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정부가 ‘혁명 100주년’ 기념행사를 꺼리는 이유
2017-03-02 코린 아마셰 제네바 대학 교수
19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러시아 당국이 골치를 썩고 있다. 10월 혁명이 전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기념을 해야겠지만, 지금의 러시아 당국은 체제 전복과 관련한 모든 이념이나 사상을 극히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혁명기념행사에서 국민 단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계층 간 갈등의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인데, 정부의 관할 밖에서 조직되는 행사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양상이다.
러시아 10월 혁명 99주년을 기념하던 2016년 11월 7일,(1) 라디오 스보보다의 기자 한 명이 거리로 나와,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1917년의 상황이라면 당신은 반혁명파의 백색 군대를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혁명파의 붉은 군대를 지지하겠는가?” 돌아온 답변은 전자를 지지하겠다는 의사가 좀 더 많았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을 거부하는 것이 곧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시도하는 볼셰비키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최근 몇 년 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역시, 이 피상적인 거리 여론 조사의 대체적인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2)
같은 날,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가 이끄는 2천여 명의 공산당 지지자들은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모스크바 거리를 행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이들이 행진을 벌이기 두 시간 전에는 온건 자유당 야블로코의 세르게이 미트로킨 총재가 국방부 앞에 ‘민주주의와 입법의회의 수호자’를 기리는 꽃과 표지판을 가져다놓았다. 미트로킨 총재는 “무기를 들고 볼셰비키 세력에 맞서 싸운 이들이 곧 영웅”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입법 의회는 1917년 11월 25일 정식으로 구성됐지만, 볼셰비키 당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1월 의회를 해산시킨 ‘정치 깡패들’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3) 그러나 모스크바 당국에서는 러시아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을 생각이 전혀 없다. 이에 야블로코 당이 조직하는 행사들은 불허하기 일쑤지만, 공산당이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것은 허용한다. (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붉은 광장 묘역에 안치된 레닌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곳에 보존될 전망이다. 레닌의 묘가 사라지는 것은 이를 현상 유지하는 것보다 더 큰 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례는 러시아 사회 내에서 혁명을 둘러싼 의견이 크게 갈라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혁명을 기념하는 방식이 정부에는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도 보여준다. 사실 푸틴 집권 이후에는 반 스탈린주의 노선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때와 달리 스탈린에 대해 보다 호의적인 시선이 주를 이뤘으나, 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양쪽 시기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1996년에는 11월 7일이 ‘통일과 단합의 날’로 제정됐으며, 2004년에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기 기념일이 국경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어 2005년, ‘국민단합의 날’이 새로이 11월 4일로 제정되면서 기존의 기념일은 그마저도 이름이 무색해졌다. 11월 4일은 모스크바가 161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에서 벗어난 날이기도 한데, 1917년까지 국경일로 지정돼 있던 이 날은 혼란기의 마침표를 찍어준 날로서 이후 1613년부터 러시아에는 로마노프 왕조가 수립된다. 이러한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기존의 10월 혁명 기념행사들의 폐지는 대중들 간에 이 행사를 지워버리려는 시도이자, 러시아 사회 내의 단합을 꾀하는 또 다른 행사로 이를 대체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겨울 궁전’의 함락을 기념하는 행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러시아 당국에서는 매년 11월 7일 붉은 광장 앞에서 군사행진을 개최한다. 이는 10월 혁명을 기념하려는 목적의 행사가 아니라 1941년 11월 7일의 열병식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다. 10월 혁명 24주년이었던 그 당시, 모스크바에는 나치의 군대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열병식에 참여한 군인 2만 8천 명 중 대다수는 행진이 끝난 뒤 곧바로 전장으로 떠났다. 따라서 지금의 러시아 당국은 혁명 그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생각도, 그렇다고 혁명을 그 자체로 기념하려는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그저 여러 개의 역사적 사건들을 한 데 모아, 이를 통해 국민 단합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미 러시아 당국이 혁명 100주년을 기념할 것인지, 기념한다면 어떤 식으로 기념할 것인지 귀추를 주목해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키릴 대주교는 붉은 광장 근처에 키예프 공국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의 거대한 동상을 건립했는데, 블라디미르는 988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전신이 된 ‘루스’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2013년에도 1613년 로마노프 왕조 수립을 기념하는 400주년 행사가 이뤄졌으며, 2012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운 1812년 애국전쟁 2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또한 매년 5월 9일에는 나치의 항복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도 마련된다.(4) 4년 전부터 이러한 행사에는 ‘불멸의 군대’ 행진이 함께 거행되는데, 이 자리에는 수백만 러시아인들이 과거 ‘대 애국 전쟁’에 참전했던 부모의 사진을 들고 참석한다. 이 수많은 기념행사에는 공통적으로 러시아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기본 의지가 깔려 있지만 러시아 혁명 그 자체는 정부의 파괴를 시도하는 사건이었다. 혁명은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렸고, 이후 러시아는 외세에 의해 내전이 지속되면서 온통 피로 물들었다.
