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환자들이여, 단결하라!
[Dossier] 요지경 속 세계 의료 시스템
의술이 발달해도 질병 앞 불평등은 갈수록 커져
민간보험 문어발 영역 확장…공중보건은 뒷걸음
세계 의료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의학의 발전과 반복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질병 앞에서 체감하는 불평등은 크다. 이는 국가 간 그리고 각국 내 수많은 요인(환경·음식·직업 등)에서 비롯되지만, 의료 시스템과 비용 조달 방식에도 그 원인이 있다. 비록 일부 국가에서 공공보험의 장점을 발견(혹은 재발견)하고 있지만, 민간 보험사들이 문어발식 사업을 확장하며 도처에서 의료 시스템이 재정비되고 있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할 것 없이 세계의 어떤 국가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의료 시스템의 개혁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우선은 개혁을 반길 만한 이유가 많다. 아직 개척이 필요한 척박한 분야인데다 여전히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현 의료 시스템으로는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민간 의료 시스템의 천국인 미국, 또는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국가들과 함께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중국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건강보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시장 논리를 제한하려는 반면, 프랑스 같은 다른 선진국은 국가의 역할을 축소해 국가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데 총력을 쏟고 있다. 어이없게도 이는 역사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가장 완벽한 의료 모델로 소개돼온 미국 모델이 지금은 비효율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비록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국가의 회귀를 반기고는 있지만, 시장은 여전히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서로 닮아가는 미국과 프랑스
미국은 보건비 지출(200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5.3%)에서는 전세계 2위지만, 건강한 기대수명이 69살로 세계 30위에 그쳤다.(1) 비록 이런 결과가 사회보험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험 혜택을 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가 약속대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험 혜택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 단언할 수 없다.(2)
사회보험에 대한 아이디어는 19세기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노조가 탄생하면서 등장했다. 1883년, 독일을 통일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처음으로 직업과 관련한 상호 구조 및 사회보장 시스템 확장을 통해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다. 독일 정치계와 재계 지도자들의 목적은 힘든 노동조건의 충격도 견뎌낼 수 있는 건강한 노동력 확보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생활 여건의 개선을 촉구하며 사회투쟁을 전개하자, 이 제도를 시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다양한 시스템들, 일종의 반계급투쟁 장치들이 등장한다. 1945년 7월 5일, 프랑스의 임시 제헌국회는 “사회보장이 노동자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을 제거해줄 것”이라며 “노동자의 열등감은 자신과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유산계급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빈곤의 위협에 노출된 노동계급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명시했다.(3) 이에 전세계는 ‘만인의 건강권’을 인정하고,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를 출범시켰다. 1978년에는 194개 유엔 회원국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주에서 ‘알마티 건강선언’을 재천명했다. WHO 출범 6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갈 길은 험난하다.
아프리카 기대수명은 30대
국가 간 불평등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첫 진단이 내려졌다. 눈부신 의약 발전에도, 1990ㅍ~2006년에 31개국(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가봉은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의 기대수명, 특별한 장애 없이 살 수 있는 ‘건강한’ 수명이 오히려 줄었다. 기대수명 부문에서 아프리카가 단연 꼴찌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공화국의 기대수명은 29살, 앙골라는 31살, 콩고공화국은 37살에 불과한 반면 지구 저편 일본의 기대수명은 75살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부의 분쟁이나 전쟁으로 희생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빈곤과 의료장비 부족 때문에(4) 말라리아, 결핵, 설사병, 에이즈 등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을 숙명론이나 미스터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개발도상국(아프리카와 동티모르·라오스·방글라데시·버마 같은 일부 아시아 국가)에 편중된 이런 질병은 경제 발전, 즉 전문가들이 ‘역학적인 변화’라 일컫는 현상과 함께 줄어들고 있다. 선진국과 신흥국들은 만성질환(심장혈관 및 호흡기 질환, 당뇨, 암 등)에 더 신경을 쏟고 있다.
