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무슬림, 터키의 대담한 외교
분쟁 중재 주도하며 국제무대서 위상 높여
중동지역 입지 강화로 EU 가입 뜻 이룰까…
집권 정의개발당(AKP)과 대립관계에 있는 터키의 헌법재판소는 지난 1월 21일 현 정부가 군사법원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입법한 법안이 무효라고 선고했다. 또한 터키 헌재는 지난해 12월 쿠르드 민주사회당(DTP)에 대해, 쿠르드 독립저항단체 쿠르드노동당(PKK)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해산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25년간 이어진 쿠르드 해방세력과 터키 정부의 갈등 종식 노력은 타격을 받게 됐다. 또한 터키 헌재는 집권당이 국가의 세속적인 원칙을 손상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집권당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의개발당은 대내적으로는 평화와 화합을, 대외적으로는 국제협력을 주창하면서 터키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어떤 비전을 갖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터키 외무부 장관 아흐메트 다부토글루는 확신한다. 그의 비전은 원대하다. 그는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바라며, 주요 20개국(G20)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조국이 이에 기여할 수 있는 적임 국가라고 생각한다. 다부토글루는 이처럼 터키의 새로운 정책을 설계한 장본인이다. 이 정책은 ‘주변국과 어떤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원칙과 설득 및 협상에 기초한 ‘소프트파워’를 근간으로 한다. 2002년 11월 3일 선거에서 정의개발당(AKP)이 승리를 거둔 뒤, 총리의 외교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온 다부토글루는 2009년 5월부터 외교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교수 출신의 다부토글루가 의원들 중에서 장관으로 뽑힌 것은 단순히 장관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터키를 위한 혁신적 외교정책을 고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에 옮겼다. 그는 자신이 이룬 성과를 죽 나열한다. “시리아와 61개 협정 체결, 이라크와는 48개 협정 체결, 주변 8개국과는 비자 면제 의무화, 시리아와 함께 레바논 내 정권 문제 해결, 아르메니아와 2개 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중재 시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간접 협상을 감독한 사실도 생각하면 그의 성과 목록은 한층 길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평화는 아니어도 직접 협상을 가능케 할 협정에까지 근접했다. 2008년 12월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셈이다.
사람들은 터키 국민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세계 금융위기와 실업의 여파가 아닐까라고 으레 짐작한다. 실제 터키의 실업률은 15%로 증가 추세고 젊은 층의 실업률은 30%에 달한다. 그러나 터키인은 오히려 가자 문제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 1년 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돌아오는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환영하기 위해 5천 명의 시민이 국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섰다. 총리는 2009년 1월 29일 다보스 TV 토론회에서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와 논쟁하던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에르도안은 페레스 대통령이 한 달 전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을 합리화한 발언에 대해 사회자가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자 페레스에게 “당신은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쏘아붙였다.(2)
관측통들은 미국이 페레스와 터키 총리의 마찰(이 사건으로 터키 총리는 아랍과 무슬림 사회에서 영웅이 되었다)을 그다지 못마땅해하지는 않았음을 주목했다. 비록 터키가 하마스뿐 아니라 파타도 우호적으로 대해 미국의 ‘평화 프로세스’를 재개하는 데 도움을 주길 원했을지라도 말이다. 다른 쪽에서는 터키의 하마스 정부 지원이(특히 하마스 최고 지도자인 칼레드 마샬 초청으로 분명해진) 어느 정도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 25일 붙잡혀 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리트 석방을 기대할 수도 있다.
2002년 정의개발당의 집권 후에도 터키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재 노력을 보여주는 등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2008년 이스라엘의 가자 무력 진압으로 분위기는 바뀌었다. 2009년 10월 양국 합동 군사훈련이 취소됐다. 2010년 1월 터키는 이스라엘 외무부 차관 다니 아얄론이 이스라엘 주재 터키 대사에게 한 ‘모욕적인’ 처우에 강력히 항의했다.(3) 터키는 자국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협박했고 자국 외교관이 받은 치욕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태가 양국 관계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앙카라 중동기술대학 교수인 멜리하 알투니시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자 전쟁 이후 어떤 정부라도 대이스라엘 정책을 바꾸고 이스라엘을 비난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현재의 지도자들로 인해 점점 고립을 자초하고 있지요. 오바마의 집권으로 이스라엘의 전략적 입장은 난처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터키인은 자국이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스라엘에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양국 관계가 다소 소원해질 수는 있지만 더는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랍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수교를 끊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람 지역 지도자들은 터키로 돌아서고 있고, 터키가 건설적인 역할을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경제가 주된 요인이겠지만 에르도안이라는 인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마스 시내에서 여자들을 만났는데 에르도안 때문에 터키를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 이 모든 게 터키가 미국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자국이 이라크 전쟁 기지로 이용되길 거부한 2003년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지도자와 달리 에르도안은 뭔가 해냈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고 알투니시크는 지적한다.