따라서 국가의 안정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통 및 권위와 단절한 10월 혁명에는 현 정부가 기피하는 모든 가치들이 내포돼 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반혁명적인 수사가 깃들어있는 담론을 펼친다. 가령 2007년 푸틴의 보좌관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도 러시아에서 혁명을 꿈꾸는 모든 ‘이상주의자’들에게 “감상에 젖은 개인의 행동은 대개 테러리스트와 미치광이의 집권으로 이어진다”고 꼬집는다.(5)
정권의 획득과 관련해서는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과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등 이른바 ‘색깔 혁명’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러시아에서 이러한 시민혁명은 곧 포스트 소비에트 지역에 대한 서구권의 공작으로 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선거 결과에 반발하며 2011~2012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규탄 운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정부의 선거개입 의혹을 부추기자, 정부는 시위대의 본질을 흐리면서 “이는 곧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행위이자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시도”라며 비난했다. 2015년 9월 28일에 있었던 유엔 연설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소위 ‘민주주의 혁명의 해외 전파’에 대해 맹비난하고 나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가령 러시아와 관련해선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사회주의 경험의 해외 전파, 즉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다른 나라에 변화를 촉발하려던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비극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가 아닌 퇴보의 확산을 불러왔다.”
러시아 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반열에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을 묵인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사람들 입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혁명 100주년을 기념할 채비를 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017년 가을, 세계 도처에서는 무수히 많은 10월 혁명 기념 심포지엄과 패널 회의가 개최되고 기념자료와 홍보물이 제작될 예정이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가령 모스크바 국제 교류 연구회와 학술원 역사 연구회, 러시아 역사회 등에서는 9월에 100명 이상의 역사학자를 초청하는 국제 심포지엄을 계획 중인데, 남미에서만 30명 이상 참석할 예정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러시아 정부에서는 혁명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내놓으려 하고 있다. 그 전조가 된 것이 2007년 연방 차원에서 새로운 교육 기준을 수립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제작한 역사 교과서였다. 이에 따라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및 내전은 모두 ‘러시아 대혁명’이라는 한 범주로 엮였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 위한 의도가 드러난다. 내전의 비극적인 측면과 그 영향도 강조됐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형태로 어느 때보다도 처참했던 이 엄청난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 논리로 보면 책임자를 지칭할 수도 없고, 다양한 정치적 관점을 가질 수도 없다. 당시에는 반 혁명파든 혁명파든 할 것 없이 모두가 러시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제정 러시아를 위해, 후자는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뿐이다. 그러니 양쪽 모두 존경받아 마땅한 대상인 것이다.(6)
러시아 대혁명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7) 이는 곧 러시아에 있어서나 학계에 있어서나 이 사건의 비중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특히 보다 넓은 맥락에서 10월 혁명을 포괄하려는 조짐도 보인다. 이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치부하면서 10월 혁명을 바탕으로 일군 소비에트 ‘신화’가 사라지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다. 2015년, 혁명 100주년이 다가오자 모스크바에서는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문화부장관의 주재 하에 패널 회의가 개최된다. ‘러시아 대혁명 100주년: 이해를 통한 통합’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이 회의에는 모스크바의 다양한 역사 연구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총동원됐다. 1998년 러시아 국립 현대사 박물관으로 개명한 구 혁명박물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의 명칭에서는 정부가 택한 노선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러시아 혁명 100주년 기념식이 러시아 사회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메딘스키 장관은 “1917년 러시아 대혁명은 20세기 최고의 사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기에 대한 ‘객관적’연구를 통해 “모든 국민 계층이 지지하는 강한 러시아 정권 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였다. 