물론 이런 질병들이 개발도상국(가나·가봉·남아프리카공화국·파키스탄 등)을 비켜가지는 않는다. 이들 나라에서는 중산층의 등장과 함께 이런 질병이 증가하는 추세다. 마찬가지로, 결핵처럼 선진국에서 이미 자취를 감춘 질병이 러시아에서 다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국가의 재산과 보건 지출 비용 수준이 수명을 연장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원론적 진단은 유효하다.
전세계 인구의 20%(5)를 차지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이 최장수를 누리며 세계 보건비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 인구의 14%에 달하는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세계 보건비는 고작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시에라리온공화국과 콩고가 각각 GDP의 3.5%와 2.1%를 보건비로 쓰는 데 비해, 일본과 프랑스는 8%와 11% 이상을 쓰고 있다. 비록 미국의 사례가 증명하듯 보건비가 항상 제대로 집행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자연사가 아닌 대부분 부의 분배와 연관 있는, 이를테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을 구하자면 충분한 수준의 보건비 확충이 절실하다.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우리 모두는 의료 부족이나 혹은 의약 부재 같은 부당함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회 발전 비전에 대한 합의를 우리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콩도르세(프랑스 사상가)가 당대에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는 원칙을 제시했듯, 우리는 문제제기를 통해 이런 부당함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6)
만약 돈이 질병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긴요한 원동력이라면, 여기에는 훈련된 군대(의료인)와 효과적인 무기(의약·장비·교육)가 필요하다. 진료 접근성도 보건 조직과 자금 조달 방식에 좌우된다. 의료 체계는 3가지 주요 시스템으로 구분된다. 식민시대에 등장한 시스템과 옛 공산국가가 형성한 시스템, 그리고 주로 신흥국에서 변형해 시행하고 있는 선진국 시스템 등이다.
과거 식민국의 모델을 본뜬 첫 번째 시스템은 옛 유럽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ACP) 지역의 79개국이 발전시킨 피라미드 구조를 띤 의료 시스템이다. 예컨대, 이들 나라는 때론 이동진료팀이 상주하는 1차 기본 의료시설인 지역보건소와 2차 진료시설인 종합병원 그리고 3차 진료시설인 전문병원(클리닉)과 대학병원 등의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다. 19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이 국가들은 불안한 보건 시스템의 균형을 국가와 국제기구의 기금으로 유지했다.
국제기구들의 협박
하지만 WHO는 2008년 보고서에서 “구조조정 정책(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협상한 내용)은 공중보건 시스템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민간과 공공기관의 의료 제공의 격차가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WHO는 “보건 시스템 상용화에 대한 규제 완화가 보건 시스템을 비효율적이고 값비싼 것으로 만들고 있다. 시스템 상용화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질 낮은 진료로 이어졌다. 심지어 환자를 위험에 처하게도 한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콩고민주공화국을 예로 들며, “이곳에서는 일부 보건소 직원이 종종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환자 집에서 불법으로 맹장이나 기타 외과 시술을 자행하는 데 이를 ‘사파리 시술’이라 부른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콩고에서 보듯, 빈곤이 항상 부패를 동반한다.
한편 이들 나라엔 국제사회(WHO, 유니세프, 유엔 상호협력 프로그램과 주요 재단 등)의 지원이 꼭 필요하지만, 국제사회의 의견이 분분해 때로는 지원에 대한 최소한의 일관성을 확립하는 것조차 어렵다. 국제사회의 지원금을 받을 때면, 이 나라들은 보건소와 병원을 건축하거나 개보수하는 등 보건의료 개혁을 시도했다.