대외정책과 관련해 유일하게 터키 내 국론이 분열되는 주제는 이란이다. 친정부 성향의 영자 일간지 <투데이스 자만>(Today’s Zaman)의 정치 특파원 야부즈 바이다르는 에르도안과 이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사이의 일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서로 불신하기는 해도 그들 모두 평민 출신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처신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란 핵 문제의 중재를 시도한 것은 순진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장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본다. 이같은 의견 차이는 그만큼 이란의 야망을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점과 터키 문전에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공포감을 반영한다.
아랍 국가 중에서 터키의 꿈을 부풀게 하는 나라는 시리아다. 대학교수들은 다마스 여행을 상기한다. 양국의 케케묵은 반목 관계를 생각하면(1980년대 시리아의 쿠르드노동당(PKK) 지원, 시리아의 하타이 영토권 주장,(4) 물 공유 문제 등), 현재의 변화는 기적이라 할 만하다. 이라크와 관련해 수니파 단체들을 협상 테이블로 모으기 위한 터키의 노력과 양국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가져온 이득 덕분에 터키와 이라크 접경 부근은 상대적으로 평온하다. 그리고 이라크는 터키가 2007년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쿠르드노동당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실시한 공격을 방관했다. 아프리카에서도 터키의 외교관계는 발전하고 있는데, 특히 리비아·수단과의 관계가 눈에 띈다. 다만 최근 터키 총리가 수단에 대해 ‘실언’을 한 것이 걸린다. 바로 2009년 11월 1일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했던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의 학살보다 이스라엘의 전쟁범죄가 더 나쁘다고 선포한 것이다.(5) 아프가니스탄 내 1750명의 ‘비전투군’ 주둔도 지역에서 터키의 좋은 이미지를 쌓는 데 기여하고 있다.
터키는 무슬림 세계만 바라보지 않는다. 러시아·세르비아·그루지야·아르메니아까지도 포섭하고 있다. 2009년 10월 10일 아르메니아와는 2개의 의정서를 체결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문호를 개방하기로 했다. 민감한 사안인 키프로스 문제도 마침내 그리스의 새로운 총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와 함께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움트고 있다. 터키의 새로운 외교 노선과 동과 남을 향한 야망, 이 모든 게 서구 언론이 지칭하듯 ‘오스만투르크 사명’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까?(6) 이는 사실 터키의 지도자나 터키인들도 생각지 못한 개념이다. 1980년대 정부 외교부의 유럽 담당 최고 책임자였던 테멜 이스킷은 ‘신오스만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은 ‘터키가 이슬람화하고 더 이상 유럽 편입을 원치 않는다’고 믿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본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근거가 없으며 “유럽연합 내 터키 가입을 거부하는 주류 세력과 미국의 친이스라엘 언론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스킷은 한때 인민공화당(CHP)의 지지자였다. 인민공화당은 현재 중도좌파의 세속주의 야당으로 그 전신은 터키 독립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이 만든 유일당이었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이스킷도 조직의 노선과 당 지도자 데니즈 바이칼에 대해 이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오랫동안 아르메니아·키프로스·쿠르드 등과 같은 금기시되는 문제를 변호하느라 세월을 보냈지요. 이제 나의 생각을 재검토하고 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독립 일간지 <타라프>(Taraf)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7)
국제 무대에서 터키의 새로운 태도가 전략적 노선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터키는 항상 지정학적인 중심부에 위치해왔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 이어 냉전을 거치면서 독립투쟁과 신생국이라는 한계 때문에 늘 수세적 입장이었습니다. 변화한 것은 정의개발당이 들어서기 전 이미 코펜하겐의 기준에 따라 민주화가 시작되었고,(8) 군이 정치 개입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민주화가 새로운 협동과 협상 정신의 물꼬를 튼 것이죠.”
세속주의 정파 일간지인 <밀리옛>(Milliyet)의 논설위원이자 TV 인기 평론가인 카드리 구르셀은 “어떤 정권이라도 현재의 외교정책 노선을 취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덧붙여 그는 말한다. “우리 외교정책은 2002년과 2003년의 경제 활황, 유럽연합 가입 협상 재개, 압둘라 오잘란 체포에 따른 중요 안보 문제 해결로 인해 그 장점이 배가되었습니다.(9) 터키는 탈냉전의 현실과 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역학관계에 자연스레 적응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세속주의 정당이었다면 이같은 여건의 이점을 이렇게 잘 이용할 수는 없었겠지요. 정의개발당은 중동 국가들, 특히 수니파와 편안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볼 때 변화의 원인은 많은 부분 터키의 경제 상황 때문이다. “터키 경제는 내수 구조가 전무하기 때문에 수출 위주의 성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우선 중동입니다. 전체적으로 이는 유효했습니다. 정부 각료들이 경제를 제대로 운영하고 있지요. 또 이익을 정부가 독점하기는 해도 무역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아나톨리아에 정의개발당의 사회적 기반을 세우고, 신중산층을 키워 이들이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빌기대학의 국제관계 교수인 솔리 오젤은 서방세계가 주체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터키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고 느낀다.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의개발당은 이란이나 이스라엘과는 달리 평화를 갈망하며 안정·번영과 안전의 장을 원한다. 오젤 교수도 터키 외교정책의 지속성을 강조하면서 “정의개발당은 그 누구보다 이를 잘 개념화했다”고 평가한다.