혁명 100주년은 “제정 러시아에서 시작해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러시아 연방에 이르는 러시아 역사 발전의 연속성을 내세우는 자리”가 돼야 하며, 따라서 혁명 100주년은 1917년 혁명과 내전 이후 분열된 러시아 사회가 안겨준 쓰라린 고통을 상기하면서 러시아를 위해 싸운 혁명파와 반혁명파, 모두의 영웅을 기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 또한 혁명에 대한 공포심은 사라져야 하며, “외세에 의존해” 내부의 정치 갈등을 해결하려 드는 것은 “잘못된 판단”(8)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일종의 경고처럼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기념행사의 맨 처음 서막이 올라간 것은, 2016년 12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역사학회라는 공식적인 단체를 통해 조직 위원회를 결성하도록 권유했을 때였다. 100주년 기념행사는 “역사학자들에게나, 전문가에게나 러시아 혁명의 본질과 기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며 “러시아 사회는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모두의 역사이므로, 우리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역사를 다뤄야 한다”는 게 푸틴의 생각이다.(9) 2011년에서 2016년까지 러시아 하원 의장직을 역임했던 세르게이 나리슈킨이 반복적으로 역설한 바와 같이 혁명 100주년은 “10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키고 이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통합이라는 가치와 시민의 연대의식, 역사상 가장 어려운 전환점의 시기에서 합의를 찾아내는 사회의 역량이다. 이를 바탕으로 내전과 같은 형태의 극심한 균열을 피하는 것이다.”(10)
이렇듯 러시아 당국은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낼’ 준비가 돼있다. 하지만 전시, 출판, 학회, 패널 회의, 연구 프로젝트, 기념행사, 영화, 다큐멘터리 등 100주년 조직위원회가 승인한 수많은 행사 목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11) 하나의 중론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역사학자들은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들의 시각만 관철시키고자 할 것이고, 학계나 문화계, 정치계에서 내보내는 저마다의 입장으로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팽팽히 부딪힐 것이다. 이는 이미 2007년과 2009년 사이에 확인된 바 있다. 정부가 스탈린에 대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함으로써 소련이 전쟁 중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한 측면을 내세우며 긍정적인 입장을 내보내자 스탈린과 관련한 수많은 간행물이 쏟아지며 이러한 시각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차단했기 때문이다.(12)
이번에도 수많은 학자들은 정부가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사회적 단합을 호소하는 것이나 그 지지자들의 연설에 간혹 숨이 막힌다는 이야기를 내놓는다. 1917년 차르 왕조 붕괴 후, 이어 10월에 볼셰비키 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제정 시절 국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변화에 목말라하고 더 이상 불평등의 뿌리가 깊은 사회 및 정치 체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7일, 거리에서 기자가 질문을 던졌던 모스크바 시민들은 100년이 지난 그 시점에서 혁명파에 속하는 것과 반 혁명파에 속하는 것이 결코 100년 전과 같지 않음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크림색의 모피 코트를 걸친 한 여성은 1917년 자신의 집이 가난했더라면 자신은 볼셰비키 쪽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물론 반 혁명파 쪽에 설 것”이라고 덧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글·코린 아마셰 Korine Amacher
제네바 대학 러시아 및 소련 역사학 부교수.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볼셰비키 혁명은 그레고리력 기준 1917년 11월 7일 밤에 발발했으며, 이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 (1918년 2월까지) 사용되던 율리우스력의 10월 25일에 해당한다.
(2) ‘10월 혁명: 원인과 결과La Révolution d’Octobre : causes et conséquences‘(러시아어), <Centre Levada>, 2011년 11월 2일, http://www.levada.ru
(3) ‘2017년 10월의 가치와 교훈Le prix et les leçons d’Octobre 2017‘, 라디오 스보보다 방송 <사건과 사람L’homme face à l’événement>, 2016년 11월 7일, www.svoboda.org.
(4) 제3제국의 항복 문서는 1945년 5월 8일 베를린 시각 기준 23시 01분에 조인됐으며, 이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 1시 01분에 해당한다.
(5) <Rossiïskaïa Gazeta>, 2007년 3월 15일.
(6) Cf. ‘러시아 혁명과 혁명 세력: 집착과 반발의 사이에서Révolutions et révolutionnaires en Russie. Entre rejet et obsession’, <Revue d’études comparatives est-ouest>, vol. 45, n° 2, Paris, 2014.
(7) 알렉상드르 슈빈Alexandre Choubine, <러시아 대혁명: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La Grande Révolution russe : de Février à Octobre 1917>, Rodina Media, Moscow, 2014 (러시아어).
(8) ‘러시아 혁명 100주년: 국민통합에 대한 고찰Vers le centenaire de la Grande révolution russe : réflexion sur la consolidation’, 문화부 소식지, Moscow, 2015년 5월 21일, http://mkrf.ru.
(9) <Ria Novosti>, 2016년 12월 1일.
(10) <Ria Novosti>, 2016년 12월 27일.
(11) 러시아 역사학회 사이트 http://rushistory.org 참고
(12) 로스펜 출판사에서 ‘스탈린주의의 역사’라는 타이틀로 펴내는 방대한 시리즈에 속하는 책은 현재 1백여 권에 이른다.