놀라운 일화가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올해 초반부터 유럽 국가들은 과다 비축한 신종플루 백신을 처분하려고 한다. WHO는 “95개 개발도상국이 그 백신을 필요로” 하지만 백신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비와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 1월 초까지 “단지 2개국만 백신을 확보한” 상태라고 밝혔다.(7) 사람들은 WHO가 내놓은 신종 플루 전염병 대책이 의료 현실보다는 제약회사의 압력에 못 이겨 내놓은 대책이 분명하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필요한 진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방증하듯, 영국의 세계 3대 의학저널 중 하나인 <랜싯>(The Lancet)의 연구원들은 지난 60년간의 ‘건강권’ 평가를 바탕으로 일반인도 “의료시설의 서비스 이용 및 접근은 가능해졌지만, 의료진이 환자들의 문화에는 둔감했다”는 총평을 내렸다.(8) 이들은 그 사례로 페루에서 실패를 거듭한 모성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프로젝트를 들었다. 페루 여성이 쪼그리고 앉아 출산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에 합당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상식이지만, 서양 상식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프리카나 심지어 인도의 식민지 시스템은 서양의 방식을 도입한 것이지만, 이것은 지역의 상식이나 관행(싸워서 지키지 않는 한)을 무시해버렸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전통의학 기반에다 서양 치료요법을 결합시켜 전염성 질환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옛 소련, 기대수명 되레 줄어
두 번째 주요 시스템은 과거 공산 소비에트 공화국의 시스템이다. 대형 병원이 운영하는 요양소(sanatorium) 시스템이다. 의사들이 환자에 밀착해 치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체제 말기에 이미 효능을 거의 상실한 이 시스템은 소비에트 공화국이 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경제가 붕괴되면서 정부의 보조금이 대폭 삭감되자 아예 붕괴됐다. 보건 기반이 후퇴(무상 의약제도 철폐, 병원 부문 민영화, 의료 장비의 노후화…)하는 순간, 공유 기준이 사라지고 고단한 삶이 시작되며 위험한 행동(폭력·알코올중독 심화 등)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90년 ‘건강한’ 기대수명이 69살이던 러시아는 2006년 66살로, 우크라이나는 70살에서 67살로, 카자흐스탄은 65살에서 64살로 줄었다. 잘못된 치료가 내성이 몹시 강한 결핵 같은 ‘변종’ 질병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 변종 결핵은 집단 생활과 부적절한 치료로 인해 과밀한 러시아 교도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즘은 기본 치료 네트워크와 사회보장제도 확립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기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선진국 시스템은 대중이 일반의·전문의·종합병원은 물론이고, 최첨단 의료기관들로부터 밀착 치료를 받는 시스템이다. 이들은 심지어 이 모든 시스템 안에서조차, 의료비를 국가(스웨덴과 영국)가 부담하는 무상 시스템인가 공공이나 민간이 제공하는 건강보험 시스템(독일·프랑스·일본 등)인가, 또는 대부분 민간 시스템(미국이나 중앙 유럽)인가를 구분짓고 있다.
만약 이 모든 의료 시스템이 요행에 생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면, 최초 옵션(공공 시스템이냐 혹은 민간 시스템이냐)이 중요하다. 의료 전문가 브뤼노 팔리에의 주장(9)처럼, 유럽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개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아닌 소득에 따라 의료비를 부담하고, 소득에 따라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건강 상태에 따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하지만 관대한 이 원칙들은 일각에서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보건비로 지출한 총액은 국민의 전반적 건강 상태와 기대수명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었다. 요컨대 보건비를 더 많이 지출한다고 해서 국민이 장수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일본은 프랑스(GDP 대비 11.4%를 보건비로 쓰며 평균수명은 73살)와 스웨덴(9.1%와 73살), 영국(8.4%와 71살)보다 적은 8.1%의 보건비를 쓰고도 건강한 기대수명이 75살에 달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형태와 노동여건 또는 음식이 장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방증이다.