오젤 교수는 말한다. “터키의 ‘서양성’ 문제는 터키의 전략 방향보다는 터키가 진정한 서방국가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터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실제 서구 유럽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데도) 이 난제를 풀지 못한다면, 터키의 대외관계는 주로 미국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정부는 터키가 진정한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요구할까요? 현재 미국은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를 진척시키기 위해 유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단계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셈이지요.”
유럽에 대한 냉소는 실재하고, 외교정책 연설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터키 정부에 쏟아지던 비난은 사르코지와 메르켈이 “노”라고 말한 이후 더는 부담스럽지 않다. 이제 중동과 같은 지역 내의 입지 강화로 유럽연합에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더욱 확산되는 듯하다. 또한 설사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못하더라도 국제 무대에서 터키의 역할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전통적으로 구세속주의파인 터키경제인연합회(TUSIAD)의 사무총장 자파르 야반은 불만스럽다. “정부는 공공 시장 및 여러 경제 사안과 관련해서 유럽연합 가입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정부 정책에 의구심이 듭니다.” 그는 이런 미묘한 발언도 했다. “유럽연합 기준 수렴 과정이 늦춰지는 것은 터키보다는 사르코지에 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현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인민공화당 정권 시절 사법부 장관을 지낸 아이세 셀리켈은 정의개발당 정부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셀리켈은 소녀들을 위한 세속주의 교육 단체(카그다스 야삼 데르네기)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이 단체가 현재 “정권의 압력을 받고 있다. 정부가 단체 간부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직원 14명을 연행해갔다”고 한다. 스스로를 “열린 의식의 ‘케말리스트’(케말주의는 근대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철학으로, 정교분리주의를 일컬음-역자)”라고 말하는 그녀는 “유럽연합 가입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정부는 동과 남을 향한 개방으로 정책 균형을 시도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유럽과 더 멀어지거나 이란과 더 가까워지는 일만 없다면 현 정부 정책에는 동의합니다.”
많은 터키인은 정의개발당 정부가 너무 많은 공을 돌리다가 몇 개라도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일부는 “주변국과 어떤 마찰도 만들지 않고 채찍도 들지 않는다”라는 생각, 다시 말해 설득과 경제적 이득으로 갈등을 해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혹 채찍 없이 당근이 먹히지 않는다면? 만약 터키가 자신의 ‘소프트파워’의 잠재력을 과대평가해 위험에 빠지게 된다면?
알투니시크 교수는 그녀대로 이러한 우려에 이렇게 대답한다. “현재로서는 그같은 의문은 시기상조입니다.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의문이지요. 즉 최종 결과만큼 중요한 것은 외교정책을 어떻게 펼치는가 하는 점입니다. 터키는 과거 모든 인접국 주위를 주변국 신세로 배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터키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전세계 많은 지역의 미래를 의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글•웬디 크리스티아나센 Wendy Kristianas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편집인으로, 런던에 거주하면서 중동과 이슬람 관련 글을 주로 쓰고 있다.
<각주>
(1) 에르게네콘 사건은 정의개발당 정부 전복을 모의한, 군부 세력이 연루된 조직이 발각된 사건이다. 이들은 뷸렌트 아른치 부총리 암살을 기도했다. 또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터키 쿠르디스탄에서 자행된 쿠르드족 게릴라 탄압 행위도 드러났고, 곧 터키인들이 ‘밀실국가’라고 부르는 조직의 모든 활동이 밝혀질 위기에 처했다. ‘밀실국가’는 군부와 마피아의 결탁 조직으로 일련의 사건을 막후 조종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1월 3일자 <Sunday’s Zaman>의 기사 ‘State’s dirty laundry might come out with ‘comsmic room’ search’ 참조.
(2) YouTube.com에서 논쟁 화면을 볼 수 있다.
