 가장 이상적으로 판단되는 ‘전문형’ 조직에 도달해도 다시 ‘혼돈형’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개별 조직들에서 전체 조직의 형태지향과 상반되는 특유의 관료성과 배타성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대학과 대학이 속한 사회의 속성에 따라 대학조직의 진화속도는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 있다.(6) 

요점은, 이러한 일반적 경향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 어떤 대학이 되기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대학이란 추상적 주체의 정향(定向)은 대학 구성원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으며, 역으로 대학 구성원 범위의 결정은 대학의 정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되먹임 구조 속에서 대학이 꿈꾸는 이상(理想)은 현재 대학 공동체의 ‘결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현실화한다. 현재 이화여대에게 가장 긴급한 결의는 총장 선출이 아니라, 확장성과 개방성을 전제한 대학의 정향 설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어떤 대학이 되기를 결심할 것인가

1866년 설립된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UC Berkeley, UC LA, UC Davis, UC San Diego 등을 포함한 10개의 캠퍼스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대학법인은 학생 1명(임기 1년)을 포함해 주지사가 임명한 18명의 대학법인 이사(12년 임기)로 구성된다. 이사 중에는 지역사회 대표자가 포함된다. 이 대학의 총장 선출방식은 우리나라 간선제와 임명제를 혼합한 형태로, 총장후보탐색위원회(대학법인 이사, 교수, 학생, 행정직원, 동문 대표, 대학기부자 망라)와 다양한 대학 이해관계자 대표들로 구성된 총장후보선출위원회를 거쳐 추천된 후보가 대학 이사회에 의해 총장으로 임명된다. 총장 물색과정에서 헤드헌터가 광범위하게 동원되며, 따라서 대개는 내부인보다는 외부인이 총장으로 선임된다. 우수한 인재를 총장으로 영입하기 위해 탐색과정에서 획득된 총장 후보자들의 모든 개인정보가 보호되는데 기밀보호는 공모제를 택하는 미국 대학에서 공통적이다. 

예로 든 캘리포니아 주립대처럼 많은 미국 대학들이 학교 외부의 폭넓은 인재풀을 활용하는 공모제 총장 선출 방식을 채택한다. 총장추천(탐색)위원회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며 운영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 집단을 참여시키고 민주적 절차를 중시한다. 

독일의 대학총장 선출방식은 ‘집단대표제’ 원리에 의한 간선제 방식이 주종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민주성을 중요하게 관철한다. 학내외 인사로 총장선출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총장 후보자의 자격과 자질을 규정한 후, 학내외에서 적격자를 공모해 3명 내외를 대학평의회에 추천하면, 평의회가 선출해 주정부가 임명하는 구조이다. 독일의 대학평의회는 학내 중앙 대의기구로 학내의 교수, 학생, 연구직원, 비연구직원이 참여해 총장과 학장 선임을 비롯한 모든 학사행정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프랑스 대학은 위원회 중심의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한다. 1968년 대학자치를 강화하는 고등교육법 제정 이후 의사결정기관으로 대학운영위원회, 대학생활위원회, 학술위원회라는 3개 위원회를 대학에 구성하며, 이 위원회들의 위원으로 구성된 총회에서 총장을 선출한다. 총장 선거권의 권한 비율은 구성원 집단별로 교수 40~50%, 학생 20~25%, 직원 10~15%, 외부인사 20~30%이다.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정부의 별도 임명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국과 일본 대학은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총장 선출시 교수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7)

잠시 대학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 유럽 등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개별 국가의 역사와 사정에 따라 총장 선출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 전에 분명히 할 것은, 총장 선출 방식만 다른 게 아니라 대학의 기능과 의미, 사회 내 위상 또한 다르다. 오히려 총장 선출 제도의 차이는 각국 대학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대학의 차이는 그 나라의 고등교육 정책과 철학의 차이로 올라간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이대에서 이제 총장 선출제도의 개선을 논의하고 있다. 변화의 시작을 만들어낸 건 물론 이대생들이다. 그렇지만 변화를 철학과 정향을 담은 확고한 개혁으로 전환케 하는 힘이 학생들에게서만 나올 순 없다. 제자들이 드높인 이대의 자부심을 교수들이 속절없이 까먹기에는 학위와 나이, 경륜이 아깝지 않은가. 총장 선출을 비롯해 학교 운영을 좌지우지하던 학교 법인과 이너서클의 권한을 조금 범위가 넓어진 일부 교수집단으로 넘기는 것이 총장 직선제 도입의 숨은 취지라면, 그런 총장직선제는 이화여대 발전에 지장을 줄 뿐이다. 

총장 직선제 도입이 누구를 뽑을지 뿐 아니라 누가 뽑을지, 어떻게 뽑을지를 심도 깊게 논의하는 자리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대 100일의 저항은 도로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덧붙이자면 총장을 언제 뽑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대 구성원들이 이대가 어떤 대학이 돼야 하는지를 끝장토론을 통해 결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대는 학생들의 수준에 걸맞은, 매우 좋은 대학이 되어야 한다. 지난해 이대생들의 저항이 우연찮게 사회변화를 추동했다면, 이제 이대와 이대 구성원에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적 혁신으로 한국 대학을 개혁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부여돼 있다.  


글·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1) YTN, “최순실 국정조사 4차 청문회”, 2016.12.15
(2) <일요신문>, “‘졸업·입학식 총장 없이 열리나’ 이대 직선제 선출규정 갈등”, 2017.1.26.
(3) Isherwood & Hoy의 교육조직 유형론(1973)
(4) 김창수 외, “총장선출제도에 대한 연구” 15쪽, 고등교육정책연구소, 2012
(5) Edwin Bridges의 집단의사결정론(1967)
(6) 박엘리사, ‘세계 우수대학 총장선출 제도-방법론 분석 및 이론적 논의를 중심으로’ 38쪽, <교육정치학연구>제19집 1호
(7) 김창수 외, “총장선출제도에 대한 연구” 15쪽, 고등교육정책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