미국 약값 지출 OECD 평균 2배
반면 보건비 지출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환자와 의사의 역학관계, 약품 가격의 통제(하든, 안 하든) 그리고 예방 비용 등이다. 약값 지출은 미국이 캐나다나 그리스, 프랑스보다 많다(OECD 국가 평균의 2배). 또 의약을 과잉 처방하는 국가로는 전세계 제약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는 중국이 단연 최고다. 낮은 임금에 시달리는 의사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처방한 의약품을 판매해 박봉을 메우는 데 능숙하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영국은 무상으로 기본적인 진료를 보장한다. 정부나 지역 단체가 공공시설비와 의사 비용을 봉급 형식(진료 횟수당 돈을 지불하는 프랑스와 달리)으로 지불한다. 물론 공공재정이 감소할 때면 서비스 속도도 느려진다. 이것은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의 대처리즘이 빚은 산물 중 하나다(대처는 영국의 위상과 경제가 흔들리는 이유로 영국 사회에 만연한 과잉복지 정책을 지적했다-역자). 2001년 영국 환자의 22%는 단지 병원에 예약하는 데만 3개월 이상(정확히 13주)을 기다려야 했고, 27%의 환자가 수술받는 데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10)
이후 영국 노동당 정부는 복지기금(의사와 간호사 수를 늘리고 이들의 월급을 올리며 재투자를 시작했다)을 늘렸다. 그러자 비록 모든 사람이 품질이 보장되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와 견줄 수는 없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나타났다. 시장경제 마니아들의 판에 박힌 생각과 달리, 공공 의료 시스템이 재앙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복지 지원 중단이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또 집단 전체가 의료보험 혜택을 볼 때, 지출하는 총의료비가 종종 감소한다는 것과 개인(가족이나 혹은 보험회사) 부담이 훨씬 준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의료비 개인 부담률은 일본 17.7%, 스웨덴 16.1%이며, 프랑스는 미국의 절반 수준인 20.2%다.
국가의 복지 지원 중단이 재앙을 부른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복지 시스템 중 가장 자유롭기로 유명한, 실패를 거듭한 미국 시스템을 살펴보면 된다. 일부에선 이런 미국 시스템을 가리켜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비웃고 있다. 직장인들은 회사에 보험료를 내고 회사는 여기에 돈을 보태 민간 보험회사와 보험 계약을 맺는다. 직장인의 3분의 2 이상이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을 취득한다. 자영업자나 파트타임 종사자, 영세 소기업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비용이 훨씬 비싼 보험에 들어야 해서 보험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사태는 직장이 없으면 보험 들 권리도 없다는 필연적인 귀결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 문제가 특히 심각한 것은 공식 실업률이 꾸준히 증가해 10%를 육박했기 때문이다. 65살 이상의 퇴직자에게는 최소한의 보험 혜택인 노인의료보험(Medicare)이 제공되고, 극빈층에게는 국민의료보조(Medicaid)가 제공된다. 이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이 미국 모델을 성공 모델처럼 소개하지만, 미국 국민의 6분의 1이 무보험 상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료 공백을 메울 비용을 마련하고 싶어한다.
미국엔 ‘시스템’이 없다
결국 최고의 보건 시스템을 갖춘 나라도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건경제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미국에서 “부자 동네에 거주하는 백인 여성의 기대수명은 86살인 데 비해, 빈민가 흑인 여성의 기대수명이 70살”임을 지적했다.(11) 16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래도 크다.
한편 WTO는 심지어 “만약 백인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사망률이 동등하다면, 1991년부터 2000년 사이 88만6202명이 목숨을 건졌겠지만,(12) 의료 발전 덕분에 구한 목숨은 17만6633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빈민가 글래스고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인도의 기대수명에도 못 미치는 54살이라는 연구자료를 내놨다.
이런 상황은 보건이나 재정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WTO가 지적했듯, 빈민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취약한 교육, 복지시설 부족, 실업과 고용불안, 열악한 노동 여건, 치안 불안, 게다가 이들이 가족 생활에 미치는 파급효과 등 많은 어려움을 안고 산다. 윌킨슨은 이런 사회·심리적 요인에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중되며 수명이 단축된다고 설명했다. 즉, 선진국에서의 가난은 건강을 해치는 심각한 요인이다.
외교적 언어에 익숙한 WTO 전문가들도 이런 자체 진단에 깜짝 놀라 노골적으로 “이런 현상은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보다는 일부의 이익을 두둔하는 정책, 대부분 헐벗은 다수의 이익보다는 힘있고 돈 많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한 정책이 빚은 결과”라고 질타했다.