(3) 주이스라엘 터키 대사는 이스라엘 아얄론 차관을 만나기 전 복도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이후 취재진 앞에서 아얄론 차관은 터키 대사의 악수를 거절했고 자신보다 낮은 의자에 그를 앉혔다. 책상 위에는 오직 이스라엘 국기만 눈에 띄었다. 이스라엘 차관은 터키의 한 민영 채널에서 방영한 드라마가 반유대주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과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 후 에르도안 총리의 이스라엘 비난을 거론하며 터키를 비난했다.
(4)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 점령되었던 이 지역은 이후 시리아의 국가주의자들이 반환을 요구했으나 1939년 터키에 양도되었다.
(5) <Today’s Zaman>, 2009년 11월 10일자.
(6) 델핀 스트라우스(Delphine Strauss)가 <파이낸셜타임스> 2009년 11월 23일자에 쓴 ‘Turkey’s Ottoman mission’ 참조.
(7) 2010년 1월 이후 <타라프>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터키판을 발간하고 있다.
(8) 1993년 코펜하겐에서 정의된 것과 같은 유럽연합 가입 기준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정치적 기준, 경제적 기준, 그리고 유럽연합 공동체가 제시하는 기준 등이 그것이다.
(9) 쿠르드노동당의 지도자는 1999년 2월 체포되었다.
깨져야 할 세 가지 금기
“하나의 금기가 깨졌다. 마침내 우리는 과거사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문제는 쿠르드·키프로스 문제와 함께 터키의 세 가지 금기사항이었다. 정의개발당은 용기를 내 이 문제들을 다루고 금기를 깼다. 단 한 번에 터키가 스스로를 지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세계를 향해 열리게 했다”고 터키의 독립 일간지 <타라프>와 아르메니아 주간지 <아고스>의 고정 칼럼니스트인 마르카르 에세얀은 기뻐한다. 에세얀은 터키에 남아 있는 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의 시바스 출신이다. 그렇다면 그는 2009년 10월 10일 양국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접경지대를 개방하기 위해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체결한 2개 의정서를 어떻게 평가할까? “터키 내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국경이 개방된다고 해서 진정한 변화가 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것은 카라바흐 문제다. 터키는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카라바흐와 그 외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길 원한다.(1)
이같은 외적인 역동성은 내적인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2007년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당한 것처럼, 악명 높은 형법 301조의 ‘터키 국가의 정체성 모독’으로 고발된 아르메니아인 출신 언론인 흐란트 딩크가 살해되자 논란은 증폭되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 법 조항의 삭제를 요구했다. 2008년 4월 30일 문제의 법은 개정되었다.(2) “비록 아직 인종 대학살을 거론하거나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토론의 자유가 증가하고 있어 한결 나아진 느낌”이라고 에세얀은 말한다.
키프로스와 관련해 터키에서는 이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정부의 손을 떠난 문제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수년간 내부 걸림돌과 반대를 거친 후 터키 정부는 유엔의 평화계획(분단된 남북 키프로스 연방안)에 찬성했다. 2004년 4월 24일 터키계 북키프로스와 그리스계 남키프로스 두 헌법국가가 연방을 결성해 단일한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터키계 북키프로스인들은 찬성(64.9%)했다. 그러나 그리스계 남키프로스인들은 반대(75.83%)했고, 일주일 후 단독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니콜라 사르코지와 앙겔라 메르켈의 배제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새로 선출된 그리스 총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파판드레우는 2004년 선거 당시 개인적으로 그리스계 키프로스 쪽에 연방안을 받아들이도록 당부했던 인물이다. <투데이스 자만>의 칼럼니스트 야부즈 바이다르는 2009년 10월 4일 그리스 선거에서 파판드레우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제 그리스와 터키 양국에서 안정적 지지를 받으며 키프로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호적인 실용주의 정당이 들어선 것이죠. 영국과 더불어 키프로스의 보증국인 터키와 그리스는 지금의 방향으로 화합해 밀고 나가야 합니다. 특히 지난 1월에 재개된 두 나라의 협상이 성공하려면 유럽연합이 개입해야 합니다.”
끝으로 이라크와 이라크 북부 지역, 즉 쿠르디스탄 지역에 대한 개방이다. 개방을 통해 그동안 쿠르드노동당(PKK)의 배후지로, 최근까지 터키 불안정의 원인이던 이 지역에서 안보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도 낳을 수 있다.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 지역의 폭력을 근절하고 군부의 역할 비중을 줄이려면 쿠르드와의 갈등이 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주>
(1) 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인 지역으로, 과거 소련 연방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자치 지역이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지역 지도자들은 아르메니아로 귀속될 것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나라는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아르메니아가 승리하면서 카라바흐 지역뿐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영토까지 점령했다.
(2) Andrew Finkel이 쓴 ‘Turkey:torn between God and state’와 ‘Turkey’s coup that never happened’, 2007년 5월과 2008년 8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기사 참조. http://mondediplo.com/2008/08/05turk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