심지어 전반적인 규제 완화를 주장한 OECD조차 민영화가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며 “이제 소수의 민영화 옹호론자만이 경쟁을 해결책으로 꼽는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효능은 많이 불투명해졌다”(13)고 인정했다. OECD 경제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회사가 시장규제 등의 조치를 강구해 (시장경제의) 결점을 고칠 필요가 있고, 극단적인 경우 추가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OECD가 마침내 묘안을 찾아낸 것일까?
민영화가 수명 단축시킬까?
그건 꿈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자신의 특권을 수성하기 위해 정치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보험 로비를 벌이고, 병원 민영화를 가속화하는 프랑스는 지금부터 2012년까지 파리 지역 공적 부조 기관의 일자리 4천 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의료보험공단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1980년에만 해도 의료보험공단은 의료비의 76.5%까지 지원해줬지만 현재는 73.9%만 지원해주고 있다.(14) 이것은 실제로는 환자가 지불한 의료비의 절반에 불과하다. 보험공단이 암 같은 장기 질환에 대해선 거의 다 부담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앓는 일상 질환은 평균 55%만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15) 디디에 타뷔토 교수는 “일부 지역의 기대수명이 방글라데시 수준으로 떨어져야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감지할 것인가?”라며 “민영화되는 사회보험”(16)에 경종을 울렸다. 이미 60살만 돼도 노동자층은 임원층에 비해 기대수명이 7년이나 짧다. 만약 진보의 수레바퀴를 계속 거꾸로 돌린다면, 수십 년 뒤에는 기대수명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불입하는 보험료(국민건강보험료·상호보험료)는 늘었는데 의료 서비스는 줄었다고 생각한다. 팔리에는 “이런 결과가 극빈층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불입하는 보험료는 증가하는 반면 서비스는 줄어든 현상이 보건 시스템의 효율성과 정당성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17) 혹시 이런 균열 현상이 현행 보건 시스템의 은밀한 목적이 아닐까?
글•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WTO가 발표한 2009년 건강보고서, 제네바.
(2) 1월 20일 웹사이트(www.monde-diplomatique.fr)에 게재된 기사 ‘오바마 혹은 종종걸음으로 헤쳐나가는 딜레마’ 참조.
(3) 알랭 바르조의 지휘 아래 발간된 저서 <1945~1981, 텍스트를 통해 보는 사회보장의 역사>, 파리, 1997.
(4) 2010년 1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매기 블랙의 기사 ‘뒷간의 위생학, 무지를 넘어라’ 참조.
(5) WTO의 통계자료를 소개하는 책 <건강 아틀라스> 참조.
(6) 2010년 1월 13일 프랑스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와 한 인터뷰 내용.
(7) 파리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G. 도널드 맥닐 주니어의 기사 ‘가난한 나라는 여전히 신종 플루 백신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프랑스, 2010년 1월 19일.
(8) ‘보건 시스템 및 건강에 대한 권리, 194개국에 대한 평가’, 런던, 주간지 <랜싯>, 2008년 12월 13일.
(9) 브뤼노 팔리에, <보건 시스템의 개혁>, Que sais-je, 파리, 2009.
(10) 위의 책 참조.
(11) 리처드 윌킨슨, <평등이 건강이다>, Démopolis, 파리, 2009.
(12) WHO의 2008년 보고서 참조.
(13) <보건 의료에서 돈의 가치 향상을 바라는 OECD>, 파리, 2009.
(14) 1966년에 44%이던 의료비 지원 비율은 1980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하다가 이후 하락했다.
(15) 상호보험과 국민보험이 서로 보완적으로 보험 공백을 메울 수 있지만, 보험기관들은 이 기능을 점점 축소하고 보험료만 올리는 추세다. 특히 퇴직자들의 보험료 부담 비율이 늘고 있다. 프랑스인 중 8%는 상호보험이 없다.
(16) 1월 13일 <르몽드>와의 인터뷰 내용.
(17) 브뤼로 팔리에의 책 <보건 시스템 개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